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2. 짐바브웨의 독립영웅 로버트 지. 무가베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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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력사적교훈
□ 짐바브웨의 독립영웅 로버트 지. 무가베대통령
1960년대초부터 아프리카에서 독립의 선풍이 불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아프리카에 54개의 신생독립국들이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서 G7선진국들이 무리하게 추진하는 이른바 《구조조정》과 《세계화》책동으로 인하여 특히 아프리카의 많은 신생국들은 감당하기 힘든 빈곤에 빠져 허덕이고있다.
미국은 개방이 만병통치약이 되는것처럼 짐바브웨에 개방을 강요하고있지만 실지에 있어서 미국과 영국은 짐바브웨를 1차상품의 공급기지로 전락시키고 인플레만 심화시키고있다.
곡물증산을 말로는 외우고있지만 실질적으로 정부의 보조가 부족한 상태인것으로 하여 오래동안 영국이 독점하고있던 짐바브웨의 농업기반은 급격히 와해되고 가뭄과 기아와 빈곤이 엄습하여 짐바브웨의 경제는 오늘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있다.
미국은 짐바브웨에 자유무역과 개방을 강요하면서도 반면에 주요농산물분야(식량)에 대해서는 오히려 자유개방무역을 가로막고있다.
미국의 정치쇼는 경제분야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다. 미국은 친미정권을 창출하기 위하여, 그리고 반미정권을 퇴출시키기 위하여 온갖 음모를 다 꾸미고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치러진 불법총선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총선결과만을 시인하며 성공적인 총선이였다고 평가하였다. 미국에 전면적으로 협조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친미정권에 대해서는 어떤 불법선거라도 무조건 허용하는것이 미국의 정치쇼다.
아프가니스탄총선은 친미군정하에서 강도적으로 실시된 불법적총선이였으며 용병들이 연출한 선거연극이였다. 심지어 미국의 요원들이 투표함을 투표소에서 딴 곳으로 옮겼다고 탈리반은 폭로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짐바브웨총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나오고있는가?
미국은 짐바브웨의 총선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선거라고 단정하고 무가베대통령의 당선을 인정할수 없다고 억지주장을 하고있는것이다.
만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총선을 합법적선거라고 주장을 한다면 짐바브웨총선도 합법적선거라고 당연히 인정을 해야 할것이다.
무가베대통령은 1980년대에 짐바브웨를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건국의 아버지》로 국민들의 추앙을 받고있는 현직대통령이다.
미국과 영국이 무가베대통령의 재선을 반대하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것이다.
나는 현재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직면하고있는 총제적문제들중에서 특히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고있는 나라가 바로 짐바브웨라고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고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짐바브웨의 고대력사에는 호이산족의 수렵인들(Bushman)이 약 5 000년전에 원시림속에 살고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석기시대를 지나 철기시대에 이르러 반투족이 대이동을 하여 호이산족을 몰아내고 짐바브웨전역을 점령하고 여러 세기동안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반투족이 수세기동안 짐바브웨를 통치하다가 쇼나왕국이 짐바브웨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였다. 쇼나왕국은 9세기와 16세기에 이르는 수세기동안에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창건하고 크게 번성하였다.
거대한 화강암언덕이 100m 높이로 가파르게 솟아있는데 이 화강암을 배경하여 세워진 석조건물들이 쇼나왕국시대 문명을 과시하고있었다.
1300년대와 1400년대에 이르러서 200여개의 거대한 궁전들이 건설되였으며 그 궁전들이 쇼나문명의 정치와 종교 그리고 산업의 최고번영의 중심지를 이루고있었다.
쇼나왕국은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번영하게 했으며 농업과 광산 그리고 무역을 확장하여 인디아, 유럽, 페르샤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이르기까지 수출과 수입 등 다양한 교역을 실현하였다.
쇼나왕국은 1100년경부터 매우 인상적인 돌벽돌을 리용한 건축을 시작했다. 200여개나 되는 이 거대한 석조건물들은 짓기 시작하여 완성될 때까지 300년이상 걸렸다고 한다. 쇼나왕국의 문명을 유감없이 과시하는 걸작들이다.
