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도 국회도 없었던 나라, 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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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작성일 11-03-04 18:51 조회 1,743 댓글 0본문
카다피의 허울 좋은 ‘자마히리야’(대중 민주주의)가 끝나가는 리비아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렵다. 카다피가 퇴진한다고 해도 내부 권력투쟁이 계속되거나 새 국가가 들어설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튀니지와 이집트를 휩쓴 민주화 물결이 리비아에 상륙한 것은 2월15일. 리비아 동부 벵가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가 급물살을 타고 수도 트리폴리까지 번졌다. 튀니지와 이집트 두 나라와는 달리 군과 용병이 유혈 진압에 나서면서 민주화 시위가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급박하게 치닫고 있다. 더불어 약자의 대변인이자 정의의 화신처럼 행동하던 카다피의 위신이 국내외에서 끝 모르게 추락하고 있다.
장기 독재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군부와 고위 공직자 등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동안 잠잠하던 몇몇 주요 부족마저 카다피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리비아 최대 알와팔라 부족은 카다피에게 “당신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니니 빨리 리비아를 떠나라”고 촉구했고, 동부의 알주와이야 부족은 “정부가 폭력을 멈추지 않으면 24시간 이내에 원유 수출을 차단하겠다”라고 선전포고했다. 그뿐 아니라 해외 주재 고위 외교관들까지 속속 그에게 등을 돌렸고, 유혈 진압에 대한 세계 각국의 비난 또한 쇄도했다. 하고 싶은 말과 일을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카다피도 이에 질세라 “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려 ‘해볼 테면 해봐라’ 식의 극단적인 행동을 불사했다.
‘미친 개’와 ‘혁명의 전사’라는 극단적 평가를 받는 카다피는 1942년 가난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나 스물일곱 살에 국가 원수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조국 리비아는 마그립 문화권과 이집트 문명권 사이에 놓여 있는 나라로 역사상 페니키아·로마·오스만튀르크·이탈리아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외침에 시달려왔다. 644~645년 제2차 마그립 원정에 나선 아랍 무슬림 군대에 정복되어 이슬람화한 이래, 155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같은 이슬람 문화권인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탈리아와 영국 지배를 거쳐 1951년 12월24일 연방왕국으로 독립했다.
왕정제에 대한 반감을 품었던 카다피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위 시절인 1969년 9월1일 이드리스 왕정을 ‘반동적이고 후진적이며 부패로 타락한 정권’이라 선포하고 쿠데타로 전복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리비아 아랍공화국으로 바꾸었다. 4년 뒤에는 사회주의와 이슬람교를 혼합한 ‘제3세계 이론’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인민주권선언’을 발표했다. 1977년 3월에는 리비아를 ‘사회주의 대중(大衆) 주권 민주주의’ 나라로 건설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국명도 1986년부터 ‘위대한 리비아 사회주의 아랍 인민공화국(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yah)’으로 개명했다.
카다피는 자신의 사상을 결집한 <그린북(The Green Book)>을 통해 대중 민주주의를 표방해왔다. 엄밀히 말하면, 그린북 사상은 이론적으로는 완전할지 모르나 실제 삶에 적용하기에는 비현실적이다. 그래도 자본주의와 소련식 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약자 특히 제3세계 편을 드는 데 주저하지 않으며, 세계를 대상으로 정의에 찬 주장을 펼친 그에게서 억압과 착취에 눌린 사람들이 희망의 빛을 발견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의를 그토록 주장하면서 공평한 세상, 완전한 민주주의에 대해 목청을 높이던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그다지 엄격하지 못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권력을 차남에게 세습하려 했다. 평생을 사막에서 기거하며 명상을 해왔다는 그가 일흔 나이에 한편으로는 대중을 위한 정치를 부르짖어놓고는, 다른 한편으로는 왜 죽도록 권력에 집착하는지 의아하다. “아무 직책도 없는데 어떻게 물러나야 하냐”라는 말은 이론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공식적으로 아무 직책도 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다피가 리비아를 움직이고 있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니, 그의 강변은 궤변에 불과하다.
