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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허상 - 일제가 파악한 3.1운동의 전개과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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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396회 작성일 11-07-2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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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파악한 3·1운동의 전개과정

1) 우리가 몰랐던 민족대표 33인의 허상

 

 

김상구


 

민족대표를 자처했던 사람들이 정작 시위현장인 탑골(파고다) 공원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선언문 낭독 장소로 택한 곳은 태화관이란 요정이었고, 참석자도 일신상의 사유를 들어 4명이 불참한 29명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은 너무나 관대했다. 적극적인 친일행위자로 변절했던 박희도, 정춘수, 최린 그리고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받았던 길선주(그가 2009년 제64주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된 사실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와 사회주의자인 김창준 외는 모두 건국훈장 1, 2급을 받았다. 친일 밀정으로 논란이 있는 이갑성도 2급인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소위 민족대표자들이 변절을 하고, 무죄선고를 받고, 재판 도중 나는 독립청원을 할 의사가 없었다, 운운하고 게다가 일부는 30세 전후의 청년들이 참여하였다는 사실,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명망가들이 전혀 없다는 사실 등 그들 33인을 당시 조선민족의 대표라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점이 너무나 많다.
 
이러한 의문을 밝혀줄 단초가 되는 귀중한 자료가 최근 발굴되었다.

1920년 10월, 당시 음지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동제사1) 란 단체가 한문으로 발행한 ‘진단’이란 주간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애국당이란 곳에서 국내외 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이 단체는 다섯 차례의 중요한 독립선언을 기획했다. 최초는 1917년 상해에서 선포한 <대동단결선언(서명자 신규식 외 14인)> 두 번째는 1919년 2월 동경에서의 <일본동경유학생독립선언서(최팔용 외 11인) 세 번째가 1919년 2월 길림에서 선포한 <국외한인대표단독립선언서(김교헌 외 39인)> 네 번째는 1919년 3월 경성에서 발표한 <국내한인독립선언서(손병희 외 33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삼위에서 1919년 3월 선포된 <해삼위한인국민회의선언서(서명자 없음, 해삼위의 주요인물은 대한독립선언서에 대부분서명 했음)>가 바로 그것이다.”2)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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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중국의 혁명지사들이 합작하여 발간한 주간신문,

1920년대 초의 독립운동사를 규명하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사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대표가 실은 국내 대표라고 한다. 실제 당시의 조선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인물 즉 신규식, 박용만, 이동휘, 안창호, 이승만, 김좌진, 신채호, 조소앙, 김규식, 조성환, 박은식 등 독립운동 명망가들은 ‘국외한인대표단독립선언서’에 대부분 서명했으며, 입헌군주론자 내지 보황론자들은 공화주의를 주창한 상기 5개 선언서에 모두 불참하였다. 무언가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우리 대한 동족 남매와 온 세계 우방 동포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子孫 黎民)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虐壓]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우리 대한은 예로부터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민족의 한이 아니라, 반만년사의 내치외교(內治外交)는 한왕한제(韓王韓帝)의 고유 권한[固有權]이요, 백만방리의 고산려수는 한남한녀(韓男韓女)의 공유 재산[共有産]이요, 기골문언(氣骨文言)이 구아(歐亞)에 뛰어난[拔粹] 우리 민족은 능히 자국을 옹호하며 만방을 화합하여 세계에 공진할 천민(天民)이라, 우리 나라의 털끝만한 권한[韓一部의 權]이라도 이민족[異族]에게 양보할 의무가 없고, 우리 강토의 촌토[韓一尺의 土]라도 이민족이 점유할 권한이 없으며, 우리 나라 한 사람의 한인[韓一個의 民]이라도 이민족이 간섭할 조건이 없으니, 우리 한(韓)은 완전한 한인(韓人)의 한(韓)이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武孼]이여. 임진 이래로 반도에 쌓아 놓은 악은 만세에 엄폐[可掩]치 못할 지며, 갑오 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에 용납[能容]지 못할지라. 그들이 전쟁을 즐기는[嗜戰] 악습은 자보(自保)니 자위(自衛)니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르는[反天逆人] 보호 합병을 강제[逞]하고, 그들이 맹세를 어기는[□[*변할투]盟] 패습(悖習)은 영토니 문호니 기회니 구실을 거짓 삼다가 필경 몰의비법(沒義非法)한 밀관협약(密款脅約)을 강제로 맺고[勒結], 그들의 요망한 정책은 감히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였고, 교육을 제한하여 과학의 유통을 막았고[防□[*막을 알]], 인권을 박탈하며 경제를 농락하며 군경(軍警)의 무단과 이민이 암계(暗計)로 한족을 멸하고 일인을 증식[滅韓殖日]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

