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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내면 '또라이', 군가에 PT 체조, 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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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969회 작성일 11-07-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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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멀고도 가까운 땅 수빅(Subic)을 찾다"



인천 공항에서 마닐라 공항까지 네 시간 정도 걸린다. 마닐라에서 수빅 한진 조선소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또한 네 시간 가량이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곳이다.

마닐라에서 수빅에 이르려면 팜팡가(Pampanga) 도(Province)를 통과하여 삼발레스(Zambales) 도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 한참 동안 큰 들판을 지난다. 평평하고 넓기로 호남평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알고 보니, 이곳이 그 유명한 피나투보 화산- 1991년 6월 14일 폭발했는데, 단일 화산폭발로 지구 전체 기온을 0.5도 낮췄다는 화산이다-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화산재가 덮쳐서 지면을 수 미터나 높였고, 어마어마하게 큰 평야를 만들었다고 한다.

▲ 버스 안에서 바라본 팜팡가 도의 들판. 멀리 피나투보 화산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알다시피 수빅은 세계 몇 번째로 큰 미 해군 기지가 있던 곳이다. 미국이 그 해군 기지를 철수하게 된 것도 필리핀 민중들의 철수 요구와 더불어 피나투보 화산 폭발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한다.

▲ 예전 미 해군 기지. 왼쪽이 비행장 오른쪽이 해군기지. 멀리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한진 수빅 조선소가 들어서 있다 ⓒ위키백과, 1990년 1월 촬영

그 수빅에 지금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조선소라고 하는 한진 중공업 수빅 조선소가 들어서 있다. 수빅은 이제 미 해군기지가 있는 곳으로부터 한국계 글로벌 기업인 한진 중공업의 조선소가 있는 곳으로, 군인도시에서 기업도시로 그 정체성이 바뀌고 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나 할까.

지난 7월 6일 그 수빅에 다녀왔다. 아침 일찍 마닐라를 출발했는데 해가 져서 돌아왔다. 왕복 꼬박 10시간의 여정이었다. 마닐라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수빅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내 마음 탓인지 수빅의 풍경은 스산했다. 한국에서는 정초에 수백 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여 그 노동자와 딸린 가족들의 삶을 송두리째 뿌리 뽑고 있는 그 한진 중공업 자본이 필리핀 수빅에서는 도대체 얼마만한 공장을 지어놓고 있는지 또 노동자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마침 필리핀 KMU('5월 1일 운동'이라는 뜻. 20년 전에 존재했던 우리나라의 전노협과 비슷한, 전투적 민주노조운동의 전국 센터이다.) 동지들의 초청으로 필리핀을 방문했던 차에 하루 짬을 내어서 찾아가 본 것이었다.

마닐라 북쪽에 있는 팜팡가 도를 지나 서쪽으로 가면 삼발레스 도에 접어든다. 그 삼발레스 도에서 중심적인 도시가 수빅 만 안쪽에 위치하는 올롱가포(Olongapo) 시이다. 수빅 미 해군 기지는 올롱가포 시를 배후도시로 하면서 수빅 만 일대를 부대 시설, 군인가족들의 주거지와 위락시설 그리고 훈련시설 등 다목적으로 사용했었다.

▲ 마닐라에서 한진 수빅 조선소까지 가는 길

시외버스로 마닐라 북쪽 케손 시티 쿠바오 터미널에서 올롱가포 시까지 가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 노선버스 회사 이름이 빅토리(Victory)다. 이름이 마음에 든다. 장거리인지라 버스는 중간에 산타 크루즈 터미널에서 잠시 쉬었다가 간다.

▲ 산타 크루즈 터미널 표지판
▲ 케손 시에서 올롱가포 시까지 가는 Victory 노선 버스

종점인 올롱가포 터미널에 내려서 한진 수빅 조선소를 다녀오려고 교통편을 알아보니 올롱가포에서 수빅(Subic) 시를 거쳐 한진 조선소까지 가는 데 대략 1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지프니 - 필리핀에서, 지프형 중고 자동차를 개조한 승합차 - 나 트라이시클 - 필리핀에서, 오토바이를 개조하여 만든 삼륜 자동차 - 로는 너무 불편할 것 같아서 택시를 대절했다.

