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신금단 선수/ 홍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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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자 여사님의 오래된 글이지만 함께 나누기 위해 민족통신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산 가족 신금단 선수
《어머님! 어머님! 천만 번 불러 보아도 그리운 어머님! 제가 바로 동수옵니다. 아직 죽지도 않고 살아서 이렇게 어머님 그리고 형제가 그리워 애타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어머님 제가 집 떠난 지도 장장 40년이 되어 갑니다. 강산이 4번이나 변한다는 기나긴 세월, 그동안 어머님 혼자서 철없는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겠습니까? 어머님, 이 못난 불효 자식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저 까마귀보다도 못한 놈이라고 자책하며 한숨짓고 있사옵니다. 까마귀도 저를 낳아 90일 동안 길러 준 보모의 노고를, 꼭 90일 동안 지쳐 있는 어미에게 먹이를 주고 보은한 뒤에야 떠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사람이되 미물보다 못한 놈이올시다. 제가 자식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모님께 단 한끼의 따뜻한 음식이라도 대접하였다면 왜 이토록 씻지 못할 한이 되겠습니까? 어머님 부디 이 못난 자식을 버리지 마시옵고 꼭 뵈올 그날까지 살아 계셔야 합니다. 어머님, 저는 오직 어머님과 형제를 만날 일념으로 제 국적마저 비리고 이곳 미국 시민으로 귀화까지 하였답니다. 한달음에 달려가 기나긴 세월 속에 맺힌 한을 풀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부디 살아 계셔야 합니다. 어머님!….》
이것은 어느 유랑 극단의 신파극 대사가 아니다. 일점일획도 고치지 않은 어느 이산 가족 아들의 피맺힌 호소요 울부짖음일 뿐이다.
이산 가족의 시중을 들게 된 것도 어느 사이 한 돌을 지냈다. 다 몇 손가락을 꼽을 만한 극소수의 용기 있는 자들에 의해 철통 같은 반공 의식, 분단의 장벽을 뚫고 이산 가족 상봉이 시도되고 그 문이 조금씩 열리게 된 것은 이미 10여 년 전 일이지만 특별히 지난해(1988) 7·7성명 이후엔 마치 둑이 무너진 듯 이산 가족의 문의, 신청이 쇄도해 왔다. 우리 두 사람은 낮도 밤도 없이 전화통 앞에 붙들려 노예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도 계획도 전혀 무산되고 방치된 채 그들의 한과 눈물, 만가지 사연에 우리 또한 동화, 흡수되어 전혀 망아 상태가 되었고 속속 쌓여 오는 서류 천리마도 어망이 없다.
헌데 그뿐인가. 일각이 여삼추같이 조속한 가족 상봉의 열망이 타오르다보니 밤잠들을 거른 탓일까. 그런 순간엔 교양도 예의도 벗어 던지고 마구 재촉 전화를 퍼부어댈 때는 마치 고용주가 피공자를 불러다 놓고 질책을 하는 것 같아 우리 두 사람은 죄인이 되어 이마의 식은 땀마저 닦아가며 쩔쩔매야 한다. 하지만 그처럼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는 그들이 마치 시험을 치른 뒤 합격 통지라도 기다리는 초조한 수험생들 같기도 해서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여간 그러는 사이 지나간 1년 꽤 상당수의 이산 가족이 꿈 같은 가족 상봉을 실현, 한을 풀게 된 기쁨을 맞이했고 그 나름의 보람도 느끼게 된다.
나는 일에 쫓기면서 문득 생각이 났다. 우리가 성서에서 보는 최초의 이산 가족 상봉이 구약(창세기 32, 33장)의 야곱과에서라면 분단 이래 우리 민족의 이산 가족 상봉 제1호가 있다면 그것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북의 육상 선수 신금단 선수와 홀로 남하했던 그 부친과의 극적 상봉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지금쯤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리고 그 부친께서는…. 그들 또한 만날 기약은 없었던가. 나는 그녀 신금단 여사를 만나 볼수 있도록 청원해 보았다.
신금단 여사. 당시 국내적으로 박뉴스의 주인공이었던 26세의 젊은 아가씨는 그 사이 51세의 중년 부인으로 변해 있었다. 아주 후덕해 보이고 위엄 있는 중년의 여성으로 그녀는 활달한 체육인에다 잦은 해외 원정 때문일까. 어딘가 개방적이고 탁트인 세련된 인상이었다.
