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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1운동의 핵심배후는 김규흥과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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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306회 작성일 11-08-1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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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핵심배후는 김규흥과 신규식 (4부)
3.1운동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이론은 역사발전을 위해 재고되어야

 

 

일제가 파악한 3·1운동의 배후

1) 김복과 신정이 모든 일의 배후이다.

1919년 8월 23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官房外事課長)가 일본외무성정무국장(埴原正直)에게 보낸 기밀문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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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 수립, 삼일운동의 배후로 김복(김규흥)과 신정(신규식)을 지목하고 있는 일제의 기밀문서  

 


《즉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고 조선의 현상을 호소하여, 미국 및 세계 여러 나라의 동정에 의해 조선의 독립을 이루어 내려는 자들로서, 재미조선인과는 위치 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밀접하게 연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락은 문서에 의하지 않고 대부분 사람들이 서로 왕복하면서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김복, 신정 등인데 김복은 항상 그가 즐겨하는 문필로서 지나(중국)신문을 통해 배일기풍을 고취하고 있으며 또 이들 조선인은 지나남방파와 통하여, 이들을 이용하길 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서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이다. 조금 더 이 문서를 살펴보자.

《이리하여 민족자결주의를 미국 대통령이 부르짖게 되니까 재미조선인과 기맥(氣脈)이 상통하여 강화회의에 진상청원을 위해 대표자의 파견을 결의하고 김규식을 그 대표자로 선발하여, 김규식은 3월(1월의 오기)상순에 상해를 출발하여 파리로 향하였습니다. 또 상해 방면 획책의 발걸음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유력자인 안창호를 4월 하순에 하와이를 출발하여 상해에 도착하도록 했는데, 이때부터 그는 이 방면(상해) 배일자의 중견인물이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임시정부가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했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수립일(1919년 4월 13일)과 김규식의 일정(1919년 1월 상해 출발, 3월 파리 도착)의 괴리, 그밖에 1919년 4월 3일 날짜로 된 ‘한국위원이 강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에는 ‘신한청년당대표 김규식’이라고 기록 되어 있는 사실 등 여러 정황상 임시정부 파견설은 점차 철회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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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 신한청년당대표 김규식 명의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최근에는 임시정부 파견설을 대신하여 신한청년당 파견설이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는 듯하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 경 여운형, 조동호 등 6명의 조선 청년들이 발기했으며 초대 대표는 여운형이었다. 그렇다면 여운형이 모든 거사의 배후였을까? 혹은 청원서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명시된 김규식일까?

일부 학자들은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파리강화회의 등의 주역으로 여운형을 꼽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의문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 당시 파리로 가기위해서는 배표와 위조여권이 필수적이었다. 이것은 이승만과 정한경의 파리 출국 좌절 그리고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에서 파견한 윤해, 고창일 등이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된 6월 28일 이후인 9월경에 파리에 도착한 점 등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김규식이 1919년 8월 21일 뉴욕 항을 통하여 입국한 서류를 보면 김중문이란 중국인으로 가장한 위조여권을 사용했음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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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식이 사용한 위조여권, 김중문이란 가명을 사용했으며 국적은 중국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1917년에 금릉대학을 졸업하여 1918년 당시 협화서국이란 서점의 일개 직원이었던 젊은 청년(여운형)이 어떻게 위조여권, 승선권 그리고 소요경비 등을 조달했으며 김규식이란 명망가를 섭외할 수 있었을까? 상기 문서는 이러한 의문점을 해소시켜 준다. 이 문서에 의하면,

■ 상해방면의 조선인은 블라디보스토크, 미국 등의 조선인들과 끊임없이 교류했다.
■ 하지만 이 방면 조선인의 주의주장은 노령의 문창범 일파 및 이동휘 일파와는 약간 차이를 갖고 있다.
■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미국 및 세계 각국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방략을 추진하고 있는데, 재미조선인들과 보다 더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다.
■ 기밀유지를 위해 문서에 의하지 않고 주로 인편에 의해 연락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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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관 신규식과 도산 안창호     © 김상구

■ 핵심은 김복(범재 김규흥), 신정(예관 신규식)이다.
■ 특히 김복은 지나(중국)신문을 통해 배일기풍을 고취하고 있으며,
■ 중국 남방파(광동성; 진형명·손문 등이 이곳 출신)와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다.
■ 재미조선인과 상해방면의 조선들이 협조하여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김규식을 선발했다.
■ 상해 방면 획책의 발걸음을 진척시키기 위하여2), 안창호를 상해로 초청했다.

등의 정보가 확인된다. 위 내용이 사실이라면 대부분의 의문이 풀리게 된다. 신한청년당의 배후에는 신규식과 김규흥이 있고, 그 배후의 단체 즉 동제사가 재미조선인 즉 대한인국민회와 협력하여 김규식을 파리로 파송했다. 그리고 중국인의 도움을 얻어 위조여권, 승선권 문제를 해결했다.…

그렇다면, 중국 남방파 즉 광동의 호법정부와 협조할 수 있으며, 재미조선인 즉 대한인국민회와 지속적인 교류를 한 인물이 누구일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규식을 연상하리라 본다. 상기 일제의 기밀문서에도 신규식을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신규식과 함께 등장한 김복이 과연 누구이며 그의 이력은 어떠한가에 대한 의문이다. 김복은 일제의 기밀문서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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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문서철명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8) 문서제목 在露支方面 鮮人의 상황 送付의 건 문서번호 官秘 제290호

2)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추정됨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501&section=sc12&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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