하지만 《그레이트 짐바브웨》에도 태양이 서산에 질 때 어둠이 찾아오는것처럼 번영하던 운명이 점점 쇠퇴하여 암흑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1400년대부터 유럽에서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정벌하기 시작했는데 1600년대초에는 인디아양에서 뽀르뚜갈세력이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침입해들어왔다. 뿐만아니라 남쪽에서는 줄루족과 은데벨레족들이 침략해들어왔으며 또한 쇼나왕국은 자체내에서도 지방분권적혈족사회로 분렬되여 왕국의 중심이 흔들리고 결국 외세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당하고말았다.
쇼나왕국은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포기하고 북쪽에 있는 잠베지강(Zambezi River)을 건너 오늘날의 마쇼날란드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마쇼날왕국》을 건설해야만 하는 비운에 처하였다.
한편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점령한 은데벨레족과 줄루족은 서로 싸우다가 결국 은데벨레족이 승리하여 령토를 독차지하였는데 독차지한 령토를 새로운 이름으로 《마타벨레왕국》이라고 불렀다.
9세기경부터 쇼나왕조가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창건하고 약 1 000년동안 찬란한 문화를 과시했지만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두개의 왕국으로 분렬되였다.
북쪽에는 《마쇼날왕국》이 건설됐고 남쪽에는 《마타벨레왕국》이 건설된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침략
몇해전 언론에서 이전 영국수상 블래어를 가리켜 《미국의 길들인 강아지》라고 조소한적이 있다. 세계지도를 들여다보면 지도상에 나타나있는 미국과 영국의 크고작음의 대조는 큰 산밑에 있는 조그마한 비위와 같이 비교도 할수 없다. 사실 지도상으로 보면 미국과 영국의 차이는 《주인과 강아지》만도 못하게 보인다.
그런데 이런 영국이 어떻게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라고 한때 호통을 쳤을가?
그리고 영국의 짐바브웨침략은 어떻게 시작된것인가?
1885년에 영국의 선교사 D. 리빙스톤이 짐바브웨에서 세계3대폭포중 하나인 빅토리아폭포의 웅장한 모습을 처음 발견하고 영국에 보고한것이 영국이 짐바브웨와 접촉을 시작하게 된 최초의 계기다.
영국이 짐바브웨를 침략하는데 있어서 처음 선구자적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영국교회의 선교사 리빙스톤이였던것이다. 그는 당시 선교사일뿐만아니라 아프리카대륙의 내부의 신비를 정탐하는 모험적탐험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리빙스톤의 이야기를 하자니 자연히 아메리카신대륙을 처음 발견하였다고 자랑한 콜룸부스의 아메리카탐험이야기가 생각난다. 콜룸부스가 에스빠냐국왕에게 처음 보낸 아메리카신대륙에 대한 탐험보고서는 종교적어휘로 가득차있다.
《… 그리하여 영원한 하느님, 우리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언뜻 보기에 불가능해보이는 장벽을 넘어 승리를 주시옵나이다.… 그리고 왕께서 필요하신만큼의 황금과 왕께서 원하시는만큼의 노예를 가져올것을 약속하나이다.》
또 이런 기록도 있다.
《황금으로 배를 가득 채울 욕심으로 콜룸부스는 14살이상의 원주민모두에게 석달마다 일정한 량의 금을 모아오라고 명령하였다. 금을 가져오면 목에 구리표식을 달아줬다. 하지만 목에 구리표식을 달지 못한 인디안들은 발견되는 즉시 두팔이 잘린채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콜룸부스가 또 이렇게 말을 한 기록도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팔수 있는 모든 노예를 계속 잡아냅시다.》
이런 보고서를 국왕에게 제출한 콜룸부스에게 국왕은 제2차 아메리카원정때 17척의 배와 200명의 선원을 지원하였다. 물론 제2의 원정은 더 많은 황금보석과 더 많은 노예를 가져올것을 약속하였다.