솔직히 그녀의 존재는 우리에게 있어서 체육인으로서의 빛나는 존재보다는 한 사람의 슬픔 많은 이산 가족의 딸로서 보다 인식되고 기억되는 그런 여인이 아닐까. 그녀는 불과 며칠 전에 해외 원정에서 돌아와 미처 피로가 가시지도 않은 채였고 그러나 그 어느 하루 한시도 쉬임없는 후진 양성으로 바쁜 나날을 지내고 있던 중 만들기 어려운 짬을 내주어 비로소 우리의 만남이 가능케 되었다. 그것은 금년도 1989년 현재 역사적인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진행되면서 그 화려한 축제의 열기가 온 나라에 가득하던 7월 초하루 하오의 시간이었다.
1964년 그녀는 동료 선수들과 함께 도꾜 올림픽에 참전키로 되어 있었다. 원정을 떠나기 앞서 김 주석은 그들을 고무하기 위해 접견의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 접견의 자리에서 신금단 선수는 뜻밖에도 놀라운 말을 김 주석으로부터 듣게 된다. 김 주석은 선수들에게 격려의 악수를 해주며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현지에 가거든 우리나라를 강정했던 나라 잘 구경하라. 그리고 꼭 승리하라. 그리고 신금단 선수, 자네는 99% 아버지를 만나기 쉽네. 아마도 감격적 상봉 있으리라. 아버지 선물 준비해 가지고 갈. 또 사업 잘하면 아버지 모셔 올 수도 있으리라.》
아버지, 14년 전에 헤어진 그 아버지 말씀인가. 어느 날 훌훌 단신 떠나버리신 그 아버지, 비록 그 아버님이 남하하여 거제도 수용소를 거쳐 부산에 사시다가 다시 서울로 와 계신다는 둥 드문드문 풍문에 소식을 들어오긴 했으나 그 아버님은 이미 살아 계셔도 살아 계신 아버지가 아니요 그리고 어질고 자상하여 몸소 집안 살림 구석구석 심지어 부엌 살림까지도 해주시던 그 아버지는 아미 아닌 것이다. 그는 흘러간 눈물과 그리움의 세월 속에 과거의 사람이 되어 버렸고 체념의 사람이 되었으며 다만 추억의 사람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젠 그 아버지를 향한 더 이상의 소망도, 꺼지고 눈물도 말랐는데 이 어인 일인가. 딸의 심정은 착잡하기 이를데 없고 이 꿈만 같은 이야기가 도시 믿기지 않을 뿐이다.
선수들을 태운 배가 청진에서 떠나 일본 니이가다항에 닿았다. 재가 닻을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우선 북한 대표들이 이번 올림픽에 과연 참가할 수 있을 것인가 여부를 물어 왔고 이미 정보를 입수한 듯 부친과의 상봉을 앞둔 신금단 선수에게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질문 공세가 날아 들었다.
《이남에서 부친이 오는 것 아느냐》는 첫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하층 노동자인데 해외 여행 같은 것을 할 수 있겠는지요. 혹 오신다 하면 그 어떤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닐런지요.》
기차를 타고 도꾜까지 오는 길에도 줄곧 기자단이 추적했다. 도꾜 체류 5일째 되던 날 결국 북한 대표단들의 참가 불가 통지를 받았다. 1964년 10월 5일의 일이다. 낙심천만 되돌아가는 동료들과 작별, 그녀만이 총련회관에 남아 부친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름떼같이 모여든 기자들 속에 포위되어서…. 그런데 그중 어느 기자가 봉투 하나를 건네 주었다. 열어 보니 아버지가 하네다공항에 도착한 사진이었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웃는 그런 표정이었다. 아버지와의 면회 시간은 3시간 정도 가능하리라 했다. 그런데 예정 시간 오후 3시가 이미 지나고 4시가 되어도 5시가 되어도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래 모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3층에서 내려오려는데 저만치서 아버지가 오고 계시지 않는가. 양측으로 사람들에게 부축되어서…. 사방에서 캄메라후레쉬가 터지기 시작했다. 부녀의 거리가 7~8미터쯤 되자 아버지가 먼저 딸을 불렀다. 그리고 아버지가 제일 먼저 안부를 물은 건 어머니였고 다음이 아들 그리고 삼촌들의 순서였다. 아버지가 염려하는 어머니, 아들은 무론 일가친척 모두 건강히 잘 지낼 뿐 아니라 모두가 다 대학 교육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아버지는 딸의 이야기를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특별히 그처럼 가난하던 집안에서 어찌 온 가족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가. 그 사실에 대해 극구 믿으려하지 않으셨다. 딸의 마음은 슬프기 그지없었다. 반공 선전이 그 얼마나 철저했기에 부모가 자식의 말을 믿지 못하게까지 되었는가. 분단은 혈육을 공간적으로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혈육간의 인간적 신뢰마저도 이같이 갈라놓았는가. 딸은 그 분단의 잔인성 앞에 다만 가슴이 미어져 왔다. 여사는 면담 도중 이대목을 몇 번이고 사무쳐 되풀이 한다.
