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미래행 급행렬차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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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12
광우는 새벽이 가까와오는무렵에야 기차에서 내렸다.
그는 밤중에 자기가 아는 사람들한테 찾아들어가 페를 끼치고싶지 않아 가까이에 있는 려관으로 갔다. 거기서 두어시간 눈을 붙인 다음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시간에 맞춰 도당에 먼저 들리였다. 그러고나서 인민위원회사람들까지 만나다나니 오전시간도 퍼그나 흘러서야 시건설사업소로 향했다. 거기에 자기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가 건설사업소의 위치를 물어가며 공원의 울타리옆으로 난 걸음길로 한참 걸어가는데 달리던 승용차 한대가 옆에 와서 멎어섰다. 무심결에 보니 구레나룻이며 코수염을 길러 나이를 대중할수 없는 외국인이 차안에 타고있었다.
승용차의 앞문이 열리면서 통역이나 안내원쯤 되여보이는 새파랗게 젊은 상고머리청년의 상반신이 나타났다.
《미안하지만 손님, 말 좀 물읍시다. 영산화학공장으로 가자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분명 김광우를 보고 묻는것이였다.
광우는 난색의 미소를 지어보이였다.
《미안합니다. 영산화학공장이란 말은 많이 들었지만 나도 이 고장에 온 손님이다보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구만요.》
상고머리청년은 손님이라는 말에 씩 웃으며 제편에서 더 미안해했다.
《이거 안됐습니다, 전 여기 사람인줄로 알고…》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주 가까이에서 애어린 청년의 목소리가 울리는것이였다. 놀라운것은 목소리의 임자가 그리 류창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 서툴지도 않은 영어로 말하는것이였다.
《당신들이 그 길을 따라 승용차로 5분쯤 더 가느라면 좌측으로 큰 공장이 보일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당신들이 찾는 화학공장입니다.》
이것 봐라! 광우는 난데없이 울리는 그 목소리의 임자를 찾아 뒤를 돌아보았다.
공원의 울타리너머에서 도수안경을 낀 어린 청년이 커다란 전정가위로 측백나무를 철거덕 철거덕 다스리며 히쭉 웃고있었다. 방금전에 그가 영어로 말한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청년은 생울타리를 다스리는 작업을 하면서도 멎어선 승용차안에 외국인이 타고있는것을 보았으며 마침 상고머리통역이 길을 묻는 소리를 듣고 이 기회에 자기의 외국어수준을 시험해볼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던 모양이였다.
김광우보다도 차안에 타고있던 외국인에게서 당장 반응이 일어났다.
외국인은 나무를 다스리는 애숭이로동청년을 향해 너그러운 찬사의 표시로 엄지손가락을 내보이고나서 자기의 안내자에게 뭐라고 했다.
상고머리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로동청년에게 외국인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외국손님은 동무의 영어수준이 놀라울 정도라고 하면서 조선에서는 어린 로동청년들이 다 그렇게 외국어를 아는가고 합니다.》
그 말에 애숭이청년이 사기가 나서 또 자기의 영어지식을 발동했다.
《세계를 내다보며 이 땅에서 가장 훌륭한 미래를 건설하는것은 우리 조선청년들의 꿈과 리상입니다.》
외국손님의 얼굴에는 또다시 감동의 빛이 나타났다. 그가 흥미있어하며 로동청년에게 무슨 말인가 또 하려는 거동을 보이였다.
그것을 느끼자 로동청년은 히쭉 웃으며 외국사람들처럼 어깨를 으쓱해보이였다. 그리고나서 재빨리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당신들도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이고 나 또한 우리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는 이 일이 대단히 바쁩니다.》
김광우가 보기에 로동청년은 영어사용지대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나이 많은 외국손님과 더 말하다가는 자기의 외국어밑천을 다 동원한 이 대화에서 잘못하면 렬세에 빠질수 있을것 같아 미리 몸을 사리는것이 좋은 수라는 생각을 한것 같았다.
