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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1-12. 칠레의 사회주의신봉자 바첼레트 녀성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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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6,113회 작성일 21-09-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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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반미열풍

 

□ 칠레의 사회주의신봉자 바첼레트 녀성대통령
 

91살을 맞은 전 칠레의 독재자인 삐노체뜨는 자기가 재임시절에 저지른 죄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재임기간에 발생한 모든 행위에 대해 정치적책임이 있다.》

그러나 삐노체뜨는 자신이 저지른 반역적류혈쿠데타로 인하여 발생한 《죽음의 행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이 없었다.

칠레대학의 정치학자 리카르도교수는 《그의 이러한 책임시인은 권좌에 있을 때 하였어야 하였다. 그는 완전한 책임을 느끼고있지 않았다.》라고 비판하였다.

삐노체뜨는 민선으로 당선된 알옌데대통령을 쿠데타로 살해하고 정권을 탈취한 후 1973년부터 1989년까지 무서운 독재를 실시하였다. 그의 재임 16년동안에 저지른 학살만행을 조사한 발표에 의하면 실종된 1 000명을 포함해 모두 3 197명이 살해됐고 근 3만명이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죽음을 피해서 해외로 도피한 사람들의 수는 7만명에 이르렀다.

2006년 12월 10일에 91살의 나이에 삐노체뜨는 사망하였다. 삐노체뜨는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칠레인민들의 가슴에 쌓인 처절한 상처를 그대로 남겨놓고 아무것도 모르는것처럼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그저 떠나가고말았다. 삐노체뜨의 사망소식이 보도되자 두시간도 되기 전에 싼띠아고시내에 있는 이딸리아광장에 3 000명의 군중들이 삽시에 집결하여 축하의 환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와는 아주 정반대로 대조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3 000명이 모인 이딸리아광장에서부터 약 2km 떨어져있는 다른 한 장소에서는 2 000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독재자 삐노체뜨의 사망소식을 전해듣고 애도하고있었다. 그뿐만아니라 삐노체뜨의 장례절차에 대해서도 민심은 량분되였다. 1 600만 칠레인구중에서 55%는 삐노체뜨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는것을 결사반대하였다. 민족반역자이며 저지른 죄과에 대한 응분의 처벌도 받지 않은채 영국으로 도망가 호화롭게 살다가 돌아온 민족의 배반자를 어찌하여 국장으로 대우를 해야 하는가라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45%의 수구친미보수적인 칠레인들은 딴소리를 하였다. 전직대통령에게 례우를 갖추는것이 온당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신임하고 후원을 해준 반공주의대통령이 아니였는가? 어찌하여 그의 공로를 무시하려 하는가라고 하면서 국장으로 할것을 주장하였다.

축하와 애도,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칠레의 력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독재정권이 남긴 상처의 후유증이다. 아물지 못하고 아직도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기야 그 후유증의 근원은 바로 미국이 아닌가?

미국이 여전히 칠레에 손을 뻗치고있는 한 절대로 그 후유증은 아물지 못할것이다.

어느 나라건 어느 민족이건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보는 력사관이나 세계관이 부족하면 퇴행적인 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할뿐만아니라 모처럼 주어진 기회마저도 놓쳐버리고만다.

칠레의 립장이나 《한국》의 립장은 비슷하다. 《한국》에서 아직도 그 옛날의 독재자 《P사모회》니 뭐니 하는것이 여전히 있는가 하면 또 누군가의 이름을 붙인 기념관에 대하여 론난이 되고있는것이 사실이다. 이런것들은 《한국》이 칠레처럼 아직도 70년대에 받은 상처의 후유증을 아직도 그냥 앓고있다는 증거가 될것이다.

그런데 칠레에서 놀라운 일이 생겼다. 삐노체뜨에 의하여 살해된 칠레의 공군준장 알베르또 바첼레트장군의 딸인 바첼레트녀사가 3명의 후보자들을 모두다 물리치고 칠레력사상뿐만아니라 남아메리카력사상 최초로 녀성대통령이 되였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피살당할 때 21살이였던 바첼레트는 어머니와 함께 쿠데타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추방되여 해외에서 떠돌이생활을 해야만 하였었다.