《아버지가 끝까지 내 말을 안 믿으셨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딸은 눈물을 거두고 마음을 가다듬어 정성껏 준비해 간 작은 선물을 아버지에게 드리고자 했다. 아버지는 선물 또한 거부하시지 않는가. 《내가 너 줄 것 없는데 어찌 받겠느냐.》 부녀간의 승강이가 소용없었다. 하지만 한덕수 총련회장께서 주신 20만원의 용돈만큼은 기어이 호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그 시간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남과 북의, 제3의 이국의 모든 사람들이 울었다. 기자들도 구경꾼도 감시원도…. 3시간 정도 허락된다던 면회 시간은 불과 7~8분만에 제지당하고 끝내야 했다. 부녀는 이제 다시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등을 돌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야 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마지막 말을 하셨다.
《고운 맘으로 통일까지 편히 살거라.》
그것은 정녕 꿈 같은 만남, 잠시 환상처럼 만나 본 아버지. 다시는 이승에서 뵙지 못하게되니 더욱더 꿈만 같다. 집에 돌아오니까 어머니는 딸의 입만 쳐다보신다. 어릴적 기억에도 동갑이신 두 부모님께선 남달리 금슬이 좋으셨다. 차마 도착하던 그날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룻밤을 뜬눈으로 새운 뒤 어머님께 소상한 보고를 드렸다. 어머니는 그 길로 몸져 누우셔서 한 주일이 가고 열흘이 가도 기력을 펴지 못하셨다.
그 남편, 그 아버지는 끝내 다시는 딸도 그 아내도 만나보지 못한 채 1983년 도로 관리원으로 근무하시던 중 사고로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더 이상 한도 눈물도 없는 저 세상을 향해서…. 그는 재혼하여 얻은 두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부디 북녘 땅 가까이에 나를 묻어 다오. 그리고 묘주는 신금단으로 해다오. 그리고 맏이가 어떻게든 북에 누이를 꼭 만나도록 하라.》
그 유언을 받들어 아버지는 경기도 파주 땅에 모시어 졌다. 그리고 나은 일은 맏이가 어떻게든 북의 누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 땅에 길은 없다. 맏이는 오직 누나를 만날 일념으로 일단 육상 선수가 되어 체육계에 발을 들였다. 그리해서 어느 날 국가 대표 선수가 되어 해외 원정을 나갈 수만 있다면 거기 국제 경기장에서 누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는 아간힘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모든 건 그의 뜻대로 쉬이 되지 않았다. 국제 경기 출전은 포기 상태가 되고 그나마 또 하나 길이라고 착안해 본 것이 있다. 그 옛날에 있었다는 신의주 부산 이어달리기를 부활시키는 거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뛰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봤다. 하지만 이 또한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려주던 여사는 드디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참 천진난만한 노력이지요.》
