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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범재 김규흥이 제1차 신해혁명에 참여했다는 증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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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494회 작성일 11-06-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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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흥은 신해혁명에 참여한 유일한 한국인 (3부)
범재 김규흥이 제1차 신해혁명에 참여했다는 증거들

 

 

 

3. 제1차 신해혁명에 참여한 유일한 한국인, 공화주의자 김규흥

3-1) 기존 학설의 문제점

“예관은 중국혁명의 성공이 조국의 독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 성공을 위하여 스스로 중국혁명에 참가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신해혁명에 참가하였으며…”<신승하, 1989「한국독립운동가열전, 예관 신규식」p55『 독립운동가열전』한국일보사>

상기 글의 논자인 신승하 교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한국 학자들은 신규식이 제1차 신해혁명에 참가하였음을 인정하고 있다. 아래는 강영심 교수의 글이다.

“신규식은 이름도 신정(申檉)으로 고치고 1911년 7월 말에 창립된 동맹회 중앙총회에 가입한 후 진기미(陳其美)와 더불어 무창기의에 참가하였다. 한국 지사로는 신해혁명에 투신한 최초의 인물로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강영심,「1910년대 한인망명자들과 중국혁명 p29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 Ⅱ』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의 학자들뿐 아니라 석원화, 호소정, 고암 등 중국인 학자들도 신규식 무창봉기 참여설에 동조를 하고 있으며 국가보훈처의 공훈기록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石源華「신해혁명에 참가한 한국인 신규식」2003『申圭植・閔弼鎬와 韓中關係』p378, 胡小靜 「한국의 혼: 신규식의 생애와 사상」2003『申圭植・閔弼鎬와 韓中關係』p334, 高岩 「한국의 혁명지사-신규식」2003『申圭植・閔弼鎬와 韓中關係』p288, 나남출판>

학자들의 주장이 이러하니, 대종교의 인물소개란, 네이버 등 각종 포탈과 백과사전 등에서는 신해혁명에 참여한 유일한 인물로 당연히 신규식 선생을 꼽을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한편, 최근에 또 한 명의 최초가 탄생하였다. 함께 보기로 하자.

“…역사연구가 김재승씨가 시민시대 12월호에 게재한 '애국지사 동해 한흥교의 숨은 항일활동'은 공백으로 남아있던 퍼즐 조각들을 맞추는 단초가 되는 글이다.…하지만 고향에서 의사로 편하기 지내는 삶을 택하기보다 그는 1911년 10월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한 최초의 한국인이 된다.<《부산일보》 2004-12-08>

한흥규, 신규식 모두 위대한 독립운동가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후손 혹은 그분들을 숭앙하는 사람들이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 혹은 과장을 하였다면 오히려 그 분들에게 누를 끼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한흥규, 신규식이 신해혁명에 참여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신규식의 경우 우창봉기 혹은 1911년 12월 1일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기 전 독립을 선언했던 13개성(호북, 강소, 절강, 호남, 사천, 운남, 산서, 섬서, 안휘, 강서, 복건, 광동, 광서)의 봉기에 참여했다는 1차 자료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상해독립과 남경 공략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신규식이 중국혁명에 가담한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근거는 신규식의 사위인 민필호가 쓴「한‧중외교사화」란 글의 내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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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규식의 사위 민필호가 작성한 '한중외교사화'를 기초로 하여 민필호가 1955년 8월 재구성, 출간한 신규식의 전기이다.

많은 학자들이 1차자료로 인용하고 있으나, 시기의 불일치 등 많은 검정이 필요한 자료이다.

특히 신해혁명 부분은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총통 : “선생은 나의 노동지인데 원로에 내방하여 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신 : “감사합니다.…규식은 신해에 망명하여 중국에 와서 마침 중국혁명을 만나 드디어 동맹회에 가입하고 귀대총통을 따라서 제1차 혁명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의도는 대개 한‧중 양국의 혁명은 동일하게 중요하여 중국혁명의 성공의 날은 즉 한국독립해방의 때라는 것을 말합니다.…” <민필호, 1955 『한국의 얼 』p96, 공보실>

1921년 신규식이 광동호법정부의 총통이었던 손문을 방문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 상기의 내용으로 대화를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대화내용이 과거의 혁명 동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너무나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신규식이 제1차 혁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신규식의 망명시기에 대해서는 “1911년 12월 초에 북경에 도착하였으며, 상해에 도착한 것은 혁명봉기가 모두 종결된 12월 20일경이었다.”는 배경한 교수의 지적은 그동안 일반화된 ‘신규식 신해혁명 참여설’의 논란을 재우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배경한, 2007『쑨원과 한국』p47, 한울아카데미 참조, 배경한은 신규식의 망명시기에 대하여 신규식의 자작시인『아목루』를 근거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1911년 10월 중국으로 건너가 1911년 10월에 발생한 무창기의 혹은 제1차 신해혁명에 참여했다는 한흥교의 예도 더 이상의 언급은 필요 없을 것이다.


