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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숙청과 친일파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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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327회 작성일 11-01-1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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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과거청산의 역사와 한국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숙청과 친일파 청산

                         


       

주 섭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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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21세기는 20세기에 못다 한 과거사정리 문제로 이념적 갈등이 표출되어 60년 전 8.15 해방 시기로 돌아가는 것 같은 모습이다. 한반도의 20세기는 전반기에 일제 36년,  후반기에 남-북간 이념적 분단 60년을 살았다. 분단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일제식민지 시대라는 ‘치욕의 현대사’는 해방시기에 청산되어야 했으나 친일파숙청의 실패로 여전히 ‘민족의 수치’로 남아 있다. 해방이후 분단과 6.25전쟁 그리고 남한의 군사독재 30년과 북한의 공산주의시대 60년은 친일파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치른 값비싼 고통의 역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한에서 1987년6월 시민항쟁결과 민주주의 애행(移行)이 본격화되면서 친일파청산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북한이 친일파청산을 했다고 말하지만 해방 후 친일파가 거의 모두 남하했기 때문에 친일파문제는 주로 남한에 집중된 시대적 과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청산(戰後淸算)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나치독일의 점령 하에 있었던 프랑스, 벨기에, 노르웨이, 네덜란드 및 덴마크 등은 나치협력자들을 철저히 숙청함으로써 ‘현대 민주주의’ 건설에 성공했다. 가해국인 독일조차도 1946년 뉘른베르그 국제전범재판에서 보았듯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군사점령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20세기의 악마’ 나치지도부를 숙청했다. 그 후 서독은 자발적으로 나치전범을 철저히 사법처리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민주주의 구축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필자가 ‘현대 민주주의’를 과거청산의 목표로 해석한 것은 이것이 냉전시대에 소련을 종주국으로 한 공산진영보다 서방진영을 체제적으로 우위에 놓은 관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이 정치적으로 공산당과 사회당을 포함한 좌파와 자유주의적 보수정당을 양대 산맥으로 하는 좌우파가 정책경쟁을 통해 집권하는 정치제도가 바로 ‘현대 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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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민주주의’ 건설을 겨냥한 나치협력자 숙청은 프랑스의 드골장군이 시작하고 집행한 대역사(大役事)로, 이는 국제사회에 탁월한 과거사정리 방식을 제공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숙청은 서구의 과거사청산 모델이 되었으며 특히 서독이 나치청산을 통해 히틀러의 암흑시대를 청산-극복함으로써 새로운 민주주의체제에 합류한 법적 정치적 근거를 제시했다. 만일 서독이 나치독일이라는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고 전체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했다면 유럽의 민주질서는 혼란에 빠져들고 평화는 불가능한 추상적 개념이 되었을 것이다. 실로 1989년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동서독일이 통일한 것은 서독의 과거사청산과 민주주의체제에 합류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다. 드골은 유럽의 우파 지도자임에도 좌-우파를 모두 아우르는 거국내각을 구성해 1944년8월 프랑스임시정부를 출범시켜 대단히 가혹하게-그러나 유럽에서는 느슨했다는 평가가 많다-나치협력자숙청을 단행했다. 이것은 뒤늦은 과거사청산으로 논의가 분분한 우리에게도 타산지석이 되는 것이다.

드골은 왜 나치협력자청산을 2차 세계대전 후 최우선과제로 삼아 집행했을까. 그리고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파와 단결해 나치협력자를 숙청했을까. 드골은 이승만처럼 극우파인 비시정권의 나치협력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았을까. 드골은 먼저 나치전체주의에 ‘민족의 혼과 정신’을 팔아먹은 프랑스인을 용서할 수 없는 국가반역자로 규정했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이념을 달리한다고 해도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역적’은 아니며 단지 국가의 관리와 경영을 달리하는 이념의 소유자로, 정책경쟁 파트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치점령기간에 좌-우파를 연합전선으로 묶은 반(反) 나치저항운동(레지스탕스)을 드골자신이 총수가 되어 총지휘해 나치독일과 싸웠던 것이다. 드골은 매국역적(賣國逆賊)과 좌파를 이념적 동반자를 명백히 구분함으로써 나치협력자청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가 프랑스임시정부에 좌-우파를 망라한 거국내각을 구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공산당을 합법적 정치공간에 합류하는 데는 혁명노선을 포기하고 의회민주제를 준수한다는 드골의 조건을 공산당이 수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드골은 이렇게 과거사청산을 위한 정치기반을 닦고 나치협력자숙청의 메스를 가했던 것이다.

