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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바라크는 나세르가 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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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작성일 11-02-18 18:20 조회 1,66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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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독재자가 무릎 꿇었다. 무바라크가 민중의 항전에 밀려 사임하기까지 이집트는 언제 분출할지 모르는 활화산이었다. 2개월 전 민중을 우롱한 부정 선거에 폭발한 이라크 민중이 30년 독재를 끝장냈다.

“나는 오늘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하는 심정으로 우리 젊은이들에게 호소합니다.…나는 애국적인 젊은이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외부, 특히 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바라크는 퇴임 발표 하루 전날(2월10일) 방송 연설을 이렇게 시작했다.

그의 연설을 들으며 기자가 1967년 아랍-이스라엘 ‘6일 전쟁’ 당시 서울의 ㄷ일보에 텔렉스로 송고한 기사가 생각났다. 6일 전쟁이 끝난 다음 날인 6월11일 저녁 6시, 카이로 하늘에 무거운 여름 석양이 깔릴 무렵, 나세르 대통령이 국영 TV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좀 더 어두워 보였다. “기쁠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우리는 마주 앉아 대화하고 의논해왔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내 자랑스러운 동포들이여, 나는 적과의 성스러운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이 순간부터 대통령직을 사임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알라후 악바르.” 채 5분이 안 되는 연설을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끝낸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 국가를 뒤로 하고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3~4분이 지났을까, 밖에서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뛰쳐나가보니 시민들이 함성을 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함성은 여기저기서 더 크게 울려 나왔다. 군중들은 “야 나세르, 야 나세르”를 외치며 시내 곳곳에서 약속이나 한 듯 쏟아져 나왔다(‘야’는 ‘오’와 유사한 감탄사). 기자가 당시 카이로 대학 근처 나일강변 집에서 나와보니 대로를 꽉 메운 시민들이 알가마 다리를 지나 해방광장(미단닐 타흐리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남녀노소 거대한 인파가 “야 나세르, 야 나세르,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 우리를 떠나지 마십시오”라고 외치며 쏟아져 나왔다. 울며 옷을 찢는 시민도 많았다. 시민들은 밤새도록 나세르의 사임을 반대하며 쉰 목소리로 외쳐대고 있었다.

나세르와 무바라크. 두 사람 모두는 착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격정적이기도 한 이집트 국민의 감성에 호소했다. 그러나 오늘의 이집트는 1967년의 그 나라가 아니다. 국민의 심리와 감성을 교묘히 이용한 나세르는 3일 만에 사임을 거두고 복귀한 뒤 병사(病死)할 때까지 집권했고, 이집트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Xinhua
작년 11월 부정선거로 민심 ‘부글부글’

나세르 집권 당시 육군 장성이었던 무바라크는 ‘60년간의 국가봉사를 명예롭게 마치고’ 국민의 존경과 환호 속에 오는 9월 대통령궁을 떠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민중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근대 이집트 역사상 최장인 30년을 집권한 무바라크 대통령은 ‘현실 감각’을 잃었다. 이집트 민중 봉기는 결국 무바라크의 퇴진으로 그 결실을 맺었다.

이집트 민중봉기가 튀니지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주장은 이번 사태의 원인을 피상적으로 파악한 과장된 표현이다. 30년 무바라크 독재정권과 기득권 세력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집트 국민의 분노와 욕구불만의 용암은 지난해 11월28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미 분출 직전에 와 있었던 것이다.

11월 선거에서 조직적인 대규모 부정선거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유럽의 몇몇 인권단체는 이집트에 비공식 선거참관단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 당일 이집트 당국은 국내외 참관인의 투표장 출입을 금지하고 외신기자들의 취재도 방해했다.