적극소극(積極消極)으로 우리의 한(韓)족을 마멸시킴이 얼마인가.

십년 무력과 재앙의 작란(作亂)이 여기서 극에 이르므로 하늘이 그들의 더러운 덕[穢德]을 꺼리시어[厭] 우리에게 좋은 기회[時機]를 주실새, 우리들은 하늘에 순종하고 인도에 응하여[順天應人] 대한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들의 합병하던 죄악을 선포하고 징계하니[宣布懲辨],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들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실행함이니, 이는 동아시아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병 결과는 군경의 야만적 힘[蠻權]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억압하고 핍박(抑迫)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장애[沮障]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그러므로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天意人道]와 정의법리(正義法理)에 비추어 만국의 입증으로 합방 무효를 선포하며, 그들의 죄악을 응징하며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노라.

슬프도다 일본의 무력과 재앙이여! 작게 징계하고 크게 타이름[小懲大戒]이 너희의 복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

각기 원상(原狀)을 회복함은 아시아의 바램[幸]인 동시에 너희도 바램이러니와, 만일 미련하게도 깨닫지 못하면 화근이 모두[全部禍根] 너희에게 있으니, 복구자신(復舊自新)의 이익을 반복하여 알아듣게 타이를 것[反復曉諭]이다.

보라! 인민의 마적이었던 전제와 강권은 잔재가 이미 다하였고, 인류에 부여된 평등과 평화는 명명백백[白日이 當空]하여, 공의(公義)의 심판과 자유의 보편성은 실로 광겁(曠劫)의 액(厄)을 일세(一洗)코자 하는 천의(天意)의 실현함이요, 약국잔족(弱國殘族)을 구제[濟]하는 대지의 복음이라.

장[大]하도다 시대[時]의 정의[義]여. 이때를 만난 우리는 함께 나아가[共進] 무도한 강권속박(强權束縛)을 해탈하고 광명한 평화독립을 회복함은, 하늘의 뜻을 높이 날리며 인심을 순응시키고자 함이며, 지구에 발을 붙인 권리로써 세계를 개조하여 대동건설을 협찬하는 소이로서 우리 여기 2천만 대중의 충성[赤衷]을 대표하여 ,감히 황황일신(皇皇一神)께 분명히 알리고[昭告] 세계 만방에 고하오니[誕誥], 우리 독립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향응[天人合應]하는 순수한 동기로 민족자보(民族自保)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함이요, 결코 목전의 이해[眼前利害]에 우연한 충동이 아니며, 은혜와 원한(恩怨)에 관한 감정으로 비문명한 보복수단에 자족한 바가 아니라, 실로 항구일관(恒久一貫)한 국민의 지성이 격발하여 저 이민족으로 하여금[彼異類] 깨닫고 새롭게 함[感悟自新]이며, 우리의 결실은 야비한 정궤(政軌)를 초월하여 진정한 도의를 실현함이라.