그녀는 사진으로밖엔 보지 못한 남녘 땅의 동생들을 그려 보는 듯 눈물을 감추려는 듯 먼 산을 바라보며 시선을 피한다. 나는 이제 그만 보다 명랑한 화제로 돌려야 했다. 북한에 있어서 그녀는 누가 뭐라해도 체육계의 여왕이다. 당시 그녀의 나이 20세, 1958년도 자강도 대표 선수로서 전국체전에 참가하여 1등을 차지한 이래 그녀의 나이 32세에 선수로서 은퇴하기까지 그녀가 국내외를 휩쓸어 걷우어 들인 빛나는 경력은 참으로 화려한 것이다. 그녀는 우선 국가의 최고의 영예인 《인민체육인》의 칭호를 받은 최초의 사람일 뿐 아니라 체육인으로 보낸 반평생을 통해 그몇 번인가 세계 신기록을 낸 것은 물론, 그녀가 국제 경기에서 획득한 금메달만도 38개에 달한다. 그녀는 오직 단 한 번 2등을 했을 뿐 매출전 때마다 1위를 해왔다. 그녀가 국내에서 받은 훈장, 표창 또한 이루 다 헤일 수 없다. 김일성 상을 위시하여 국기훈장 제1급 3개, 제2급 6개, 제3급 4개, 군공메달 1, 김 주석 명함 시계… 끝이 없이 나열된다. 하지만 그녀가 이같이 천하의 영예를 한몸에 받아안기까지 그녀의 남모르는 악전고투, 백절불굴의 투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녀는 평소 남보다 배나되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을 뿐 아니라 경기장마다 현장에서 있었던 눈물겨운 투쟁의 일화 또한 얼마든지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잊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는 1963년 7월 소련 원정때의 일이다. 첫날의 경기인 400미터 달리기에서 1등을 하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려는데 별안간 배에 심한 진통이 왔다. 그래 삼시를 굶은 대신 포도당 혈관 주사를 맞고져 했으나 혈관이 너무 약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포도당 주사약을 들이 마신 결과 이번엔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다. 다시 냉수를 들이마시자 고통은 배로 늘어났다. 밤새도록 고통에 몸부림쳐야했다. 하지만 날이 밝자 주의에 만류도 뿌리치고 그녀는 그 몸을 이끌고 곧장 경기장으로 나아갔다. 백절불굴, 그녀의 투지에 신이 감동했는지 환자인 그녀는 다시 800미터에서 기어이 1위를 차지하고야 말았다. 당시 창성에 가 있던 김 주석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직접 국제 전화를 내주어 격려를 보내 왔다. 그리고 그녀가 귀국하였을 때 김 주석은 그녀를 가리켜 《개선장군》이라 불러 또 한 번 고무했다.
이제 나는 몹시도 궁금했던 질문을 던져 보았다. 국제 경기에 나갈 때마다 혹시나 남한 선수들과의 그 어떤 만남이 가능했던가고. 그녀의 표정은 갑자기 밝아졌다. 그리고 생기가 난다.
《남조선 선수들과 만나는가고요? 그렇고 말고요. 우린 만나면 아주 참 재밌게 지냅니다. 경기 때는 서로 꼭 이기라고 격려할 뿐 아니라 피차 있는 힘 다해 응원해 준답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건 이기면 제일 먼저 달려와 축하해 주는 건 언제나 북이건 남이건 우리 동포들입니다.》
나는 처음엔 놀라왔고 다음엔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 좀 믿기 어려운 얘기였지만….
《그리고 쉬는 시간에 풀밭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이렇게 농담도 오고 가지요.》
남 : 《당신들은 강낭죽만 먹고 산다지요?》
북 : 《강낭죽만 먹고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뛸 수 있겠습니까.》
남 : 《당신들 경기 잘 못하고 돌아가면 처벌 받아서 아오지탄광으로 끌려 가는 것 아닙니까?》
북 : 《그런가 안 그런가 우리 내년 경기장에서 다시 만나 보면 알 것 아닙니까.》
평생을 오직 체육인의 한길을 걸으며 독신을 지켜온 그녀는 평양체육대학을 졸업한 이래 줄곧 《압록강 체육 선수단》 지도원으로 봉직하면서 후진양성에 온 정열을 다하고 있다. 지난날 준엄했던 자시의 체험을 살려 후진들에게도 엄혹한 훈련을 쌓아 가도록 지도한다. 국수와 채소, 과일을 좋아한다는 그녀는 과연 육상 선수가 되기 위해 태어난 듯 1미터 73의 장신에다 체중 70kg이라 했다. 3년 전에 모친상을 당하고 북녘 땅엔 하나뿐인 남동생마저 근자에 누님을 앞서 갔다.
