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1-11. 흑인왕국 아이띠의 반미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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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반미열풍
□ 흑인왕국 아이띠의 반미투쟁
흑인의 나라이라면 먼저 아프리카대륙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까리브해국가들중의 하나인 아이띠는 흑인의 나라이다. 아이띠는 1804년에 독립을 쟁취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총인구 880만명중에서 흑인의 수 95%를 유지하고있는 명실공히 확실한 흑인의 나라이다.
프랑스노예해방
1492년 10월에 그리스토퍼 콜룸부스가 아메리카신대륙발견의 첫 발자국을 남긴 곳이 현재 까리브해국가중의 하나인 아이띠섬이였다. 콜룸부스의 뒤를 따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식민지침략의 열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하였다.
1500년대초에 에스빠냐사람들이 제일먼저 아이띠섬에 상륙하여 식민지침략을 시작하였다. 에스빠냐침략자들은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등을 재배하면서 침략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에스빠냐초기 침략자들은 토지개발보다 더 먼저 시작한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이띠섬에서 수천년동안 뽈리네시아문화권속에서 평화롭게 살고있던 원주민인 아라와크(Arawaks)부족을 전멸시킨 잔인한 살상행위였다.
원주민들을 전멸시킨 후에 그 아름다운 섬에서 백인들만이 잘살겠다는 에스빠냐침략자들의 잔인한 꿈은 일단 성취되였다. 그들의 잔인한 꿈은 성취되였지만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곤난한 문제가 제기되였다. 그것은 원주민들을 전멸시킨 후에 농지를 개척하자니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것이였다. 식민지에서 일손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각해낸것이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를 붙잡아오는 방법이였다. 그리하여 흑인노예제도가 1512년이후부터 시작되였다.
유럽의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루를 잡는것처럼 흑인들을 붙잡아 아메리카로 싣고와서 농장주들에게 팔아넘겼다. 밑천 안드는 장사를 하여 서로 리득을 보는 백인들의 흑인노예시장은 그후부터 수백년동안 계속되였다.
그리스도교문화가 세계 여러 나라들을 지배하고있는 오늘의 21세기에 우리가 당면하고있는 비인간화문제를 도대체 리해할수 없는것처럼 그 옛날 아프리카에서 인간사냥을 하여 노예로 팔아먹은 그 당시의 유럽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저지른 그 무지한 죄악들을 우리는 정말 리해할수 없다.
에스빠냐침략자들은 세월이 얼마 지난 후에 작은 섬나라 아이띠를 포기하고 보다 더 큰 욕망을 채우려고 남아메리카의 광활한 대륙을 향하여 떠나가고말았다.
1697년에 에스빠냐가 다 떠나간 후에 프랑스는 《리스위크조약》을 맺고 아이띠를 프랑스의 령토로 만들었다. 원주민들은 모두다 학살사태로 사라져 없어졌고 흑인노예들만 다소 남아있는 아이띠의 새 주인으로 프랑스가 등장하게 된것이다.
아이띠의 새 주인이 된 프랑스는 아이띠에 사탕수수와 커피농장을 확대하여 유럽으로 수출하는 새로운 식민지로 출발을 하였다. 프랑스는 아프리카노예장사군들을 통하여 흑인노예의 수를 50만으로 대폭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노예들의 로동력을 리용하여 아이띠를 대대적인 열대농산물을 수출하는 수출원산지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프랑스는 아이띠에 항구도시를 건설하여 당시 뉴욕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화려한 항구도시를 만들고 여기에서 프랑스본국의 경제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역할을 하고있었다.
프랑스는 50만 흑인노예들의 피땀의 대가로 프랑스제국의 영예와 번영을 100년동안이나 누리였다.
하지만 이 100년의 세월은 흑인노예들에게는 알몸으로 채찍을 맞으면서 피눈물의 고역을 치러야 하는 절망과 분노의 길고긴 100년이였다.