3-2) 신해혁명 당시 김규흥의 임무와 역할(비가공 자료를 중심으로)

■ 일본 기밀문서

대정5년(1916년) 9월 22일,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기밀문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자질과 성품이 온화하고 구한국 시대 참봉을 지낸 적이 있다. 1907년(명치40) 고종 양위사건 때 고종으로부터 약 3만원을 받아 장래를 획책하고자 중국으로 달아났다. 제1차 및 제2차 혁명 때에는 혁명당에 가입했다. 혁명이 실패한 후 박은식 등과 함께 홍콩으로 피했다. 1914년(대정3) 5월경 광동 천평가에 체류했다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경에 들어간 모양이다. 향리에는 아내 윤씨 및 장남 김진원(23세)이 있다. 재산이 없어서 목하 규흥의 종제인 신우희 집에서 동거하는데, 그 집일을 도우면서 생활하고 있다. 본인(김규흥)이 중국에 건너간 후 1914년(대정3) 5월에 목하 장사를 하고 있다는 편지를 아들 진원 앞으로 보낸 적이 있을 뿐이다.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在支那 朝鮮人陰謀事件에 관련된 朝鮮人 身上 통보, 1916-09-22『在支那 朝鮮人陰謀事件에 관한 件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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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일제는 “조선인과 독일인의 음모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상당히 심각한 문서를 작성 한 바 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이철(유동열의 이명) 및 김규흥을 지목하고 있는데, 특히 김규흥에 대해선 가족 관계를 비롯한 간략한 이력을 첨부하고 있다. 이 이력서에 김규흥이 제1, 2차 신해혁명에 참여하였고, 혁명 실패 후 박은식 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같은 사건 12월 18일자문서에는 “제1차혁명 당시 생사를 함께하던 지나(중국)인들이 현재 중앙정부의 요직에 있고…”라는 내용도 있다. <北京在留 朝鮮人 狀況 報告의 件, 1916-12-18, 발송 林權助(支那特命全權公使) 수신 本野一郞(外務大臣) 波多野龜太郞(警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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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당시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동지들이 현 중앙정부의 요직에 있어,

이들과 김규흥은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일제는 파악하고 있다.


■ 중국인이 제공하는 증거 자료

다음으로는 신해혁명에 직접 참가한 중국인의 음성을 들어 보자. 혁명 주역 중 한 명이며 대학총장 및 국민당 고위직을 역임한 추노가 1945년 10월, 중경에서 발행된 중앙일보를 통하여 한국의 광복을 축하하며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추노(鄒魯, 1885~1954) 1905년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1907년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여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신해혁명 후 1913년 선거에서 국회중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2차 혁명 실패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면서 1914년 중화혁명당에 가입했다. 1924년 중국국민당집행위원에 당선되었고 서산회의에 가담했다. 1927년 국민당 통합 이후 국민정부위원, 중앙특별위원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상 전동현『두 중국의 기원』(서해역사책방 16), 서해문집 p36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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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창기의 상활을 묘사한 부조  

 

첫째, 조선과 인연을 맺은 것은 40년 정도인데, 조선에서 온 반가운 친구 한 사람이 남방종사혁명 초기에 참가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고 김범재이다.


둘째, 김범재는 ‘조선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선 우선 중국혁명이 성공해야만 한다. 내가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한 것은 이러한 평소의 소신 때문이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셋째, 김범재는 동지로서 충실했으며, 나는 허다한 비밀문건을 그에게 보관시켰으며 많은 정보를 취급, 전달하게 하였다.


넷째, 김 동지는 진영사(진기미)와 친밀한 관계였으며, 나는 그를 통하여 진영사를 알게 되었다.


다섯째, 무창기의 이후, 나는 광동 북벌군 병참총감이 되어 북상했는데, 김 동지가 상해에 있는 진영사와의 연락을 적절히 통제한 덕분으로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었다.