그러나 전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을 뿐 아니라 자식보다도 나은 숱한 제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녀는 외롭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말한다.
《사람들이 그러죠. 당신은 최대의 영예를 다 얻었고 이제 나이도 50을 넘어섰으니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제게는 아직도 열망하는 크나큰 소원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남과 북이 하나의 팀이 되어 국제 경기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오늘도 훈련장에 나와 이렇게 후진들에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운동은 생애를 통해 운동을 시작한 그날로부터 운동을 바치는 그날까지 단 하루도 쉬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진실과 평화의 유토피아를 항해 계속 달려야 할 우리 모두에게 외치는 그녀의 훈령이 아닐까.
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중 일부
이것은 어느 유랑 극단의 신파극 대사가 아니다. 일점일획도 고치지 않은 어느 이산 가족 아들의 피맺힌 호소요 울부짖음일 뿐이다.
이산 가족의 시중을 들게 된 것도 어느 사이 한 돌을 지냈다. 다 몇 손가락을 꼽을 만한 극소수의 용기 있는 자들에 의해 철통 같은 반공 의식, 분단의 장벽을 뚫고 이산 가족 상봉이 시도되고 그 문이 조금씩 열리게 된 것은 이미 10여 년 전 일이지만 특별히 지난해(1988) 7·7성명 이후엔 마치 둑이 무너진 듯 이산 가족의 문의, 신청이 쇄도해 왔다. 우리 두 사람은 낮도 밤도 없이 전화통 앞에 붙들려 노예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도 계획도 전혀 무산되고 방치된 채 그들의 한과 눈물, 만가지 사연에 우리 또한 동화, 흡수되어 전혀 망아 상태가 되었고 속속 쌓여 오는 서류 천리마도 어망이 없다.
헌데 그뿐인가. 일각이 여삼추같이 조속한 가족 상봉의 열망이 타오르다보니 밤잠들을 거른 탓일까. 그런 순간엔 교양도 예의도 벗어 던지고 마구 재촉 전화를 퍼부어댈 때는 마치 고용주가 피공자를 불러다 놓고 질책을 하는 것 같아 우리 두 사람은 죄인이 되어 이마의 식은 땀마저 닦아가며 쩔쩔매야 한다. 하지만 그처럼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는 그들이 마치 시험을 치른 뒤 합격 통지라도 기다리는 초조한 수험생들 같기도 해서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여간 그러는 사이 지나간 1년 꽤 상당수의 이산 가족이 꿈 같은 가족 상봉을 실현, 한을 풀게 된 기쁨을 맞이했고 그 나름의 보람도 느끼게 된다.
나는 일에 쫓기면서 문득 생각이 났다. 우리가 성서에서 보는 최초의 이산 가족 상봉이 구약(창세기 32, 33장)의 야곱과에서라면 분단 이래 우리 민족의 이산 가족 상봉 제1호가 있다면 그것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북의 육상 선수 신금단 선수와 홀로 남하했던 그 부친과의 극적 상봉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지금쯤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리고 그 부친께서는…. 그들 또한 만날 기약은 없었던가. 나는 그녀 신금단 여사를 만나 볼수 있도록 청원해 보았다.
신금단 여사. 당시 국내적으로 박뉴스의 주인공이었던 26세의 젊은 아가씨는 그 사이 51세의 중년 부인으로 변해 있었다. 아주 후덕해 보이고 위엄 있는 중년의 여성으로 그녀는 활달한 체육인에다 잦은 해외 원정 때문일까. 어딘가 개방적이고 탁트인 세련된 인상이었다.
솔직히 그녀의 존재는 우리에게 있어서 체육인으로서의 빛나는 존재보다는 한 사람의 슬픔 많은 이산 가족의 딸로서 보다 인식되고 기억되는 그런 여인이 아닐까. 그녀는 불과 며칠 전에 해외 원정에서 돌아와 미처 피로가 가시지도 않은 채였고 그러나 그 어느 하루 한시도 쉬임없는 후진 양성으로 바쁜 나날을 지내고 있던 중 만들기 어려운 짬을 내주어 비로소 우리의 만남이 가능케 되었다. 그것은 금년도 1989년 현재 역사적인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진행되면서 그 화려한 축제의 열기가 온 나라에 가득하던 7월 초하루 하오의 시간이었다.
