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1-8. 아르헨띠나, 미국의존에서 벗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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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반미열풍
□ 아르헨띠나, 미국의존에서 벗어나다
아르헨띠나를 생각할 때 《슬퍼말아요, 아르헨띠나》가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극 《에비타》에 나오는 대사이다.
《에비타》는 유명한 에바 뻬론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사랑의 삶의 일대기를 노래로 엮은 명작이다. 1978년 웨스트엔드 초연에서 2 900회를 공연하였고 그후 브로드웨이에서 1567회 장기공연을 하였다. 토니상 7개 부문을 수상한 세계적명작 오페라이기도 하다.
가난한 농부의 사생아로 태여나 3류배우에서 1945년에 뻬론과 결혼하고 1946년에 국모의 자리에 올라앉은 에바(애칭 에비타)는 남편인 뻬론대통령의 정치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아르헨띠나의 현대사에 있어서 분기점을 이루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절세미인이며 정열적인 에비타는 뻬론대통령의 정치사상과 그의 정책에 있어서 반미반독재, 근로자복지정책, 복지국가주의적행정, 로동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사회제도, 철도 및 공익사업들의 국유화 등 엄청난 사회주의개혁정책을 시행하도록 크게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에비타의 꿈은 아르헨띠나의 어려운 상황에서 인민대중을 위한 새로운 혁신적정책의 모험을 시도함에 큰 의미가 있다.
뻬론의 등장과 결혼, 에바 뻬론의 역할, 망명생활, 망명이후의 재집권 등 파란만장한 뻬론과 에바 뻬론의 이야기는 아르헨띠나의 현대사에서 놀라움을 떠올리게 하는 획기적인 력사적사건이였다.
《뻬로니즘》과 《반뻬로니즘》이 교차하는 1946년에서 1976년까지 30년동안의 시기는 아르헨띠나력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등장한 뻬론의 시대라고 말할수 있다. 리념적으로 좌익과 우익이 서로 넘나드는 폭넓고 자유로운 시기였다.
하지만 뻬론대통령의 사망이후에 뒤따른 그 다음시기에 대하여 아르헨띠나사람들은 《더러운 전쟁의 시기》(Dirty War)였다고 말한다.
뻬론대통령이 사망직후에 미국이 후원한 쿠데타로 1976년에 군사정권이 등장하였다. 미국에서 고문기술과 랍치와 정보수집방법을 훈련받은 군인들이 주축이 되여서 쿠데타를 일으켰던것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통치하에서 《더러운 전쟁》은 8년동안 벌어졌는데 이 전쟁으로 3만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였고 또 다른 3만여명이 랍치되고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1만 4 000여명이 법원의 소환도 없이 투옥되였다. 이때문에 500여명의 어린이들이 부모의 랍치와 사망으로 인하여 고아가 되였다.
아르헨띠나에서 이와 같은 참혹한 군사독재의 만행은 오직 《반공》이라는 단순론리 하나때문이였다.
군사정권은 반공을 위하여 전국의 300여곳에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하고 저항세력을 탄압하는데 리용하였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일단 《반정부인사》라는 명부에 오르기만 하면 반드시 수용소에 끌려갔고 끌려가기만 하면 절대로 살아나올수 없었다. 《죽음의 수용소》에 끌려가면 눈이 가려진채 다른 사람과 대화는 금지되였다. 누구나 례외없이 전기고문을 당하고 성고문도 당하였다. 숨이 막힐듯 한 물고문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땅에 목만 내놓고 온몸이 묻힌채 뜨거운 해볕과 폭우를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폭력적구타는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사회전체가 공포의 소굴이기도 하였다. 마치도 박정희군사독재시대에 저항하던 세력에게 가해지던 탄압의 암흑시대를 련상하게 하였다.