로동청년의 그런 계교를 외국인이 눈치챘는지 어쨌는지는 광우가 보기에도 알수 없는 일인데 그의 구레나룻 더부룩한 얼굴에는 너그러운 미소가 어리였다. 외국손님은 승용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로동청년을 향해 다정히 손을 저어보이였다.
승용차가 가버리자 김광우는 기지있고 재미있는 애숭이청년에게 별로 호감이 가서 빙그레 웃었다.
《동무, 이자 보니 외국어수준이 괜찮던데!》
《손님도 영어를 아시는거구만요.》애티가 아직은 말짱 가셔지지 않은 목소리였다.
《뭘, 영어라면 겨우 자모나 외우는 수준인걸. 그런데 동문 그만하면 어디 가서 통역원도 할수 있겠소.》
청년을 만족하게 해주고싶어 일부러 과장하는 말이였다.
해볕에 가뭇이 탄 청년의 애리애리한 얼굴에는 어른들의 칭찬을 받고 의젓하게 보이려는 철부지소년의 그것과 같은 천진한 표정이 떠올랐다.
《뭘요.》
《동문 아버지가 외교일군이 아니요?》
로동청년은 의아해서 김광우를 건너다보았다.
《그건? …》
《허허, 내가 묻는건 동무가 외교부문에 있는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 나가 살았던적이 없었는가 하는거요.》
그제서야 청년은 씩 하고 웃었다.
《꼭 외국에 나가야 외국어를 배웁니까 뭐. 전 중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는데요.》
광우는 느닷없이 즐거워졌다. 우연히 만난, 이름조차 모르는 청년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동무말이 옳소. 그러니 동문 중학교때 외국어공부를 잘했구만. 동문 대학에 갈걸 그랬소.》
광우가 기꺼이 그 말을 하기 바쁘게 청년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인생의 쓰고 단맛을 다 체험한 뒤끝에 짓는듯 한 고뇌의 표정이 실리였다.
인생의 문어구에 금시 들어선, 기껏해도 스무살을 넘기지 못했을 애숭이청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였다. 광우가 무슨 영문인지 알수 없어 벙벙해있을 때 청년의 입이 열리였다. 청년은 광우를 놀리기라도 하는듯 영어로 말했다.
《대학에요? 난 운수가 좋지 않거던요. 그래서… 에이, 그저 이렇게 됐습니다.》
청년의 입에서 놀랍게도 거침없이 쏟아져나오는 외국어말마디들이 무엇을 뜻하는것인지 알게 되자 광우는 그만 어이없어 입이 하 벌어졌다. 방금전에 느꼈던 청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당장 우뢰가 터졌다.
《이녀석! 무슨 소릴 해? 운수가 어쨌다구? !》
광우의 입이 다시 열리려고 할 때 청년은 이미 달아나버렸다. 길가는 나이지숙한 손님이 영어라면 기껏해야 뜯개말이나 번지는 정도인줄로만 알고 떠오르는대로 아무 말이나 섬겨댄것인데 알고보니 죄다 알아들은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바빠맞은것이였다. 하여 애숭이청년은 보매 나이도 듬직하고 누군지는 알수 없으나 높은 기관의 일군일수도 있는 손님한테 잘못 걸려들었으니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당장은 꼬리를 사리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것이였다.
(음음, 나쁜 녀석!)
광우는 걸어가며 입을 쩝쩝 다시였다. 우연히 당한 이 일로 하여 우울해졌다.
그런 기분을 털어버리지 못한채 시건설사업소를 찾아들어갔으며 신소를 했던 당사자를 만났다.
시건설사업소의 운전사라는 얼굴 시꺼먼 사십대의 사나이는 김광우가 만나자는 취지를 알고 자기는 몹시 바쁜 사람이라고 했다. 기름내 풍기는 작업반휴계실에 불리워들어와 반들거리는 긴의자에 손님과 함께 나란히 앉기는 했지만 애당초 성근한 대화상대자가 되여줄 자세는 아니였다.
