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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초의 한.중합작 `향강잡지`를 발간한 범재 김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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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1,965회 작성일 11-06-3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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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중합작 '향강잡지'를 발간한 범재 김규흥
중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혁명 동지들과 연대하는 범재선생

 

 

역사복원신문 2011.06.26   김상구

 

4. 혁명 동지들과의 연대

4-1) 최초의 한중합작, 향강 잡지 발간

1914년 1월 7일, 박은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저는 백수(白首)에 나뭇잎처럼 나부끼어 영락하나 다행스럽게 병 없이 지탱하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에 또 상해로부터 홍콩으로 이주하였으니 김군(金君) 범재[凡齋(범재 김규흥)]가 보관(報館)을 설립하여 경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미 제 일호를 방행함이 있으니 대개 중·한(중국·한국)합동기관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단독기관으로 하면 다만 힘이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시국상황이 허락하지 않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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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암 박은식 선생

 


또한 중·한(중국·한국)관계가 가장 밀절(密切)하므로 중국의 발전은 우리 민족이 부활하는 기회니 지금 중국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또한 남의 밭의 김을 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들이 중국에 온 자가 남에 있든 북에 있든 논할 것 없이 잡류(雜類)가 매우 많으니, 금전을 요구하지 않으면 망령되게 장서(長書)를 투서하여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일이 겹쳐 자꾸 일어나니 어떻게 남의 신용을 얻겠습니까. 만약에 실지 사업이 없으면 결코 믿음을 얻을 도리가 없는데, 의사를 발표하는 것은 보장(報障)보다 필요한 것이 없으나 우리들이 이러한 실력이 있는 자를 또한 얻을 수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김군(金君)의 주선이 있어 이 보장의 실현을 얻게 되었으니 생각하건대 고명(高明)께서는 헤아림이 있을 것입니다.…” <박은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4-1-7), 2000『도산 안창호 전집 제2권, 서한 Ⅱ』p122~1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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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합작  향강잡지 창간호, 공화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신해혁명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김규흥이 창간했으며 박은식이 편집을 맡았다.  


제2차 혁명 실패 후 박은식과 함께 홍콩으로 피신했다는, 앞서 인용한 일제기밀문서의 내용과 시기가 일치함을 우선 밝힌다. 이 편지에 의하면 범재 김규흥이 보관(報館)을 설립하여 경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보관은 1913년 12월 간행된 한중합작 언론인 「향강 잡지」를 말하고 있는데, 제4호까지 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창간호만 발굴된 상태이다.<배경한, 2007『쑨원과 한국』p165, 한울아카데미 참조>

「향강 잡지」의 발간에 중국혁명동지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잡지의 구성 내용이나 편집 겸 발행인 명의가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이정화(李正華)로 되어 있는 점 등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보다 확실한 근거는 김규흥이 1911년 3월 대한국민회의에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광동(廣東)은 중국에서 제일먼저 개화한 땅일 뿐 아니라 도적(盜賊)을 증오하고 원망하는 ‘골’이 아주 깊게 파여 있는 곳입니다. 그런 까닭에 동생(弟)은 수년 동안 광동에서 기거 하였고 그러는 동안 여러 지사의 돌봄으로 자못 피차에 지기지간(知己之間)이 되었으며 지난 겨울에는 지사들과 회의를 하여 하나의 신문사를 조직하고 신보(新報)를 발간하기로 하여 한국과 중국의 인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상호 연락기관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고…당초 신문 사업을 발기했을 때 그 자금은 여러 중국인사가 부담하고 기기 등은 내가 스스로 부담하기로 한 것입니다.” <김규흥이 샌프란시스코 대한국민회의에 보낸 편지, 1911-3-7>

 

범재는 신해혁명 이전부터 한중합작 언론사를 창립할 준비를 하였으며 그 와중에 동포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였다는 기막힌 내용 등이 실려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편지의 말미에 적혀 있는 발기인 명단이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구봉갑(邱逢甲), 진형명(陳炯明), 추노(鄒魯), 조판(曺辦), 홍자의(洪子義)등 5명인데, 이들 중 구봉갑은 청일전쟁 후 일제가 대만을 강제 병합할 무렵 대만의 부통령을 지내며 일제에 항거한 바 있는 대만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었으며, 진형명‧추노 등과 함께 광동성을 이끌어 가던 실세였다.

