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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益烈장군 실록유고- 4‧3의 진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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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323회 작성일 11-04-0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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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최고 수뇌회의 ①

귀순공작의 성공으로 제주도 전역에 전투가 종식되고 완전진압이 눈 앞에 보이던 중 경찰의 방해공작과 귀순폭도들의 잇단 피살로 폭동이 재연되는 상황으로 급변하고 만다. 당황한 미군정청장관 딘 장군은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현지에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제주읍에 비래(飛來)하겠다고 연락해 왔다.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나와 함께 회의준비를 하였다.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는 사전에 나에게 자기들의 난처한 입장을 설명하고(딘 장군이 자기들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고 강압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차후대책과 작전을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3인은 회의에 내놓을 일체의 증거물과 사진첩을 준비하였다(당시 9연대는 사진자료와 그런 자료를 만들 시설이 없었으나 미군정에서 수집작성한 앨범이 있었다).

 

회의는 5월 5일 12시에 개최되었다. 장소는 제주중학교의 미군정청 회의실이었다. 참가자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씨(목사출신)이었다. 이상 9명이 참가한 회의는 극비에 부쳐졌다.

회의는 맨스필드 대령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회의의 첫머리에 맨스필드 대령은 이 회의는 딘 장군의 명에 의하여 참석자 누구든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으며, 이 회의의 내용은 극비이며 누설자는 군정재판에 회부한다고 선언하고 먼저 경찰에서 설명하라고 하였다.

 

경찰을 대표하여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씨가 상황설명과 건의를 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이 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전에 조직 훈련‧계획된 폭동이며 군‧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송호성 장군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 장군은 제주도 실정은 연대장이 자기보다 잘 아니 연대장이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송 장군의 지시에 따라 군의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 내용과 건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성을 이용해 공산주의자‧불평분자‧밀무역자 등 각종 성분의 무리가 일으킨 도민폭동으로 본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와 경찰간의 마찰이다. 폭동자 수가 수만으로 증가된 것은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데서 기인된 것이다. 실제 무장한 인원은 3백명 이내로 보며 나머지는 여러가지 불가항력으로 인한 동조자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①적의(敵意)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제주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된다 ②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하여야 된다. 일방으로 회유와 선무를 하며 응하지 않는 자는 토벌하는 것이다 ③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며 이것이 폭도증가의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나의 지휘하에 달라. 작전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도 이 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보고와 건의가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물을 제시하겠다 하면서 준비하였던 물적 자료와 사진첩을 제시하였다. 사진첩을 보자 (사진첩에는 맨스필드 대령이 영문으로 상세한 설명을 기입해 놓았다) 딘 장군은 흥분하여 안색이 붉어지며 즉석에서 나의 건의를 채택하는 동시에 경찰을 나에게 배속시키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진첩을 조병옥씨에게 던져주면서 불쾌한 어조로 “닥터 조, 이것 어떻게 된 일이요, 당신의 보고 내용과 전연 다르지 않소”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병옥씨는 사진첩을 두루 살피면서 당황한 기색이더니 갑자기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는 우리말로 자기가 설명하겠노라고 인사를 하고는 그 다음은 유창한 영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조병옥씨는 처음에는 영어로 한 말을 자신이 통역하는 식으로 설명하다가 열을 띠자 우리말을 치워버리고 영어로만 떠들었다. 영어를 모르는 안재홍씨‧송호성 장군‧유해진 도지사는 무슨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조씨는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 (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가 작성한 것인데)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요”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닥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딘 장군은 나를 제지하며 연설 방해를 하지말라고 명령하였다. 조병옥씨는 계속해서 나를 가리키며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 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요”하면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더구나 나의 부친은 내가 다섯살때 이미 작고한 분이었다).

딘 장군은 조병옥씨가 나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나를 쳐다 보았다. 맨스필드 대령까지도 의외라는듯 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내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힐 판이었다. 나는 격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하는 조병옥씨에게 달려들었다.