유럽의 백인침략자들의 종교적위선과 비인간적인 잔인한 행동은 그 당시 아메리카신대륙에서만 있었던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침략의 초창기에 있어서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종교의 위선적행위는 어디서나 잔인성으로 표현된다.
1888년에 리빙스톤선교사의 뒤를 이어 영국인사업가 세실 로즈(Cecil Rhodes)는 영국정부의 승인을 받아 《영국ㅡ아프리카회사》를 창설하려고 짐바브웨에 왔다.
세실 로즈는 마타벨레의 왕을 포섭하여 조약을 맺고 짐바브웨의 《광업권》을 획득하였다.
세실 로즈는 마타벨레의 왕에게 년금과 무기를 제공해주므로 친분을 두텁게 하면서 왕을 매수했던것이다. 그리고 세실 로즈는 마타벨레왕을 매수할뿐만아니라 북쪽에 있는 마쇼날왕국까지 모두 매수포섭하기 위하여 똑같은 방법으로 접근하였다.
1891년에 세실 로즈는 남과 북의 두 왕국을 모두다 동시에 《영국의 보호령》으로 정식 편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짐바브웨의 두 왕국은 불과 몇년전에 화살을 겨누면서 분렬되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 왕국이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자신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려는 대영제국의 보호령으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동시에 편입되였던것이다. 영국은 보호령이 된 두 왕국의 이름들을 모두다 제거해버리고 영국인사업가 세실 로즈(Cecil Rhodes)의 이름을 따 식민지이름을 《로데시아》(Rhodesia)라고 부르게 하였다.
영국의 짐바브웨에 대한 식민지침략은 이렇게 순풍에 돛을 단듯 쉽게 진행되였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그 화려한 번영의 시대는 가고 침략의 앞잡이, 광산권을 획득한 영국의 한 개인의 이름을 딴 로데시아가 식민지의 새로운 명칭으로 되였던것이다.
1923년 10월에 로데시아는 영국련방안에 속하는 《자치식민지》로 승격됐다.
1953년에 영국은 식민지를 확대하고 강화할 의욕으로 로데시아 북쪽에 국경선을 맞대고있는 잠비아와 그리고 말라위를 통합하여 더 큰 식민지를 편성하고 거대한 식민지련방체제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 새로 구성된 식민지련방체제를 니아살랜드련방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새로 구성된 니아살랜드련방은 오래가지 못하고 구성한지 10년후인 1963년에 해체되고말았다.
해체된 리유는 잠비아와 말라위 두 나라가 제각기 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여 각각 독립을 쟁취했기때문이였다.
두 나라가 독립하여 떨어져나감으로써 로데시아는 다시 《자치식민지》로 혼자 남아있게 되였다.
1965년에 백인인 스미스는 백인들이 주도하는 《로데시아전선당》을 창당하였다. 새로 창당한 《로데시아전선당》은 백인들이 주도하는 국회를 새로 창설하고 로데시아의 《자치식민지》정권을 튼튼히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 백인들이 주도하는 로데시아의 국회는 영국에 대고 독립을 요구해나섰을뿐아니라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의 독립운동이 류행처럼 번져나가는것을 본 로데시아의 백인들이 로데시아백인독립국을 추구하여 선손을 쓴것이였다.
그러나 영국은 갑작스러운 백인들의 독립선언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은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프리카에서 독립운동이 번져나가는것을 원치 않았기때문이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흑인들은 로데시아의 백인들이 《로데시아전선당》을 창당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것을 보고 즉각적으로 자극을 받았다. 이번에는 흑인들이 아프리카흑인반군(ZANU)을 조직하여 로데시아독립을 위한 게릴라전을 시작하였다. 게릴라전이 몇년 계속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백인《로데시아전선당》은 할수없이 독립선언을 철회하고 영국식민지로 복귀하기로 결정하고 영국정부에게 굴복하였다.
짐바브웨의 독립
백인들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흑인들이 들고일어섰다.
1977년경에 로데시아흑인들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운동진영이 《온건파》와 《급진파》 두 진영으로 대립하였다.