드골은 1944년8월25일 레지스탕스의 9일간 전투 끝에 폰 콜티츠 독일군사령관의 항복을 받아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개선장군으로서 입성했다. 그는 개선문 앞 샹제리제 대로를 100만 시민과 함께 행진했다. 드골의 금의환향과 샹제리제 행진은 나치협력자숙청을 단행해 ‘새 프랑스’를 건설한다는 신호탄이었다. 드골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으로 제헌의회를 구성할 수 없어 임시정부대통령의 훈령으로 전쟁을 수행하면서 나치협력자를 정리하겠다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보냈다. 1944년6월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영과 프랑스 캐나다 연합군은 프랑스에서 나치독일군과 전쟁을 펼치고 있었다. 프랑스가 해방된 지역에 드골은 임시정부 정치위원을 급파해 법질서를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도처에서 인민재판이 벌어져 나치협력자에 대한 ‘야만적 학살’이 일어났다. 또 프랑스군도 해방된 지역에서 나치협력자를 체포해 군사재판을 통해 즉결처분을 하는 등 유혈사태가 빈번했다.

드골은 나치협력자에 대한 공정한 재판을 위해 대통령 훈령을 발표했다. 파리에 최고재판소를 설치해 나치괴뢰정권 비시정부의 지도부와 고위관료들을 재판하며 각 현에는 숙청재판소들을 세워 각계각층의 나치협력자를 응징하고 또 시민법정을 각 현에 개설해 일반시민의 나치협력행위를 재판한다는 것이 훈령의 골자였다. 특히 드골은 나치협력자에 대한 재판에서 전쟁 전 프랑스 제3공화국 형법을 원용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숙청재판부는 형법 75조 국가반역죄와 79조 이적죄를 적용했으며 이 때문에 나치협력자들은 거의 모두 사형 무기 아니면 강제노동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75조는 사형과 무기가 일반적으로 선고되는 매국역적을 응징하는 벌칙이었고 79조는 종신 강제노동형과 무기징역이 주로 선고되는 간첩-스파이-에게 적용되는 형법이다. 프랑스의 다수 나치협력자들이 중형선고를 받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특히 드골은 파리가 해방된 다음 날인 1944년8월26일 부역죄에 관한 훈령을 발표해 나치협력자에 대한 응징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2003년에 파리에서 발행된 ‘드골의 나치협력자숙청’에 관한 연구서 “한줌밖에 안 되는 비천한 것들”은 ‘부역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해답을 내놓았다. ‘국외추방과 국적박탈을 주로 할 수 있는 정치적 형벌’이며 ‘근본적으로 공화주의의 형벌’이라는 답을 냈다. 흔히들 부역죄라고 번역하지만 원문인 'indignite nationale'은 ‘국민자격을 박탈한다’는 뜻이다. 먼저 부역죄는 최고재판소와 숙청재판소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나치협력자에게 전원 병과(竝科)되었다. 드골이 알제리 망명정부시절 재판해 숙청한 나치협력자들에게 까지 소급해 적용했다. 부역죄 훈령은 형법 75조와 79조에 해당되지 않는 나치협력자를 처벌하기 위해 드골이 연구해 내놓은 벌칙으로 해석된다. “비시정권의 명령과 지시에 순종한 일반국민들, 중형으로 다스리기 힘든 비시정권 지지세력, 나치독일 점령기간 합법성을 가장한 비시정권의 법을 솔선해 준수한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이기 때문이다. 부역죄 법 제1조는 ‘프랑스국민의 단결, 자유, 평등 원칙을 위반한 공화주의 침해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이중형벌이라는 반대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시민법정은 일반국민도 나치협력자로 형사소추를 가했다. 아마도 드골은 부역죄 법으로 나치협력자를 프랑스공동체에서 추방하는 인적청산을 통해 민주질서를 흐리는 반역적 사고와 기회주의적 행태에 철퇴를 가한 셈이다.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의지는 확고부동했다. 그는 숙청동기에 관해 이렇게 밝혔다. “나치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 주로 정치활동과 때로는 군사행동 그리고 행정조치 및 언론의 선전활동 등의 변화무쌍한 형태로 프랑스민족의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나치독일의 박해마저도 미화(美化)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치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농양(膿瘍)>과 종기(腫氣)를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협력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의 썩어가는 종기와 농양이 종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결국 망하게 만들 것임으로 철저히 응징해 제거시켜야 한다는 것이 드골의 확신이었다. 과거사 청산에서 전무후무한 부역죄 법이란 특별법은 나치협력 프랑스국민에게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고 국가에 반역이나 배반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유죄를 선고받은 나치협력자에게는 ‘국적박탈’형이 부과된다고 규정해 ‘나치독일점령에서 해방된 프랑스에 가득 찬 불순물을 제거함으로써 새 출발한다’는 드골의 숙청목적을 잘 설명한 입법이라 하겠다.