세월은 어느덧 33년이 흘러갔다. 아버지를 살해한 민족반역자 삐노체뜨는 영국에서 편안하게 피신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미국의 암묵적보호를 받으면서 가택연금중 칠레인들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삐노체뜨가 살해한 바첼레트장군의 딸이 칠레의 대통령이 되였다. 이제 막 집권하게 된 바첼레트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독재자 삐노체뜨의 사망과 관련해 그의 장례절차문제를 놓고 론의하는 세상이 된것을 그저 우연한 일이라고만 말할수 있을가?

삐노체뜨가 살아간 한 시대의 력사는 그 오랜 400년력사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탄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고 투쟁한 칠레인민들의 처절한 력사의 그림자를 생생히 반영해주고있는것 같다.

 

 

      에스빠냐식민시대 300년

 

에스빠냐식민지력사는 1541년 2월 12일부터 시작되였다. 에스빠냐의 식민지선구자 발디비아가 싼띠아고에 정착하여 많은 원주민인디안들을 설득하여 개척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마푸췌부족은 도저히 설득할수 없는 완강한 부족이였다. 1553년에 비타협적인 마푸췌부족의 추장 라우타로와 에스빠냐침략의 선구자 발디비아가 정면대결하여 한판 승부를 가리게 되였다. 물론 한편은 총을 가지고있고 다른 한편은 활을 가지고있었다. 싸움은 어떤 모양으로 대결이 되였는지 알수 없으나 결과는 상상밖이였다. 총을 가지고있는 에스빠냐선구자는 인디안추장에게 붙잡혀 죽고말았다. 이로 인하여 라우타로 마푸췌추장의 명성은 인디안들에게 수세기동안 전설적인 영웅으로 기억되고있다. 마푸췌부족은 에스빠냐침략 300년력사에서 줄곧 독자적령토를 확보하고 싸우면서 오늘까지도 100만의 부족이 칠레와 린근지역에서 명성을 보존하고있다.

칠레의 사회적구성은 대략 세가지로 구분할수 있다. 첫째는 유럽태생 백인들과 현지에서 태여난 백인후손들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현지행정부나 에스빠냐황제에게 충성하는데 아무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둘째는 유럽백인들과 인디안원주민들과 흑인노예들사이에서 태여난 혼혈족들이였다. 이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여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확대되게 되였다. 이들은 사회구조의 모순에 대하여 불평을 표시하였다. 셋째로는 인디안원주민들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이들이 칠레인구의 다수를 이루고있었다. 하지만 사회적계층으로는 하급에 속하여있으므로 생존을 위한 활동에 있어서 많은 제약을 받고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구조를 지탱해나아가는데 있어서 버팀목이 된것은 역시 카톨릭교회였다. 칠레의 카톨릭교회는 메히꼬나 뻬루처럼 막강한 재산을 소유하지는 못하였으나 제도적권위를 행사하는데 있어서는 당당하였다. 카톨릭교회는 침략자들의 성공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기때문에 백인들편에 서서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데 버팀목의 역할을 하였다.

칠레는 남태평양해변으로 영국과 도이췰란드 등의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16세기부터 강한 군대를 확보하고있었는데 남아메리카에서 제일 강한 군대였다. 에스빠냐식민지 300년력사에 있어서 칠레의 침략자들이 초기에 획득할수 있은 자산은 오직 농업과 목축뿐이였다. 광업은 처음에 소규모였으나 후에 동을 많이 생산하였다.