사나이는 몹시 불편해하며 금시라도 일어나 나가버릴듯 나들문쪽을 흘끔흘끔 바라보다가 겨우 성의없는 말을 한마디 했다.
《우리야 평범한 로동자가 아닙니까. 됐습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의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야지요.》
그 순간 광우는 어디선가 울려오는듯싶은 우뢰소리를 들었다. 우우― 마치도 광우의 운명에 내려지는 그 어떤 예고처럼! 우뢰소리와 함께 당비서의 준절한 목소리가 다시금 귀전을 왕왕 울리였다.
《일군들의 인민관이…》 《…인민관이…》 그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마음이 불안했다. 약 한시간전에 류창한 외국어로 자기의 심상치 않은 심리를 토설하던 젊은이가 눈앞에 떠오르기도 했다.
광우는 언짢은 심기를 애써 누르며 얼굴에 느슨한 웃음을 실었다.
《동무, 그러지 마오. 우리 사회가 로동자는 아무런 권한도 없는 막바지취급을 당하고 일군들한테만 특세가 부여되는 그런 사회야 아니지 않소. 그걸 모르지 않을 동무가 그렇게 말하면 되겠소? 로동자가 어쨌단 말이요?》
사나이는 고개를 들어 광우를 피끗 건너다보았다. 사나와진 그의 눈에서 펑끗 불꽃이 이는듯 했다.
《그 인정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동지가 신소문제때문에 내려왔다간 다음…》그는 갑자기 말을 끊어버리며 고개를 홱 저었다. 그는 한순간 리성을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회오의 감정에 빠져 우울해졌다.
이 사람이 무슨 말을 들었단 말인가? 무슨 말을 들었기에 평범한 로동자가 어쩌고 어쩌고 하는, 분명 그자신도 믿지 않는 당치않은 소리를 한단 말인가?
광우는 갑자기 용기를 잃어버리였다. 그것은 말을 성의없이 하는 이 투박한 사나이의 가차없는 비난같은 눈빛에 겁을 먹어서도 아니였고 수재아들의 좌절을 겪은 아버지로서의 그에 대한 동정에서 오는것은 더욱 아니였다. 자기와 이야기하는 사나이가 결코 막되게 사고를 할만큼 지각없는 인간같지는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서 그 어떤 의분이 끓고있다는것을 그 눈빛이 말해주고있는것이였다.
그런데 광우는 차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툭 두드러져나온 언덕이마가 감때사나운 인상을 자아내면서도 광우앞에서 주눅이 들어 서있던 사단후방차운전사의 얼굴이 언뜻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것이였다. 그것은 오래전에 광우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과거의 한토막이였다. 광우의 눈앞에서 병사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질 때 사나이의 눈에도 한순간 의혹의 빛이 어리였다. 그것은 인차 당혹감으로 변하였다.
《하고싶은 말이 있는것 같은데… 말해보십시오.》하고 광우는 온화하게 말했다.
《제가 이지러진 소리를 한건 용서하십시오. 그러지 말아야 하는건데 그랬거던요.》
《허허, 리해합니다. 동무야 우선 저에 대한 불만이 많겠지요. 그래서 그랬겠지요.》
사나이는 비로소 입가에 어설픈 미소를 그리였다.
《옳습니다. 실은 동지가 여기에 한번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비판을 하자구요.》
《말하십시오.》
《우에서 신소문제때문에 내려왔으면 제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을 다 만나봤어야 했습니다. 대중의 여론을 들어봐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동지는 한사람의 말만 들었거던요. 항상 좋은 인상에 좋은 말만을 골라서 하는 사람에게 다 정의가 있는것은 아닙니다. 자식가진 부모로서 제 자식의 일이 잘되지 않았을 때 마음 편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아들녀석의 일이 그렇게 되여 괴로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들 하나때문에 가슴이 아파 그러는것이 아닙니다.
