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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益烈장군 실록유고- 4‧3의 진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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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277회 작성일 11-04-0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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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귀순.평화회담 ④

나는 먼저 오늘 당장 지서습격 등 일체의 전투행위를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김달삼은 전도에 연락하려면 시간이 걸리므로 즉각 전투행위 중지는 불가능한 일이며 5일후 전투중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의 그런 대답에 나는 불쑥 의심이 들었다. 김달삼이 유일한 폭동두목이 아니라 다른 두목들이 여러 명 있어서 닷새간에 자기들끼리 회합을 가져 합의에 의하여 결정하려는 수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와의 합의가 무의미했다. 만일 폭도의 두목이 몇명 더 있다면 각자의 견해가 다를 것이며 그 중 공산주의자가 한 명이라도 끼어있으면 합의는 불가능할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은 유일한 실권자가 아니고 또다른 실권자가 여러명 더 있어서 합의할 시간을 벌기 위하여 5일이 필요한 것이냐”고 물었다. 김달삼은 즉각 부인하면서 단지 연락에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다시 그렇다면 대정면‧중문면은 오늘 즉각 전투중지하고 그밖의 지역은 24시간 이내로 하자고 하였다. 김달삼은 5일은 꼭 걸린다고 설명한다. 생각하여 보니 도보로 산간부락까지 전도에 연락하자면 수삼일은 걸릴 것이고 또 연락을 받고 자체모임을 갖고 하다보면 그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투 완전중지가 72시간 이내에 이루어져야 하고 기타 산발적인 전투는 연락미달로 간주하되 5일 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단정하기로 합의 결정되었다.

 

제 2의 조항은 즉각 무장해제였다. 김달삼은 먼저 비무장 주민들을 하산시켜 약속이 이행되는가 확인하고 나서 약 3개월 후에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면 대원의 무장해제를 받겠다고 고집했다. 나는 그것은 무장해제를 의미하지 않으며, 전원 완전 무장해제만이 회담의 성패에 관한 요점이며, 폭동진압의 완료이고 평화의 회복이라고 무장해제를 강요하였다. 결국 단계적으로 무장을 해제하되 약속을 불이행하면 즉각 전투에 들어간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제 3조항은 범법자의 자수와 명단의 작성과 제출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김달삼은 완강히 거절했다. 살인‧방화는 ‘정당방위’였고 ‘의거’전투에서 있게 마련인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유야 어떻든 법치국가에서 법에 호소하지 않고 살인‧방화한 행위는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불법이며, 재판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김달삼은 이 문제에서만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기들의 행동은 정당방위였고 합법적 행위라고 완강하게 주장했다. 간단히 끝날 것 같지 않아서 그것은 나중에 토의하기로 하고 나의 요구는 이상 3개 조항이 전부이므로 이번에는 김달삼의 요구조건을 들어보자고 하였다.

 

그가 내놓은 첫째 조건은 제주도민으로만 행정관리와 경찰을 편성하고, 민족반역자와 악질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들을 제주도에서 추방하라는 것이었다. 이에대해 나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관리‧경찰은 사실이 증명되면 해직 추방할 것이며, 서북청년단원들도 범법자는 처벌하고 추방하겠지만, 제주도민만으로 행정기구‧경찰을 편성하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이고 군인으로서 나의 권한 밖이다, 그러나 독립이 되고 우리 정부가 들어서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자연 그리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 선에서 김달삼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하고 첫째 조건은 합의 결정되었다. 합의가 이루어지자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두번째 조건은 제주도민으로 편성된 경찰이 구성될 때까지 군대가 제주도의 치안을 책임지고 현재의 경찰은 해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평화회담이 성립되면 자연히 군대가 치안을 담임하고 경찰은 군대의 보조역할을 하게 되어 나의 지휘를 받을 것이므로, 경찰은 해체할 필요가 없고 다만 인원은 감축개편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 문제도 합의결정된다.