당시의 아르헨띠나군사독재정권은 자신들이 죽인 저항인물들의 시체처리도 골치거리였다. 이 골치거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비행기로 싣고 대서양으로 날아가 비행기밖으로 떨어뜨리기까지 하였다는것이다. 이렇게 죽어간 사람만도 수천명에 이른다고 하니 당시의 사회분위기가 얼마나 혹독하였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고문과 살해만 일어난게 아니였다. 임신부를 체포해온 군인들은 아기를 낳은 녀성은 죽이고 아기는 군인들과 기업체간부들의 호적에 올려 키웠다. 수용소에서 태여난 아기들의 수는 500명이상으로 추정하고있다. 그 아이들이 벌써 30살의 성인이 되였는데 이들중 82명이 DNA검사를 통해 혈육을 되찾았다.
수용소에서 태여나 군부가 키운 올해 28살의 마리아 호세의 이야기는 눈물겨운 사연이다. 마리아는 20살이 되여서야 어머니가 임신한 몸으로 수용소에 련행된 뒤 마리아를 낳고 살해된것을 알게 되였다. 처음 알게 되였을 때 마리아는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은 충격을 겪었다. 하지만 그후부터 수용소에서 태여난 아기들이 이미 20대후반이지만 그들을 찾아내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오늘도 동분서주하고있다.
반공친미독재종식후 30년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중의 시위와 실종된 가족의 유해라도 찾으려는 애타는 유족들의 항의는 오늘까지도 그치지 않고 부에노스아이레스광장에서 계속되고있다.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30분에는 어김없이 아르헨띠나의 민주화의 요람인 마요광장에는 백발의 로인들이 잃어버린 자식의 이름을 새긴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프랑카드를 앞세우고 시위행진을 계속하고있다.
여기 또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군부독재시절 《죽음의 수용소》에서 복역중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살아남은 올해 77살의 로페즈가 법정예심에서 군사정권당시 경찰수사관들이 저지른 고문과 반인륜적행위에 대하여 낱낱이 증언을 하였다.
최종진술을 하기 위하여 다음날 출두하게 되여있는데 출두 바로 전날에 로페즈가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 없어졌다. 마치도 정형근의 귀신이 오늘 아르헨띠나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모양을 방불하는것 같다.
1970년대와 80년대 같은 시기에 《한국》과 아르헨띠나에서 거의 비슷한 군부독재의 만행이 발생되였다. 이와 관련하여 신통히도 《닮은 꼴》을 생동하게 비교해볼수 있다.
아르헨띠나의 쿠데타와 독재만행은 미국의 지원과 묵인하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오늘 아르헨띠나의 정부와 사람들은 공공연히 시인하고있다.
《한국》에서도 같은 시기에 같은 방법으로 쿠데타가 일어났다. 또 광주만행사건도 역시 미국의 지원과 묵인하에 일어났다는것은 만인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두 나라에서 행해진 력사적사건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가 있을가? 광주학살만행의 주범은 전두환이며 전두환을 뒤에서 끝까지 보호해준 세력은 미국의 중앙정보국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할 사람들은 얼마나 될가.
간추린 아르헨띠나력사
1516년에 J. D. 솔리스가 라플라타강을 발견하고 1535년에 P. 멘도사가 이끄는 에스빠냐의 대규모탐험대가 아르헨띠나에 도착하였다. 그때부터 벌써 원주민대량집단학살이 시작되였다.
1580년에 에스빠냐침략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침략함으로 아르헨띠나에서 식민지시대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하지만 아르헨띠나의 산악지대에는 공격적인 원주민인디안들이 자리를 틀고있었기때문에 식민지정착이 타지역보다 약간 늦어졌다.
그리하여 뻬루에 정착하였던 에스빠냐사람들이 남하하여 지금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지역에 집중되여 도시를 이루었다.
아르헨띠나에서는 값비싼 광물자원이 발견되지 않았기때문에 종주국 에스빠냐는 관심을 다른 지역으로 돌리고 아르헨띠나를 잠시 방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구의 증가가 늦어졌다.
에스빠냐황제는 아르헨띠나에서 원주민에 대한 《엔코미엔다》라는 특별제도를 허용하였다. 이 제도는 에스빠냐왕정의 군인들이 직접 원주민을 공격하고 살해하여 령토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였기때문에 에스빠냐이주자들에게 통치권을 위탁하는 제도였다.
