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조국 방문기 66. 리경찬, 김은환 비전향장기수 선생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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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15-07-18 19:35 조회 18,135 댓글 3본문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66
리경찬, 김은환 비전향장기수 선생과의 대화
방문기 지난 회에 이어서 이번 회에는 비전향장기수로 2000년 9월에 북송된 리경찬 선생과 김은환 선생 두 분과 김은환 선생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나눈 대화가 이어진다.
리경찬 선생은 1935년 11월 15일생으로 황해북도 장풍군 월고리에서 출생하였다. 북부조국이 고향이고 북송됨으로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북부조국으로 송환된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 가운데 단지6명만 북이 고향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리경찬 선생을 포함한 6명 외에 나머지 비전향장기수들의 고향은 남쪽인데도 불구하고 끝내 전향하지 않고 신념을 지키다가 북으로 돌아간 것이다.
리경찬 선생은 건장한 모습처럼 원래 특수전 출신이었다고 한다. 당시 아주 총을 잘 쏘았는데 지금도 3발 모두 정확하게 맞출 수 있다고 한다. 남쪽으로 파견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붙들려서 35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감옥에서 거의 죽을 정도로 가해진 숱한 구타와 고문을 이겨내었다고 한다.
60년대 중반 처음 남쪽에 갔을 때의 느낌이 어떠했는가를 물어보니 당시 사람들의 생활이 아주 곤란하였는데 그때가 보릿고개 시절이었다고 말해준다. 대부분 먹고 살기가 어려운 시절이었고 빈부의 격차가 아주 심한 것을 보았는데 거기다 권위주의가 만연하였다면서 동지애가 크고 평등한 북부조국과 크게 비교되었다고 말한다. 살기가 어렵다보니 사기를 치고 남의 등쳐먹는 세상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젊은이들이 한편으로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우리 조상 전래의 좋은 풍습도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리경찬 선생은 감옥에서 출소하여 2개월만에 북송되는 행운을 누렸다. 그날 판문점에서 만난 딸이 ‘아버지’하고 불러서 겨우 딸이 이렇게 어른이 되었구나 하였는데 그 곁에 웬 늙은 여인이 서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자기 곁에서 계속 서있기에 참 이상한 사람이구나 왜 내 곁에서 계속 서있을까하고 여기는 가운데 딸이 ‘아버지, 엄마도 못 알아봅니까?’ 하고 말해주어서 그제서야 그는 부인을 알아보고 35년 만에 부인과의 상봉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리경찬 선생은 북에 돌아온 후 어떻게 보내느냐는 질문에 무엇보다 북부조국으로 돌아온 후 어디든 마음놓고 다닐 수 있어 너무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 갇혀있던 몸이었으니 자유롭게 된 것보다 더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으랴. 그 나이 인데도 춤을 추러 가고 낚시를 간다기에 낚시는 어디서 하는가고 물어보니 원산 송도원에서 도미를 낚은 적도 있다고 말해준다. 감옥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온몸이 쑤시면 딸과 손자들을 불러 주물러달라고 하는데 모두들 정성들여 주물러 준다면서 그렇게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때가 참 행복하다면서 혼자 계시는 동지들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든다고 하신다. 북으로 돌아온 후 가장 감격적인 일은 광명성 3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였을 때였다면서 조국에 대하여 더욱 큰 자부심을 갖게해주었고 군사적으로 더욱 신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리경찬 선생과 김은환 선생이 조선화와 서예로 다른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출품한 작품들의 사진
리경찬 선생은 지금 전문적인 수준의 조선화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높은 수준의 그림을 그려서 여러 번 상을 받았다. 그가 광주 감옥에 있는 동안 누가 그림을 버린 것을 보고는 그것을 재료로 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위대한 수령님’, ‘백두산 호랑이’, ‘장군님’ 의 그림을 그렸고, 북송된 후 만수대창작사에서 그림 교육도 받으면서 ‘리경찬호랑이’ 그림 등 민화성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린다. “그림 그리는 것은 품을 많이 먹는다”고 표현하면서 팔순이 넘은 나이에 화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의 모습이 아주 보기에 좋고 행복해보인다.