온건파는 백인들과 협상을 통하여 서서히 흑인다수의 지배체제를 조성해가면서 결국 독립을 성취하는것이 옳바른 독립운동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는 정반대로 급진파는 로데시아에서 백인들이 주도권을 쥐고있는 한 흑인의 독립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흑인의 독립은 오직 투쟁의 길외에는 별도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급진파는 국내와 국외에 게릴라거점을 두고 투쟁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적극적인 게릴라투쟁을 전개해나갔다.
여기서 무가베는 게릴라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의 선봉자로서 지휘자역할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온건파는 독단적으로 백인들의 《로데시아전선당》과 손잡고 련합하여 1979년 4월에 독립국창설을 위한 총선을 시행하기로 합의하였다.
백인후보자들과 흑인후보자들이 함께 출마하여 총선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흑인온건파의 행위는 실패로 끝나고말았다.
총선은 독립의 쟁취가 아니라 오히려 흑인과 백인, 량진영의 대립만을 가증시켰으며 흑백갈등만 극명하게 로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급진개혁적인 무가베진영(ZANU)는 흑백련합총선을 거부하고 불참하였다.
영국은 로데시아식민지에서 벌어지고있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하여 발벗고나섰다. 국제적인 정서와 유엔의 눈치때문에 그냥 보고만 앉아있을수는 없었다.
영국은 1979년 12월에 런던에서 로데시아의 흑백의 모든 정당들과 운동단체대표자들이 함께 모여서 《로데시아제헌회의》를 창설하도록 주선하였다. 영국은 시대적흐름에 대하여 별다른 방도가 없음을 지각했던것이다.
런던에서 《로데시아제헌회의》가 결성됨에 따라서 1980년 2월에 력사적인 총선이 로데시아에서 실시되였다.
이 총선에서 무가베가 이끄는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ZANU)이 전체 의석 100석중에서 75석을 차지하는 압도적대승을 거두었다.
1980년 4월 18일에 드디여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지배하는 나라로 독립하게 되였다. 짐바브웨는 이제는 영국이 지배하던 《로데시아》가 아니였다.
아프리카흑인들이 주인이 된 흑인의 나라 짐바브웨가 독립국으로 새로 창건된것이다.
무가베는 새로 창건된 짐바브웨의 총리직과 국방장관을 겸직하면서 신생독립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87년 12월에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90년에 무가베대통령은 재선됐고 1996년 3월에 또다시 3선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02년에는 대통령임기가 6년제로 개정됐다. 무가베대통령은 새로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2002년 3월 4선에 당선되였다.
2008년 3월 29일에 실시된 대선에서는 야당의 츠방기라이후보자가 무가베대통령을 누르고 승리하였다. 하지만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기때문에 결선투표를 실시해야 했다.
무가베대통령은 2008년 6월 27일에 진행된 결선투표에서 절대다수의 득표로 또다시 당선되였다. 무가베대통령은 5선 대통령으로서 6년임기를 시작했으며 2014년까지 대통령직무를 맡게 되였다.
로버트 지. 무가베는 누구인가?
무가베대통령은 1924년 2월 21일에 쿠타마에서 로동자의 아들로 태여났다. 1951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잠비아와 가나 등 외국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60년에 귀국하여 《민족민주당》에 입당하여 민족해방운동에 뛰여들었다. 1961년에 《민족민주당》을 영국이 불법단체로 규정한것으로 하여 무가베는 엔 코모가 주도하는 《짐바브웨아프리카인민동맹》(ZAPU)에 가담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무가베는 체포되였다가 탈출하여 탄자니아로 피신하였다. 탄자니아에서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ZANU)을 창설하고 서기장으로 활약하였다.
무가베는 또다시 체포되여 1964년부터 1974년까지 10년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감옥에 있는 남편의 구명운동을 위하여 무가베의 안해 샐리는 영국으로 망명을 신청하였다.
샐리는 가나녀성이며 무가베가 가나에서 활동할 때 알게 됐다. 샐리는 가나의 유력한 정치인집안출신으로 매우 활동적인 녀성이였다.