그렇기때문에 원주민과 이주민사이에 접촉은 군사적공격이나 전쟁보다는 다소 부드러운 면이 있었다. 이것은 타지역보다 에스빠냐인과 원주민사이의 혼혈인들이 더 많이 생겨나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아르헨띠나는 지역이 넓고 원시림지대가 많이 있기때문에 백인들의 침략의 속도가 늦어져 1883년까지도 백인들이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였고 원주민인디안과 서로 대치한 상태로 남아있는 지역이 있었다.
1806년에 영국군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침공하여 에스빠냐부왕이 도망가는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아르헨띠나인들이 참전하여 영국군을 격퇴시켰다. 1810년에 아르헨띠나의 백인2세(criollo)들이 에스빠냐부왕을 강제로 퇴임시키고 《집정위원회》를 설립하였다.
1816년에는 각 지방대표들이 모여 정식으로 에스빠냐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유독립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독립한 아르헨띠나에는 중앙집권파와 련방주의파가 서로 대립하여 내분이 계속되다가 1826년에야 비로소 리바다비아를 초대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불행하게 리바다비아대통령은 1827년에 사임하고 아르헨띠나는 1835년까지 내전으로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1800년대에서 1900년대로 넘어가는 한세기동안에 아르헨띠나헌법은 1825년, 1853년, 1860년, 1866년, 1898년, 1948년에 여러차례에 걸쳐 개정되였다. 독립후에 발생한 쿠데타와 정권교체는 그 수를 이루 다 파악하기 곤난하다.
아르헨띠나는 제1차 세계대전때 중립을 지켜 외화를 획득하는 기회를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때도 역시 련합군에 대한 지지문제를 놓고 량론으로 갈라졌으나 대체로 중립을 지켰다.
아르헨띠나에서 력사상 최초로 이리고엔대통령의 급진당정권이 1916년에 탄생하였다. 20세기초에 도시화와 공업화가 급속히 진척됨에 따라 로동운동이 사회적구조속에 자리잡게 되였다.
이리고엔대통령의 급진당정권은 아르헨띠나의 사회주의제도수립과 로동운동의 선구자가 될것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이리고엔대통령의 꿈은 세계적으로 들이닥친 대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난관에 부딪쳤다.
1930년에 또다시 보수주의세력의 쿠데타로 인하여 좌익급진당은 몰락하였다. 강경보수파가 집권하여 3대에 걸쳐 정권을 잡음으로써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는 정변은 10여년간 계속되였다.
1944년에 또 다른 쿠데타로 좌익적인 파렐정권이 등장하였다. 파렐정권하에서 뻬론은 부대통령, 국방장관과 로동부 장관 등 중요한 요직을 맡았다. 뻬론이 파렐정권에서 실권을 잡은 이때가 뻬론당과 뻬로니즘의 시발점이 되였다.
뻬론은 누구인가
후안 뻬론(Juan Peron)은 1895년 10월 8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딸리아계백인과 원주민사이의 혼혈후손으로 태여났다. 어려서 엄격한 카톨릭교를 믿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6살에 륙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엄격한 학창생활을 보냈다.
뻬론은 1915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되였다. 뼤론은 비교적 평범한 군인생활을 하면서 사관학교에서 군사력사교수로 봉직하였으며 군사력사에 관한 5권의 책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1928년에 미모의 녀성 Aurella와 결혼을 하였으나 1938년에 암으로 사망하였다.
뻬론의 군인정신은 불의에 항거하는 투지로 점차 싹트기 시작하였다. 1930년에 독재자 Irigoyen대통령을 타도하는 군민련합쿠데타에서 주도적역할을 하였으며 1936년에 륙군중령으로 진급되였다.
1938년에 뻬론은 군사시찰단원으로 유럽려행을 하였는데 이딸리아, 프랑스, 에스빠냐, 마쟈르,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나라들을 시찰하였다. 이 려행을 통해서 그는 세계정치에 대한 시야를 넓히게 되였다.
1941년에 대령으로 진급한 뻬론은 령관급장교들을 중심으로 GUO(Group of United Officers)를 창설하고 나라를 위한 《형제애운동》의 주도적역할을 하였다.