저 하나의 리속을 앞세우는 한두사람때문에 공정성이 묵살되는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기는 힘들지요. 보면 그런 사람들은 국가가 손해를 보는것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당성이 강한체 하니까요.》
그 사람은 입을 꾹 다물어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최윤호처장에 대하여 말하는것 같은데… 그 사람이 신소와 관련해서 동무를 찾아와 무슨 소리를 했다는것입니까?》
《아니!》 그는 천천히,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동지와 잘 아는 사이같은데… 저는 할말을 다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십시오.》
그는 일어나려 했다.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아들은 어떻게 하고있습니까? 알고싶은데…》
사나이는 잠시 덤덤해있다가 고개를 들어 김광우를 도전적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왜요? 걱정됩니까?》
《허허,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오.》
《…》
《동무를 보니 그 아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사나이의 꺼밋한 얼굴에는 그제서야 깨끗한 미소가 실리였다.
《대학 못 갔다고 타락은 하지 않을겁니다. 괜찮은 녀석이니까요. 시원림사업소에 입직했습니다. 원래는 군대에 나가야 더 훌륭한 사람이 되겠는데 이 눈이 나쁘거던요. 젠장, 가문에 눈 나쁜 사람은 없었는데…》
《동문 제대군인이지요? 최전연에서 운전사로 복무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알아본것 같은데…》
사나이는 당장 얼굴이 뻘개졌다.
《옳습니다. 그때 동지는 련대작전참모였구 저는 사단후방차운전사였지요. 차를 잘못 세웠다가 참모동지한테…》
그것은 파아란 하늘에서 해빛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리는 어느 가을날에 있은 일이였다.
김광우는 사단에 일이 있어 갔다가 련대지휘부로 돌아가고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 기쁨은 풍요한 계절이 주는 선사품이였다. 따스한 바람에 실려오는 무르익은 낟알의 구수한 향기,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래소리, 길을 가득 메우며 건너가는 염소들이 겨끔내기로 질러대는 음매소리… 인간과 자연이 어울리는 《교향곡》에 취해서 걸어가던 그는 앞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마루에 눈길이 멎어섰다.
사단후방차 한대가 기관실문을 열어놓은채 서있는데 그 주위에 소학교 낮은반이나 될 아이들이 모여들어 오구작작 붐비고있었다. 웬일인가 해서 눈여겨보니 서있는 자동차밑에 새끼염소 한마리가 들어간것을 아이들이 끌어내겠다고 복작대고있었다.
(허, 저러다가 차가 움직이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광우는 아이들한테 물러나라고 소리치며 다가갔다. 운전사를 욕하려고 찾아보니 운전실이 비여있었다. 차바퀴에는 고임목조차 괴여있지 않았다. 아마도 운전사가 잠간사이에 무슨 사고가 나랴 하고 제동변만 당겨놓은채 자리를 뜬 모양이였다. 그런데 자동차가 서있는 곳에서 조금만 더 나가면 완만한 경사지였다.
광우는 한심한 운전사라고 속으로 욕을 하며 길가녁에 있는 커다란 돌 하나를 힘들게 안아다 차바퀴밑에 밀어넣었다.
그가 일을 끝내고 손이며 군복소매에 묻은 흙을 털고있을 때 고무바께쯔를 든 운전사가 나타났다. 나이도 어리지 않은 사관이였다. 언덕마루에 올라가서야 기관이 과열되였다는것을 알고 물을 길러 내려갔던 모양이였다.
《자동차를 세워놓을 때 고임목을 해야 한다는건 운전사들이 지켜야 할 규정이 아니요.동문 보아하니 운전년한도 어지간한것 같은데 제대될 때가 왔다고 해이된게 아니요? 자동차가 저절로 움직이기라도 했으면 귀여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될번 했는가 말이요!》
운전사는 얼굴이 뻘개서 그의 비판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래도 광우가 자리를 뜰 때에는 《작전참모동지, 사단에다가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닌게아니라 전 인차 제대되는데 흠을 남기고싶지 않아 그럽니다.》하고 푸접좋게 말했다. 그 바람에 김광우는 어이없어 웃었다.