이랑과 고랑이 되는 력사의 변천을 막을수 있는 제국주의는 이 세상에 없는것이다. 100년의 암흑속에서 절망과 분노로 살아가고있던 흑인노예들에게 대서양을 건너 희망의 불씨가 날아왔다. 그 희망의 불씨는 프랑스혁명의 소식이였다. 또 그때 마침 미국에서도 George Washington대통령이 주장한 만민평화평등사상에 대한 소식이 들어오고있었다.
1791년 8월에 드디여 아이띠프랑스령 싼또 도민고에서 흑인노예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흑인노예들은 프랑스에서 진행되고있는 혁명의 진전을 예민하게 주시하면서 아이띠에서 항쟁에 박차를 가하였다. 폭동은 아이띠전역으로 확장되여 3년동안 계속되였다. 프랑스의 나뽈레옹은 강력한 원정군을 파견하였지만 흑인노예들의 거센 저항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퇴진하고말았다.
1804년 1월 1일에 량부모가 다 흑인노예인 데살린이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아메리카대륙에 력사이래 처음으로 《아이띠흑인공화국》이 창설되였다. 이것이 바로 아이띠흑인공화국의 력사적시발점이였으며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다.
독립후유증을 악용하는 미국
아이띠 흑인나라의 독립은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나라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아이띠의 혁명을 본받아 흑인들과 원주민들도 각 지역에서 혁명을 일으킬 기회를 꿈꾸게 되였다. 또 극심한 착취와 학대에 대하여 유럽의 백인들에게 정면으로 항의를 하려는 추세를 나타내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관련국들과 련합하여 내적으로는 분렬을 조장하고 외적으로는 봉쇄와 고립을 시킴으로써 아이띠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온갖 시도를 다하였다.
로마교황청은 아이띠와의 단절을 선포하고 사제들을 철수시켰다. 프랑스는 식민지통치하에서 아이띠에 투자하였던 모든 자원에 대한 대가를 변상하라고 사정없이 압박하였다. 미국은 아이띠주변을 군사적으로 포위하고 위협하였으며 내적으로는 분렬과 하극상을 은근히 부추기고 후원함으로써 아이띠에서 정변을 일으켜 사회적불안을 확대시키는 작전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아이띠는 독립후에 사정없이 불어닥치는 《독립후유증》으로 인하여 날이 갈수록 혼돈과 험난한 풍파에 헤매이게 되였다. 미국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가장하면서 사실은 아이띠의 점증하는 위기를 악용만 하였다.
미개한 아프리카밀림에서 짐승모양으로 붙잡혀와서 2대, 3대, 4대에 걸쳐 줄곧 노예로만 살아온 흑인들이였기때문에 비록 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독립국가를 자주적으로 운영해나아가는 정치적지도력에 있어서는 큰 한계점이 있었고 또 엄청난 위기와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기다리고있었다. 혁명을 지휘하고 독립을 선언한 혁명투사 Jean Dessaline초대대통령이 취임한지 2년후에 흑인들끼리 싸우는 분쟁의 희생물이 되여 정적에게 암살되였다.
1806년에 제2대대통령으로 취임한 Chrisopher대통령은 권력에 굶주렸던 흑인들의 한풀이를 하는듯이 광적으로 자기와 같이 노예이였던 국민들을 향하여 무서운 독재를 실시하였다.
아메리카대륙에 유일한 흑인왕국을 과시할 목적으로 1 000m의 높은 산꼭대기에 화려하고 웅장한 왕궁을 건설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노예처럼 강제로동을 명령하였다. 왕궁으로 올라가는 길을 닦는데만 3 000명을 강제로 동원하였다고 한다.
독립된 새 나라를 기뻐하던 흑인들은 오히려 흑인대통령에게 극심한 구박과 중로동을 강요당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에 빠지고있었다. 자기를 대통령이라 부르지 말고 《앙리1세국왕》이라고 부르라고 국민에게 명령을 한 이 독재자는 결국 반대파에 쫓겨 도망을 치다가 자살로 종말을 고하고말았다.