드골은 알제 망명시절인 1943년8월10일 처음으로 나치협력자 숙청방침을 천명했다. 그는 비시정권 참여자와 지지세력 그리고 나치독일에 협력한 자에게 준엄한 심판을 가할 것이라고 밝히고 “국가가 애국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을 배반한 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나치협력자는 1) 자유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2) 프랑스국민을 악의 길로 잘못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관료들과 추종자들, 3) 나치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 사람이라고 드골은 규정했다.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천명으로 프랑스 본토와 아프리카 등 식민지지역 레지스탕스들은 자체적으로 ‘나치협력자 숙청위원회를 설치해 민족배반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드골임시정부가 파리해방 직후 실제로 나치협력자를 체포해 재판하기 시작했을 때 ’블랙리스트‘가 잘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많은 체포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드골의 나치협력자숙청은 순풍을 탄 것은 아니었다. 내부에서는 프랑스를 먼저 해방시켜놓고 숙청작업을 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미국의 루스벨트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숙청을 반대했다. 그러나 드골은 알제에서 비시정권 초대내무장관 퓌슈를 최초로 나치협력자 숙청재판에 회부했다. 망명지에서 집행한 퓌슈의 숙청재판은 프랑스본토가 나치독일 점령에서 해방된 다음에 퓌슈를 심판해야 된다는 반대주장이 빗발쳤다. 그럼에도 재판에서 퓌슈가 사형을 선고받은 것은 드골의 강력한 숙청의지 때문이었다.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집행을 유예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드골은 사형을 바로 집행하라고 명령했다. 1944년3월22일 퓌슈는 알제에서 총살당했다. 드골의 측근으로 후에 외무장관을 지낸 모리스 슈만은 ‘자유프랑스 방송’에서 퓌슈의 사형집행을 보도하며 “퓌슈는 1941년8월 비시정권 내무장관에 발탁되면서 레지스탕스에게 <우리는 무자비하다>라고 선언해 나치독일의 승리를 기원한 것이다. 퓌슈는 나치독일과 같이 패배했다”라고 논평했다.