광우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동무도 나를 알아보면서 모르는척 했구만.》
《그래야 말하기 편하니까요.》 사나이는 성글성글한 하얀 이발을 활짝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때 말이요. 동문 나를 욕했겠구만. 련대작전참모라는 사람이 사단에 그 일을 보고해서 자기를 비판받게 했다고 말이요.》
《그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아닌게아니라 동지가 보고하는 바람에 난 제대를 앞두고 부사단장동지한테 되게 비판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제대되여와서 사회생활을 하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생활의 걸음마다 그때일을 생각하며 자기를 채찍질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광우는 마음속에 깃드는 따뜻한 정을 느끼였다. 이번 출장길에 또 한명 좋은 사람을 알게 되였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을 더 만나야 했다. 그러자면 어데서 하루밤을 자야 했다. 렬차에서 내리자바람으로 만난 최윤호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김광우가 평양에서 내려온 용건을 말해주고 건설사업소에 먼저 들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자 저녁에는 꼭 자기 집에 와야 한다던 최윤호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의 집에 가고싶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옹졸한 생각을 하는게 아닌가? 그래도 우리 아버지와 함께 싸운 부대정치일군의 아들이고 군인사택마을에서 이웃하고 살아온 최윤호네가 아닌가. 앓고있는 내 안해를 위해서 극진하게 마음써준 고마운 사람이 아닌가! 집에 들리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서운해할가! 평양에 두고온 안해는 또 어떻게 생각할가!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원숙해지려고 해도 자기를 극복하기 어려운 때가 있는 법이다. 눈앞에는 늘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좋은것은 아니라고 울분에 차서 말하던 건설사업소운전사의 관골이 두드러진 꺼칠한 얼굴이 떠올랐다.
최윤호는 그때 신소자를 만나 사연을 잘 설명해서 리해시키겠다고 했다. 그런데 최윤호가 이자 그 사람을 만나 뭐라고 말했단 말인가?
《아니, 말하지 않겠습니다.》하던 그 말이, 《그가 동지와 잘 아는 사이같은데.》 하던 그 말이 가슴에 얼음쪼각처럼 들이박혀 빠져나가지 않았다. 불안했다.
여기 시내에는 그가 아는 또 한사람이 있다. 책임부원으로 있을 때 이곳 도에 드문히 내려오면서 전학선부상의 소개로 몇번 신세를 진적이 있는 공업대학 교무부학장 지석영이였다. 전학선부상이 대학교단에 있을 때 배워주었다는 제자였다.
김광우는 그의 집에 가면 평양소식도 말해주고 여기 지방형편도 들으면서 생활의 다반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대화로 시간을 보내야 할것이였다.
그런 교제는 자연스러운것이고 생활의 단조로움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누구와도 마주앉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혼자 있고싶었다.
려관에 다시 들어가 하루밤을 보내고 신소한 사람의 아들이 공부했다는 중학교를 찾아갔다.
거기서 나이지숙한 교장의 립회하에 당시 담임교원이였다는 녀선생을 만나 문제로 제기되였던 두 학생의 평상시성적을 알아보았다.
대학추천을 못 받고 원림사업소 로동자로 들어갔다는 오문형의 성적이 더 높았다.
《교장선생, 어떻게 되여 일이 그렇게 되였습니까? 원래야 성적이 우수한 오문형학생이 추천을 받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일이 잘못된거지요. 그 문형학생이 품행도 좋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수재라고들 했으니까요.》
교장은 퍽 소심한 사람같았다. 더 할 소리가 있는것 같은데 말하지 않았다.