1820~1844년에 Pierre Boyer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는 기간에는 도미니까공화국이 새로 창설되여 아이띠에서 분리되여 갈라져나감으로써 나라는 동서로 분리됐다. 혁명으로 흑인이 주권을 가지는 새 나라를 창건하기는 하였지만 불행한 사건들은 끝없이 계속되였다.
이와 같이 싸움과 분렬이 계속된 원인이 무엇일가?
첫째는 근본적으로 아이띠흑인의 무지와 혼란을 악용하여 뒤에서 조정하면서 재침략을 노린 미국때문이다.
둘째는 흑인사회는 《순종 아프리카흑인》과 《혼혈흑인》들이 두개의 세력으로 분리되는데 이들중에서 《혼혈흑인》들이 경제권을 장악하고있으므로 늘 두 세력간에 권력다툼이 끊기지 않고 계속되는것이다.
셋째는 오래 뿌리박힌 노예생활로 인하여 형성된 문화적후진성과 렬등의식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이 전혀 없는 력사성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문제들이라고 볼수 있다.
리유야 어찌되였든 독립후 1800년대말에 있어서 아이띠흑인공화국의 정세는 래일을 예측할수 없는 혼미한 상황에 빠지고있었다. 새로운 대통령들만 자주 등장하였다가 또 즉시 물러나는 정치적혼란속에서 경제는 퇴보하고 외국자본들이 침투해들어오는것을 막지 못하고 속수무책이였다.
이와 같은 혼란속에서 미국은 1905년을 기점으로 하여 간접 또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아이띠에 대한 경제적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였다. 그러다가 1915년 7월에 드디여 미국은 아이띠의 내분을 구실로 삼으면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은근슬쩍 아이띠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이 아이띠흑인공화국을 점령하고 통치한 그 과정을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미국의 외국자본투입과 경제적침투(1820년대부터 시작하여 1915년까지)
2. 미국의 군사적침략과 군정통치시기(1915년부터 1934년까지)
3. 미국이 쿠데타로 세운 독재정권시기(1934년부터 1990년까지)
자유의 꿈이 고통과 시련을 만나게 되는 경우를 인류력사를 통하여 흔히 볼수 있다. 하지만 아이띠의 흑인들이 대중봉기로 획득한 자유의 꿈은 고통과 시련을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미국에 의하여 감당하기 힘든 최악의 재앙을 당하게 된것이다.
미국은 아이띠에서 군정을 20년동안 계속한 후에 1934년에 형식적으로 군정을 끝냈다. 하지만 미국은 군정이후에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정보다 더 극악한 친미독재자 Duvalier를 내세우고 아버지와 아들이 계속하여 장기집권을 하도록 뒤에서 조종하면서 1990년까지 66년동안 식민통치를 감행하였다. 그러니까 미국은 도합 75년동안이나 군정과 쿠데타로 아이띠를 지배하고 통치한것이다.
해방신학신봉자 카톨릭신부 아리스띠드대통령
아이띠는 프랑스의 영향으로 총인구의 80%가 카톨릭교인이다. 1804년 독립후 187년의 긴 세월이 흘러갔는데 아이띠력사이래 비로소 처음으로 국제적여론의 뒤받침을 받으면서 민주주의적인 대통령선거가 이루어졌다.
이른바 좌경해방신학신봉자라고 불리우는 아리스띠드(Bertrand Aristide) 카톨릭신부가 력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에 의하여 당선이 되였다. 1990년 12월에 당선이 되여 1991년 2월에 대통령에 취임을 하였다. 노예흑인들이 그들의 손으로 혁명을 일으켜서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187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에 또 역시 그들의 손으로 투표를 하여 처음으로 흑인대통령을 선출하여 취임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노예시장을 통하여 아이띠섬으로 팔려왔을 때부터 따진다면 어언 4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400년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민주주의와 민선에 의하여 근로대중을 위주로 하는 흑인대통령이 선출되였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아리스띠드는 빈민가출신으로 미국, 이스라엘, 카나다에서 류학한 뛰여난 신학자였다. 그는 빈민들의 대변자로 역할을 하면서 암살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탁월한 인품과 강한 신념으로 대중의 지도자로서 투신하였기때문에 70%의 득표로 대통령으로 취임할수 있었다.