악착한 에스빠냐침략자들이였지만 칠레의 토착원주민 마푸췌부족을 가히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멸종시키는것이 불가능하였다. 결국 에스빠냐침략자들은 잡혼과 혼혈 그리고 문화변용의 길을 선택하여 점진적인 동화의 길을 찾을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독립과 격동의 한세기

 

1400년대에 있어서 에스빠냐식민지침략자들의 명제는 《골드러쉬》이였다. 하지만 1800년대초에 이르러서 라틴아메리카를 완전히 점령한 에스빠냐침략자들의 후예들이 부르짖던 명제는 골드가 아니라 《독립러쉬》였다. 남아메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에스빠냐주둔군을 몰아내고 에스빠냐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독립을 부르짖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칠레도 1817년에 독립을 선포하였다. 독립을 선포한 칠레는 히낀스를 제1대대통령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정권을 확립하는데 실패하고 곧 추방당하였다. 완전한 주권적독립을 주장하는 자유파와 향수에 빠져 에스빠냐황제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는 보수파로 갈라졌다.

어느 파에 속하던 사태를 수습하기는 곤난하였다. 독립이란 말뿐이였고 혼란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갈등만 계속되였다.

칠레의 정치적맥락은 처음부터 자유파와 보수파 두줄기로 시작되였다. 카톨릭교회는 보수파진영에서 지주적역할을 하였다. 빈부로 갈라진 량편에서 빈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파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빈자라는 말은 토착원주민이나 혼혈족이나 흑인들을 가리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백인사회내부에서 특정세력과 대지주들이 한편이고 그렇지 못한 일반 가난한 백인그룹으로 량분되여있었을뿐이다. 그러니까 백인들 저들끼리의 빈부의 차별을 말하는것이다. 원주민이나 혼혈인들, 흑인들은 그들의 어느 편에도 대상에 들지 못하였다.

아무튼 칠레는 독립초창기 1817년부터 1830년까지 13년동안 량편으로 분렬되여 서로 싸웠다. 그후에 밭에서 해마다 이랑과 고랑이 교대되는것처럼 다음 60년동안은 두개의 량진영이 서로서로 교대하면서 장기집권을 하였다. 1830~1861년까지 보수진영이 그리고 1861~1891년까지 자유진영이 집권하면서 세월은 흘러 190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섰다.

세기가 교차되는 중요한 시기에 칠레에서 매우 특이한 정치적제도가 새로 등장하였다. 소위 《의회공화국》이라는 정치제도를 새로 창안해냈다. 이 제도는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는것이 아니라 의회에서 의원들이 나라의 수반을 선출한다. 그런데 그 의원들은 누구들인가? 대부분 지주들과 특권그룹을 대표하는자들로 구성된 의회였다.

《그러한 제도는 나라를 망치는 제도이다. 그런 제도가 선출한 수반은 허수아비 아니면 흐리멍텅한 사람이다.》라고 사람들은 비웃었다. 왜냐하면 교활한 특권세력은 흐리멍텅한 사람을 형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앞에 내세워놓고 저들은 뒤에서 저들이 하고싶은 일들을 마음대로 할수 있기때문이였다. 《한국》에서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불안전하고 불공정한 부자들과 특권층중심의 《의회공화국》시대가 30년동안이나 계속되였다. 하지만 드디여 칠레에서도 1920년대를 전후하여 자유선거와 정당정치시대가 도래하였다. 아니 오히려 그런 불공정한 시대가 있었기때문에 그 덕분에 정당정치제도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높아졌다고 말할수 있다.

에스빠냐식민지통치에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에 칠레에서 력사상 처음으로 민주당과 개혁당 두개의 정당이 출현하였다.

민주당은 주로 도시로동자와 기술로동자운동에 뿌리를 내렸다. 이와 반면에 개혁당은 주로 도시중간층과 지방특권계층운동에 뿌리를 내리고있었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이 두 정당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때 로씨야에서 일어나고있는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기대와 열정에 고무되여있는 정서를 공유하고있었다. 그리고 이 두개의 정당은 빠르게 성장하여 의회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후 계속해서 칠레에서 사회주의개혁운동이 활발히 벌어져 여러 정당들이 합치기도 하고 또 개편도 하면서 발전해나아갔다.

사회로동당(POS 1912년), 칠레공산당(PCCH 1922년), 칠레사회당(PSCH 1933년), 그리스도교민주당(PDC 1957년) 등 여러 정당들이 칠레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불안한 미국, 흔들리는 칠레

 

미국은 1900년대에 들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반미감정이 일어나고 사회주의물결이 파도치고있는것을 바라보면서 몹시 불안해하였다. 특히 칠레에서 급진적으로 사회주의운동세력이 파급적으로 성장하는데 대하여 미국은 당황망조해하였다.