헌법도 국회도 없이 42년간 지속되어온 카다피의 철권통치에 서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숨을 죽이며 살아왔다. 30%가 넘는 높은 실업률은 리비아 국민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이웃 나라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예견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부 지역에 반서방 이슬람 국가 들어설 수도
전투기·헬리콥터·탱크·대포를 동원해 시위대를 무참히 사살한 것은 민중의 대변인인 양 자처해온 카다피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또 차드 등지에서 용병을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한 것은 분명히 자살골을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카다피가 진정한 서민의 편이었다면 튀니지와 이집트의 민주화를 독려하고, 이제는 자신의 임무도 끝났다고 인정하며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왔어야 했다. 추한 꼴로 계속 버티기 작전을 하는 것은 그가 그간 부르짖어온 구호 ‘자마히리야’, 즉 ‘대중에 의한 민주주의’ 정치철학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다.
리비아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렵다. 일단 카다피가 물러난다고 해도 대체할 만한 인물이나 세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혁명 당시 리비아가 근대국가로 진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부족주의를 없애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카다피는 결국 부족에 의존한 정치를 펴왔고, 현재 민주화 시위가 내전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도 역시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소외받은 부족들이 들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카다피 퇴진 후 통일국가가 유지된다는 전제하에서 본다면 경쟁 관계에 놓인 부족 공동체들은 활발하게 합종연횡할 것이고, 종교 단체들의 정치적 입지 굳히기, 친서방과 반서방 세력의 갈등, 군부의 이익이 결부되어 권력 다툼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다면, 가장 예측 가능한 정국은 동부 지역에 이슬람을 기치로 내건 반서방 국가가 들어서는 것이다. 카다피를 제거하려고 했던 알카에다 리비아 지역 단체인 이슬람전사단의 활동무대가 바로 이 지역이다. 프랑코 프라티니 이탈리아 외무장관이 동부 지역에 이슬람 세력이 국가를 건설하면 유럽연합이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이다.
미국과 영국이 카다피 제거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카다피가 사라지면 속은 시원할지는 모르나, 그 뒤에 몰려올 혼란이 암담하기 때문일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지는 않으니 적당한 선에서 봉합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특히 리비아가 산유국으로 세계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 때문에 더블딥을 우려하는 경제계는 리비아 정국 안정을 바라고 있다. 경제는 불투명한 정국을 가장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카다피가 자리를 굳건히 지켜도, 또는 그가 물러난다고 해도 혼란은 쉽게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다만 이번 리비아 민주화 시위로 카다피가 주창한 ‘자마히리야’가 한때의 환상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적어도 가장 확실한 수확으로 남을 것이다.
김종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 교수)
튀니지와 이집트를 휩쓴 민주화 물결이 리비아에 상륙한 것은 2월15일. 리비아 동부 벵가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가 급물살을 타고 수도 트리폴리까지 번졌다. 튀니지와 이집트 두 나라와는 달리 군과 용병이 유혈 진압에 나서면서 민주화 시위가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급박하게 치닫고 있다. 더불어 약자의 대변인이자 정의의 화신처럼 행동하던 카다피의 위신이 국내외에서 끝 모르게 추락하고 있다.
ⓒReuter=Newsis
한 리비아 남성이 2월21일 이집트 카이로 주재 리비아 대사관 앞에서 신발로 카다피의 사진을 때리고 있다.카다피, ‘미친 개’ 혹은 ‘혁명의 전사’장기 독재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군부와 고위 공직자 등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동안 잠잠하던 몇몇 주요 부족마저 카다피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리비아 최대 알와팔라 부족은 카다피에게 “당신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니니 빨리 리비아를 떠나라”고 촉구했고, 동부의 알주와이야 부족은 “정부가 폭력을 멈추지 않으면 24시간 이내에 원유 수출을 차단하겠다”라고 선전포고했다. 그뿐 아니라 해외 주재 고위 외교관들까지 속속 그에게 등을 돌렸고, 유혈 진압에 대한 세계 각국의 비난 또한 쇄도했다. 하고 싶은 말과 일을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카다피도 이에 질세라 “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려 ‘해볼 테면 해봐라’ 식의 극단적인 행동을 불사했다.