하지만 1991년 2월에 취임한 아리스띠드대통령은 결코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대통령이 되지 못하였다. 해방신학의 신봉자 아리스띠드대통령은 취임한지 불과 9개월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또 쿠데타를 당하였다.
당시 일어난 쿠데타에 대하여 유럽의 어느 인터네트 웹싸이트는 《A coup made in the USA》(미국산 쿠데타가 발생하였다.)라고 로골적으로 비평을 하였다.
미국이 같은 해인 1991년에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라크전의 리유는 독재자를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라고 선전하였다. 하지만 아이띠에서는 독립후에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선대통령을 쿠데타로 제거하고 미국이 지원하는 독재자를 그자리에 세우기 위함이였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정반대의 모순덩어리 미국인가? 그러면서 미국은 평화를 위하여 싸운다고 떠든다. 이것을 거짓과 위선의 이중자대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을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수 있을가?
미국지배세력은 그동안 수많은 약소국들을 제 마음대로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켜왔다.
쿠데타의 주역은 미국의 부쉬1세와 프랑스의 쉬라끄대통령 두사람이였고 하수인들은 미국의 CIA와 미국에서 훈련받은 아이띠군장성 세드라스(Raoul Cedras)였다.
아리스띠드대통령을 축출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세드라스는 3년동안 지독한 친미독재를 실시하였다. 미국이 만들어낸 쿠데타로 인하여 5 000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아리스띠드대통령은 강제로 미국으로 끌려와서 3년동안 망명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3년동안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아리스띠드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는 유엔과 미국을 향하여 아이띠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모든 원조를 끊고 고립시켜달라고 주장을 하였다. 만일 원조가 끊어지면 당장 국민들의 고난과 고통이 심화될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그는 판단하였다.
아리스띠드의 주장대로 미국은 모든 원조를 끊고 독재정권을 고립시켰다.
그 리유는 독재가 너무 심해지면 미국에게 모든 원망이 쏠리게 되고 그로 인하여 반미감정이 심화되는것을 막기 위한것으로 진단되고있다.
아무튼 아리스띠드의 유일한 희망은 어떻게 해서든지 속히 아이띠로 돌아가서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정권을 회복하겠다는것이였다.
1994년에 클린톤대통령의 지원과 미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아리스띠드는 귀국하는데 일단 성공하였다. 미국은 3년전에 쿠데타로 권좌에 앉게 한 군장성 세드라스를 이번에는 외국으로 축출하고 아리스띠드를 대통령직에 다시 복귀시키고 그의 남은 임기기간을 채우는 조건으로 1996년까지 대통령직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미군을 또다시 아이띠에 주둔시켰다. 미국의 이중적행위는 이와 같이 아무 차질도 없이 착착 진행되였다.
헌법에 대통령직을 련임할수 없기때문에 아리스띠드는 1996년에 평민으로 돌아갈수밖에 없었다. 아리스띠드대통령은 남은 임기를 다 마치고 퇴임하면서 그의 측근인 르네 프레발(Rene Preval)을 추천하여 후임대통령이 되게 하였다.
4년동안 평민으로 지내다가 아리스띠드는 2000년에 다시 출마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사람들은 아직도 아리스띠드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가지고있기때문에 군부와 기득권유산층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선이 되였다.
당선이 되여 대통령에 또다시 취임을 하기는 하였지만 사실 그의 앞에는 태산같은 문제들이 쌓여있었다.
병주고 약주고 약주고 병주는 미국
아이띠에서는 기름이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또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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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또 지하자원이 욕심날 땅도 아니다.