여섯째, 광복 이후(제1차 신해혁명의 성공을 뜻하는 듯) 김 동지는 광동성 정부의 고문직에 임명되었다.

<「朝鮮革命要能成功, 先要中國革命成功. 因爲這個緣故, 所以我來參加了中國革命.」>

이 글에 의하면, 김규흥은 제1차 신해혁명에 깊숙이 관여했을 뿐 아니라 전공도 세웠으며 그러한 공로로 혁명 후에는 혁명 정부의 고위직을 역임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혁명 전부터 광동과 상해를 왕래하면서 진기미 등 중국혁명동맹회의 주요 인물들과 동지의 연을 맺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한편 배경한 교수가 발굴한 중국 측 자료는 또 다른 확실한 증거인데, 1998년 광주(廣州) 廣東人民出版社에서 간행한『산미시인물자료집(汕尾市人物資料集)』제2책에 들어있는 도독부 명단에 김규흥이 중국 망명 이후 사용하던 김복(金復)이 고문에 해당하는 참의에 들어 있음이 밝혀졌다.<배경한, 2007『쑨원과 한국』p305, 한울아카데미 참조> 

■ 김규흥 본인이 제공하는 자료

범재 김규흥이 혁명 정부의 고위직을 역임한 사실은 몇 가지 다른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김규흥의 후손들이 간직하고 있는 몇 장의 사진 중에는 혁명정부의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2장 있으며, 1912년과 1916년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 “전략…작년에 ○○관이요 금년에는 고문관으로 이직했다.…중략…명색이 대관 지위에 앉아서 겨레의 괴로움을 구제하지 않을 수 없어서 구제한 것이…후략” “전략 만리타국에 있더라도 정부 대관으로 떠받치어 지내오니 아무 걱정 마시옵소서.…후략” 라는 글에서도 범재 김규흥의 직책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김상철 ‧ 김상구 2010 『범재와 3.1혁명』p60 참조, 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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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독부 참의 관복을 입은 김규흥 


이와 관련된 자료로 1913년 8월 20일, 김진용(김진용, 김성도, 김복, 김규흥, 김범재는 동일 인물임)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토원군에 가담한 경위와 손문, 황흥, 이열균, 진기미 등 중국 혁명지사들과의 인연 그리고 이들과는 10여 년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 외 혁명 당시 주요임무로서 자신이 각국 정부와 전국에 반포하는 글을 직접 기초했다는 내용도 있다
.<김진용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3. 8.20 도산안창호전집제2권, p78~82>
 

그리고 1913년 8월 5일자, 김성도가 김영일・민충식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이 중국에 오게 된 경위와 원세개(袁世凱) 집권 후의 중국 정세를 전하고 있다. 원세개에 의해 송교인(宋敎仁)이 암살당함으로써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과 그 후 손문(孫文) 등과 원세개 토벌군을 조직하는 문제와 그 의미 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김성도가 김영일・민충식에게 보낸 편지, 1913. 8. 5, 구)도산안창호전집제2권 p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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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교인의 암살은 제2차신해혁명 발발의 기폭제가 된다

 

이상 소개한 일제기밀문서, 신해혁명당사자의 회고, 김규흥의 친필 서한, 중국측 자료 등을 고찰하면, 범재 김규흥이 제1차 및 제2차 신해혁명에 참가한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이 없을 것으로 본다. 여기서 잠깐 짚어 넘어 가야 할 점은 김규흥의 신해혁명 참여가 혹 모화사상에 의한 일신의 영달을 위한 목적이 아니었을까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결은 다음의 자료가 명쾌하게 해결해 주고 있다.

“1912년 겨울 광동 도독의 명령에 의해 나유산(羅幼山)과 한국사람 김복(金復) 등을 만주에 파견하여 한국독립운동을 협력하기 위한 한인의 ‘독립운동기지’를 만들고자 현지조사를 실시한 일이 있었다
.”<羅香林, 『乙堂文存』(香港: 中國學社, 1965), 75~76면, 추헌수, 「독립운동종적」『연세춘추』(연세대학교, 1968-09-16)에서 재인용>



추노에게 고백했듯이 범재 김규흥의 원래 목적은 조국의 독립이었으며. 중국 측 혁명동지들도 범재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이 된 셈이다. 범재와 동맹회 회원 간의 동지적 유대관계는 그 이후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유지되는데, 다음 장에서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다. 


 

기사입력: 2011/06/19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382&section=sc12&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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