 

세번째 조건은 의거(폭동)에 참가한 여하한 사람도 전원 죄를 불문에 부치고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나는 ①교전시 이외에 발생한 살인‧방화범을 제외하고는 전원 범죄 일체를 불문에 부칠 것이고 군에 귀순하면 군에서 책임지고 생명‧재산의 안전과 자유활동을 보장하겠다 ②살인‧방화자들과 기타 사람들을 구별하고 책임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살인‧방화를 저지른 장소와 일시를 기입한 명단을 작성하고, 범인들이 자진 귀순하면 관대한 처분을 할 것이며 절대로 사형이나 종신형 같은 중형에 처하지 않도록 보장한다고 했다. 김달삼은 완강히 반대했다. 이번에는 도무지 굴복할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벌써 시간이 오후 4시30분이 되어 있었다. 나는 김달삼에게 “나는 지금 돌아가야 한다. 내가 5시까지 연대본부에 돌아가지 않으면 나의 부하들이 회담이 결렬되고 내가 당신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단정하고 보복의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필요한 오해와 유혈이 발생할 것이니 오늘은 이것으로 일단 휴회를 하고 내일 또다시 시간을 결정하고 이 장소에서 회담하자”고 했다. 갑자기 회담장소는 긴장되었다. 김달삼은 회담이 오늘내로 결말을 짓지 못하면 사실상 회담은 결렬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품이 회담에 관한 나의 성의를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어조였다. 말하자면 평화회담이 주목적이 아니고 평화회담을 빙자하여 사실은 정탐이나 분열공작을 하러 온 것이 아니냐 하는 말투였다.

 

나는 다 되어가는 회담이 결렬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회유책을 쓰기로 하였다. 나는 김달삼에게 최후로 나의 제안을 하겠다며 합의되지 않으면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나는 범법자의 명단은 작성하여 범법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명단에 기재된 범인들의 자수‧도망은 자유의지에 맡기겠다. 그리고 김달삼 당신과 두목들은 중벌을 면하기 힘들터이니 책임지고 모든 폭도의 귀순과 무장해제를 시켜준다면 합의서에 명문화할 수 없으나 나 개인적으로 도외나 해외(일본을 뜻함) 탈출을 배려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자 회담장 내는 반기는 기색으로 술렁대고 김달삼은 쾌히 수락했다. 그는 나의 손을 잡고 악수를 청했다.

 

이 제안은 정부의 권위와 대의명분이 지켜진다는 전제하에 범법자들이 자수하든, 생명이 아깝고 벌이 무서워 해외로 도망가든 말리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즉 폭도전원에 대한 무죄사면이나 다름 없었다. 단 표현상으로 정부의 권위만은 세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김달삼과 폭도두목들의 탈출을 위하여 성능이 좋은 선박을 1척 제공할 용의도 있다고 약속하였다(그 당시 모슬포 항에는 나포된 일본 어선이 10여척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약속은 나의 명예와 생명을 걸고 준수하겠다고 하였다.

 

 

16. 귀순활동의 진행

 

그러나 김달삼은 귀순과 무장해제가 끝나고 모든 약속이 준수 이행되면 자기는 당당히 자수하여 폭동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겠으며 법정에서 폭동참가자들의 행동은 자위를 위한 정당방위였음을 밝히고 경찰의 압정과 만행을 만천하에 공표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런 쾌남아다운 면모가 폭도들의 호응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합의된 귀순절차는 내일 낮 12시를 기하여 모슬포 연대본부 내에 1개소, 제주읍 비행장에 1개소의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되 군대가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금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서귀포‧성산포 등에도 수용소를 설치하기로 하는 외에 기타 연락 등에 관하여 합의함으로써 귀순평화회담은 마침내 성사되었다. 이제는 성실한 약속이행만 남았다. 이렇게 되면 평화가 오고 제주도 폭동사건은 완전 진압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합의되고 나자 나는 일종의 허탈감마저 느꼈다.

 

김달삼과 폭도들은 합의서의 약속이행을 거듭 강조하며 진짜 약속대로 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의문과 불안을 느껴 아무래도 안심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의 약속에 대하여 정녕 신뢰와 안도를 갖지 못한다면 내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두어도 좋다고 하였다. 폭도들이 나 하나만 믿고 모든 생명을 맡기고 귀순하는 만큼 혹시 내가 배신하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폭도들에 나의 전가족을 인질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했더니 여기 저기서 감격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제주도에 평화가 오는구나” “우리도 집에 돌아갈 수 있다”하며 여자들 중에는 엉엉 우는 사람도 있었다. 퉁퉁 부은 젖가슴을 나에게 보이면서 속히 집에 돌아가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여인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몰려와서 감사와 애원의 말을 쏟아 놓았다. 폭도들은 갑자기 김달삼의 부하가 아니라 연대장인 나의 부하가 된 것처럼 내 주위에 몰려들어 둘러쌌다. 그리고 귀순 후 경찰의 보복박해로부터 연대장이 보호해 달라는 등 여러가지 호소를 하였다.