그러면 왜 미국은 아이띠를 침공하여 민선대통령 아리스띠드를 취임한지 9개월만에 쿠데타를 일으켜서 미국으로 랍치하였을가? 왜 3년후에는 아리스띠드를 대통령으로 복귀시켰다가 또다시 축출시켰을가?
그 리유를 다음과 같이 찾아볼수 있다.
첫째, 미국의 공화당보수세력은 해방신학신봉자인 좌경화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오래동안 존속하는것을 원치 않고 속히 제거하기를 원하였다. 이와 같은 보수진영의 여론이 부쉬를 압박하였다.
부쉬는 이 여론을 등에 업고 해병대를 투입시켜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리스띠드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둘째, 아이띠내부에 존재하고있는 막강한 군부는 뿌리깊은 친미보수기득권세력들이다. 이 군부세력들은 아리스띠드대통령의 정권이 등장함으로 진보력량과 충돌하게 될것을 우려하였다. 이와 같은 친미보수세력들이 미국의 우익보수세력과 야합하여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셋째, 부쉬는 이라크전쟁으로 인하여 국제적여론의 부담을 느끼게 되였다. 이와 같은 국제적여론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기를 원하였다. 즉 《미국은 오직 원유만을 위해서 전쟁을 하는 나라가 아니다.》라는것을 과시함으로써 국제적관심을 조금이라도 전환시키려는 의도도 깔려있었다고 본다.
넷째, 부쉬는 해방신학자 아리스띠드를 공갈과 협박뿐만아니라 동시에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설득매수하여 앞으로 리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그를 미국으로 망명을 시켜서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 여러가지 타협을 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대통령에 복귀하면 IMF를 수용하겠다는 타협이였다.
미국의 의도대로 아리스띠드는 결국 그렇게 설득매수된것으로 의심을 받고있다.
2000년에 아리스띠드대통령이 복귀하여 대통령에 재취임을 하였다.
그가 취임한 이후 미국은 외면하면서 원조를 일절 끊어 경제난에 빠지게 하였다. 전임독재정권이 망쳐놓은 경제로 인하여 빈부의 격차와 일반서민들이 당하는 빈곤은 전세계에서 최하권으로 떨어졌다. 절대다수인 서민들은 하루에 1US$이하로 겨우 살아가는 실정인데도 미국은 모든 원조를 끊어버렸다. 이것은 미국이 아르스띠드대통령을 복귀시켜놓고 다시 버렸다는 뜻이다.
곤경에 빠진 아리스띠드대통령에게 미국은 IMF를 수용하라고 강요하였다. IMF수용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있을 때 비밀로 약속을 하였기때문에 도저히 거절할수 없는것이였다. 아리스띠드대통령이 IMF를 순순히 받아들이는것을 보고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를 맹렬히 규탄하였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아리스띠드대통령을 위험한 좌파지도자라고 몰아붙였다.
진퇴량난에 빠진 대통령은 량진영에서 매일같이 벌리는 시위와 폭동을 막기 위하여 할수없이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진압을 강행하였다. 언론은 아리스띠드정권을 국민을 위한 정권이 아니라 무서운 독재정권이라고 규탄하였다.
2004년 1월은 아이띠흑인공화국창건 200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해야 할 날이다. 하지만 기념은 고사하고 우파와 좌파 량진영에서 아리스띠드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면서 웨치는 소요와 혼란으로 인하여 200주년을 맞는 아이띠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있었다.
미국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아이띠의 보수진영과 우익강경파들에게 막대한 돈을 대주면서 아리스띠드정권이 무너지도록 조종하였다. 미국은 2004년 2월 29일에 이른바 유엔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2 300명의 군인들을 아이띠에 다시 상륙시켰다. 《미국산쿠데타》는 또다시 성공하였다. 2004년 5월 31일에 아리스띠드대통령과 그의 가족은 미국국회의 흑인대표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남아프리카 Johannesburg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아리스띠드대통령의 첫번째 망명지는 미국이였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망명지는 본래 흑인들의 본 고향인 아프리카가 되였다.