샐리의 망명요청을 영국정부가 거절함으로써 그녀는 추방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무가베는 비자만료로 추방위기에 처해있는 사랑하는 안해 샐리는 위하여 감옥에서 영국의 총리와 내무장관에게 탄원서를 여러차례 보냈다. 그 탄원서에는 무가베의 안해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구절구절 절절히 표현되여있었다.
하지만 무가베의 간절한 탄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국정부는 무가베의 탄원서를 정부의 비밀문서로 38년동안 보관해오다가 《정보공개법》에 의하여 최근에 영국의 인터네트를 통하여 처음 공개하였다. 무가베의 영국에 대한 증오의 씨앗은 아마 그때부터 자라났다고 말할수 있다.
무가베대통령은 사회주의자이지만 집권초기에는 서방으로부터 《위대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흑인과 백인의 《화해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새로 조직한 정부내각에 백인장관을 두명이나 임명하는 관용을 베풀었고 백인군장성들을 그대로 직책에 머물도록 허용하기도 하였다.
영국 태쳐수상은 무가베대통령에 대해서 《함께 일할수 있는 사람》이라고 극구 찬양했으며 1994년에 엘리자베스녀왕은 무가베대통령에게 《영예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서방은 짐바브웨에 89억US$의 원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가베대통령의 굳은 신념은 제국주의를 배격하고 짐바브웨의 자주와 자립을 성취하는것이였다. 이와 같은 그의 신념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무가베대통령은 국가와 민족에게 약속한 책임과 사명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았다.
력사적으로 수세기동안 백인들에게 짓밟혀온 한맺힌 분노와 비애를 보상받기 위해 무가베대통령은 생명을 바쳐 투쟁할것을 굳게 다짐하고있었다.
무가베대통령이 영국과 틀어진 리유와 동기가 무엇인가?
영국의 혹독한 식민지통치하에서 흑인들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 토지의 20%뿐이였고 80%는 백인들의 소유였다. 짐바브웨의 막대한 농작물과 풍부한 지하자원의 소득은 오직 소수인 백인들의 손을 통하여 영국으로 흘러들어가고있었다.
무가베대통령은 그동안 불법적으로 백인들이 소유하고있는 토지를 공정하게 재분배할수 있는 《토지개혁법》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의 태쳐수상은 백인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하고있는 토지에 대한 보상으로 우선 약 830억US$를 무가베대통령정권을 위해 지불하기로 약속하였다. 태쳐수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백인들의 토지소유권을 유지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뜻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1997년에 토니 블래어신임수상은 약속한 보상금지불을 거부하였고 영국레이버당은 짐바브웨식민통치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터무니없는 궤변을 주장하였다.
영국이 보상금지불약속을 어김으로 하여 2000년 3월에 짐바브웨의회는 토지재분배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무가베대통령에게 특권을 부여하였다.
무가베대통령은 식민지시절에 백인들이 부당하게 갈취했던 토지를 모두 되찾아 흑인들에게 무상으로 돌려주는것은 지극히 당연한 조치라고 언명하였다.
무가베대통령이 토지개혁법을 공포한 후 짐바브웨에서 벌어진 사건들과 이와 관련된 기사들을 례로 몇개 적어본다.
* 무가베대통령은 841개의 백인소유농지를 몰수하여 토지없는 흑인들에게 분배할수 있는 특별법을 공포하였다.
* 영국식민통치시절 총리를 지냈으며 《로데시아전선당》을 창설했던 스미스의 농장에 흑인 50명이 몰려와 토지 1 400ha를 강제로 점거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량측의 충돌은 없었다.
* 옛 법에는 백인들의 토지를 흑인들이 무단점유할 경우에 정부가 보상하기로 되여있었다. 하지만 무가베대통령이 발포한 《토지개혁법》에 의하여 이제는 그런 옛 법이 실질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 영국식민지시절에 백인 4 000명이 전체 토지의 80%를 점유하고있었으나 무가베대통령은 백인의 토지를 보상없이 흑인들에게 넘긴다는 법안을 발표하였다.