 

나는 인질이 될 나의 가족들을 인수할 장소와 일시를 말하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김달삼은 감격하여 눈물어린 눈으로 나를 한참 주시하더니 “감사합니다. 그렇게까지 애족(愛族)하시니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송구스러워서 노령하신 노모님과 연약한 부인과 아드님을 불편한 산에서는 모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원이 약속이행에 대해 불안해 하니 가족들을 연대 내에서 (그 당시 장교가족들은 연대내에 수용되고 있었음) 자기가 지정하는 민가에 옮겨와 살도록 하고 부근에 일체의 군인 배치를 금하며, 출입도 금해달라”고 했다. 그 민가는 전 면장의 집으로 나도 한때 숙소로 사용했던 집이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주변에서 감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귀대키로 약속된 시간이 넘었으니 이제 귀대하겠다고 하였다.

 

회담장소에선 연대본부가 내려다 보였다. 부대는 전투무장한 병사들이 수대의 트럭에 타고 출동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부녀자들의 애원과 폭도들의 칭송이 뒤범벅된 환송을 받으며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하산하여 연대본부에 귀대하였다. 귀대즉시 회담성공을 알리고 무장을 해제시킨뒤 수용소 설치를 명령하고는 급거 제주읍으로 향하였다.

 

밤늦게 제주읍에 도착한 나는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에게 일체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맨스필드 대령은 나의 성공을 대단히 기뻐하며 칭찬을 하였다. 그리고 나의 요청에 의하여 전경찰은 지서만 수비 방어하고 외부에서의 행동을 일절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지서 울타리 밖의 일체의 치안책임은 경비대에 일임되었다.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폭도진압이 단시일내에 평정의 가능성이 엿보이자 용기를 되찾고 나를 적극 지원하여 주었다. 전단을 만들어 이 회담의 내용을 전도에 살포하여 폭도들에게는 무모한 유혈을 삼가고 귀순하라고 권고하는 한편 폭도들이 과연 약속을 지킬 것인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시하였다.

 

폭도들은 약속대로 대정‧중문면 일대에서는 그 날로 즉각 전투 중지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한림‧제주읍에 이르는 일대에서도 전투를 완전히 중지해 나갔다. 다만 조천면 관내 몇 곳에서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으나 그것도 곧 중지되어 오래간만에 제주도는 총소리가 그치고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전투는 일단 멈췄으나 귀순과 무장해제는 처음에는 지지부진하였다. 첫날에는 연소자와 부녀자만 귀순하였고 그 수도 극히 적었다(그 수는 점차적으로 늘어났다). 가지고 온 무기도 대부분이 사용불가능한 것이고 카빈은 1정도 없었다. 폭도들은 귀순자와 무장해제자에 대해 군대가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을 모든 정보를 총동원하여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군대는 군대대로 귀순자의 처리에 특별히 조심하고 손님 모시듯 하였다. 그러자 귀순자는 갑자기 늘기 시작해 수용소에 준비한 천막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 귀가를 희망하는 자들은 필요한 처리를 하고는 귀가를 시켰다. 다만 귀가 후의 행동은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까 제주도는 생기를 되찾았다. 군대는 대단히 분주해 졌으나 군인들은 신이 나서 천막을 치고 수용소를 증설하고 또 선무공작에 나서는 등 피곤도 잊은 듯하였다.

 

17. 귀순 방해공작 ①

 

휴전 4일째 되는 5월 1일은 노동기념일인 ‘메이 데이’ 날이었다. 이날 오전 11시경 제주읍 중산간 부락 오라리(吾羅里)에 정체불명의 일단(一團)이 습격하여 부락민을 죽이고 부락을 방화하는 난동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두고 경찰은 공산폭도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폭도들은 경찰이 서북청년들을 시켜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군정장관과 나는 경찰의 소행으로 심증을 굳혔다. 그 이유는 당시 육지의 각지로부터 연대증원군이 속속 제주도로 들어오고 있었고 평화로운 가운데 귀순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이때에 폭도측이 아무 이유도 없이, 전술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오라리라는 단 한 마을에 대해서 그것도 백주에 만행을 하리라고는 정세의 대세로 보아 있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귀순이 시작되자 여러가지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었다. 군정장관 맨스필드에게 들어간 악선전 중의 하나는 연대장이 폭도들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폭도들이 귀순을 가장하고 시간적 여유를 얻어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대대적인 기습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정식보고서로 작성해 군정청에 제출했다. 반면에 제주읍과 각 부락에는 ‘연대장이 폭도를 기만하여 폭도 전원을 귀순시켜 놓고 일시에 몰살하려한다’는 낭설이 돌고 있었다.