올롱가포 시에서 수빅 시로 가면서 비로소 '수빅'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길가에 건물들이 쭉 이어졌는데, 어느 곳인가에 이르니 길가를 걸어가는 청소년들의 얼굴 모습이 여느 곳과 다르다. 흰색이거나 검은 색이 많이 섞인 혼혈아들이었다. 미군기지가 주둔하던 흔적이 아닐까? 그런데 문득 한글이 눈에 띄었다. '청계 종합 공구'라는 상호의 간판이었다. 80년대 초 공장에 다니던 시절 청계천 3~4가 공구상가에 공구를 사러 여러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 이름을 딴 공구점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올롱가포 시에서 수빅 시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수빅 시에서 시장통을 지난 다음 한 동안 마을이 없는 지대를 통과했다. 군데군데 위락 시설들이 있었지만 붐비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머지않아 인가가 끊어지고 한적한 산길을 수십 분을 달렸다. 그렇게 달려가는데 갑자기 자그마한 건물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건물의 간판에 영어로 'Police Station'이라고 되어 있고 한글로 '경찰서'라고 병기되어 있었다. 경찰서 본부는 아니겠고 파출소 같은 것이라 여겨졌다. 어쨌거나 이 외딴 곳에 그런 경찰 건물이, 더구나 한글까지 병기된 간판을 가진 건물이 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이것은 한진 조선소와 관련된 것임이 분명했다. 만일에 있을 조선소 노동자들의 소요 사태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지어진 시설 같았다.

그리고 얼마 더 가지 않아서 한진 조선소 정문에 다다랐다. 바다 쪽으로 난 공간에 통근 버스 수십 대가 주차해 있고, 승용차도 여러 대 주차해 있었다. 필리핀의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인 지프니와 트라이시클도 여러 대 대기하고 있었다. 허름한 음식점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구멍가게들도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글로벌 조선소가 있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했다. 마치 군 부대 앞 같았다. 수빅 조선소의 정문은 도로의 끝이었고, 도로의 끝이 수빅 조선소의 정문이었다. 그리고 정문 출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처져서 길의 절반을 가로막고 있었다. 부득이 택시를 360도 돌려 길가에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막상 목적지인 한진 수빅 조선소에 다다랐으나 수빅 조선소 안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정문 이외에는 조선소에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었다. 정문에서 왼쪽 아래의 해변까지는 수십 미터의 가파른 언덕을 이루고 있었고, 오른쪽 위로는 야산이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는 담장이 세워져 있어서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철조망까지 쳐놓고 있었다. 군 시설도 아닌 공장 시설을 이렇게 교도소나 군부대처럼 요새화해 놓은 것이었다. 경비원 가운데 몇 명은 군 헌병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정문을 지키는 경비원들은 사진도 찍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보기 전에는 공장의 겉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한진 자본은 왜 조선소를 마을에서 수십 Km나 떨어진 이런 외딴 곳에 지었을까? 그리고 왜 사람이 접근조차 할 수 없게 가파른 산 비탈길 중간을 가로막아 정문을 만들었을까? 조선소를 군부대처럼 운영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저런 모습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한진 수빅 조선소는 실제로 군부대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아침에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운동장에 집합시켜 '진짜 사나이' 같은 군가를 부르게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군대식 율동을 하게하고, 틀리면 벌칙으로 PT체조를 시키고 있다고 한다. 나아가 식민지 군대처럼 욕설에다 폭력행사를 밥 먹듯이 한다는 것이다. 그런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렇게 꼭꼭 감추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철저히 가두고 고립시켜 놓아야만 군대식 노동통제를 관철시킬 수 있어서일까?

▲ 한진 수빅 조선소 정문 왼쪽, 높은 담장 때문에 안을 볼 수 없다.

함께 간 사람이 기자는 아니고 통신원이지만 언론인인지라 그 권력(?)을 빌려서 공장 안을 좀 구경하자고 졸랐지만 경비원들은 자신들의 권한이 아니라면서 사무실에 연락했고, 사무실에서는 한국인 관리자가 세 사람이나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언론인에게도 조선소 안을 일체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조선소 상황에 대해서도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겨우 대답한 말은 그 조선소에 2만여 명의 사람이 일하고 있다는 것과 그 가운데 한국 사람은 천 명 가량이라는 것뿐이었다.

함께 간 언론인이 한국인 관리자와 대화하는 사이에 조선소 도크가 있는 쪽 앞바다에 떠 있는 배 한척과 언덕 아래의 크레인과 그 부근에서 배로 실어온 고철을 싣는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대여섯 개의 하얀색 둥근 통을 촘촘히 싣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압가스를 운반하는 배 같았다.

▲ 먼 바다에 보이는 가스 운반선(?). 선창에서 노동자들이 고철을 배에 싣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간신히 여기까지 왔으니 기념으로 정문 사진이나 한 장 찍자고 하여 정문 앞에 서서 공장 안을 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 사이에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바리케이드가 쳐진 정문 안에서 군용 스리쿼터 한 대가 밖으로 나오다가 멈추어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룩무늬 옷을 입은 군인들이 한국인 관리자들 및 경비원들과 뭐라고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스리쿼터가 정문으로 통과할 때 보니까 적재 칸에도 얼룩무늬를 입은 군인들이 타고 있었고, 적재 칸 가장자리에 앉은 병사는 개머리판이 검은색인 소총을 옆구리 총 자세로 들고 있었다. 얼핏 보아 정확하게는 판단하지 못했지만 M-16 자동소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정문 앞에서 본 수빅 조선소. 군인 복장의 경비원 뒤로 건조 중인 배 세 척이 보인다.