* 미국은 무가베대통령을 비난하면서 백인소유의 농장을 무단점유하는것은 불법이라고 비난하였다. 영국도 무가베대통령의 농지개혁법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못된다고 비난하였다.
* 짐바브웨정부는 백인농장주인 2 900명에게 강제퇴거령을 내렸으며 불응한 백인농장주 200여명을 체포하였다.
* 무가베대통령이 정권을 잡기 전에는 짐바브웨의 백인인구는 15만명이였다. 하지만 현재 백인인구는 4만명으로 줄었으며 농장주 4 500명가운데 3 800명이 땅을 빼앗겼다.
* 최근 대통령결선투표로 어수선한 짐바브웨의 정세속에서 아직 남아있는 백인농장주 60명이 옛날 무가베대통령과 함께 해방전선에서 싸웠던 퇴역군인들에 의하여 모두 쫓겨났다.
우에 인용한 몇가지 기사들에게 극히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해방과 독립을 쟁취한 짐바브웨의 어제와 오늘의 정세를 엿볼수 있다. 또한 여기서 무가베대통령의 강력한 애국적지도력도 느낄수 있다.
8. 15해방후 《한국》의 리승만《정권》은 어떠하였는가!
지금의 리명박《정부》도 일본제국주의의 간악한 잔재들을 오히려 감싸주고있지 않는가!
무가베대통령은 집권초기에 《해방의 영웅》으로 국내외적으로 인기가 대단하였다. 무가베대통령이 영국과 미국을 반대하는 《반제국주의로선》을 과감하게 취했기때문이였다.
2000년에 들어서서 무가베대통령은 전체 농경지 80%이상을 소유하고있는 백인의 땅을 몰수하여 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농지개혁을 강행하였다.
그후 미국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짐바브웨의 경제를 파탄시키려 목을 졸랐다. 미국은 짐바브웨를 세계최악의 《10대 인권위반국》으로 지정하면서 경제보복을 계속 가하고있다. 영국도 미국에 가세하여 카나다와 오스트랄리아 등 영련방의 여러 나라들을 총동원하여 짐바브웨에 대한 경제제재와 봉쇄조치를 취하였으며 시간이 갈수록 입박의 도수를 점점 더 높이고있다.
이로 인하여 한때 아프리카에서 풍요로운 경제력을 자랑하던 짐바브웨의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했으며 빈곤층이 60%에 이르는 곤경에 처하게 된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짐바브웨의 녀류작가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흑ㅡ백 남녀의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식민통치하에서 흑인에 대한 억압과 비애가 어떠했는가를 적라라하게 파헤치고있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에는 진지한 사회주의사상과 반제국주의정신이 담겨져있다. 도리스 레싱이 현실을 파헤쳐 창작한 이 작품은 백인들의 억압과 흑인들의 비애의 유산이 아직도 짐바브웨에서 《외세》와 《빈곤》이라고 하는 망령으로 떠돌고있다고 말하고있다.
무가베대통령이 오늘도 큰소리로 웨치고있는 그의 항변에 대하여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IMF는 개발도상국에 도움이 안된다.》, 이것이 그의 항변이다.
짐바브웨는 IMF의 차관 45억US$에 대한 리자체납금 2억 9 000만US$때문에 IMF로부터 축출하겠다는 공갈과 협박에 시달리고있다. IMF채무에서 벗어나려면 《친미정권》으로 돌아서라는 공갈과 협박 또한 만만치 않다.
이런 관계로 무가베대통령에 대한 국제적평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친서방국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독재자》라고 규탄한다.
반면에 아프리카대륙은 물론 남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식민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해방의 영웅》이라고 무가베대통령을 높이 추앙하고있다.
력사적으로 식민통치의 죄과를 지니고있는 서방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지칠줄 모르고 투쟁하고있는 《저항의 심장》, 무가베대통령에게 친미예속국가들을 제외한 그외의 나라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있는것이다.