해방신학신봉자 아리스띠드신부의 마지막 정치적고백
조상의 땅 아프리카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한 아리스띠드신부는 그 지역의 명문대학이나 운동단체들로부터 강연초청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일체 응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프리카, 조상의 나라의 원어인 Zulu어공부에만 열중하여 언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제는 영어나 프랑스어뿐만아니라 Zulu어를 류창하게 말할수 있게 되였다.
아리스띠드신부는 어느날 취재차 방문해온 유명한 저술가 Naomi Klein에게 카톨릭교의 사제로서 마지막 정치적고백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다음은 그의 고백적이야기들을 간략하여 소개한다.
《내가 미국 워싱톤에 붙잡혀있을 때 미국이 나에게 강요한 말은 오직 하나의 단어뿐이였다. 즉 사유화, 사유화, 사유화.
클린톤행정부는 나를 대통령으로 복귀시키는 조건으로 아이띠의 정치적체제를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라고 강요하면서 기존의 경제적프로그람들을 일체 다 쓸어버리고 새 틀을 짜자고 요구하였다.》
그 새 틀이란 무엇인가?
1. 모든 사회봉사프로그람을 대폭 삭감하라.
2. 자유무역의 문을 활짝 열라.
3. 쌀과 옥수수 등 수입의 관세를 절반 낮추라.
4. 정부가 소유하고있는 기업체들을 사유화하라. 특히 통신과 전기를.
《내가 그때 미국에 붙잡혀있으면서 내게 무슨 힘이 있다고 감히 반대만 할수 있겠는가? 그래서 타협적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공기업을 사유화하면 오직 개인기업주들이 독점을 하여 빈부의 격차가 더 심화되여 사회문제가 대두되므로 조건을 붙여야 한다. 그 조건은 〈독점금지법〉을 먼저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
2. 공기업들을 사유화하여 얻는 리득을 근로자들과 분배하기 위하여 주식분배소유제도를 세워야 한다.
미국은 이 제안을 완전히 묵살하고 사전에 약속하였던 5억US$를 단박에 취소하고말았다.
이것은 분명히 경제적쿠데타이다라고 나는 그때 생각하였다.》
이상과 같은 상황하에서 어쨌든 아리스띠드대통령은 미국망명생활 4년만에 미군 2 300명의 《호위》하에서 아이띠로 돌아와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던것이다.
아리스띠드대통령이 4년만에 돌아와보니 아이띠는 친미독재정권하에서 경제적인 파탄은 말할것도 없고 사회악은 극도에 이르러 유엔이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범죄률이 세계에서 132위라고 하였다.
그러면 아리스띠드대통령이 두번째로 2004년 5월 31일에 가족과 함께 아프리카로 영구적망명을 하였는데 그러면 이후 아이띠는 어떻게 되고있는가?
미국은 과도기적군정을 속히 끝내고 선거를 통하여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기를 원하고있었다. 드디여 2006년 2월 7일에 대통령선거가 시행되였다.
극도의 혼돈과 절망속에서 해방신학신봉자 아리스띠드대통령에게 일시 실망하고 등을 돌렸던 아이띠인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그들의 미련과 추억은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것이였다.
아리스띠드대통령의 최대의 측근자이며 또한 아리스띠드대통령의 공석을 메꾸어 일시 대통령이 되였던 르네 프레발이 국민의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였다.
군부독재기득권세력은 프레발을 지지하는 대중의 열망을 도저히 막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제동을 걸어 득표의 계수를 트집잡아 선거무효소동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득표계수를 하루 중단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드디여 프레발이 대통령으로 당선된것이 확정발표되였다.
프레발대통령이 취임을 한 후에 제일 첫 발언이 무엇이였을가?
《나는 아프리카에 망명중인 아리스띠드 전 대통령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원한다.》
특정상황에서 미국이 태산같이 큰 힘이 될수 있지만 다른 상황아래서는 연약한 대중의 힘이 태산을 넘어 앞으로 달려간다는 사실을 오늘 이스파노아메리카는 이곳저곳에서 잘 보여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