헨리 키신져는 당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남아메리카의 한 나라가 공산화되고있는데 왜 우리는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어야 하겠는가?》

미국은 칠레에서 급진적인 사회주의개혁운동이 전개되는것을 방지하고 저지시키기 위하여 묘한 방안을 고안해냈다. 그것이 소위 《전진을 위한 동맹》이라고 하는 리론적방안인데 그 본질은 《너무 빨리 가려고 고생하지 말고 천천히 함께 가자.》라고 하면서 좋은 말로 붙잡는다. 하지만 천천히 가는것이 아니라 결국 가지 못하고 주저앉게 만든다는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저개발국가들에게 개발을 못하도록 항상 써먹는 상습적인 수법이다.

이 수단에 걸려든것이 바로 칠레의 그리스도교민주당(PDC)이였다. 민주당세력은 듣기 좋은 온갖 문구를 다 리용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온건개혁, 자유주의개혁, 자유안에서 혁명, 중도정치와 온건개혁 등 그럴듯한 모든 좋은 구호들을 력설하면서 선거공약으로 내놓았다. 1964년 칠레총선에서 그리스도교민주당 프레이와 칠레사회당 알옌데 두사람이 대결하는 량당대결의 투표를 하게 되였다.

미국은 독립이래 처음 있는 《민주적선거》라고 극구 떠들면서 적극적으로 《지지》, 《환영》하였다. 그러면서도 교활한 미국은 앞에서는 민주주의를 찬양하고 뒤에서는 돈으로 비민주주의적모략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미중앙정보국(CIA)은 온건개혁, 중도로선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민주당 후보자 프레이를 당선시키기 위하여 비밀리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였다.

같은 해인 1964년에 미국에서는 죤슨과 골드워러가 대결하는 선거가 있었다. 미국에서 두 후보자가 선거전에서 사용한 돈의 액수보다 칠레에서 CIA가 프레이를 당선시키기 위하여 제공한 돈의 액수가 오히려 더 많았다.

또한 미국이 지원하는 선거전략은 종교적으로 유신론과 무신론을 직접 대립시켰다. 쏘련은 무신론나라이고 미국은 유신론나라이다라는 단순한 론리를 선거전략으로 사용하였다. 천사와 마귀, 어느것을 택하겠는가? 이런 선전효과로 인하여 프레이후보자가 녀성들의 표를 훨씬 많이 받음으로써 선거에 승리한것으로 조사분석되였다.

선거결과는 뻔한것, 프레이가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렇지만 프레이대통령이 한 일이 무엇인가?

선거공약은 미국의 간섭때문에 손도 댈수가 없었다. 농지개혁도 13%에 그쳤으니 농민들이 개혁의 실감을 느낄수가 없었다. 동산업도 큰소리로 공약을 하였으나 운영권의 회수와 소득분할을 위한 타협에 은행들은 절대로 응하지 않고 요지부동이였다. 프레이대통령이 주장한 온건개혁은 사실상 공념불이 되고말았다.

미제국주의독점자본들은 무제한적인 투자만 계속 늘여갔다.

칠레의 로동자들과 근로대중은 이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고난을 당하게 되였다. 프레이대통령이 공약한 온건중도정책이란 하나의 위장이였으며 신자유주의착취와 수탈을 허용하는 결과만을 낳고말았다.

이로 인하여 신식민지체제만 칠레에서 심화되였을뿐이였다. 5년동안 경제성장은 5%에 머물렀고 통화팽창은 해마다 30%까지 늘어났다.

무능한 그리스도교민주당대통령에 대한 실망은 밖에서보다 오히려 안에서부터 먼저 일어났다. 청년당원들이 탈당을 하고 일반당원들도 탈당하는 비상사태가 벌어져도 집권당으로서 별 대책은 없고 그저 수구정당으로 남아있을뿐이였다. 드디여 일부 당원들이 《그리스도교좌익운동》이라고 하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함으로써 분당사태가 조성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였다.