그리고 조판과 홍자의는 당시 광동성의 자산가였다. 즉 범재는 원세개를 실각시키기 위해 일어났던 제2차 신해혁명에 실패했지만, 원세개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광동성의 실세 진형명, 추노 등 혁명 동지의 협력을 얻어 그동안 준비해왔던「향강 잡지」를 간행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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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강잡지(香江雜誌)사 구지, 홍콩 섬의 중심가에 자리한 탓에 이미 고층빌딩(勵精中心)이 들어서 있다.

1977년 건축공사가 진행되면서 84호에서 90호까지 한 지번(地番)으로 통합되었다.

이전 향강잡지사 자리는 현재 건축물의 중간에서 우측으로 치우친 곳으로 생각된다.



「향강 잡지」는 그 제호부터 홍콩(香港)이란 명칭 대신 아편 전쟁 이전의 명칭인 향강(香江)을 사용함으로써 반제국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의 많은 부분이 공화주의를 선전하는데 치중하고 있는데 중국 인민 뿐 아니라 이 잡지를 접할 수 있었던 동제사 요원을 비롯한 한인 독립지사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정원택(1913년 12월 28일)『지산외유일지』탐구당>

범재는 잡지의 첫머리에 수록된 축사를 통하여 자유민주사상을 설파함과 동시에 준법정신을 지킬 것이며 특히 민기(民氣)를 기르는 일에 공헌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凡齋,「祝辭」1913 『香江雜誌』p1>

창간축사에서 언급한 민기에 대해서는 본문 중 민기란 제목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다음은 그 일부 내용이다.
"…이러므로 우리의 혁명이 성공하였다 하여도 우리가 믿을 바가 아니요 우리가 공화제를 세웠다하여도 우리가 믿을 바가 아니요 우리의 민족주의가 달성했다 해도 또한 우리가 믿을 바가 아니니 우리가 믿을 바는 오직 우리의 민기(民氣) 뿐이다. 만약 우리의 민기가 믿을만하지 못하면 우리는 믿을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기는 과연 믿을 만한 것이 도무지 없다고 하는 것일까? 내가 이전에 각지를 유람하면서 우리의 민기를 살펴본즉 진실로 한심하였다.…"

<民氣 1913『香江雜誌』p26~27 (필명없이 제목만 붙어있지만, 축사의 내용과의 연계성 등으로 볼 때 범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민기 즉 민족(民族)의 정기(精氣)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현재 민중들의 의식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이 글은 다음에 소개되는 민덕(民德)과 함께 우리나라의 초기 공화주의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되리라 본다.

민덕에서는 백성(百姓)의 도리(道理)를 설명하고 있는데, 전제시대가 마감되어도 백성의 도덕적 가치가 새로워지지 않았다면 그 나라가 새로워 질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과 함께 정치체제를 새롭게 하고, 백성의 힘이 바탕이 되는 단체를 조직할 것이며, 교육과 병역의 의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금권 타락 선거에 대한 경고와 투표권 포기에 대해서도 엄중히 경고를 하고 있는데, 오늘의 우리들도 눈여겨봐야할 지침으로 보인다.

<民德 1913『香江雜誌』p28~30 (마찬가지로 범재의 작품으로 보인다.)>

「향강 잡지」의 발간, 신해혁명의 참여, 혁명 후 한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등으로 동지의 연을 맺은 진형명은 범재의 평생지기라 할 만하다. 그와 함께 구상한 대단히 웅대한 프로젝트를 다음 차례로 소개하겠다.



기사입력: 2011/06/26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388&section=sc12&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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