1943년에 Castillo대통령이 친영분자인 대지주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한데 대한 항의에서 주동적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대통령은 사직하고 영국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44년에 쿠데타로 좌익적인 파렐정권이 등장하였고 뻬론은 아르헨띠나의 부대통령이 되였다. 뻬론은 부대통령뿐만아니라 국방장관, 로동장관, 사회개혁위원회 위원장 등 국가요직을 모두 차지하여 좌익적국정에 있어서 실권을 장악하게 되였다.
뻬론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결정적으로 성공과 실패가 모두 가능한 운명적이며 획기적인 시기였다. 뻬론은 로동조합을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로동운동을 확장하였다. 사회개혁운동을 단행하여 우익기득권자들만을 위한 낡은 제도를 뜯어고치려고 하였다.
다른 한편 뻬론의 개혁정신을 《뻬로니즘》으로 규정하고 조직적인 반뻬로니즘운동이 시작되였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카톨릭교회가 선두에 나서서 반뻬로니즘을 선동하면서 군부의 우익쿠데타를 지원하였다.
이발로스장군이 이끄는 우익쿠데타로 좌익파렐정권은 무너지게 되였다.
뻬론은 중범죄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섬나라감옥에 보내져서 감옥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아르헨띠나력사에 있어서 하나의 《신화적사건》이 발생하였다.
에비타는 뻬론에게 해방자이며 정치적동지이며 그리고 열렬한 애인이였다. 에비타는 뻬론을 존경하고 지지하는 로동자와 근로대중을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로동자들과 근로자들을 총동원하여 반정부시위를 단행하면서 뻬론석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뻬론석방을 위한 대중적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였고 정세는 급변하여 당국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에비타는 반정부대중운동의 총본부를 감옥으로 정하고 본부장을 감옥에 있는 뻬론이 맡도록 사전에 비밀로 모의하였다. 에비타는 또한 중요정치인들과 백방으로 접촉하여 뻬론의 석방을 위한 정치적활약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1945년에 수많은 로동자, 농민, 근로대중이 길거리에 나서서 붉은 기발을 휘날리는 격렬한 장면속에서 뻬론은 드디여 감옥에서 석방되여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왔다. 바로 이 장면이 《에비타》뮤지컬에 나오는 중심장면이다.
뻬론은 출옥하여 돌아왔을뿐만아니라 부대통령의 자리까지 복귀하였다. 석방되여나온 뻬론은 1945년에 에비타와 행복한 결혼을 하였다.
뻬론은 1946년 2월 24일에 대선에 출마하여 54%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였다. 에비타는 아르헨띠나의 국모가 되였다.
뻬론대통령은 1952년에 또다시 재선되여 1955년까지 집권하였다.
뻬론은 안해인 에비타와 함께 로동자보호정책, 사회보장제도, 국가주도의 산업 등 큼직한 과제들을 풀어나아가면서 사회주의나라건설에 주력하였다.
뻬론의 권력이 막강해지고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뻬론을 반대하는 반뻬로니즘의 운동도 역시 막강해졌다. 그의 진보적지도력은 외세와 사대주의의 저항에 부딪쳤다. 여기에서 결정적걸림돌이 되였던것은 미국의 비밀공작이였고 이와 합세하여 방해하였던 세력은 카톨릭교회의 구조적반정부조직이였다. 그리고 기득권세력의 련합은 뻬론의 권력기반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뻬론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패배의 원인은 애처 에비타의 사망이였다. 1952년 7월 26일에 아르헨띠나의 국모 에비타는 암으로 사망하였다.
에비타의 존재는 애인일뿐만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등뼈와 같은것이였다. 뻬론정권의 지주는 에비타의 정열과 대중을 사랑하는 에비타의 리념이였다. 사랑하는 안해를 잃은 뻬론은 태풍처럼 밀려오는 자본주의와 보수파의 반발과 그리고 미국이 지원하는 군부의 움직임으로 인하여 의기소침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였다.
