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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독립운동史 모두 다시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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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452회 작성일 11-07-20 23:05

본문

3.1독립운동史 모두 다시 써야 하나? (1부)
- 동제사, 신한청년당과 신규식, 김규흥을 중심으로 -

 

 

김상구 컬럼

 

1. 머리글

-3.1 운동의 의의와 의문점

현행 대한민국 헌법에는 세 가지 역사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4·19>이다. 특히 <3·1운동>은,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헌법이 개정되었지만 3.1 운동이란 단어 자체가 누락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만큼 3·1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3·1운동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 전개한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므로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는 물론, 광복 이후 민족이 분단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  ‘3·1운동의 의미’ 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러한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3·1운동의 전개과정과 주관 단체, 배후 등을 파악하다보면 여러가지 의문점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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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대표의 독립 선언(민족 기록화) ⓒ중학교 국사 교과서



첫째, 기미년(1919년) 3월 1일 정오, 선언서를 낭독해야할 민족대표들은 집회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타나지 않고 왜 태화관에서 모임을 가졌을까?

둘째, 태화관에서의 모임에는 독립선언서 서명자 33명 중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명이 불참했다. 그들은 어떤 연유로 참석하지 않았을까?

셋째, 29명의 참석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출동한 일제 경찰들에게 그들은 전혀 항거를 하지 않았고 도피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왜 순순히 붙잡혀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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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선주 목사,

33인의 소위 민족대표 중 중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받았다.

 

넷째, 기미년 독립선언 관련 재판 결과, 최고형은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7명에게 선고된 3년 형이었고 그 외는 2년 6월, 2년, 1년 6월 등이었다. 특히 길선주는 무죄로 판결되었다. 일제는 왜 그렇게 관대하게 판결했을까?

다섯째, 민족대표 33인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사람은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고 상해로 간 김병조뿐이었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 중 임시정부 각료로 선출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출옥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찍이 임시정부에 합류한 김병조조차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대표와 선전위원회 이사정도가 고작이었다. 임시정부는 민족대표를 왜 그렇게 홀대했을까?

여섯째,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은 당시 61세였던 이종훈, 이종일이고 그 다음 연장자는 58세의 손병희, 권동진이었다. 그리고 최연소자는 서른 살의 박희도, 이갑성, 김창준 등이었다. 민족을 대표한다는 인사들의 연령이 너무 젊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일곱째,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최린, 박희도, 정춘수 등 민족대표 3인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그리고 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소위 민족대표가 왜? 어떤 이유로 훼절했을까?


(표1: 기미년 독립운동 국내대표 33인)

이름

생존기간

건국훈장

서훈

연도

형량

비 고

손병희(58)

1861.4.8~1922.5.19

대한민국장

1962

3년

천도교

권동진

(58)

1861.12.15~1947.3.9

대통령장

1962

3년

천도교

오세창

(55)

1864.7.15~1953.4.16

대통령장

1962

3년

천도교

임예환

(54)

1865.7.17~1949.4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나인협

(47)

1872.10.8~1951.4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홍기조

(54)

1865.12.6~1938.7.6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박준승

(53)

1866.11.24~1921.3.24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양한묵

(57)

1862.4.29~1919.5.16

대통령장

1962

재판 중 사망

천도교

권병덕

(52)

1867.4.25~1944.9.15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김완규

(43)

1876.7.9~1949.6.20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나용환

(55)

1864.8.7~1936.8.19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이종훈

(61)

1858.2.9~1931.5.2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홍병기

(50)

1869.11.5~1949.1.26

대통령장

1962

2년

천도교

이종일

(61)

1858.11.6~1925.7.13

대통령장

1962

3년

천도교

최린

(41)

1878~1958

친일

인명사전



3년

천도교

이승훈

(55)

1864.4.25~1930.5.9

대한민국장

1962

3년

기독교

박희도

(30)

1889~1951

친일

인명사전



2년

기독교

이갑성

(30)

1889.10.23~1981.3.25

대통령장

1962

2년 6월

기독교

오화영

(39)

1880.4.5~1950

대통령장

1989

2년 6월

기독교/ 납북

최성모

(45)

1874.1.9~1937.3.14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이필주

(50)

1869.12.9~1942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김창준

(30)

1889~1956

월북,

사회주의

-

2년 6월

기독교

신석구

(44)

1875~1950

대통령장

1963

2년

기독교

박동완

(34)

1885.12.27~1941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신홍식

(47)

1872.3.1~1937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양전백

(50)

1869.3.10~1933.1.17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이명룡

(47)

1872.8.2~1956.11.12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길선주

(50)

1869~1935.11

독립장

2009

무죄

기독교

유여대

(41)

1878.11.26~1937.1.13

대통령장

1962

2년

기독교

김병조

(42)

1877.1.10~1948.2.25

대통령장

1990

상해 망명

기독교

정춘수

(44)

1875~1951

친일

인명사전



1년 6월

기독교

한용운

(40)

1879.8.29~1944.6.29

대한민국장

1962

3년

불교

백용성

(56)

1863.5.8~1940.2.20

대통령장

1962

1년 6월

불교

 

여덟째, 민족대표들 중 양한묵은 재판 중 사망하였고, 손병희는 석방 후 몇 년 되지 않은 1922년에 작고하였다. 반면 오세창, 최린, 박희도, 정춘수 등 상당히 많은 수의 인물들이 해방 이후까지 생존했다. 출옥 이후 그들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출옥 이후에도 절개를 지키고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한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홉째, 33인 중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않은 사람은 최린, 박희도, 정춘수 외 북한 정권을 적극 지지하는 대표적인 월북 인사라는 이력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김창준 등 4명이다. 그 외 나머지 인사는 모두 서훈을 받았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3인은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이고 나머지도 대부분 대통령장(2급)이다. 심지어 무죄로 선고된 길선주마저 2009년에 독립장(3급)에 서훈되었다. 그들 중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서훈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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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최린,       '제일선'에 실린 '춤추는 박희도',   지금은 철거된 정춘수의 동상



마지막 의문으로, 일제가 진정으로 생각한 3·1운동의 배후는 어디이며 주모자를 누구라고 판단했을까?

3·1운동은 그 의의가 큰 만큼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3.1 운동의 자료로는 선교사 등 서양인들이 남긴 자료와 중국 등 해외의 언론 기사, 일제기밀문서 등 외국인들이 작성한 것들이 있고, 우리 민족이 기록한 것으로는 박은식이 편찬한『독립운동지혈사』상해「독립신문」, 미주의 「신한민보」 등과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0년 상해에서 발간한 한중합작 한문신문「진단주보」등의 기사가 참조된다.


이 글은 재판기록,『고등경찰비사』등 일제의 기록물을 중심으로 당시 우리의 적인 일제가 3·1운동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으며 주동 단체는 어디이며 어떤 인물을 배후 인물로 지목하여 검거에 주력했는가를 검토하는 글이다. 논자가 제기한 많은 의문점에 대하여 일제의 기록물들이 오히려 우리의 기록물 보다 진실에 더 가까운 답변을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이 글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리라 본다.

 

역사복원신문 2011.07.19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458&section=sc12&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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