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의 밤 지배자 ‘그림자 정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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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요사이 최대 화두는 ‘지배’이다. 누가 아프가니스탄(아프간)을 지배하는가. 물론 수도 카불에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통치하는 아프간 중앙정부가 있다. 그러나 최근 탈레반 기세가 날이 갈수록 확장되면서 마치 탈레반 정부가 다시 돌아온 것마냥 그들이 지배하는 지역이 늘어나고 있다.
탈레반 정부의 또 다른 이름은 ‘그림자 정부’이다. 돌아온 탈레반 최고 통치자 모하메드 오마르가 이 그림자 정부의 주지사를 임명한다. 이 때문에 지금 아프간의 낮과 밤을 지배하는 세력은 서로 다르다. 낮에는 아프간 중앙정부가 임명한 주지사가 각 지방을 통치하지만, 밤이 되면 오마르가 임명한 탈레반 주지사가 등장한다. 이처럼 탈레반은 정권 재탈환에 대비해 그림자 정부를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탈레반의 그림자 정부는 주지사 이외에도 경찰 총수와 지구 행정관 그리고 법관까지 임명한다. 이로 인해 아프간에서는 직책 하나에 두 사람이 임명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보원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34개 주 중 33곳에서 탈레반이 그림자 정부를 운영하고 있다. 겉으로는 미국과 카르자이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카불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저항 세력을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Reuter=Newsis
카불에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위)이 통치하는 중앙정부가 있지만, 최고 지도자 오마르가 이끄는 ‘그림자 정부’도 그 세력이 만만치 않다.
탈레반은 자체 사법권으로 아프간 주민들을 통제한다. 범죄자들을 체포해 자신들이 운영하는 법원에서 유죄·무죄를 가리고, 곳곳에 교도소까지 운영하고 있다. 범죄자들이나 소송 당사자가 법원에 가지 못할 경우 친절하게 주민들을 직접 찾아가는 이동 법원까지 운영 중이다. 탈레반 법원에서 유죄가 인정되면 그 자리에서 가혹한 체형이 가해지기도 한다. 형량이 가벼운 경우에는 지역 내 탈레반이 운영하는 교도소에서 구금 생활을 한다.
주민들은 탈레반이 운영하는 사법 체계를 더 환영한다. 그 이유는 첫째, 탈레반의 사법 처리가 신속·정확하기 때문이다. 칸다하르의 부족 지도자 중 한 명인 요세프 의원은 “주민들은 율법이 신속해서 좋다고 한다. 만약 주민들이 어떤 문제를 중앙정부가 세운 법원에 의뢰한다면 최소한 1~2년이 걸리거나, 영원히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민들, 신속·깨끗한 ‘탈레반 법원’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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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정부’를 이끄는 최고 지도자 오마르..
둘째, 부패한 중앙정부 관리들이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돈을 받고 재판하는 일이 없으므로 주민들이 탈레반 법원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라고 요세프 의원은 말했다. 즉 재판에도 돈을 요구하는 부패한 중앙 관리보다는 차라리 율법에 기초한 탈레반 법원이 주민들에게 환영받는 것이다.
아프간 남부 헬만드 주에서만 2006년부터 탈레반이 최소 5개 지역 교도소를 운영한다. 그중 가장 큰 무사칼라 교도소의 경우, 지난여름 미군이 급습하기 전까지 3년 이상 탈레반이 운영했다. 이 교도소에서 불과 1.6km가량 떨어진 곳에 영국군 기지가 있었다. 미군과 연합군은 탈레반이 운영하는 교도소를 대대적으로 수색하지만 그 성과는 미미하다.
탈레반은 사법 분야 외에도 민생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요즘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의 모든 휴대전화는 낮 동안에만 사용할 수 있다. 탈레반이 지역 통신사들에게 밤시간에는 중계기 작동을 멈추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 뒤 아프간 남부 대부분 지역에서 야간에 휴대전화 불통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탈레반이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휴대전화 사용을 통제함으로써 이 지역의 ‘지배자’가 정부나 미군이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것을 주민에게 각인시키고, 이로써 주민들의 탈레반 의존도를 더욱 높이기 위함이다. 또 다른 이유는 최근 연합군이 탈레반 내부에 심어놓은 내부 첩자가 휴대전화를 이용해 자신들의 은신처나 모임, 활동 내용 등을 미군에 누설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밤에 주로 운영되는 그림자 정부가 자신들의 행적이 미군들에게 일일이 노출되는 것을 염려해 통신사로 하여금 야간에는 휴대전화 중계기를 꺼놓도록 지시한 것이다.
아프간에서는 ‘로샨’ 등 여러 통신회사가 휴대전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후 외국에서 막대한 자본이 들어와 휴대전화 서비스를 아프간 전역에 제공했다. 아프간처럼 낙후된 나라에서는 유선전화보다 휴대전화가 훨씬 효율적으로 이용된다. 그래서 가입자들은 나날이 늘어났고, 이제 휴대전화는 아프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다. 통신사들은 처음에 탈레반의 지시를 무시하고 야간에도 휴대전화 서비스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를 안 탈레반이 즉각 보복에 나섰다. 값비싼 중계기를 박격포로 파괴하고 휴대전화 회사 운영요원을 공격했다. 그렇게 몇 달간 탈레반과 휴대전화 회사들 간에 전쟁이 벌어졌고 승리는 탈레반에 돌아갔다.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에 결국 아프간 이동통신사들은 두 손을 들었다. 그 결과 탈레반이 지시한 대로 오후 5시에서 다음 날 오전 6시30분까지 안테나 작동을 중단시켰다. 이 시간에는 응급환자라도 휴대전화를 쓸 수 없다.