뻬론의 통치력이 강력할 때는 뻬론정권을 반대하는 카톨릭교사제들을 외국으로 추방할 정도로 강경한 대통령의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안해를 잃고 우울증에 빠진 뻬론은 날개 꺾어진 독수리모양으로 원쑤들에게 공격의 기회만 제공해줄뿐이였다.
1955년 9월 16일 로나르다장군이 주도하는 우익군부쿠데타로 뻬론은 빠라과이로 망명하게 되였고 그곳에서 18년동안이나 망명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군부가 장악한 아르헨띠나는 평온하지 못하였다. 로조는 없어지고 외국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정부와 국민사이의 관계는 화해와 협력이 아니라 분렬과 적대관계만이 덧쌓여갔다. 이러한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여 아르헨띠나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였다.
18년후에 아르헨띠나에서는 인민봉기의 열기가 극도에 달하게 되였으며 결과 현직대통령인 Campora는 1973년 7월에 대중적인 봉기로 하야하였다. 이런 정세속에서 망명중이던 뻬론이 광범한 대중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이번에는 감옥에서부터가 아니라 망명지로부터 귀환하여 62%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또다시 당선되였다. 세번째로 재집권을 하게 되였지만 이번에는 에비타가 없는 대통령으로 등장하였다.
뻬론은 외국에서 18년동안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세번째 결혼을 하여 이싸벨을 안해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뻬론이 세번째 재집권을 하면서 이싸벨을 부대통령의 자리에 앉혀놓은것이다. 세번째 재집권을 시작한 뻬론은 강경책을 피하고 온건한 사회주의적ㅡ민족주의로선을 정책으로 내세웠다. 이로 인하여 뻬론진영안에 강경로선과 온건로선으로 두파가 대립과 갈등으로 맞서게 되여 뻬론은 심한 고민에 빠지게 되였다. 이런 와중에 뻬론대통령이 1974년 7월 1일에 세번째 집권한지 8개월만에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뻬론의 생애가 끝나자 그의 세번째 부인이며 또 부대통령이기도 한 이싸벨이 정권을 계승하게 되였다. 이싸벨은 남편의 후임으로 녀성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경제위기와 우익반동들의 테로로 인하여 1976년에 해임당하였다.
공포가 지배하는 아르헨띠나
1976년에 이싸벨대통령을 해임시키고 정권을 탈취한 군부는 1976년 3월에 《군사평의회》라는 명칭으로 아르헨띠나력사에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독재권력기구를 창설하였다. 의회와 법원을 해산하고 혹독한 군정이 새로 시작되였다.
《더러운 전쟁》(Dirty War of 1976~1983)은 이때부터 이렇게 시작되였던것이다.
군장성 3인방은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전제하에 좌경의 뿌리를 뽑는것이 사명이라고 주장하였다. 뻬론과 에비타가 뿌려놓은 사회주의운동의 씨앗을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니까라과의 친미독재자 소모사와 칠레의 최악의 독재자 삐노체뜨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잔인하고 포악한 반민족적친미악당 세사람이 아르헨띠나의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는 비운을 맞는다.
3인방 독재체제는 군장성 J. 비델라, E. 비올라, L. 칼티엘리 세 인물들이였다. 이 세사람의 명령으로 3만명이 죽었고 3만명이 랍치와 고문을 당하였으며 1만 4 000명이 리유도 모르면서 투옥되였다. 도시마다 공공건물을 개조하여 수용소 300개를 만들어놓고 정부에 대하여 반대를 말하기만 하면 공산주의자라고 정죄하고 무조건 수용소에 잡아넣었다. 일단 수용소에 가기만 하면 인생이 끝장나는것으로 공포사회분위기가 아르헨띠나의 전국을 휩쓸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오늘의 아르헨띠나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때 군인들은 신처럼 행동하였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그때 군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약 너는 죽는다고 말하면 너는 죽고 너는 산다 하면 너는 산다.》
그때 8년동안 사람들의 생사는 군인들의 기분에 좌우되였다고 한다.
아르헨띠나는 6. 25전쟁 같은것을 모르는 나라이다. 38°선도 없는 나라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도 《반공》이라고 하는 그 하나때문에 독재를 하면서 동족을 무자비하게 죽인 리유가 무엇일가?