 

 

      알옌데대통령 당선과 운명의 9. 11

 

1964년 대선에서 미국CIA의 방해공작때문에 락선하였던 알옌데는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재출마하였다. 알옌데는 1970년 9월 4일에 당선되였으며 11월에 칠레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알옌데가 재출마하여 승리할수 있었던것은 칠레사회당, 칠레공산당, 인민독립행동, 인민일치행동운동, 급진당, 사회민주당 등 6개의 사회주의지향적인 여러 개혁적진보정당과 단체들이 련합하여 《인민의 단결》이라고 하는 련합체를 결성하고 이 단체의 추천을 받아 단일후보자로 출마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알옌데가 재출마하여 당선되였다는 사실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였다는 소식을 받은 닉슨대통령은 분노하여 《그 X같은 놈을 그냥둘수 없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닉슨대통령뿐만아니라 경악하고 분노한 두사람이 또 있었다. 그 세사람 즉 닉슨대통령과 헨리 키신져 그리고 CIA국장 헴스는 급히 백악관에서 비밀회의를 가졌다. 세사람이 모여 비밀회의를 한 날은 1970년 9월 14일이였다. 비밀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모략이 결정되였다.

1) 알옌데대통령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비밀공작비 100만US$를 확보.

2) 비밀행동대원 40명 조직과 키신져를 위원장으로 확정.

3) 암살대상자로 우선 대통령측근자인 륙군대장 쉬나이더로 결정.

4) 쿠데타계획. (이 계획은 1973년 9월 11일에 결국 실시됐다.)

그 당시 칠레의 ITT회장은 키신져와 헴스에게 약속하기를 알옌데대통령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100만US$를 기증할것을 약속하였다.

알옌데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당선이 확인된지 3일후에 미국CIA거물들은 다음과 같은 토론을 하였다.

《미국은 칠레에서 큰 리익의 추구나 군사적위협 같은것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칠레가 좌경화하게 되면 남아메리카전체에 미치는 심리적영향은 크게 작용할수 있을것이니 절대로 좌시할수 없다.》

알옌데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기 바로 며칠전인 1970년 11월 어느날 미국CIA로부터 5만US$를 받은 까밀로라는 륙군장성이 알옌데대통령을 암살하려고 미행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였다는 사실이 후에 폭로되였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알옌데대통령이 비록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을 하였다 할지라도 대통령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의 비운은 벌써 이미 결정이 되여져있었던것이다.

알옌데대통령은 집권초기부터 군부의 완전한 장악이 불가능하였으며 의회의 장악도 불안한 상태였다. 로동계급과 농민근로대중을 기반으로 하고있는 알옌데대통령의 터전은 벌써부터 미국CIA의 공작으로 인하여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칠레의 농민로동자근로계급의 위력은 남아메리카 어느 나라보다 강력하였으며 탄탄한 《중앙로동련합》(CUT)이 존재하여 알옌데대통령의 튼튼한 정치적기반이 되고있었던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CIA는 《아메리카자유로동발전협회》라는 어용로조를 급히 창설하여 칠레의 로조활동을 마비시킬 공작을 꾸미고있었다.

미국은 칠레의 로조간부들에게 반공주의교육을 시키고 친미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하여 막대한 노력과 돈을 투자하였다. 그리하여 알옌데정권과의 뉴대를 단절시켜서 오히려 반정부세력으로 육성시키였다.

알옌데대통령은 집권초기에 선거공약을 실천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였다. 칠레의 중요산업들의 국영화를 단행하여 일부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업의 경영권만 법적으로 국가에 귀속시켰을뿐 기업의 자산은 여전히 자본가의 손에 남아있는 불완전한 한계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개혁이였다.