 

 

 

20. 최고수뇌회의 ②

 

나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 치려고 하였다(나는 유도 3단이었다). 그러나 조 박사는 의외에도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 조 박사는 숨을 못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천씨가 말리러 올라왔으나 나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서 그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하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송 장군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이 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하며 고함을 친다. 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호령호령했다. 돌아가는 내용의 대강을 눈치챈 안재홍 민정장관은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역시 소리만 지를 뿐 단상에 올라와 말릴 뜻은 없었다. 유해진 지사가 단상에 올라와 나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노령이라 역부족이었다.

 

나는 미친듯이 덤볐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딘 장군은 싸움은 말리지 않고 떠들고만 있는 안재홍씨와 송호성 장군이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냐고 통역관 김씨를 옆으로 불러 물었다. 그런데 이 자의 통역이 또 괴변이다. 그 경황 중에도 내가 단상에서 듣자니 이 자는 딘 장군에게 안재홍씨와 송 장군이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터무니없는 통역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대로 치밀어서 두 손으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붙잡은 채 단하로 끌어 내리면서 김 통역관에게 발길질을 했다. 입을 걷어찬다는 것이 빗나가서 그만 그 자의 음부 급소를 걷어찼다. 김 통역관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루 위에 나뒹군다. 놀란 딘 장군은 급히 회의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가더니 대기 경호중이던 미군헌병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수 명의 MP가 달려들더니 그 중 2명의 MP가 양쪽에서 나의 두 팔을 붙잡아 조 박사에게서 떼어놓고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두 팔을 잡고 꼼짝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장내의 소란은 끝났다.

 

모두가 대단히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딘 장군은 “콰이엇, 콰이엇(조용히 하라)”하면서 진정하라고 명령하였다. 2~3분간의 침묵이 있은 후 딘 장군은 조병옥씨에게 단상에 올라가 설명을 계속하라고 하였다. 조 박사는 이번에도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욕설로 맞섰다. 딘 장군은 다시 “콰이엇”을 연발한다. 안재홍씨도 “연대장! 조용히 하시오”하고 말렸다. 송호성 장군도 고함 고함을 지르며 “이놈! 이놈!” 호령했는데 그 대상이 연대장인지 조병옥씨인지 분명치 않았다. 나는 그것이 조병옥씨를 향한 욕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안재홍씨가 탁자를 두드리며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하면서 방성통곡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울음을 한참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장내는 순식간에 숙연해지고 안재홍씨의 통곡소리만 들렸다. 조병옥씨도 연설을 중지하고 나도 욕설을 멈췄다. 딘 장군은 안재홍씨와 조병옥씨의 안색을 번갈아 보면서 어떤 영문인지를 살핀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서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해산이오”하고 고함을 지르듯 선언하고는 문을 열고 총총히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한참있다가 조병옥씨가 그 뒤를 쫓아나갔다. 회의장에는 안재홍씨와 송호성 장군 그리고 나 3인만 남게 되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재홍씨는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비극이오”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비행장으로 직행한 딘 장군이 두 사람에게 속히 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일행은 제주에서 1박할 당초의 예정을 바꿔 딘 장군을 따라서 상경하고 말았다. 회의는 결국 아무런 결론도 못내린 채 난장판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21. 연대장의 교체

 