아프간 통신사끼리도 탈레반 장악 지역에서는 저녁 시간대에 중계기를 작동하지 않기로 협약을 맺었다. 아프간 최대 이동통신사로 가입자 35만명을 확보하고 있는 로샨은 보유 중계탑 800개 가운데 60개를 밤마다 꺼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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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이 야간 휴대전화 사용을 통제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낮에만 통화가 가능하다.
왜 탈레반은 밤에만 휴대전화를 허용하지 않는 걸까. 탈레반에게도 휴대전화는 필수이다. 휴대전화는 전후 게릴라전으로 돌아선 그들에게도 가장 효율적인 통신수단이다.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설치한 즉석폭발물(IED) 원격 폭발에도 휴대전화를 리모컨 대용으로 이용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통신사 측과 탈레반이 낮에는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밤에는 서비스를 중단하는 절충안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절충안 덕에 통신사는 더 이상 탈레반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되었지만 손해는 막대하다.
탈레반은 조세권에도 영향을 행사한다. 그들은 주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세금을 내지 않으면 농작물을 불태우거나 압수하기도 한다. 최근 아프간에서는 탈레반이 주민을 상대로 전기세를 부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것도 탈레반이 아닌 미국이 건설한 발전소에서다. 다시 말해 미국인이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어 만든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에 대해 탈레반이 전기세를 부과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진 셈이다. 지난 7월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억 달러 이상을 들여 아프간 남부 대부분의 전력을 감당하는 헬만드 주 카자키의 수력발전소 성능 개량 사업을 진행했는데, 그로 인한 가장 큰 수혜자가 탈레반이라고 한다.
아프간의 전기 사정은 아주 열악하다. 미군이 재건 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마을을 방문하면 주민들은 한결같이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고통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아프간 민생 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10월 카자키 발전소 발전 용량을 두 배 이상 키웠다. 전략적 요지인 헬만드 주의 민심을 탈레반 그림자 정부로부터 미국이 지원하는 현 아프간 정부로 돌려놓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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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키 수력발전소(위)는 미군이 건설했지만, 전기세는 그림자 정부가 거둬들인다.
나토군, 탈레반 지도부 극진히 대접
하지만 미국의 기대와 달리 헬만드 주 탈레반 그림자 정부는 오히려 자신들이 전력을 베푼다며 주민들로부터 전기세를 거둬들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탈레반이 전기요금 정액제를 적용해, 매월 가구당 1000파키스탄 루피(1만2000원 정도)를 받는다고 전했다. 헬만드 주 정부는 이렇게 해서 탈레반으로 새나가는 전기세가 연간 4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이 돈은 탈레반 그림자 정부의 재정으로 쓰이기도 하고 미국 연합군을 공격하는 데 고스란히 사용되기도 한다. 카리 유세프 탈레반 대변인은 “여기서는 꼭두각시 카불 정부가 아닌 탈레반이 정부다”라며 탈레반이 송전 시스템을 관리하고 전기료를 거둘 권리가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결국 미국의 재건 사업이 탈레반 그림자 정부를 돕는 데 사용된 셈이다. 헬만드 주에서 전력 상황이 좋아질수록 득을 보는 쪽은 탈레반이다. 하지 굴 모하마드 칸 헬만드 주 부족문제 담당 고문은 “전기가 더 많이 들어올수록 탈레반은 더 많은 돈을 번다”라고 말했다.
탈레반이 전기세를 거둘 수 있게 주민들이 협조를 하는 데는 의문이 따른다. 미군은 전기를 제공하는 대가로 주민들에게 돈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아흐룰라 오바이디 헬만드 주 전기수자원국장은 “송전선이 탈레반 통제 지역을 지나기 때문에 그들이 전력을 통제하기가 매우 쉽다”라고 말했다. 탈레반의 전기세 징수를 막기 위해 송전선을 아예 차단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카자키 발전소 사례는 미국의 아주 정교한 재건 개발계획도 아프간에서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크 세드윌 나토 아프간 담당 민간대표는 “아프간 정부가 영토 구석구석을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라며 탈레반 그림자 정부가 득세하는 배경을 설명했다.
10월20일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은 카불 외곽에서 탈레반 지도층 그룹 ‘퀘타 슈라(Quetta shura)’와 ‘하카니(Haqqa ni)’ 리더들과 만나 비밀리에 종전 회담을 가졌다. 그동안 그림자 정부로 암약하던 탈레반이 드디어 공식 석상에 등장한 것이다. 탈레반 리더들은 나토 군용기를 이용해 카불로 향했으며, 지상에서도 나토군 호위 차량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이동했다. 탈레반 지도층의 카불 정부 방문에 앞서 나토는 “절대 이들을 향해 체포 등 공격 행위를 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했다. 이 회담을 위해 그동안 적으로서 서로 공격을 주고받아온 나토군이 탈레반 지도자들을 호위하는 일종의 신사협정이 맺어진 셈인데, 이로 인해 아프간 전쟁이 급기야 막바지에 달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불거져나왔다.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그림자 정부의 만남은 이제 시작이다. 그럼에도 이번 만남은 탈레반 그림자 정부가 연합군도, 아프간 정부도 무시할 수 없는 아프간의 지배자로 등장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출처: 시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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