농지개혁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농업인구 70만중에서 90%가 령세농민과 토지없는 농민들인데 처음 일차적몰수를 강행하였다. 하지만 토지소유자들의 반발은 태산같은데 혜택을 받은 농민의 수는 7%도 미치지 못하여 많은 농민들의 욕구를 채울수 없었다. 농민들은 농민대로, 지주들은 지주대로 알옌데대통령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알옌데대통령은 의회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농민들의 요구를 원만하게 해결해줄수 있는 힘이 부족하였다.

알옌데대통령의 집권초기에 한때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고 동정하던 도시중산층도 점점 반정부편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더러운 공작으로 직장과 학원과 길거리에서는 하루에 1US$씩 돈을 받아먹은 란동군들의 질서파괴행동이 일년내내 계속되였다. 신문과 방송은 빨갱이들의짓이라고 보도하여 민심을 동요시켰다.

운수기업이나 기타 대형공장이나 사업체의 로조간부들을 매수하여 파업을 전국적으로 일으켜서 나라는 마비와 혼란으로 더욱 불안해지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모든 사건들은 미국CIA작전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진행되고있었다.

다음은 키신져가 위원장으로 있는 40인위원회가 3년동안 추진한 비밀행동계획을 간추려서 소개한다. 이것은 클린톤대통령의 명령으로 CIA가 할수없이 일부를 비밀문건해제함으로 폭로된 내용들이다.

1. 40인위원회는 800만US$의 자금으로 운영을 한다.

2. 경제파탄이 행동의 제일 우선이다.

3. 언론매수에 돈을 투자한다.

4. 반정부행동단체들에게 재정적지원을 한다.

5. 정부단체들에 깊이 들어가 분렬작전을 전개한다.

6. 뉴욕, 워싱톤에 있는 칠레공관들을 관리한다.

7. 친미적인 그리스도교민주당을 적극 지원한다.

8. 경제봉쇄를 하여 칠레의 목을 조인다.

9. 구리산업을 망치기 위해서 동값을 떨어뜨린다.

10. 좌익으로 가장한 란동군들을 항상 동원한다.

11. 각종 직장에서 파업을 조장한다.

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쿠데타로 정권을 퇴진시킨다.

우의 공작들은 여러가지 문건들중에서 중요한 건수들을 간추린것이다.

1973년 6월 29일에 제1차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알옌데대통령을 지지하는 군부세력과 충돌하여 실패로 끝나고말았다.

하지만 1973년 9월에 다시 시도한 쿠데타는 미국이 직접 개입하고 지원을 해주므로 마치 전쟁을 시작한 선전포고와도 같은것이였다.

미국편에는 헨리 키신져가 총지휘를 하고있었고 칠레에는 숨어서 지휘하는 삐노체뜨군총사령관이 있었다.

9월 11일 오전 6시부터 쿠데타군부는 행동개시를 준비하고있었다.

미국이 제공한 공군기 32대와 미해군 구축함과 잠수함 등이 칠레해안에서 모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준비하고있었다.

9월 11일 오전 11시경에 쿠데타군 500명이 대통령궁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대통령을 지지하는 《인민의 단결》국회에서는 쿠데타군에게 일절 대항하지 않도록 지시를 내렸다.

쿠데타군은 알옌데대통령에게 외국으로 도피할수 있도록 비행기를 준비해놓았으니 빨리 행동할것을 제안하면서 재촉하였다.

하지만 알옌데대통령은 쿠데타군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남아있던 호위병들과 대통령궁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서 속히 피신하라고 호소하였다.

9월 11일 오전 11시 52분 칠레공군은 미국이 제공한 공대지로케트로 대통령궁을 포격하여 불길속에 휩싸이게 하였다. 그 마지막순간까지 전화로 련결된 알옌데대통령의 마지막음성은 이렇게 전달되였다.

《나는 항복하지 않고 이 나라 력사의 이 준엄한 순간에 나는 우리 인민에게 내 목숨을 바친다. 나는 나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을것을 믿는다.》

알옌데정권이 무너지던 그날 싼띠아고중앙경기장에는 5 000명의 사람들이 포악한 쿠데타군에게 붙잡혀 끌려왔다. 팔이 부러지고 창자가 터지고 목이 짤려죽으면서도 그들은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그날에》를 부르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항거해나섰다.