‘미친 개’와 ‘혁명의 전사’라는 극단적 평가를 받는 카다피는 1942년 가난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나 스물일곱 살에 국가 원수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조국 리비아는 마그립 문화권과 이집트 문명권 사이에 놓여 있는 나라로 역사상 페니키아·로마·오스만튀르크·이탈리아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외침에 시달려왔다. 644~645년 제2차 마그립 원정에 나선 아랍 무슬림 군대에 정복되어 이슬람화한 이래, 155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같은 이슬람 문화권인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이탈리아와 영국 지배를 거쳐 1951년 12월24일 연방왕국으로 독립했다.
왕정제에 대한 반감을 품었던 카다피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위 시절인 1969년 9월1일 이드리스 왕정을 ‘반동적이고 후진적이며 부패로 타락한 정권’이라 선포하고 쿠데타로 전복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리비아 아랍공화국으로 바꾸었다. 4년 뒤에는 사회주의와 이슬람교를 혼합한 ‘제3세계 이론’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인민주권선언’을 발표했다. 1977년 3월에는 리비아를 ‘사회주의 대중(大衆) 주권 민주주의’ 나라로 건설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국명도 1986년부터 ‘위대한 리비아 사회주의 아랍 인민공화국(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yah)’으로 개명했다.
카다피는 자신의 사상을 결집한 <그린북(The Green Book)>을 통해 대중 민주주의를 표방해왔다. 엄밀히 말하면, 그린북 사상은 이론적으로는 완전할지 모르나 실제 삶에 적용하기에는 비현실적이다. 그래도 자본주의와 소련식 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약자 특히 제3세계 편을 드는 데 주저하지 않으며, 세계를 대상으로 정의에 찬 주장을 펼친 그에게서 억압과 착취에 눌린 사람들이 희망의 빛을 발견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AP Photo 리비아에서 반정부 시위 도중 숨진 시민들 시신. |
헌법도 국회도 없이 42년간 지속되어온 카다피의 철권통치에 서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숨을 죽이며 살아왔다. 30%가 넘는 높은 실업률은 리비아 국민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이웃 나라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예견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부 지역에 반서방 이슬람 국가 들어설 수도
전투기·헬리콥터·탱크·대포를 동원해 시위대를 무참히 사살한 것은 민중의 대변인인 양 자처해온 카다피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또 차드 등지에서 용병을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한 것은 분명히 자살골을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카다피가 진정한 서민의 편이었다면 튀니지와 이집트의 민주화를 독려하고, 이제는 자신의 임무도 끝났다고 인정하며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왔어야 했다. 추한 꼴로 계속 버티기 작전을 하는 것은 그가 그간 부르짖어온 구호 ‘자마히리야’, 즉 ‘대중에 의한 민주주의’ 정치철학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다.
리비아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렵다. 일단 카다피가 물러난다고 해도 대체할 만한 인물이나 세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혁명 당시 리비아가 근대국가로 진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부족주의를 없애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카다피는 결국 부족에 의존한 정치를 펴왔고, 현재 민주화 시위가 내전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도 역시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소외받은 부족들이 들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카다피 퇴진 후 통일국가가 유지된다는 전제하에서 본다면 경쟁 관계에 놓인 부족 공동체들은 활발하게 합종연횡할 것이고, 종교 단체들의 정치적 입지 굳히기, 친서방과 반서방 세력의 갈등, 군부의 이익이 결부되어 권력 다툼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다면, 가장 예측 가능한 정국은 동부 지역에 이슬람을 기치로 내건 반서방 국가가 들어서는 것이다. 카다피를 제거하려고 했던 알카에다 리비아 지역 단체인 이슬람전사단의 활동무대가 바로 이 지역이다. 프랑코 프라티니 이탈리아 외무장관이 동부 지역에 이슬람 세력이 국가를 건설하면 유럽연합이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이다.
미국과 영국이 카다피 제거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카다피가 사라지면 속은 시원할지는 모르나, 그 뒤에 몰려올 혼란이 암담하기 때문일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지는 않으니 적당한 선에서 봉합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특히 리비아가 산유국으로 세계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 때문에 더블딥을 우려하는 경제계는 리비아 정국 안정을 바라고 있다. 경제는 불투명한 정국을 가장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카다피가 자리를 굳건히 지켜도, 또는 그가 물러난다고 해도 혼란은 쉽게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다만 이번 리비아 민주화 시위로 카다피가 주창한 ‘자마히리야’가 한때의 환상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적어도 가장 확실한 수확으로 남을 것이다.
김종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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