광우는 그를 탓하고싶지는 않았다. 지내보면 우리 주위에는 부정을 알면서도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척 하는 약삭바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든것을 좋게만 보는 너그럽고 온화한 성격이 지나쳐서 뻔한 부정앞에서도 모난 말을 할줄 모르는 사람도 있는것인데 교장은 두번째 부류에 속하는것 같았다.
김광우가 어느 정도 답답한감을 느끼고있을 때 조심스럽게 앉아있던 녀교원의 입에서 《옳지 않습니다!》 하는 분노에 가까운 소리가 튀여나왔다. 교장의 두리뭉실한 말이 녀교원의 의분을 폭발시켰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우리 일군들의 심장이 그렇게 차거우면 됩니까? 나라의 미래를 안중에 두지 않는건 더 말할것도 없고 한 학생의 운명을 우롱의 도마우에 놓았단 말입니다!》
《아, 정란선생!》
교장이 자제시키려 했으나 의분의 수레바퀴는 이미 누구도 멈춰세울수 없는 지경이 되여 우당탕거리며 굴러갔다.
《자기의 리해관계에 따라 성적이 우수한 로동자의 자식을 밀어놓고 다른 학생을 추천했단 말입니다!》
그 녀자는 모든것을 알고있었다.
결국 광우는 그때 《허심하고 자기반성적》인 최윤호의 설명을 믿고 본의아니게 과오를 범했던것이였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는 최윤호를 만났다. 광우가 건설사업소에 찾아가 신소한 당사자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최윤호는 왜서인지 당황해했다. 그것이 김광우를 더욱 의아하게 했다. 하여 내가 신소때문에 처음 내려왔다간 다음 신소자를 만나 뭐라고 말한게 없는가고 하자 최윤호는 그 사람을 리해시키자고 그때 찾아가 사연을 솔직히 말해주었으며 그 사람도 다 리해를 했노라고 했다.
그 말을 할 때의 최윤호의 부자연스러운 거동이며 말투에는 아리숭한것이 있었다. 더우기 신소자가 다 리해했다고 하는 말이 왜서인지 광우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문득 눈앞에는 건설사업소 운전사의 분개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신소문제때문에 나를 찾아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하던 그의 말! 《아니, 말하지 않겠습니다!》하던 그의 말! 최윤호처장이 그 운전사에게 뭐라고 했단 말인가?
광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될수록이면 자제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격하여 인차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우선 동무의 말만 듣고 올라간 나부터 잘못했소. 이제 올라가면 당조직에 찾아가 내 과오에 대하여 보고하고 비판을 받겠소. 하지만 최동무도 옳지 않소! 옳지 않단 말이요! 자기의 상급에게 잘 보이는것이 동무에게는 국가의 리익을 지키는것보다 더 중요하오? 사람은 량심이 있어야 하오. 일군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운명이 어느 한두 일군의 량심에 따라 달라질수도 있기때문이요. 다른 사람도 아닌 동무가 그렇게 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소. 섭섭하구만!》
《부국장동지, 제 다시야 그러겠습니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것을 알면서도 제가 인정이 무르다나니 우에 있는 일군의 얼굴만 보면서 그런 과오를 범했단 말입니다.》
《동무는 인정에 못이겨 그랬다고 하는데 그〈인정〉때문에 한 로동자의 가슴이 얼마나 쓰리겠는가를 생각해봤소? 더우기 우리 사회가 미덕이 흐르는 사회이고 누구나 노력하면 희망에 따라 마음껏 나래칠수 있는 사회라고 배우며 자란 한 어린 청년의 가슴에 어떤 의혹이 자리잡겠는가를 생각해봤는가 말이요! 가슴이 다 서늘해지오. 그는 인생의 먼길을 가야 할 초년생이란 말이요.》
광우는 정말 이제 평양에 올라가면 먼저 당조직에 찾아들어가 자기의 과오에 대하여 비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는 서켠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평양행 렬차를 타야 할 시간도 얼마안 남았는데 광우는 또 한사람을 만나야 할 일이 있었다. 건설사업소 운전사의 아들이였다.