이렇게 막을 올린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약 6년간 성공적으로 펼쳐졌다. 여기서 숙청의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필자의 저서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드골의 과거사정리방식과 친일파청산” (2004년 사회와 연대 출판)을 참조하기 바람) 알제에서 막 올린 드골의 나치협력자숙청은 1944년8월 파리가 해방되면서 본격화했다. 프랑스가 나치독일의 점령에서 해방되면서 숙청재판에 처음부터 회부되어 심판된 나치협력자들은 주로 지식인과 언론인들이었다. 프랑스의 천재교육 파리고등사범출신 작가이며 언론인 브라지야크의 재판은 그래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브라지야크는 파시즘 확신범(確信犯)으로 독일의 승리와 레지스탕스를 테러분자로 규정해 제거하기 위한 글을 많이 쓴 악명 높은 나치선전원이고 독일에 찾아가 히틀러 찬양세미나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당연하다는 국민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그의 천재가 아깝다’는 저항지식인들의 구명운동이 벌어져 드골의 감형이 기대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며 저항언론을 주도한 카뮈와 관용을 주장한 모리악이 서명한 감형탄원서를 드골이 고려하지 않고 사형집행에 결재한 것은 오늘에도 유명한 에피소드로 인구에 회자된다. 브라지야크는 사형선고 다음날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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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협력자 심판의 중대고비는 비시정권 국가원수 페탱의 재판이었다. 페탱은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패배를 안기고 프랑스에 승리를 선사한 전쟁영웅으로 프랑스와 유럽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패전을 앞두고 안보담당 부총리로 국방차관 드골과 견해를 달리 했다. 드골은 ‘끝까지 싸우자’는 항전(抗戰)파의 두목이었고 페탱은 ‘타협하자’는 투항(投降)파 총수였다. 페탱은 히틀러와 휴전협정을 체결해 프랑스북부를 나치독일의 점령을 수용하고 자신은 중부도시 비시에 페탱원수의 ‘국민정부’를 수립해 프랑스 남부를 통치했다. 드골은 영국 런던에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수립하고 나치독일에 선전포고를 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페탱과 드골의 선택은 두 사람의 운명을 패자와 승자로 갈랐다. 페탱은 나치독일로 도주했다가(페탱은 히틀러에 납치당했다고 변명했다) 귀국하자말자 나치협력 괴수로 체포되었고 드골은 대통령으로써 그를 심판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페탱은 나치독일 점령시절 ‘4년을 드골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웠다면 자신은 프랑스 안에서 싸우고 준비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비시정권을 ‘불법이며 무효이고 나치독일에 협력한 범죄 집단’으로 규정하고 페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페탱의 선고는 집행되지 않았다. 배심판사들이 다수표로 사형집행의 유예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군의 대선배이며 1차 세계대전 영웅인 페탱에 대해 즉각 무기징역으로 감형함으로써 예우를 했다. 이는 살벌한 나치협력자 재판에서 ‘미담(美談)’으로 남았다. 페탱의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변명에 대해 검사의 논고가 흥미롭다. 모르네 검사는 “프랑스에서 15만 여명의 프랑스인 인질과 레지스탕스가 나치독일군에 의해 총살되었고, 75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나치군수공장에 강제 동원되었으며 11만 여명의 프랑스인들이 저항운동 등 정치적 이유로 나치집단수용소에 유배되었고 12만 여명은 인종차별정책으로 나치수용소에 이송되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살아 돌아온 프랑스 사람은 전혀 없다”라고 준엄하게 비시정권을 규탄했다. 프랑스의 해방은 레지스탕스의 희생으로 가능했다는 설명이었다.