 

맨스필드 대령은 이 모든 것들을 경찰들에 의한 귀순방해 공작으로 판단하고 나에게 “경찰의 방해공작이 시작되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하고 특히 나의 신변안전에 유념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경찰의 방해공작이라니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맨스필드 대령은 자기도 확실히 모른다며 대략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용의 요점은 수일내에 귀순작업이 종료되어 폭도진압이 끝나게 되면 경찰과 경무부장 조병옥씨와 그 추종자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약 1개월 전 호언장담하고 제주도폭동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공안국장 김정호씨가 진두지휘하여 토벌을 시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폭도진압은 고사하고 경찰은 막대한 피해만 입었다. 패전의 연속으로 육지에서 파견되어 온 대부분의 경찰관들은 무기를 버리고 흩어져 제주도 각지 항구에서 밀선(密船)을 타고 육지 자기 고향으로 달아나 버린 반면에 폭도는 수천인지 수만인지 모를 숫자로 증가되고 토벌나간 토벌대가 폭도들에 무기공급원이 되고 말았음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완전히 전의를 잃은 경찰은 토벌을 포기하고 제 2선으로 후퇴하고 경비대가 폭동진압의 책임을 지게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서울의 정계에 알려지고 미군정청에 상세히 알려지면 조병옥씨의 입장이 난처하여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경비대가 폭도진압의 책임을 맡은지 불과 열흘이 못되어 연대장인 28세의 백면(白面)의 청년이 전투도 해 보지않고 단신 적지에 들어가 회담으로 귀순공작에 성공한 것이다. 사정은 어떻든지간에 수삼일에 전도에 걸쳐 전투가 종식되고 평온을 되찾았으니 폭동은 사실상 진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자잘한 뒤처리만 남았으니 조병옥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제주도 현지경찰의 허위보고만 듣다가 대세의 판단을 그르쳤고 그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였을 적엔 때는 이미 늦어버렸던 것이다. 폭동이 신속하게 진압되어 뒤처리 문제로 들어가 폭동발생의 원인이 밝혀지고 초토작전의 진상이 탄로되면 그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 처하여지는 것을 몰랐을리 없다. 조병옥씨 일파는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서는 화평‧귀순공작을 방해하고 폭동을 재연시켜 자기들이 주장해온 공산폭동으로 조작하는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방해공작을 극비리에 제주도 현지경찰에 내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는 경찰의 이 비애국적인 처사에 대단히 분개하면서 경찰의 방해공작을 철저하게 경계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심지어 방해공작의 하나로 연대장을 암살할 수 있다는 경고까지 해 주었다. 나는 이 정보를 듣고 설마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하였더니 그들은 “당신은 나이 어리니 잘 이해가 안갈는지 모르나 사실은 사실이니 주의하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무엇이 무엇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했고 아무리한들 그럴리가 있겠느냐고 반신반의하였다. 그후 부대참모들에게 상의를 하였더니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는 자기 정보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와 있다며 연대장에게 보고하려던 참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경비대는 폭도와 경찰 양면으로 신경을 쓰게 되었고, 고급장교들은 자위수단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던 차에 예기하던 불길한 사태가 드디어 5월 3일 발생하고야 만 것이다. 그날 오후 3시경 귀순폭도 2백~3백명이 오라리 부락 부근을 거쳐 제주비행장에 설치된 수용소로 귀순한다는 연락이 왔다. 연대고문 드루스 대위와 미군병사 2명, 9연대 병사 7명이 하산하는 귀순폭도들을 호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완전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92식 일본군 중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귀순폭도들과 미군들을 기습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폭도들은 총에 맞아 죽고 생존한 나머지는 산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경찰은 계속 미군과 9연대 병사들을 향하여 집중사격하였다. 그들은 중기관총 엄호하에 드루스 대위 일행에게 공격을 가해왔다. 경찰은 숫자가 훨씬 많았으나 드루스 대위는 2차대전의 역전의 용사였다. 2명의 미군병사를 시켜 M-1총으로 중기관총 사수를 사살하고 일제히 경찰지휘관을 집중사격하여 그를 쓰러뜨렸다. 경찰은 5명의 사체를 버리고 제주읍 방면으로 도주했다. 쓰러진 자는 제주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위였으며 양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중상은 아니었다.

 

구사일생한 드루스 대위 일행은 격분했다. 부상한 경위를 미군정 본부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여 주고 나서 드루스 대위 일행을 기습한 이유를 심문하였다. 그 자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하였다.