미군정 최고수뇌회의가 아무런 결론없이 유회된 다음날 오전 11시경 제주읍 소재 연대임시본부 겸 연락소(일제 때 금융조합 건물)에 난데없이 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인 박진경(朴珍景) 중령이 도착하였다. 나는 최고참모의 방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후임 연대장으로 오늘 아침에 명령을 받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어떤 밀명 - 그것도 내가 염려하고 그토록 싫어했던 그런 밀명을 받고 왔구나 하는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출세와 보신을 위해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나는 즉각 본부 장병들을 집합시켜 연대장의 이취임식을 끝내고 나자 서둘러 상경준비를 하였다. 그런 나에게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을 통해 뜻밖의 상부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박진경 중령은 연대장으로서 명령권을 가지고, 김익렬은 연대장의 고문이 됨과 동시에 작전지휘를 책임진다’는 것이었다. 작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된다고 하였다. 참으로 비정상적인 지휘계통과 책임한계였다. 정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 사정으로서는 이해됨직한 일이기도 하였다. 신임 박진경 중령은 소위 임관 후 그 때까지 고급부관직을 지낸 행정장교 출신이므로 부대 작전지휘는 경험이 없었다. 그런 그가 당장 연대지휘를 맡는다는 것은 사실상 곤란한 문제였다. 또 지금과 같이 막중한 시기에 제주도의 지리 지형에 밝고 부대의 파악과 지휘 등 군사적인 유경험자인 나를 경질하는 것은 만일의 경우를 고려할 때 대단히 불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변칙적인 임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또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표면적인 명분상으로는 당시 미군정하의 제1인자였던 조병옥씨를 폭행한데 대한 문책 경질이었지만 내용은 그 것만은 아니었다. 딘 장군은 박진경 중령에게 극비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제주도 전역에 대한 초토작전 명령이었다. 현지 연대장인 나와 맨스필드 대령은 절대 반대해 온 작전이었다. 초토작전은 인도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고 전시에도 명령하거나 묵인한 사령관은 전범으로 처형을 면키 어렵다. 하물며 전후(戰後) 평화시에 자기가 군정하는 영토내의 국민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가 세상에 알려지면 그 결과는 엄청날 수 밖에 없다. 전범재판을 받지 않는다해도 그는 인도적으로 처형될 것이다. 더구나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과 내가 한사코 초토작전을 반대하므로 명령으로 강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딘 장군은 자기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여줄 연대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딘 장군은 미국정부로부터 제주도 폭동의 조속한 진압을 독촉받고 있었다.

 

나는 연대장의 임무한계에 대하여 동의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박진경 중령과 나는 고향 친구로 절친한 사이였다. 박중령의 결혼식때 내가 들러리를 설만큼 가까웠다. 박중령은 일제 때 대판(大阪)외국어학교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하였다. 구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었다. 그 경력이 제9연대장으로 임명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전투준비를 마치고 전투명령을 대기 중이던 부대로 신임 박진경 연대장을 안내하여 거기서 또 한차례의 이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그 자리에서 박진경 연대장은 취임식 인사 중 연대장의 통솔과 작전방침을 밝히면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나는 부대통솔 경험이 없는 철부지의 이 실언에 대하여 나무라고 다음부터는 중지하도록 강력히 충고하였으나 박중령은 소신대로 자기의 의지를 부대 장병들에게 훈시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오히려 나에게 대들었다. 그는 각 부대를 순방하면서 예의 훈시를 계속하였다. 이 실언이 장차 박진경 중령이 불행을 당하는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실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자신의 혈통에 관한 소개가 우선 실수였다. 자기 부친은 친일파들의 정치집단이었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중요간부였다고 소개했다. 이 필요없는 소개를 왜 해야만 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자기는 절대로 공산주의자와는 적대관계라고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②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그래서라도 독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 다시 말해서 초토작전을 감행하겠다는 의지의 발표였다.

 

고급지휘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실언이었다. 이런 언행은 부대지휘 경험이 없는 참모출신이나 정치적인 배경으로 출세한 장교들이 흔히 범하는 과오다. 그것은 군대는 명령만 하면 복종한다는, 통솔의 기술을 무시하는 환상에 기인한다. 군인들은 이해관계에 얽매인 조직체는 아니다. 군인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충성심으로 결속된 조직체이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이라는 대의명분 없이는 귀중한 자기 목숨을 희생하려고 생각지 않는 것이 군인이다. 상관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위하여 그릇된 사병(私兵)놀이를 하지 않는 것이 군대와 시정 폭력조직과 다른 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군인은 목숨을 바칠만한 명분 -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대의가 있어야 복종한다. 이런 사실을 박진경 중령은 망각하고 군인은 무슨 명령이라도 복종하는 줄 착각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박진경 중령과 나는 다음 날부터 토벌에 관한 상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작전에 관한 개념이 서로 달랐다. 그러니까 의견이 상통할 리가 없었다. 불과 1시간도 못되어 의견충돌이 생겼다. 박중령은 자기의 임무수행에 방해가 되니 제주도를 떠나 달라고 하였다. 나도 화가 나서 떠나달라면 떠나겠다고 내뱉고는 그 길로 비행장으로 향하였다. 마침 대기 중이던 비행기를 타고 상경하여 나는 총사령부로 직행하였다. 이것이 나와 제주도의 이별이었다. 나는 그 후 5년간을 제주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악몽같은 제주도 사건의 기억때문에‧‧‧.