비전향장기수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바로 맞은 편에 소학교가 있었고 아이들이 보였다. 북부조국으로 돌아가서 인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외롭지 않게 살도록 배려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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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환 선생은 1930년 7월 12일 생이다. 고향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인데 현재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이 되었다. 아버지가 묘지기로 고향에서 능 주위에서 살았는데 해방후 농사를 짓던 땅을 모두 다 빼앗겼다. 전쟁 때 그가 남하한 인민군에 입대한 것을 이유로 고향의 부모님 모두 총살을 당했는데 그 일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김은환 선생은 김책공대 전기공학부를 졸업했다. 고향에 살 때 서울 쪽을 바라보면 야경이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것이 참 보기 좋았는데 그의 고향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아주 캄캄했다면서 통일이 되면 고향에 전기를 뽑겠다는 꿈을 갖고 공부해서 대학시험을 쳤다고 한다. 지배인이 건설대학에 가라고 하면서 전기공학은 수학을 잘해야 갈 수 있다고 하였지만 굽히지 않았다. 전기공학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풀어 합격해야 한다기에 주어진 문제를 당당하게 풀고 합격하였다. 그런데 통일은 아직 되지 않았는데 그가 살던 고향 수서는 지금 남한의 강남에서도 제일 번화가가 되었다면서 허허 웃으신다. 김은환 선생은 아주 명석한 분으로 말씀도 재치있게 잘하신다.
김책공대에서 열심히 공부하였고 졸업할 때 중공업부에 가시오라는 말을 들었기에 화력발전소 건설장에 가고 싶었는데 1년이 되어도 부르지를 않았다고 한다. 58-59년도에 대동강 유보도 건설에 참여하여 2월에 얼음을 헤치고 현장에서 일했다. 고구려 시대부터 조상들이 그곳을 사용하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물이 줄어들면 바위가 나올 때까지 땅을 파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중 문화성에 배치되어 뜻밖에도 영화촬영소에 가라고 하여 갔더니 총장이 문건을 보고는 ‘됐소!’ 하면서 기술부장을 하라고 했다. 영화제작에 대해서는 그가 아무 것도 모르는 분야였기에 그냥 눈치껏 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일본 책으로 공부하면서 노력한 결과 우수하게 근무했다.
그가 영화촬영소에서 몇 년 동안 근무하고 있을 때 나라에서 불렀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나갈 수도 있었지만 ‘남조선 혁명을 위해 가겠습니다’하고 나라의 부름에 따랐다면서 자신의 전공대로 사는 것보다는 ‘그 일이 더 컸다’고 말한다. 분계선을 넘으며 부인에게는 편지 한 장을 남겼다. 1년만에 돌아오겠다는 거짓말이 된 약속을 하고 떠난 것이다. 그런데 남으로 내려오자마자 바로 붙들려버렸다. ‘내가 잘했으면 붙잡히지 않았을텐데 잘못했으니 감옥에 갔지’ 라고 말하면서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였기에 떨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김은환 선생 댁에서의 담화. 오른편이 김은환 선생, 가운데가 리경찬 선생.
붙잡힌 후엔 엄청난 구타와 고문 가운데 ‘몰라’로 대답하면서 버티었다. 20일이 심문 기한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몽둥이 찜질을 당하면서도 버티는 가운데 이빨이 모두 다 빠졌다. 18일이 되는 날은 실신하여 거의 죽었다가 겨우 정신이 드는데 이대로 계속 맞다가는 죽겠구나 싶어 작전을 세웠다. 그래 정신을 가다듬고 있다가 그 지독한 수사관 놈이 가까이 오자 퉤 하고 빠진 이빨과 함께 침을 뱉어주고는 수갑을 찬 손으로 머리를 치고는 허리를 찔렀고 그 수사관이 꼬꾸라지자 엉치를 차고 급소를 쳤다.
갑자기 그런 일이 생기자 우당탕탕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수사관에게 ‘왜 증거가 남게 때려?’ 하면서 정당방위로 일어난 일이라 더 이상의 고문을 중단하고 수갑 두 개를 채워서는 먹방에 가두어버렸다. 그가 말하는 먹방이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독방인데 거기서2년을 보냈다고 한다. 먹방에 갇혀서는 이빨이 없으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1주일을 보내는 동안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 하는데 밖에서 간수가 문을 땅땅 치면서 ‘선생님, 죽지 마십시요. 왜 죽습니까?’ 하면서 불렀다.