이집트 국회는 양원제로, 하원 격인 국민의회(마즐리스 슈압)와 상원 격인 슈라로 구성된다. 상원은 입법 권한이 거의 없어서 실제 선거의 관심은 하원의원 선거에 쏠린다. 하원의원은 모두 508명. 222개 선거구에서 440명을 뽑고, 64석은 여성 몫으로 32개 선거구에서 2명씩 선출한다. 나머지 4명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하원 선거에서는 5000여 명의 후보가 난립해 평균 10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정부는 자유 공정선거 약속을 되풀이했지만, 이번 선거는 과거 어느 때보다 노골적이고 무자비한 부정선거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AP Photo
무슬림형제단 고위 지도부(위)가 2월6일 기자회견을 열고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집트의 정치 애널리스트 아무르 앨 샤바키는 유권자 4100만명의 10%인 400만명 정도만이 투표에 참여해 국민들이 사실상 선거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일간 <알마스리 알야옴>은 기관단총을 든 민간 복장의 사나이들과 몽둥이를 든 괴한들이 투표장 주위를 둘러싼 사진을 실었다.

▲투표소 관리원들이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꺼내 서명한 뒤 투표함에 넣는 장면, 유권자에게 돈을 건네주는 장면, 한 유권자가 이집트 화폐 200파운드(약 3만5000원)를 받고 투표하는 장면 등이 휴대전화 카메라에 잡혔다.

▲야당 성향으로 보이는 유권자들에게는 투표용지에 유권자 자신의 이름을 쓰도록 권해 무효화시키는 장면도 있었다(사설 이집트 민주연구소 이스라이 파타의 증언).

▲투표소 관리원들이 빈 투표용지를 꺼내 여당 후보를 찍은 다음 투표함에 넣는 장면, 야당 선거참관인과 외신기자의 투표소 입장을 거부하는 장면, 집권 민족민주당원들이 허가 없이 투표소에 들어와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면들이 휴대전화 카메라에 찍혀 유튜브에 올라왔다.

한 이집트 인권단체는 선거 당일 8명이 사망하고 180명의 야당 인사가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다. 험악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는 사상 최악의 야만적 선거였다고 노르웨이 참관인은 평했다.

‘무슬림형제단’이 이번 선거에 130명의 후보를 내세웠으나 1차 선거에서 직선으로 당선된 후보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번 선거의 난맥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을 불법단체로 규정해 각종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아닌 무소속으로 출마토록 제한하고 있다. 카이로의 슈브라 엘하이마 극빈층 지역에서 출마한 엘베타기는 2005년 선거에서 큰 표차로 당선된 바 있다. 이번 선거에도 출마한 그는 지지자 수백명과 함께 투표소에 도착했지만, 투표용지가 모자라 투표할 수 없는 어이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1950년대 이래 이집트 현대사를 통틀어 공정선거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 11월의 선거는 너무나 심한 부정선거였기에 무슬림형제단의 문제로만 치부되지 않는다. 2005년 선거에서 하원 의석의 20%, 88석을 건졌던 무슬림형제단이 11월 선거에서 한 명도 당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AP Photo
이집트 사태를 외면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 대한 이집트 국민의 분노는 컸다(위).
2005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의 선전에 충격을 받은 무바라크와 민족민주당은 패닉 상태에 빠져, 지난 11월 선거에 “적을 완전히 타도하자”라는 자세로 임했다. 오는 9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압승을 ‘진상’하려던 당 지도부와 군부의 충성과 초조감이 역대 최악의 부정선거를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하원 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는 깊었다. 그 밑바닥에는 지난 30여 년간 무바라크 치하에서 악화된 빈부 격차, 사회정의의 실종, 만연한 부패, 젊은 층의 높은 실업률 등 온갖 불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여기에 불을 댕긴 사건이 튀니지 국민의 봉기였을 뿐이다.

미국 정부는 이집트 민중봉기 초기와는 달리 무바라크 정권의 연명을 옹호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민중봉기 초부터 갈팡질팡하던 미국 행정부는 세계 민주주의 진영의 지도국답지 못한 두 개의 얼굴을 드러냈다.