짐바브웨와 국제관계
2007년 8월에 소집된 《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정상회의에 제출된 비밀보고에 의하면 《영국은 짐바브웨의 여야의 대화가 실패하기를 원하고있다.》고 지적되여있다.
그러면서 비밀보고는 《영국은 짐바브웨내분이 격화되기를 원하고있을뿐만아니라 오히려 내분을 조장하여 아프리카나라들속에서 고립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하고있다.》는 지적도 함께 하였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개발공동체》는 짐바브웨를 비난하는 영국의 《확성기정치》에 절대로 합류할수 없다는 립장을 밝혔다. 영국의 선전술에 절대로 《속지 말자》는 립장이다.
뿐만아니라 《영련방정상회》(CHOGM)의 회장인 우간다의 무쎄베니대통령은 영국의 브라운수상에게 다음과 같은 매우 신중한 훈수를 하였다.
《무가베는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싸운 혁명가이다. 서유럽나라들은 그에게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신중한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미국은 《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에 압력을 가해 짐바브웨의 인권문제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취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공동체회장인 잠비아대통령은 이에 반대하여 말하기를 《짐바브웨문제가 너무 과장됐다. 짐바브웨문제는 짐바브웨스스로 해결해나갈것이다.》라고 하였다.
미국과 영국은 개별적으로 경제제재를 가하여 짐바브웨의 목을 조이고있다. 그러면서도 철면피하게 영ㅡ미 두 나라는 짐바브웨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있으니 서방은 손을 펴서 구제해야 한다고 력설하고있다.
중국과 로씨야는 유엔을 통해 짐바브웨에 대한 국제제재안에 항상 반대하고있다. 중국과 로씨야의 반대에 부딪쳐 미국의 짐바브웨제재조치의 추진은 난항을 겪고있다.
중국과 로씨야는 경제적으로 짐바브웨의 목을 조이고있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구제를 떠들고있는 《미국의 위선》을 반대하고있는것이다.
미국이 반미국가들에게 가하고있는 경제봉쇄는 봉쇄로만 끝나는것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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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 봉쇄의 뒤에는 반드시 군사적공격이 도사리고있다. 이것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을 통해서 똑똑히 확인할수 있다.
미국이 손만 대면 어느 나라든 비참한 국가로 전락하고만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음베키대통령은 미국과 영국이 무가베대통령에 대하여 아무리 떠들어도 침묵으로 일관하고있다.
음베키대통령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많은 정치지도자들은 그 옛날 영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투쟁할 때 무가베대통령과 함께 싸운 옛 전우들이다.
영국과 미국이 아무리 제재를 떠들어도 이미 28년동안 《철권통치》를 해온 무가베대통령에게 그와 같은 접근방법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할것이다.
미국과 짐바브웨의 갈라진 틈사이에 중국과 로씨야가 들어서고있다. 뿐만아니라 유럽동맹에서도 영국에 정면으로 맞서고있는 도이췰란드와 뽀르뚜갈 등 여러 회원국가들이 짐바브웨의 무가베대통령과 대화를 주장하고있다.
2005년에 로마에서 열린 《유엔식량농업기구》창립 60주년 기념식에서 무가베대통령은 연단에 올라 다음과 같이 미국과 영국을 규탄하였다.
《새 천년에 사악한 두사람은 세계지배를 노리고있는 파시스트이다. 이 사악한 두사람이 이라크전쟁을 일으키고 짐바브웨와 같은 작은 나라의 내정에 간섭을 하고있다.》
이 두사람은 물론 부쉬와 블래어이다.
무가베대통령의 연설이 끝나자 188개국 대표들의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나왔다. 영국의 토니 블래어는 《이번 회의에 무가베대통령을 초대하지 말았어야 했었다.》고 혼자 불평을 터뜨리였다.
이 글을 끝맺으며
미국은 무가베대통령이 철통독재의 장기집권자라고 맹비난을 퍼붓고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장기집권을 하고있는 나라들이 어디 짐바브웨뿐인가!
미국의 국무장관 흑인녀자인 라이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짐바브웨의 무가베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하여 비난발언을 련속 쏟아내고있다.