현역군인들이 웬일로 민간 공장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일까? 더구나 총을 곧추세워 들고서. 평소에도 이렇게 군이 들락날락하는 것일까? 한국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2011년 1월 6일 아키노 현 대통령이 한진 중공업이 건조한 화물선 두 척의 명명식에 참여하여 테이프를 끊었는데, 그 당시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여럿이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날 명명식을 가진 배가 군함이 아닌 상선들이었는데 왜 군인들이 거기에 함께하고 있었을까? 한진중공업은 군함을 건조하는 방위산업체여서 군이 경비를 지원해 주는 것일까? 국책사업체여서 지난 대통령과 현 대통령이 모두 배 명명식에 참여하고 커다란 관심을 갖기 때문에 군이 경비를 지원해 주는 것일까?

▲ 아키노 대통령이 헬기에서 내려 고위 군 장성과 함께 영접을 받았다.
▲ 명명식에 많은 수의 군인들이 참석하고 있다.
어쨌건 한진 수빅 조선소는 필리핀 경찰이나 일반 행정부로부터뿐 아니라 군으로부터도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특별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 수빅 조선소를 세우고 물량을 그쪽으로 빼돌린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들 군대와 경찰은 누구로부터 무엇을 경비하려는 것인가? 바로 필리핀 노동자로부터 한진 자본과 관리자들을 보호하려는 것 아닌가? 바로 그 필리핀 경찰과 군이 말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수빅 시를 거쳐 올롱가포 시로 왔다. 비는 계속해서 추적추적 내렸다. 올롱가포 시는 70년대의 한국의 여느 도시 같았다. 2만 명이나 되는 노동자가 일하는 조선소의 배후 도시 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인구가 20만을 넘는 도시라는데 전혀 그런 도시 같지가 않았다. 미군에 의지하던 도시인데, 미군은 떠났고 조선소가 대신 들어섰지만, 조선소가 만들어내는 소득은 이 도시에서 지출되지 않고 있는 듯했다. 노동자들의 소득조차 이곳에서 지출되지 않고 있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민다나오를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집되어 와서 조선소 안 기숙사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 마치 군대에 징집된 것처럼! 실제로 고향에 다녀오기 위해 하루 휴가를 신청했다가 한국인 관리자로부터 '또라이'라는 모욕을 당한 노동자가 있다고 한다.


▲ 수빅 시장 안에 있는 노점
▲ 빗속의 올랑가포 시민들.
또 노동자들이 시내에서 출퇴근하거나 가끔 시내로 나오는 경우에도, 노동자들의 소득이 워낙 박해서 이렇다 할 지출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수빅 조선소 노동자들의 임금은 한국의 조선소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의 약 1/1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큰 조선소에서 발생하는 그 커다란 량의 노동이 창조하는 가치는 도대체 어디로 흘러나가는 것일까? 마닐라로? 서울로? 뉴욕으로?

마닐라로 되돌아 와서 국제회의가 진행되는 짬짬이 KMU 동지들에게 한진 수빅 조선소의 상태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들도 한진 수빅 조선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소 내부는 자기들도 들어가 보지 못해서 잘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들도 궁금해서 지난 5월에 배를 임대해서 조선소 앞바다로 가서 바다 쪽에서 조선소를 한 바퀴 둘러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사진들을 USB에 담아서 주었다. 그 사진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6척의 배가 5도크와 6도크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부산 영도 조선소에는 3년째 수주물량이 없어서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노동자를 대량 정리해고 한다는 회사에서 같은 소유자가 경영하는 필리핀 수빅 조선소에는 수주물량과 일거리가 넘치고 있었다.


▲ KMU 측으로부터 받은 사진들. 5도크와 6도크에 6척의 배가 건조되고 있다.
▲ KMU 측으로부터 받은 사진들. 5도크와 6도크에 6척의 배가 건조되고 있다.
▲ KMU 측으로부터 받은 사진들. 5도크와 6도크에 6척의 배가 건조되고 있다.
▲ KMU 측으로부터 받은 사진들. 5도크와 6도크에 6척의 배가 건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수주한 배가 없어서 영도 조선소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도 조선소보다 수빅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것이 임금을 싸게 지불함으로 인해 이윤을 더 많이 창출하기 때문에 생산 물량을 의도적으로 그 쪽으로 옮긴 것이라는 노동조합의 주장이 객관적 사실로 입증된다. 한진 자본은 그것을 이른바 "경영상의 긴박한 이유"라고 강변하고 있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다는 탐욕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도 정리해고를 정당화하는 "경영상의 이유"가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런 사정을 두고서 영도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어서는 도저히 기업을 유지할 수 없어서 영도 조선소 문을 닫고 노동자의 밥줄을 잘라야 할 정도의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라거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빅 조선소를 다녀와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수빅을 다녀오기 직전인 7월 3일 그곳에서도 마닐라에서 수빅까지 수십 대의 차량을 앞세운 저항의 차량행진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사 IN>에서 상세히 보도하고 있었다. 가톨릭의 주교 한 분이 이 시위에 앞장을 서고 있었다. 1970~80년대 한국에서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노동자들의 울타리 역할을 해 주었던 일을 연상시킨다. 종교계가 노동자들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필리핀은 산업화의 정도에서도 아직 한 세대 정도 한국에 뒤쳐져 있듯이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운동에서도 그렇지 않나 싶다.