그 리유는 미국의 안보를 위하여 약소국들이 리용을 당하고있었기때문이다. 미국이 그 나라의 기득권자들과 결탁하여 약자들을 학대하면서 리득을 취하고 종속관계를 맺도록 강제하기때문이다.
부자들은 영원한 부자가 되고 약자들은 영원한 약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견고한 세계적사회구조를 만들어갔기때문이다. 부패한 종교가 강자들의 편에 서서 부귀를 신의 축복이라고만 해석을 하였기때문이다.
하지만 우에서 말한 설명들은 단지 하나의 추상적론리에 불과하다.
그러면 실제적리유는 무엇인가?
그 리유는 미중앙정보국의 공작때문이며 이 공작에 의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다 완벽하게 진행되고있었기때문이다.
다음은 남아메리카에서 미중앙정보국이 어느 정도 공작하였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실 하나를 소개한다.
《미국의 신구교 선교사들이 명백한 CIA의 소스가 되고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아마 유일한 정보원이 되고있을것이다. 1만 2 000명의 미국인선교사들이 남아메리카 각 지역에서 CIA와 협력하였다는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1960~1970년대에 미국정부의 남아메리카정책이 〈경제개발과 반공주의〉라는 정책에 선교사들이 모두 동조하였다.》
한 퇴직한 CIA요원은 남아메리카에서 활동하였던 1970년대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기랄, 나는 목표를 한걸음이라도 달성하는것이라면 누구든지 다 리용하였다. 나는 불교승려, 카톨릭사제들 그리고 카톨릭주교까지 리용하였다. 미국 CIA가 남아메리카에서 우익독재정권을 지원하는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선교사들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 독재정권들이 반공주의적이라고 주장하였기때문이였다.》
우와 같은 례들은 수천수만가지가 있다.
어쨌든 1983년에 그 무시무시하였던 《더러운 전쟁》의 독재정권은 8년만에 물러가고 아르헨띠나에 또다시 민주화의 새봄이 오기 시작하였다.
1983년에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에서 급진 시민당의 R. 알폰신이 취임하였다.
1989년에 선거를 통한 승리와 1994년에 재선의 승리로 뻬론당의 C. 메넴이 아르헨띠나의 대통령으로 두번 취임하였다.
2001년에 두알레대통령(림시)이 취임하여 집권을 하였다.
2003년과 2006년에 뻬론당의 키르치네르대통령이 초선과 재선에 승리하여 현재 두번 취임하여 집권하고있다.
하지만 아르헨띠나에는 《더러운 전쟁》이 물러간지 20여년이 지나간 오늘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와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남아있다. 그 수수께끼와 과제는 《더러운 전쟁》의 전범자들을 아직도 처벌하지 못하고있다는 사실이다.
전범자 3인방 군인중에서 두목인 비델라장군에게 사형이 선고되였다. 그리고 비올라장군에게는 17년형이 선고되였다. 그러나 1985년에 선고를 해놓고 1990년에 이들을 모두다 사면시켰다.
왜 그런가?
그 리유를 리해하기 위하여 아르헨띠나의 오늘의 사회적구조를 살펴보았다. 아르헨띠나의 인종구성은 원주민과 흑인, 백인과 백인혼열인들인데 백인들이 주로 도시에서 주류를 이루고있다. 주류를 이루고있는 백인들은 이딸리아, 에스빠냐, 프랑스, 도이췰란드인들과 유태인들이다. 유태인들은 약 30만명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면서 뉴욕 다음가는 세계적유수의 한 유태인계회사들을 운영하고있다.
제2차 세계대전후 나치스잔당 6만명이 아르헨띠나에 이주하여 살고있다는것도 특기할 사실이다. 아르헨띠나국민의 90%가 카톨릭교도이며 사회의 큰 영향을 끼치고있다.
이상과 같은 사회구조가 《더러운 전쟁》의 민족반역적전범자들이 사면을 받고 뻐젓이 살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있는것이다.