 

 

18. 귀순방해 공작 ②

 

격분한 맨스필드 군정장관과 드루스 대위는 제주경찰서장을 군정본부로 소환하여 문책하였다. 문용채 서장은 도망하여온 부하들에게 들어서 사건의 진상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므로 당황하여 대답을 못하였다. 조사하여 내일 보고하겠다고 하고 부상자와 중기관총을 인수하여 돌아갔다.

 

다음날 미군정장관은 김정호 경찰토벌대장을 소환하여 어제 발생하였던 사건의 경과를 따졌다. 김정호씨는 뻔뻔스럽게도 눈 하나 깜짝않고 이 사건은 공산주의 폭도들이 경찰을 중상하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고 잡아 떼었다. 경찰을 미군정과 군대와 이간시키려고 폭도들이 경찰로 위장해 기습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 드루스 대위에게 총격을 가한 경찰들도 사실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제주도출신 경찰이며, 이 자들은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의 중기관총 등 무기를 가지고 공산폭도들에 가담하여 현재까지도 경찰복장과 무기를 가지고 민가를 습격하고 선량한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드루스 대위를 습격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생포된 경위도 사건발생 전에는 제주도 경찰서 본부에 근무하던 자였으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로서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부하들을 데리고 산으로 도망간 사람이라고 하였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그 자가 어젯밤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감시소홀을 틈타서 자살하였으므로 사체를 검증하여 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잔인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들의 음모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자기 부하를 살해하고 나서 김정호는 대사(臺詞)를 작성하여 우리들 앞에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허위조작을 믿을 리 없었다. 우리는 격노하였다. 그랬더니 김정호는 미소를 띄우며 천연스럽게 “당신들이 나의 보고를 신뢰하지 않는 것은 바로 공산폭도들이 원하는 것이다. 공산폭도들은 미군정과 경찰을 이간시켜 경찰을 제주도에서 쫓아내고 제주도에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다. 당신들은 지금 그들의 기만작전에 걸려든 것이며 경찰의 보고를 신용하는 것만이 공산주의자를 타도하는 길이다”하며 우리를 설득하다가 돌아갔다. 나는 너무 분노가 치밀어 신(神)을 원망하기까지 하였다. “신이 어째서 하필이면 이런 악인들을 우리 민족 중에서 태어나게 하였는가!”하고. 나는 김정호씨나 제주도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씨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아무런 이해관계나 원한관계도 없었으며 그 후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자들은 인도적으로 영원히 저주받아야 될 사람들이다.

 

그 후 사태는 소문 듣던대로 발전해 나갔다.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귀순공작에 대한 방해공작이 노골화되어 갔다.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도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다.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 그리고 귀순하여 귀가하였던 폭도들이 각지에서 살해되었다. 폭도측에서는 나에게 귀순 약속의 위반이라고 결사적으로 모든 보복을 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경찰측에서는 귀순폭도의 살해는 폭도들이 자기들의 배반자를 처형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 저기서 민가가 방화되고 양민이 학살되었고 이에 대해 경찰과 폭도는 서로 상대방의 소행으로 책임을 전가하였다. 나는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폭도측은 나에게 기만했다고 비난하고, 경찰측은 내가 폭도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중상모략을 일삼았으므로 실로 난처하였다.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중지되었던 전투가 재발되니 대로하였다. 내가 격분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이 인간들의 더러운 행동을 보고 나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후회되기까지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바뀌자 귀순하였던 폭도들은 다시 산으로 도망가 버리고 일주도로 주변에 피난하였던 양민들마저 산으로 피신하는 자가 늘어났다. 양민들이 산으로 피난하는데는 한가지 중요한 까닭이 있었다. 당시 일선지서에는 제주도 출신 경찰관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찰 수뇌들은 이들이 산의 폭도들에게 경찰의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여 일제히 제주읍 본서로 불러들여 근무를 시켰다. 이것이 도민들에게 일대 불안을 주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쯤되자 실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쯤으로 비관하지 않을만큼 나의 고집도 강하였다. 나는 즉각 제9연대에 명하여 부대를 각 지서 부근에 배치하여 지서를 습격하는 폭도든, 지서를 나와 민가와 폭도를 습격하는 경찰이든 가릴 것 없이 군대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사살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이 사실을 경찰과 폭도 양측에 통고하고 모든 전투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이 단호한 조치에 경찰과 폭도측은 겁을 먹고 일시에 조용해 졌다. 다시 총성은 멈추고 소강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도의 공기는 폭풍전야와 같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출처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원문보기   글쓴이 : 한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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