▲7월 3일에 있은, 수빅 노동자를 지지하는 차량 행진.
▲ 필리핀 주교회의 사회행동정의평화사무국 위원장 파비요 주교.

필리핀은 이제 비로소 산업화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고 있는 듯했다. 대다수의 제3세계 자본주의 나라들이 그러하듯이 외국자본에 의존하는 종속적인 방식으로! 더구나 한국의 경우 차관이 주된 방식이었다면 필리핀은 직접투자가 주된 방식이 되고 있었다. 한진 조선이 들어온 데 이어서 내년에는 중국계의 큰 자동차 공장이 들어온다고 한다. 쌍용자동차의 알짜 기술을 빼먹고 튄 상하이 자동차 같은 저질 자본일까 걱정된다. 그렇게 종속적으로 산업화 해 나가다가는 잘 되어 봐야 초국적 자본들의 노동 착취 시장밖에 더 되겠는가?

지금 수빅 조선 노동자-모두가 하청 회사 소속이고 계약직의 비정규직 노동자이다-의 임금은 한국 조선소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하면 새발의 피 정도밖에 안 된다. 그 싼 임금을 이용하기 위해 한진 중공업은 부산 영도의 80년에 가까운 유서 깊은 생산기지를 버리고 저 멀리 필리핀 수빅 조선소를 생산기지로 삼고 있다. 또 민다나오에도 큰 조선소를 짓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여 비정규직으로 채움과 함께 노동조합을 불허하여 노동자들을 무권리 상태에 꽁꽁 묶어 놓아야 할 것이다. 마치 1970~80년대의 한국의 독점재벌들이 군사독재 정권과 힘을 합해 그렇게 했듯이.

한진은 똑같은 작업을 하면서도 6개월마다 노동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하청회사와 계약을 맺도록 한다고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반년에 한 번씩 소속 회사가 바뀌고 명찰이 바뀐다는 것이다. 필리핀 노동법에는 6개월 이상 고용이 계속되면 정규직으로 간주된다고 하며, 정규직이 되면 노동조합에 가입해도 계약기간이 끝났다고 하면서 해고해 버릴 수 없으므로, 노동조합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치졸한 수법을 쓴다는 것이다. 그 결과 수빅 조선소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고 파업이라는 노동자의 유력한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리핀 노동청 또한 한국의 노동부와 같이 기업의 편을 들어서 한진 중공업 노조에 대해 아직 합법성을 인정해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 노동자들도 이런 자신들의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굴종할 리는 없었다. 7월 3일 차량행진이 끝날 때 노동자들은 횃불시위를 했다. 이런 캠페인은 계속되고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캠페인만으로 거대 초국적 자본에 맞서기 어렵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KMU 엘머 위원장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이런 노동자 의식에 기초하여 강고한 조직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초국적 자본과 맞서 전투적으로 투쟁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런 의식적, 조직적 기초를 가지고 한국의 노동자들과 필리핀의 노동자들이 국적을 넘고 국경을 넘어 같은 노동자로서 연대하고 단결하여 함께 싸워나갈 때 비로소 한국과 필리핀에서 모두 노동현장을 착취와 억압이 없는 일터로 만들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멀다면 먼 나라 필리핀과 미 해군기지로 유명하던 수빅이 한진 조선이 그곳에 생산기지를 세움으로써 가까운 나라가 되고 노동운동으로 유명한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7월 5일에는 한국의 영도조선소에서 찾아간 해고노동자가 출근하는 수빅 노동자들을 향하여 피켓 시위를 했다. 수빅 조선소는 한·필리핀 노동자의 국제연대 활동으로 유명해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노동자는 기업의 벽, 산업과 직종의 벽을 넘어 서로 간에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이 글로벌화하고 있는 시대에는 국제적으로도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한진 수빅 조선소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그 지점을 보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이번에 참가한 '민중투쟁 국제연맹(ILPS: International League of Peoples' Struggle)' 제4차 국제대회의 주 슬로건도 "Long Live International" 이었다.


글 - 김승호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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