그 간수는 대학을 나온 후 처음으로 잡은 직장이 그곳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매일 교대간수로 들어오겠다고 하고는 그에게 아~ 하고 입을 벌리게 해서는 쵸콜렛을 입안에 넣어주며 기운을 차리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죽지 마십시요. 저는 북에 대해서 많은 책을 읽어보았는데 모두 나쁘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사실대로 얘기해주세요.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음 그 간수를 대하고는 김은환 선생은 그 간수가 자신을 시험하는 줄 알았다. 그래 처음엔 믿기가 어려웠지만 차츰 그 간수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2년 동안 그 간수와 지나는 동안 건강을 회복하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2년이 되었을 때 그 간수는 ‘선생님, 저는 앞으로 간수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통일운동을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낼 모레 대전으로 갑니다.’라고 말하고는 헤어졌다. 김은환 선생이 34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2000년에 출소하는 날 30여 명의 청년들이 환영해주었는데 그 가운데는 먹방에서 만난 그 간수도 통일운동가가 되어 반겨 맞아주었다면서 ‘간수도 변화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김은환 선생이 북으로 돌아오는 날 아무리 둘러보아도 부인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웬 할머니 한 사람이 옛날 기억에 본 적이 있던 조선옷 차림으로 쩔뚝쩔뚝 다가오는 것이었다. 바로 그의 부인이 그를 배려해서 옛날에 입던 옷 차림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옷은 옛날의 옷을 입었지만 그 젊고 아름답던 부인이 이제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될 정도로 세월은 무심히 흘러버린 것이었다. 그의 곁에서 어떤 중년의 사내가 ‘아버지’ 하면서 말을 걸었지만 그는 지도원이겠지하고 여겼다. 그랬는데 계속해서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그가 바로 꿈에도 그리던 그의 아들이었다. 어렸을 때 동무들로부터 ‘과부 새끼’라고 놀림을 당하면서도 아버지가 통일운동을 하러 남쪽으로 갔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자라난 아들이다. 그러다보니 그 아들은 놀림을 당할 때마다 더욱 의지가 강해지고 주먹이 세어졌다고 한다. 아버지라고 실컷 부르고 싶었는데 막상 35년만에 만난 아버지는 자신이 몇 번을 불러도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북부조국에 돌아온 이후의 생활에 대하여 노길남 박사와 대화하는 김은환 선생
대화에 함께 자리한 김동기 선생과 김은환 선생의 손녀 은심
김은환 선생은 부인이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을 기다리며 수십 년 동안 고생하였던 부인 생각을 하면서 재혼은 생각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는 ‘신념과 의지의 강자’로 내가 지킬 것은 의리다고 하면서 그걸 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아들, 며느리, 손주가 늘 곁에서 있는 것이 큰 위안이기도 하다.
북으로 돌아온 후 감명깊은 일 한가지만 말해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말하기를 돌아와서 ‘자기비판’을 썼는데 그걸 보지도 않고 당으로부터 ‘총화할 필요 없다. 이미 높은 평가가 있었다’는 대답을 듣고는 감격하여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은 당에 기여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이렇게 조국은 그를 평가해주었다는 마음에서 였다. 또한 장군님께서 ‘감옥에 있는 동무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하루속히 꺼내어 당의 품에 데려 오겠습니다.’라고 하며 그들 비전향장기수들을 잊지 않고 소중하게 여겨주었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일에 대한 의욕이 넘쳐흘렀다고 말한다.
리경찬, 김은환 선생이 다른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출품한 작품들
김은환 선생이 전문 서예가임을 증명하는 서예작품 입상증서와 메달
대화를 마친 후 우리를 배웅하는 리경찬, 김은환 선생
김은환 선생은 지금 북부조국에서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4월에 특상을 받기도 하였다면서 자신이 쓴 ‘천하제일강국’ 작품과 함께 리경찬 선생과 함께 수상한 작품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오늘 찾아뵌 이 두 분은 북으로 송환된 후 조국의 품안에서 통일을 꿈꾸며 맹렬하게 활동하는 예술가로서 인생의 후반을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인 것이다. 팔순이 지난 나이지만 이렇게 활기차고 멋있는 삶을 살아가는 두 분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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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3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신념을 지켜낸 애국자를 존중하는사회, 그리고 그것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 사회가 너무도 대비됩니다. 지금도 통일운동을 하는 동지를 감옥으로 보내는 세상이지요.
광개토왕님의 댓글
광개토왕 작성일인생의 반을 감옥에서 지내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자신의 한 인생 희생한다하여 뭔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도 없을진데 스스로의 신념에 자신의 생을
걸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로 여겨집니다.
이런 사람들을 제대로 보아 그러한 덕목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사회가 바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자 사람사는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