1964년 그녀는 동료 선수들과 함께 도꾜 올림픽에 참전키로 되어 있었다. 원정을 떠나기 앞서 김 주석은 그들을 고무하기 위해 접견의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 접견의 자리에서 신금단 선수는 뜻밖에도 놀라운 말을 김 주석으로부터 듣게 된다. 김 주석은 선수들에게 격려의 악수를 해주며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현지에 가거든 우리나라를 강정했던 나라 잘 구경하라. 그리고 꼭 승리하라. 그리고 신금단 선수, 자네는 99% 아버지를 만나기 쉽네. 아마도 감격적 상봉 있으리라. 아버지 선물 준비해 가지고 갈. 또 사업 잘하면 아버지 모셔 올 수도 있으리라.》
아버지, 14년 전에 헤어진 그 아버지 말씀인가. 어느 날 훌훌 단신 떠나버리신 그 아버지, 비록 그 아버님이 남하하여 거제도 수용소를 거쳐 부산에 사시다가 다시 서울로 와 계신다는 둥 드문드문 풍문에 소식을 들어오긴 했으나 그 아버님은 이미 살아 계셔도 살아 계신 아버지가 아니요 그리고 어질고 자상하여 몸소 집안 살림 구석구석 심지어 부엌 살림까지도 해주시던 그 아버지는 아미 아닌 것이다. 그는 흘러간 눈물과 그리움의 세월 속에 과거의 사람이 되어 버렸고 체념의 사람이 되었으며 다만 추억의 사람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젠 그 아버지를 향한 더 이상의 소망도, 꺼지고 눈물도 말랐는데 이 어인 일인가. 딸의 심정은 착잡하기 이를데 없고 이 꿈만 같은 이야기가 도시 믿기지 않을 뿐이다.
선수들을 태운 배가 청진에서 떠나 일본 니이가다항에 닿았다. 재가 닻을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우선 북한 대표들이 이번 올림픽에 과연 참가할 수 있을 것인가 여부를 물어 왔고 이미 정보를 입수한 듯 부친과의 상봉을 앞둔 신금단 선수에게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질문 공세가 날아 들었다.
《이남에서 부친이 오는 것 아느냐》는 첫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하층 노동자인데 해외 여행 같은 것을 할 수 있겠는지요. 혹 오신다 하면 그 어떤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닐런지요.》
기차를 타고 도꾜까지 오는 길에도 줄곧 기자단이 추적했다. 도꾜 체류 5일째 되던 날 결국 북한 대표단들의 참가 불가 통지를 받았다. 1964년 10월 5일의 일이다. 낙심천만 되돌아가는 동료들과 작별, 그녀만이 총련회관에 남아 부친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름떼같이 모여든 기자들 속에 포위되어서…. 그런데 그중 어느 기자가 봉투 하나를 건네 주었다. 열어 보니 아버지가 하네다공항에 도착한 사진이었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웃는 그런 표정이었다. 아버지와의 면회 시간은 3시간 정도 가능하리라 했다. 그런데 예정 시간 오후 3시가 이미 지나고 4시가 되어도 5시가 되어도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래 모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3층에서 내려오려는데 저만치서 아버지가 오고 계시지 않는가. 양측으로 사람들에게 부축되어서…. 사방에서 캄메라후레쉬가 터지기 시작했다. 부녀의 거리가 7~8미터쯤 되자 아버지가 먼저 딸을 불렀다. 그리고 아버지가 제일 먼저 안부를 물은 건 어머니였고 다음이 아들 그리고 삼촌들의 순서였다. 아버지가 염려하는 어머니, 아들은 무론 일가친척 모두 건강히 잘 지낼 뿐 아니라 모두가 다 대학 교육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아버지는 딸의 이야기를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특별히 그처럼 가난하던 집안에서 어찌 온 가족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가. 그 사실에 대해 극구 믿으려하지 않으셨다. 딸의 마음은 슬프기 그지없었다. 반공 선전이 그 얼마나 철저했기에 부모가 자식의 말을 믿지 못하게까지 되었는가. 분단은 혈육을 공간적으로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혈육간의 인간적 신뢰마저도 이같이 갈라놓았는가. 딸은 그 분단의 잔인성 앞에 다만 가슴이 미어져 왔다. 여사는 면담 도중 이대목을 몇 번이고 사무쳐 되풀이 한다.