삐노체뜨독재정권 17년의 《죽음의 행렬》은 바로 그날 그곳에서 시작되였다.

1973년 9월 11일과 2001년 9월 11일은 무엇이 같으며 무엇이 다른가?

마이클 무어의 책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에 의하면 두 9. 11사건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폭탄을 퍼붓는 음모가 미국인의 안전과 리익을 위해서 필요한것이라고 핑게하는 허위에 있어서 조금도 다름이 없는 동일한 악마적음모라고 단언하였다. 마이클 무어는 단호히 이 두 9. 11사건의 음모는 모두다 백악관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이 조작해낸 자작극일뿐이고 다른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다른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시간과 장소가 다른것뿐이였다고 폭로하였다.

 

 

      로출된 삐노체뜨와 키신져

 

삐노체뜨는 극악한 독재자로 세상에 알려졌가. 그의 정체에 대하여 정치심리학적비판을 한 Saul Landau의 분석에 의하면 삐노체뜨는 외적으로는 무척 부드럽고 무난한 사람처럼 언제나 보인다. 그의 군인생활은 항상 중간파의 역할을 하면서 일평생 군복을 입고 살았다. 사회주의지향의 정권하에서도 오래동안 군장성으로 복무하였으며 1970년에 알옌데정권하에서도 군총사령관이였다. 하지만 삐노체뜨는 드러나지 않게 뒤에 숨어서 알옌데정권을 전복시키고 알옌데대통령을 살해하는 쿠데타의 총지휘자였으며 이제는 미국이 제일 신임하는 친미정권의 대통령이 되였다. 삐노체뜨는 알옌데대통령이 힘들여 이룩한 모든 사회개혁적공헌을 전부 무효화하여 공장과 기업을 자본가에게 돌려주고 토지를 지주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삐노체뜨는 칠레의 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여 미국의 독점자본을 끌어들이고 근로대중과 로동자들이 외국자본의 악착한 착취를 당하게 만들었다.

삐노체뜨는 정권의 안전과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비밀정보국(DINA)을 창설하였다. 이 비밀정보국은 국가안보라는 명분하에 대통령이 투옥, 고문, 학살을 자유로이 행사할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하였다. 삐노체뜨는 이 권한을 악용하여 16년 집권기간에 근 3만명을 고문하였고 3 197명을 살해하였다.

1976년 6월에 키신져가 칠레를 방문하였다. 키신져는 삐노체뜨에게 《미국은 당신이 하고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만족한다.》라고 칭찬하였다. 그후 1976년 9월에 칠레의 비밀공작원은 알옌데정권하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레테리어를 암살하였다. 레테리어는 량심적인 사회주의신념의 소유자였고 삐노체뜨의 독재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한 사람이였다. 그러한 그를 미국 워싱톤시내에서 그의 승용차밑에 폭탄을 가설한 후 폭발시켜 무참히 살해하였다. 암살의 배후에는 삐노체뜨가 있고 삐노체뜨의 뒤에는 키신져가 있다는 사실을 미국CIA는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삐노체뜨는 1991년에 16년 독재정치를 끝내고 물러났다. 하지만 삐노체뜨는 칠레의 군총사령관의 통수권은 내놓지 않았다. 1997년까지 군통수권을 장악하고있었다.

1998년에 군총사령관의 자리마저 다 내놓게 되였다. 그런데 삐노체뜨는 자기가 미리 만들어놓은 법을 리용하여 이번에는 《종신상원의원》이라고 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종신상원의원이 되면 법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

삐노체뜨는 칠레에서 재판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심리적으로 불안하였으므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전 영국수상 태쳐와 여러 정계인사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칠레에서는 뒤늦게나마 삐노체뜨에 대한 재판을 요구하는 대중의 소리가 고조되였다. 삐노체뜨는 종신상원의원이라는 면죄법때문에 국내에서가 아닌 국외에서 국제재판에 회부하도록 하여 에스빠냐법정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였다. 하지만 영국은 건강상핑게로 삐노체뜨를 에스빠냐로 보내지 않고 영국에서 가택연금이라는 눈가림으로 처리하면서 끝까지 삐노체뜨를 옹호하였다.