 

22.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

서울에 도착, 총사령부로 들어간 나는 송호성 사령관에게 그 후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는 “제주도 사람은 이제 다 죽었구나”하면서 제주도민의 생명을 걱정하였다. 한편 서울의 경비대 장교들은 나의 행동을 전해 듣고 한결같이 칭찬하고 지지하여 주었다. 나의 행동은 나 개인의 행동이기 보다는 당시 군인들의 정신을 보여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조병옥씨 일파의 나에 대한 집요한 중상모략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이 나를 절대지지했기 때문에 전경비대 군인들이 경찰과 조병옥씨에 대한 적개심을 터뜨리는 도화선이 될까봐 미군정도 감히 나를 박해할 수 없었다. 나는 3~4일간 서울에서 휴식을 취한 뒤 여수 소재 제14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내려갔다. 그것은 나 개인적으로는 전화위복이었다.

 

그러나 인생유전(人生流轉)의 무상(無常)이 여수에서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수 14연대장으로 부임한지 1개월이 못되어 나의 후임 제주 제9연대장 박진경 대령(그동안 대령으로 진급)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무부장 조병옥씨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진경 대령의 암살지령자는 김익렬이라고 무고하였다. 나는 박대령 암살주범으로 의심을 받고 서울로 소환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무고가 전화위복이 되어 나는 4개월 후에 발생한 여수 14연대의 여순반란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게 된다. 나의 후임 14연대장 오동기(吳東起) 중령은 반란발생을 미연에 방지 못하였다는 죄명을 쓰고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사망하였다.

 

내가 제주도를 떠난 후 박진경 연대장은 ‘소신껏’ 폭도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토벌방법은 과거 일본군이 만주‧중국 등지의 점령지에서 유격대를 토벌했던 것처럼 양민과 폭도를 구분치 않고 폭도 출현지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은 무차별 토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의 결과는 여의치 않았다. 경비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는 반면에 폭도측에 가담하는 도민들이 날로 늘어서 폭도의 수는 급격히 증가해 갔다.

 

약 1개월이 경과된 후 군정장관 딘 장군은 박진경 연대장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하여 몸소 제주도에 내려가 연대장을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진급 당일 제주도 관‧민 유지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진급축하연을 열었다. 박진경 대령은 만취하여 밤늦게 연대본부의 자기 숙소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만취하여 취침 중인 그를 연대장 숙소 근무병(당번병)이 M-1소총으로 사살하고 자수하였다. 박대령은 말 한마디 못하고 즉사하고 아까운 청춘을 이렇게 끝내고 만 것이다.

 

범인들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고 수십 명의 피의자를 색출, 주동자 일당이 체포되었다. 범인은 문상길(文相吉) 중위를 주범으로 하는 하사관 1명과 이등병 1명 등 모두 3명이었다. 연대장을 직접 사살한 자는 이등병이었다. 문상길 중위는 경북 출신이었고 나머지 2명은 경남 출신이었다. 제주도 출신은 없었다. 특이한 것은 문중위 등 3명이 모두 기독교 신자로 문중위는 특히 신앙심이 강하였다고 한다. 당시 나이 23세였다.

 

자기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던 박진경 대령이 암살당하자 딘 장군은 대로했다. 그 뿌리를 뽑기 위하여 미군 CIC를 총동원, 철저한 수사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9연대 전장병을 심문하고 또 비밀 무기명으로 여론조사도 실시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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