도모집처에서 나와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가며 광우는 가슴이 쓰리였다. 최윤호동무에게 너무 가슴아픈 말을 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의 량심까지 거들며 모가 나는 말을 해준게 아닌가? 그는 안해를 생각했다. 여보, 미안하오. 내가 최윤호동무에게 가슴아픈 말을 해주었구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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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는 어수선한 기분을 털어버리지 못한채 원림사업소를 찾아가 마침 퇴근길에 오르려는 오문형이라는 어린 청년을 만났다. 건설사업소 운전사가 눈이 나쁜 아들이라고 하더니 김광우앞에 나타난 청년은 어제 오전에 공원옆을 지나오다가 만났던 그 도수안경을 낀 애숭이로동자였다.
《나한테 종아리를 맞을 준비가 되여있겠지, 나쁜 친구.》
자기를 혼쌀내주려고 기어코 찾아온 손님인줄로 알고 주접이 들어있는 청년에게 일부러 엄포를 놓고나서 김광우는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그와 함께 역으로 나오며 말했다.
《문형아, 너도 알겠지만 우리 나라는 인간의 꿈을 소중히 여기고 그 꿈을 꽃피워주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나라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공부를 해라. 그래서 다음해엔 꼭 대학입학시험을 치거라.》
청년은 말이 없었다. 한참후에야 《알겠습니다.》 하고 조용히 말했다. 그다음엔 침묵.
《?》
광우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원망도, 이지러진 심리도 찾아볼수 없는 깨끗한 눈이였다.
《문형인 내 말을 믿니?》
《믿습니다!》
청년의 눈에는 따뜻한 신뢰의 빛이 흐르고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가슴은 쓰려오는것인가?
눈앞에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녀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학에 붙지 못하고 웃으며 돌격대로 나가던 딸애의 얼굴이 그리고 《당신은 제 딸문제 하나 해결할수 없어요?》하던 안해의 창백한 얼굴이.
지금도 안해의 마음속에는 그날의 원망이 녹을줄 모르는 얼음덩이처럼 남아있지 않을가?
그날 저녁, 도모집처장 최윤호는 기분이 흐려가지고 늦어서야 집으로 퇴근했다.
집에 들어서니 초인종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기다렸던듯 안해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 녀자는 혼자서 퇴근해오는 남편을 눈이 올롱해서 이상하게 올려다보았다.
《여보, 평양손님을 데리고온다더니 어떻게 된거예요?》
《다른데 들릴 일이 있다더구만.》
최윤호는 적당히 얼버무려치우며 시답지 않은 인상을 지어보이였다.
안해의 예쁘장하게 생긴 해말간 얼굴에는 점점 의혹의 빛이 짙어갔다. 그럴만도 했다. 남편이 낮에 전화를 걸어 저녁에 중요한 손님을 데리고 가겠으니 손님맞을 준비를 잘하라고 단단히 일렀던것이였다.
남편이 드문히 동무들을 데리고 들어오군 하여 손님접대에 어지간하게 지친것이지만 오늘은 중요한 손님이라고 강조를 하여 특별히 마음을 써서 음식준비를 한 그 녀자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 녀자는 집안의 외동딸로 자라면서 어머니한테서 전습을 잘 받아 음식솜씨가 있었다.
주부란 남편의 손님들로부터 료리솜씨가 있다든가 하는 그러루한 치하의 말을 듣는것도 하나의 기쁨이고 소박한 행복이라고 할수 있는것인데 오늘은 성의를 다하여 일껏 준비한 보람이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서운한 나머지 남편을 원망하던 그 녀자는 차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기분상태가 말이 아니라는것을 뒤늦게야 알아차린것이였다.
《여보,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전실로 들어서는 남편의 별로 어두워보이는 얼굴색을 살피며 그 녀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불안의 기색이 어리는 안해를 피뜩 돌아보고난 최윤호는 시답지 않아하며 퉁명스레 한마디 던졌다.
《일은 무슨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