그후 다시 영국은 립장이 곤난해지자 이번에는 로쇠병으로 건강문제를 핑게삼아 에스빠냐가 아니라 칠레로 돌려보냈다.

칠레에 돌아왔지만 라고스(Lagos)대통령은 삐노체뜨를 법정에 세우는것을 실행하지 않고 눈치만 보면서 지연작전을 썼다. 그 리유는 량론으로 갈라진 민심과 여론때문이였다. 하지만 진짜리유는 아직까지도 삐노체뜨에 대한 미국의 간섭과 위협때문이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리유는 삐노체뜨는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딸라를 가지고있기때문에 돈의 힘으로 얼마든지 버틸수 있었던것이다.

격분한 칠레인들은 《늦었지만 좋다. 건강이 나빠도 좋다. 앉아서라도 전범재판은 받아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이였다.

그러나 삐노체뜨는 대중의 분노의 함성을 못 들은척 하고 또다시 피신하여 멀고먼 죽음의 나라로 떠나가버렸다. 결국 독재자의 전범재판은 그곳에서 받게 될것이다.

 

 

      바첼레트의 날개는 어느쪽으로?

 

칠레뿐만아니라 라틴아메리카력사상 처음으로 2006년 3월에 녀성대통령이 취임을 하였다. 바첼레트는 33년전 아버지가 처형을 당하고 어머니와 함께 자기자신도 고문을 당하였던 싼띠아고중앙경기장에서 53%의 득표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바첼레트대통령은 행정부조직에서 녀성장관 10명을 등장시킴으로써 확실히 진보적개혁주의대통령이라는 점을 확인할수 있었다. 또 그의 선거공약에서 민주와 인권, 근로자복지 그리고 원주민보호를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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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원주민보호를 강조한것으로 보아 삐노체뜨가 망친 칠레를 다시 회복시킬 대통령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하였다.

하지만 바첼레트의 날개가 과연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속단할수 없으며 념려되는 점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첫째, 뿌리깊은 군사독재시대의 기득권세력이 암묵적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지원을 받으면서 칠레에서 활보하고있다.

둘째, 전임대통령 라고스가 삐노체뜨에 대한 재판을 10여년동안이나 실현하지 못한것은 미국의 압력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이와 같은 압력은 바첼레트대통령에게도 례외가 될수 없다고 우려하고있는 상황이다.

셋째, 칠레의 로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정치적뉴대를 강화하여 과거에 경험한 분렬을 극복하여 바첼레트정부와 일체를 이루어 전적으로 대통령을 지원하는 일이 반드시 실현되기 바라고있지만 아직은 미지수이다.

넷째,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있는 좌경화운동에 칠레와 이웃 나라인 볼리비아, 브라질, 베네수엘라, 꾸바 등 여러 나라들과 굳건한 련대를 맺는 방향설정이 매우 중요한데 이것의 결과가 주목되고있는 실정이다.

다섯째, 삐노체뜨독재정권하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한과 현재 백만이나 되는 인디안 마푸췌부족들의 한을 풀어주는 과제는 바첼레트대통령이 감당하기 너무나 힘든 과제로 진단되고있다. 하지만 가야할 길임은 분명하다.

여섯째, 칠레인민이 가기로 선택한 반제, 반미, 사회주의건설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렬된 로동계급과 각계각층이 정치적으로 반드시 세력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진보정당들도 련합전선을 강화하여 바첼레트대통령을 지원해주는 정치력이 되여야 한다.

끝으로 다른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꼭 중요하다. 미제국주의침략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무기와 유혹은 《실용주의》이다. 이 《실용주의》는 환자에게 진통제를 처방해주는것과 같은것이다.

하지만 챠베스대통령이 주장하는 남아메리카에서 단합된 내부적실용주의는 참 좋은것이다. 왜냐하면 외부의 침략을 막는 방법은 리론보다 실용주의가 더 좋은 방법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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