2009년 6월13일 테헤란. 수십만 이란 국민이 대통령 아마디네자드와 측근들의 철권통치를 가능케 하는 부정선거 결과에 반발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란 ‘물라’들의 신정 통치가 대두한 이래 최초·최대의 반정부 시위였다. 2011년 1월25일 수많은 이집트 국민이 30년간 지속된 무바라크 정권의 부패와 고문, 공포 정치의 종식을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위 두 사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매우 대조적이다. 2009년 이란 사태 당시, 오바마 대통령을 포함한 서구 지도자들은 신속히 반정부 시위대 지지 의사를 밝히고 이란 정부를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이번 이집트 사태의 경우, 이란 사태 때보다 훨씬 더 상황이 심각한데도 미국 행정부는 침묵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으며” “이집트 정국은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라고 논평한 것이 거의 전부다.

이란과 이집트 사태의 차이점은, 미국 처지에서 무바라크가 아직 관계를 끊고 싶지 않은 ‘선한 독재자’였다는 점이다. 이번 이집트 사태와 관련해 오바마는 반정부와 친정부 시위대 모두에게 폭력 중단과 자제를 촉구했다. 이집트 국민들이 정의와 자유를 위해 봉기했는데도 그는 이집트 국민을 적극 지지하기는커녕, 아랍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이집트 현 정권의 명맥을 유지해주기 위해 정치적 게임을 벌였다.

   
이집트의 시위 현장은 2년 전 이란 시위 때의 거리 모습과 흡사했다. 시위 군중이 군과 경찰에 무차별 폭행당하거나 죽어가는 모습, 진압 차에 목숨을 걸고 맞서는 시민들의 모습, 사복 경찰과 친무바라크 대원들에게 사살되는 젊은이들…. 그럼에도 오바마는 이란 사태 때와는 대조적으로 시민들을 적극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무바라크 정권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는데, 무바라크가 그동안 미국의 친이스라엘 아랍 정책을 충실하게 대변해왔기 때문이다(20~21쪽 딸린 기사 참조). 미국 보수 논객들은 이집트 민중봉기 직후부터 무슬림형제단을 공격해왔다. 무슬림형제단을 반미·반여성적인 과격한 보수 이슬람 단체라고 공격하며, 마치 무바라크가 물러나면 이란처럼 이슬람 신정국가가 재연될 것 같은 공포감을 조성했다. 그러나 타흐리르 광장 시위에 참가 중인 군중은 그들의 시민혁명이 이집트 국민을 위한 것이며, 무슬림형제단이 주도한 것이 아님을 수차례 강조한 바 있다.

수십만 기독교인과 무슬림 함께 기도

수십만 기독교인과 무슬림 교도가 함께 모여 기도의 시간을 갖곤 했다는 사실은 미국의 일부 보수 언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준다. 폭스뉴스를 비롯한 일부 미국 보수 언론은 이집트 정국을 이란과 비교함으로써 근거 없는 공포심을 조장하고, 이집트 민중봉기를 왜곡하려 들었다.

시위에 참가한 20세 대학생 모하메드는 미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가 우리 편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가 필요치 않다. 우리의 목적은 정의로운 것이며 그가 독재정권에 대항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미국은 훗날 크게 후회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나세르와 무바라크, 두 독재자의 종말은 이집트 현대사의 비극이자 아이러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즉각 사임하겠다는 나세르에게, 온 국민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임기를 다하고 물러나겠다는 무바라크에게 국민은 오늘 당장 물러나라고 외쳤다. “오늘을 현명하게 사는 사람이 내일을 결정한다”라는  아랍 속담이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오늘을 현명하게 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시사인

댓글목록 1

와이리좋노님의 댓글

와이리좋노 작성일

본 내용을 근거로 한다면 이란의 민중데모는 미국이 뒤에서 사주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마치 한국의 개스통할배 데모와 유사한 성격의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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