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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조국 방문기 14. 만경대 고향집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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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3건 조회 11,915회 작성일 14-10-20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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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4


만경대 고향집에서 2.


두 번째 방은 주석이 부친 김형직 선생과 모친 강반석 여사의 사진과 나란히 하고 있다.  부친은 항일투쟁을 하다 일제에 다시 체포되어 신의주로 이송되는 중 탈출하였으나 감옥에서의 고문과 동상으로 인하여 무송에서 30세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모친은 지독한 가난 가운데서도 주석의 항일투쟁을 도왔는데 40세의 나이에 만주 소사하에서 병고로 인하여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당시 주석은 빨찌산으로 산 속에서 싸울 때였다.  이국에서 그렇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묘는 1947년에 만주에서 평양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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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회고록을 통하여 부친으로부터 네 가지 큰 유산을 받았다고 했다.  첫째는 지원의 사상, 즉 뜻을 고상하고 원대하게 갖는 것이었다.  둘째는 3대 각오로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아사, 타사, 동사를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세째는 동지를 구하는 것이었다. 즉 투쟁을 위해서는 동지가 꼭 필요하고, 한 사람의 동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천리를 함께 가라는 것이었다.  네째는 권총 두 자루였다.  부친이 죽기 전에 ‘성주’가 크면 주라고 유언을 남기며 어머니에게 맡겼었다.  주석이 이후 항일유격대를 창설하여 일제에 대항하여 무장항쟁을 시작했을 때 이 두 자루의 권총으로 시작했다.  두 자루의 권총으로 무장한 일제 관동군의 총을 빼앗아 무장을 늘려감으로 유격전의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나의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고 홍동근 목사님은 그의 책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라는 독후감 책을 통하여 방대한 분량의 주석의 일대기를 잘 요약해 놓았다.  홍동근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 책에서  김 주석이 어머니 강반석 여사를  회고하는 글을 여기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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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해외에서 발행한 홍동근 목사님의 저서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어머니가 순수한 모성애만을 갖고 있었다면 나는 이처럼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어머니를 회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기울인 사랑은 단순한 모성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식을 자기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나라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기 전에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준 진실하고 혁명적인 사랑이었다. 어머니의 온 생애는 그대로 나의 가슴에 참된 인생관, 혁명관을 심어준 하나의 교과서와 같은 생애였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대를 이어가며 싸워서라도 기어이 나라의 광복을 이룩해야 한다는 불요불굴의 혁명정신을 심어준 스승이라면 어머니는 일단 혁명을 시작한 사람은 인정에 끌리거나 곁눈을 팔지 말고 끝장을 볼 때까지 오로지 목적한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만 노력해야 한다는 이치를 깨우쳐준 고마운 선생이었다.” (김주석 회고록 제 2권, 428쪽)


마지막 방의 사진 셋은 주석의 삼촌 김형권의 사진과 동생 철주, 그리고 사촌동생의 사진이라한다.  삼촌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31세에 옥사하여 거기서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동생 철주는 빨찌산으로 일제와 싸우다 19세의 어린 나이로 희생되었는데 그 시체조차 찾을 길이 없고,  사진의 사촌동생은 해방은 맞이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해방후 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고 한다.  주석의 온 일가가 항일투쟁에 나섰지만 막상 해방 후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주석 혼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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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석의 삼촌, 동생, 사촌동생의 사진.  항일혁명의 노상에서 모두 죽었다.



위의 홍동근 목사님의 같은 책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의 서문에서 서술한 김 주석의 항일혁명에 관한 것을 발췌하여  몇 문장으로 여기 옮겨본다.


“주석의 항일무장유격대원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만주이민의 자녀들이며 부모가 일본 토벌대에 맞아죽거나 가족이 끌려간 빈농, 소농, 머슴의 10대 젊은이들이었다.  공부는 소학교도 가보지 못한 자가 대부분이었다.  망국민의 한과 보복의 분노로 가득찬 애국청년들이었다. 주석이 그들에게 한글부터 가르치고 아동단, 소년단, 공청 등에서 구국의 사상을 주어 의식화시켜 연락병으로, 소년중대로 그리고 정규 유격대전사로 훈련하여 백두의 빨지산을 만든 것이다. “


“영하 40도의 눈보라 속을 기아와 동상과 싸우며, 조국광복의 일념에 꽃다운 청춘을 모두 바쳤다.  많은 전사자들이 묘비석도  없이 광야의 눈서리에 또 산기슭 나무밑에 묻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광복후 조국에 돌아와 북의 공화국을 세우고 무적의 조선인민군 전통을 만들었다.  최헌, 김책, 강건, 안길, 최춘국, 김일, 오진우, 박성철, 황순희, 김옥순은 그 대표적 빨지산들이다.  이들이 일제의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천황의 군대를 백두에서 무찌르고 광복후 조국해방전쟁에선 세계최강의 미군을 맞받아치고 신생조국을 보위하였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 군사학과 전쟁사에도 없는 기적이요, 신비이다.  여기 주석은 위대한 교사요, 창조자이다.   갈릴리의 불학무식한 어부와 농민을 불러 하나님 나라 운동의 혁명당을 만든 예수의 지도자적 천재성을 주석의 항일무장유격대 혁명에서 본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 김일성 사령과 빨지산 영웅들을 가짜와 악당으로 50년 욕하고 저주해온 남한의 ‘반공’의 허구가 슬퍼진다”