《아버지가 끝까지 내 말을 안 믿으셨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딸은 눈물을 거두고 마음을 가다듬어 정성껏 준비해 간 작은 선물을 아버지에게 드리고자 했다. 아버지는 선물 또한 거부하시지 않는가. 《내가 너 줄 것 없는데 어찌 받겠느냐.》 부녀간의 승강이가 소용없었다. 하지만 한덕수 총련회장께서 주신 20만원의 용돈만큼은 기어이 호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그 시간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남과 북의, 제3의 이국의 모든 사람들이 울었다. 기자들도 구경꾼도 감시원도…. 3시간 정도 허락된다던 면회 시간은 불과 7~8분만에 제지당하고 끝내야 했다. 부녀는 이제 다시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등을 돌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야 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마지막 말을 하셨다.
《고운 맘으로 통일까지 편히 살거라.》
그것은 정녕 꿈 같은 만남, 잠시 환상처럼 만나 본 아버지. 다시는 이승에서 뵙지 못하게되니 더욱더 꿈만 같다. 집에 돌아오니까 어머니는 딸의 입만 쳐다보신다. 어릴적 기억에도 동갑이신 두 부모님께선 남달리 금슬이 좋으셨다. 차마 도착하던 그날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룻밤을 뜬눈으로 새운 뒤 어머님께 소상한 보고를 드렸다. 어머니는 그 길로 몸져 누우셔서 한 주일이 가고 열흘이 가도 기력을 펴지 못하셨다.
그 남편, 그 아버지는 끝내 다시는 딸도 그 아내도 만나보지 못한 채 1983년 도로 관리원으로 근무하시던 중 사고로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더 이상 한도 눈물도 없는 저 세상을 향해서…. 그는 재혼하여 얻은 두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부디 북녘 땅 가까이에 나를 묻어 다오. 그리고 묘주는 신금단으로 해다오. 그리고 맏이가 어떻게든 북에 누이를 꼭 만나도록 하라.》
그 유언을 받들어 아버지는 경기도 파주 땅에 모시어 졌다. 그리고 나은 일은 맏이가 어떻게든 북의 누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 땅에 길은 없다. 맏이는 오직 누나를 만날 일념으로 일단 육상 선수가 되어 체육계에 발을 들였다. 그리해서 어느 날 국가 대표 선수가 되어 해외 원정을 나갈 수만 있다면 거기 국제 경기장에서 누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는 아간힘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모든 건 그의 뜻대로 쉬이 되지 않았다. 국제 경기 출전은 포기 상태가 되고 그나마 또 하나 길이라고 착안해 본 것이 있다. 그 옛날에 있었다는 신의주 부산 이어달리기를 부활시키는 거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뛰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봤다. 하지만 이 또한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려주던 여사는 드디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참 천진난만한 노력이지요.》
그녀는 사진으로밖엔 보지 못한 남녘 땅의 동생들을 그려 보는 듯 눈물을 감추려는 듯 먼 산을 바라보며 시선을 피한다. 나는 이제 그만 보다 명랑한 화제로 돌려야 했다. 북한에 있어서 그녀는 누가 뭐라해도 체육계의 여왕이다. 당시 그녀의 나이 20세, 1958년도 자강도 대표 선수로서 전국체전에 참가하여 1등을 차지한 이래 그녀의 나이 32세에 선수로서 은퇴하기까지 그녀가 국내외를 휩쓸어 걷우어 들인 빛나는 경력은 참으로 화려한 것이다. 그녀는 우선 국가의 최고의 영예인 《인민체육인》의 칭호를 받은 최초의 사람일 뿐 아니라 체육인으로 보낸 반평생을 통해 그몇 번인가 세계 신기록을 낸 것은 물론, 그녀가 국제 경기에서 획득한 금메달만도 38개에 달한다. 그녀는 오직 단 한 번 2등을 했을 뿐 매출전 때마다 1위를 해왔다. 그녀가 국내에서 받은 훈장, 표창 또한 이루 다 헤일 수 없다. 김일성 상을 위시하여 국기훈장 제1급 3개, 제2급 6개, 제3급 4개, 군공메달 1, 김 주석 명함 시계… 끝이 없이 나열된다. 