아 우리 대중이여, 공의로 독립한 자는 공의로써 진행할지라, 일체의 방편[一切方便]으로 군국전제를 삭제하여 민족 평등을 세계에 널리 베풀[普施]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제일의 뜻[第逸意]이요, 무력 겸병(武力兼倂)을 근절하여 평등한 천하[平均天下]의 공도(公道)로 진행할지니 이는 우리 독립의 본령이요, 밀약사전(密約私戰)을 엄금하고 대동평화를 선전(宣傳)할지니 이는 우리 복국의 사명이요, 동등한 권리와 부[同權同富]를 모든 동포[一切同胞]에게 베풀며 남녀빈부를 고르게 다스리며[齊], 등현등수(等賢等壽)로 지우노유(知愚老幼)에게 균등[均]하게 하여 사해인류(四海人類)를 포용[度]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 건국[立國]의 기치(旗幟)요, 나아가 국제불의(國際不義)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體現)할 것이니 이는 우리 대한민족의 시세에 응하고 부활[應時復活]하는 궁극의 의의[究竟義]니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同心同德] 2천만 형제자매여! 우리 단군대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시어 우리의 기운(機運)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돕는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죽음[一死]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傾家復國]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건국기원 4252년 2월 일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좌진(金佐鎭) 김학만(金學滿) 여준(呂準) 유동열(柳東說) 이광(李光) 이대위(李大爲)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봉우(李奉雨) 이상룡(李相龍) 이세영(李世永)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이종탁(李鍾倬) 이탁(李□) 문창범(文昌範) 박성태(朴性泰)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翼) 손일민(孫一民) 신정(申檉)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임방(任□) 윤세복(尹世復) 조용은(趙鏞殷) 조욱(曺煜) 정재관(鄭在寬) 최병학(崔炳學) 한흥(韓興) 허혁(許爀) 황상규(黃尙奎)

 

그리고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겠지만, 각종 문서를 취합하면, 한국애국당(동제사 혹은 동제사의 하부기관인 신한청년당3) )에서는 1919년 초부터 김규식은 파리로, 여운형은 길림을 거쳐 해삼위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선우혁·서동호·김철 등을 조선으로 밀파했다. 그리고 미주지역은 박용만, 안창호 등과 꾸준히 접촉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1919년 3월 1일을 전후하여 국내뿐 아니라 동경, 길림, 용정, 미국, 하와이, 시베리아, 대만, 상해 등 국내외에서 70여 종의 서로 다른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중에는 1919년 4월 해삼위에서 선포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도 있음을 밝힌다.
 
우리는 서울의 3·1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전국방방곡곡, 전 세계 조선인 거주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발발했으며 임시정부도 수립되었다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가설은 3·1운동 이전부터 독립운동가 명망가들이 상해로 속속 모여들었고, 3월 1일을 전후하여 70여 종의 독립선언서들이 전 세계 각지에서 발표되었음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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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강화회의의 대표단과 사무원, 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우사 김규식이다

 

그러나 모든 중심축을 파리강화회의에 두고 임시정부, 3·1운동을 함께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의문이 풀린다. 즉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우리의 실상과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한편 조선인의 기개를 보여 주기 위해 평화적이고 거국적인 시위를 결행함과 동시에 망명정부격인 임시정부 정부를 수립함을 전 세계에 알린다면 우리의 독립은 이루어지라고 생각한 것이 당시독립지사들의 신념이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확인해야할 것은 선언서의 종류가 그처럼 많았지만 대부분 민주공화정을 선포했고, 상해 임시정부의 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써 한다.”라고 선언한 점이다. 이왕 독립을 한다면 양반이 쌍놈을 핍박하던 조선시대로 회귀하자는 게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가진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한 우리 선조가 자랑스럽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으로 기술된 교과서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공화정인 미국에 거주하던 박용만, 안창호, 이승만 등이 공화주의자인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의병장 출신의 보황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중국에서는 공화주의의 세례를 누가 뿌렸을까하는 의문도 들 수 있는데, 뒷글에서 소개할 범재 김규흥을 알게 된다면 상당부분 풀리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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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동제사(同濟社) 1912년 7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결성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 역사학계에선 박은식이 총재, 신규식이 이사장을 맡았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중국인과의 관계, 망명시기 등을 고려하면 김규흥이 배후의 인물로 추측된다.
2)진단주보 창간호, 1920, p8
3)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1918년 8월 상해에서 설립된 한인 청년독립운동단체이다 초대 대표는 여운형이다.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 등이 발기인이었으며, 1919년 4월에 서병호, 김구, 이광수 등이 가입했다. 초창기 임시정부의 주류였으나, 안창호의 흥사단과 경쟁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1922년 12월 해산했다.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했다.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469&section=sc12&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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