“김일성 항일무장유격대의 최대의 민족사적 의미는 1930년대 민족이 사멸하는 가장 암흑한 때 항일구국의 횃불을 들고 일어난 것이며, 어느 외세의 군사적 지원도 없이 자체로 적의 군경을 쳐서 무기를 획득하고 자기 인민과 연대하여 유격전쟁 15성상을 수행한 것이라 하겠다”


“김사령이 유격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를 쳤을 때 동아일보는 두 번이나 호외를 내어 1937년 6월 5일자에 보도했고, 미국의 신한민보(조선국민회 기관지)는 ‘김일성장군, 룡같이 범같이 비략활동!’이란 큰 제호 아래 ‘김일성씨의 무장부대가 잇어 갑산보천보를 습격하다 (1937,7,29,  9,30)’라고 대서특필하여 온 조선동포가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여기 김일성장군 민족신화는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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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장개석, 모택동 또는 스탈린에게서 소총 한 자루 받은바 없이 오직 자기 인민의 도움으로10여성상을 싸우고, 끝내 1945년 8월 소련군과 연합하여 일제를 치고, 조국에 개선하였다.  무장한 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이 주체의 혁명전통위에 주석은 나라를 세우고 광복 50년 자본주의 대국에도, 공산주의 대국에도 어느 큰 자에게도 종속함이 없이 자주하는 나라, 주체조선을 견지하고 있다.”


“오히려 제3세계 신생국인민들과 연대하여 반제비동맹 자주해방의 길을 가고 있다. 자주평화의 길이다. 이 항일무장유격대의 혁명전통을 북의 인민은 민족의 신화로, 존엄으로 또 민족정통성으로 자랑하고 계승하고 있다.  이 혁명전통의 이해 없이 북의 나라는 바로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오늘도 ‘학습도 생산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하고 외치고, ‘80년대의 김혁, 차광수가 되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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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에서 한참 동안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고 나오니 밖엔 남여 인민군인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 북부조국을 고향으로 둔 저 인민군인들이 고향집에서 김 주석을 느끼는 마음은 과연 얼마나 뜨거울까?  마음 깊이 흠모하는 주석의 태어나고 자란 곳을 찾는 그 마음을 내가 과연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  


남한에서 내가 교육을 받을 때 당시 고등학교 교과서에선 북의 김일성 주석은 가짜라고 했었다. 항일무장독립항쟁을 한 김일성 장군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어야 하는데 막상 평양의 군중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은 나이 서른 셋의 젊은이여서 군중들이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였다.  김일성 장군은 따로 있었다고 교과서에 실렸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그 진짜 김일성 장군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밝혀진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후에도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런 거짓에 우리들은 세뇌되었던 것이다.  그런 거짓을 꾸며서 온 나라와 민중을 세뇌한 자는 누구인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남한의 세대들이 북한을 바로 알고 바로 볼 수는 없다.  처음부터 그렇게 머릿속을 세뇌당하고 나면 살아가면서 어떤 일로 인하여 큰 충격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계기가 없는 이상 평생을 진실과는 동떨어진 거짓을 진실로 믿고 그럭저럭 살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란 것이 스스로의 유지를 위해서 교육과 매스컴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것들로 대부분의 우리들의 생각은 이뤄져있다.  그런 연유로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새로운 것을 들으면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내 생각과 다른 소리를 듣는 것에는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 북의 인민과 남의 민중이 서로 생각하고 믿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래 먼저 진실을 바로 알고, 그 차이를 좁혀나가며, 서로 이해하는 것이 통일운동의 시작이 아닐까?  나의 방문기가 그렇게 진실을 바로 알게 되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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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선생이 고향집 밖의 넓은 마당 건너편 그늘로 가서 잠깐 쉬자고 한다.   오늘부터 동무로 부르기로한 안내원 김미향 동무가 우물가에서 두레박을 내린다.  아마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줄 생각이었나보다.  내가 얼른 두레박을 받아들었다.  여성에게는 제법 크고 묵직한 두레박이다.  내가 옛날 한때 이것보다 더 큰 것으로 깊은 우물에서 수없이 두레박질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랴.  능숙하게 물을 길어올려 곁에 있는 표주박에 옮겨 모두에게 마시기를 권한다.  참 좋은 물맛이다.  바로 주석과 온 가족들이 오래전에 마셔온 그 물맛이리라.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0-21 16:52:51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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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가용님의 댓글

갯가용 작성일

두 여자분 사이에 있는 글쓴이의 모습이 마치 그들의
오라버니인양 든든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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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갯가용 님, 원래 저 안내원 미향동무는 동생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여겼지만
워낙 훌륭한 여성인지라 제가 자격이 부족해서 그냥 동무로 하기로 했었지요.
그렇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갯가용 동지께서 제 방문기를 많이 기다리고 좋은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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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우님의 댓글

황진우 작성일

이민갈날만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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