하지만 그녀가 이같이 천하의 영예를 한몸에 받아안기까지 그녀의 남모르는 악전고투, 백절불굴의 투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녀는 평소 남보다 배나되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을 뿐 아니라 경기장마다 현장에서 있었던 눈물겨운 투쟁의 일화 또한 얼마든지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잊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는 1963년 7월 소련 원정때의 일이다. 첫날의 경기인 400미터 달리기에서 1등을 하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려는데 별안간 배에 심한 진통이 왔다. 그래 삼시를 굶은 대신 포도당 혈관 주사를 맞고져 했으나 혈관이 너무 약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포도당 주사약을 들이 마신 결과 이번엔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다. 다시 냉수를 들이마시자 고통은 배로 늘어났다. 밤새도록 고통에 몸부림쳐야했다. 하지만 날이 밝자 주의에 만류도 뿌리치고 그녀는 그 몸을 이끌고 곧장 경기장으로 나아갔다. 백절불굴, 그녀의 투지에 신이 감동했는지 환자인 그녀는 다시 800미터에서 기어이 1위를 차지하고야 말았다. 당시 창성에 가 있던 김 주석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직접 국제 전화를 내주어 격려를 보내 왔다. 그리고 그녀가 귀국하였을 때 김 주석은 그녀를 가리켜 《개선장군》이라 불러 또 한 번 고무했다.
이제 나는 몹시도 궁금했던 질문을 던져 보았다. 국제 경기에 나갈 때마다 혹시나 남한 선수들과의 그 어떤 만남이 가능했던가고. 그녀의 표정은 갑자기 밝아졌다. 그리고 생기가 난다.
《남조선 선수들과 만나는가고요? 그렇고 말고요. 우린 만나면 아주 참 재밌게 지냅니다. 경기 때는 서로 꼭 이기라고 격려할 뿐 아니라 피차 있는 힘 다해 응원해 준답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건 이기면 제일 먼저 달려와 축하해 주는 건 언제나 북이건 남이건 우리 동포들입니다.》
나는 처음엔 놀라왔고 다음엔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 좀 믿기 어려운 얘기였지만….
《그리고 쉬는 시간에 풀밭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이렇게 농담도 오고 가지요.》
남 : 《당신들은 강낭죽만 먹고 산다지요?》
북 : 《강낭죽만 먹고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뛸 수 있겠습니까.》
남 : 《당신들 경기 잘 못하고 돌아가면 처벌 받아서 아오지탄광으로 끌려 가는 것 아닙니까?》
북 : 《그런가 안 그런가 우리 내년 경기장에서 다시 만나 보면 알 것 아닙니까.》
평생을 오직 체육인의 한길을 걸으며 독신을 지켜온 그녀는 평양체육대학을 졸업한 이래 줄곧 《압록강 체육 선수단》 지도원으로 봉직하면서 후진양성에 온 정열을 다하고 있다. 지난날 준엄했던 자시의 체험을 살려 후진들에게도 엄혹한 훈련을 쌓아 가도록 지도한다. 국수와 채소, 과일을 좋아한다는 그녀는 과연 육상 선수가 되기 위해 태어난 듯 1미터 73의 장신에다 체중 70kg이라 했다. 3년 전에 모친상을 당하고 북녘 땅엔 하나뿐인 남동생마저 근자에 누님을 앞서 갔다.
그러나 전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을 뿐 아니라 자식보다도 나은 숱한 제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녀는 외롭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말한다.
《사람들이 그러죠. 당신은 최대의 영예를 다 얻었고 이제 나이도 50을 넘어섰으니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제게는 아직도 열망하는 크나큰 소원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남과 북이 하나의 팀이 되어 국제 경기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오늘도 훈련장에 나와 이렇게 후진들에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운동은 생애를 통해 운동을 시작한 그날로부터 운동을 바치는 그날까지 단 하루도 쉬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진실과 평화의 유토피아를 항해 계속 달려야 할 우리 모두에게 외치는 그녀의 훈령이 아닐까.
1992년 2월5일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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