리용숙청재판소는 당대 프랑스최고의 민족주의이론의 석학 모라스에게 무기징역형을 선고했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며 명작 ‘좁은 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극적으로 재판을 모면했다. 유명 언론인 쉬아레즈, 르바테, 폴 샤크 등은 사형선고 후 바로 집행되었고 공쿠르상 수상작가 베로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드골이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또 비시정권의 유명한 파시스트 총리 라발은 스페인에 도주했다가 프랑코가 오스트리아로 추방하는 통에 체포돼 프랑스에 압송되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다음날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드골은 먼저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비시정권의 최고지도부를 심판해 가혹할 정도로 엄벌을 내렸다. 그리고 비시정권 공직자들, 지방공무원들, 사법부와 군부, 그리고 교육계와 경제계, 출판인과 연극인 및 영화계, 미술계, 가요계와 석학집단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나치협력자를 차례로 숙청했다. 레지스탕스에 참가한 철학자 사르트르조차도 ‘카프카의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기술할 정도로 숙청은 전국적으로 집행되었던 것이다.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실로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오늘까지도 사망자 수치가 1만에서 10만으로 엇갈리는 것을 보면 나치협력자 숙청작업은 드골이 숙청재판소를 설치해 질서를 잡았음에도 혼란과 신비(神秘)로 뒤엉켜 있음을 보게 된다. 프랑스의 연감 ‘퀴드’ 2003년 판은 나치협력자 청산결과를 이렇게 집계했다. 나치협력자 조사대상 150만-200만 명. 체포되어 조사받은 자 99만 명, 최고재판소와 숙청재판소는 5만7천1백여 건 재판, 6천766명에 사형선고, 782명을 사형집행, 2천802명에게 종신강제 노동형, 1만434명에게 유기강제 노동형, 2만6천529명에게 유기징역형, 3천678명에게 공민권 박탈형을 선고. 시민재판소는 11만5천 건을 재판해 9만5천여 명에게 부역죄 형을 선고. 또한 공직자 12만여 명은 시민재판소에서 행정처분을 받았다. 이들은 군대 장교 4만2천여 명, 정부관료 2만8천750명, 전기가스공사 5천여 명, 경찰간부 170명, 판검사 334명, 헌법위원 18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치협력자 숙청결과는 오늘에도 사망자가 1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연감의 집계에는 레지스탕스의 인민재판과 군사재판 그리고 보복응징에 의한 사망 등 이른바 ‘야만적 재판’에 관한 수치는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 프랑스극우파 민족전선세력은 10만 사망설을 여전히 주장하지만 믿을 수 없다. 드골이 회고록에서 밝힌 1만842명 사망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치일 것이다. ‘한국판 나치협력자’로 규정할 수 있는 친일파를 청산하는데 실패한 한국 사람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처벌로 생각되는 드골의 숙청은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의 숙청에 견주어 보면 너무나 온건한 청산이라는 평가이다. 유럽의 과거사 정리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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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은 드골시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는 일종의 ‘망각(忘却)과의 국민적 투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프랑스는 1960년대에 자국형법에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법을 병합해 국가반역죄와 반인권범죄 그리고 인종차별범죄에 관해 시효가 없이 체포해 재판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그래서 미테랑 대통령의 좌파정부는 1983년 레지스탕스 영웅 쟝 물렝을 고문 살해한 리용지역 나치게슈타포 바르비를 남미 보리비아에서 체포해 재판했다. 바르비에게 사형이 폐지된 후 최고형인  종신징역형이 선고되었다. 1992년에는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 때 도주해 2차례나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폴 투비에가 체포되어 반인도적 범죄 공범죄로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다. 바르비와 투비에는 모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 “죄진 자는 결코 자기 침대에서 눈을 감지 못한다”는 프랑스 격언의 진실을 증언했다. 특히 21세기에는 전 프랑스 경찰청장이었고 예산장관을 역임한 모리스 파퐁이 나치협력자임이 밝혀져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90세의 고령임에도 10년 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으나 유럽의회의 재판절차상 이의제기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 대법원은 파퐁에 대한 유죄판결을 최종 확인했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은 드골이 철저하고도 준엄하게 집행했음에도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드골의 나치협력자청산은 2차 세계대전 후 페탱의 비시정권에 복종한 국가반역적이며 매국적인 극우적 정치세력을 프랑스공동체에서 추방하고 좌-우파를 망라한 레지스탕스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도덕적이며 정의롭고 청렴하고 민주적인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함으로써 유럽의 평화와 선진민주주의를 구축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이다. 드골이라는 우파지도자가 정의로운 과거사청산을 단행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지금 친일파청산에 대한 한국사회의 이념적 갈등은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이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어 정치적 주류로 재등장시킴으로써 일어나게 된 필연적 귀결이다. 한국보수파는 드골이 왜 나치협력자 청산을 했는지를 반면교사로 삼아 과거사라는 족쇄(足鎖)를 벗어 벌이고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통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노무현정부는 매국역적을 청산하는 친일파 청산과 군사독재를 혼돈해 한 묶음으로 처리하려고 함으로써 갈등을 자초하고 있다. 드골처럼 친일파 청산을 우선적으로 단행함으로써 갈등을 진정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친일파 청산에는 70% 이상의 국민적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혼란의 늪에 빠질 위험이 많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왜 과거사를 들추어내느냐는 보수파의 불평에 관한 답변이다. 프랑스와 유럽에서도 “이제 그만 하자”는 여론과 질문이 제기된다. 나치협력자 청산전문가 앙리루소의 답변으로 글을 마감한다. 이 답변은 한국에서 오늘 친일파청산이 왜 필연적이냐에 대한 해답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극우파의 향수병(鄕愁病)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전쟁을 끊임없이 쟁점화하려고 한다. 21세기에 1945년 나치협력자 숙청을 상기시키는 연설을 통해 극우파는 비시정권의 반동적(反動的) 가치관을 옹호한다. 다시 말해 민족주의, 인종차별주의, 외국인 혐오주의를 확산시키려 한다. ‘망각하자’는 호소는 극우파가 재등장시키고자 하는 비시정권에 대한 존경의 결과물이다. 반동적 극우세력은 나치협력자숙청의 원칙과 절차까지도 이념과 당파적 관점에서 격렬히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인

․ ‘사회와 연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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