아르헨띠나의 상황은 오늘 《한국》에서 5. 18인민항쟁탄압의 전범자와 18년의 박정희군사독재《정권》계통의 전범자들이 하등의 처벌없이 뻐젓이 살고있는 사실과 똑같은 맥락이라고 판단된다.
그 똑같은 맥락이란 친미군사재벌과 친미기득권세력들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끊임없는 공작에 리용을 당하고있기때문인것이다.
이 맥락이 풀리지 않는 한 아르헨띠나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것이다.
키르치네르대통령, 부쉬에 앙심
지난 3월 9일 부쉬 미국대통령이 남아메리카순방길에 있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축구장에서는 대대적인 반미, 반세계화집회가 열렸다. 남아메리카나라들을 분렬시키려는 부쉬의 잔꾀에 대하여 찬물을 끼얹은것이다.
키르치네르대통령은 《더러운 전쟁》발생 28주년 기념식에서 독재시대의 고문장소에 《기억의 기념관》건설계획을 발표하였다. 키르치네르대통령은 독재정권시대의 인권유린에 대하여 과거 정권들이 침묵해온것을 국민에게 사과하면서 범죄자들에 대한 단호한 처벌을 약속하였다.
키르치네르대통령은 40년간의 군부독재로 눈덩이처럼 쌓인 국제금융기구(IMF)의 차관 95억US$를 깨끗이 청산하고 아르헨띠나가 미국이 주도하고있는 신자유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이같은 정책은 《한국》이 보여준 친미사대주의정책과는 대조를 이룬다.
키르치네르대통령을 중심으로 룰라대통령과 챠베스대통령 등 남아메리카지도자들은 남북을 련결하는 1만km의 가스관을 6년안에 완공할것을 전망하고있다. 이들의 꿈은 외교, 안보, 경제적으로 대미의존에서 벗어나 역내 안보강화와 경제권을 나토와 류사한 기구로 창설할것을 전망하고있는것이다.
지난 1982년 군정시절에 아르헨띠나는 포클랜드군도령유권을 놓고 영국과 전쟁을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영국은 1765년에 상륙하였을 때 무인도인것을 자기네가 먼저 점령하였다고 주장하고있다.
키르치네르대통령은 아르헨띠나가 1810년에 에스빠냐에서 독립할 당시 분명히 아르헨띠나령토로 편입시킨 력사적근거를 제시하면서 영국에 물러서지 않을것을 밝혔다.
뻬로니즘의 조상인 뻬론은 녀성지도자 에비타를 안해로 맞이하여 사상과 리념에 있어서 강력한 동반자로 활약하였었다. 마찬가지로 키르치네르대통령도 그의 안해가 같은 뻬론당소속으로 상원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여 동반자로 활약하고있다.
뻬론이 1943년 처음으로 좌파적인 뻬론당을 창설하였으며 그후 뻬론당은 줄곧 의회에서 뻬로니즘의 전통을 이어왔다. 키르치네르대통령의 부인 크리스티나도 제2의 에비타로 불리울만큼 미모의 녀성이며 정열적인 꿈을 소유하고있는 녀성정치인이다.
아르헨띠나에서 뻬론당은 근로대중을 중산층으로 육성하여 중남아메리카를 하나로 묶어 단합시키는 선구자적길을 달리고있다.
키르치네르대통령은 아르헨띠나의 로동자와 근로대중을 반드시 중산층으로 만들어내는것이 자신의 사명이며 목표라고 주장한다.
뻬로니즘의 씨앗은 중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뿌려져서 민중적련대의 결실을 반드시 거두어들일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르헨띠나의 2003년 대선에서 1, 2, 3위의 득표자모두가 좌파 뻬론당소속의 후보자들이였다.
뻬론당의 창시자 후안 뻬론은 로조를 바탕으로 기득권세력과의 투쟁과 동시에 주권문제, 인권문제 등을 개척하면서 녀성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선구자적역할을 수행해왔다. 뻬론이 죽은지 33년이 되는 지금 키르치네르대통령은 석유생산국과 석유소비국의 균형을 위해 국유화조치를 인정하겠다고 언명하였다. 뻬론과 뻬론당의 사기와 전통을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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