이에 분노한 무가베대통령은 라이스에게 서슴지 않고 폭언을 터뜨렸다. 《철없는 라이스소녀(계집애)는 제 조상이 백인들에게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은 력사공부를 좀 단단히 해야 하겠다.》라고.
아프리카 54개 나라들의 례를 일일이 다 들수는 없지만 문제의 핵심은 단 두가지로 요약해서 말할수 있겠다.
첫째는 친미주의정권은 장기독재를 해도 오히려 미국이 뒤에서 도와주면서 일절 문제로 삼지 않는다.
둘째는 반미주의정권은 온갖 경제봉쇄와 제재를 가하여 빈곤에 빠뜨리고 CIA는 숨어서 활동하면서 민심을 교란시켜 《민주주의》라는 무기로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공작을 하고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처럼 무력으로 그 나라를 망쳐놓기도 한다.
미국은 무가베대통령이 2000년에 토지개혁을 강행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무기를 짐바브웨에 판매하였다. 유럽동맹은 2002년에 짐바브웨가 《인권탄압국》이라는 리유로 무기수출을 중단하였다.
미국은 결산투표에서 락선된 야당지도자 츠방기라이와 화해하여 련립정부를 구성하라고 서방언론을 총동원하여 무가베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넣고있다.
무가베대통령은 서방의 언론플레이에 대하여 단호한 립장을 밝혔다.
《여론은 여론이고 짐바브웨는 짐바브웨이다.》
《우리는 오늘까지 정치적난국을 타결해온 고유한 력사를 가지고있다.》
《미국은 남의 나라 인권문제에 참견말고 너나 잘하라.》
무가베대통령은 2008년 6월 27일에 치르어진 결선투표때 짐바브웨주재 미국대사 제임스 멕기가 남의 나라의 내정에 간섭한다고 비난하면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결국 제임스 멕기대사의 내정간섭엄포는 실천에 옮겨지지 못한채 말로만 끝나고말았다.
무가베대통령은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만 우리와 싸우기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할것이다.》라고 강력한 결전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와 같은 무가베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대하여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물론이고 중국과 로씨야,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와 윁남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꾸바와 베네수엘라 등 많은 나라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특히 놀라운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의사 22명을 짐바브웨에 파견하여 3년간 머물면서 의료활동을 벌릴 예정이라고 발표한것이다.
물론 개별국가들의 실패도 있겠지만 8억인구의 아프리카대륙이 총체적으로 빈곤에 빠지게 된 리유는 서방의 국제기구들이 강요하는 무역자유화, 평가절하 등 이른바 《세계화구조조정》정책때문이다.
우리가 분노하는것은 서방이 아프리카의 비참한 빈곤의 현실을 보고서도 실질적으로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도 꽤나 자비를 베푸는척 위선을 부리고있기때문이다.
사실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재력과 과학기술이나 의료적구호가 옳바로 추진되기만 한다면 아프리카의 어려움을 다소나마 해결하는데 큰 문제가 없을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장래의 문제는 오늘의 빈곤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미국이 아프리카의 빈곤을 해결하겠다고 하는 정치적의지가 전혀 없을뿐만아니라 앞으로 더 악화시키기 위해 악의적책동을 계속하고있다는 점이다.
오바마흑인대통령이 출현하는가싶어 들뜬 재미《한국》동포들을 많이 볼수 있다. 하지만 민주당이 말하는 《소수민족우대정책》은 오직 《흑인들과 스패니쉬》를 위한 말이다.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소수민족우대》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다.
만일 오바마가 당선되여 대통령이 된다면 오바마의 제일 첫번째 정책은 《워싱톤의 기득권정치세력을 두려워하는 정책》이 될것이 확실하다.
오바마는 미국의 세계패권주의를 여전히 유지할것이다. 만일 오바마가 미국의 세계패권주의에 도전을 한다면 오바마는 그 즉시 옛날 케네디처럼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점은 왜 미국이 흑인 오바마를 미국의 대통령후보가 되게 하였는가 하는것이다.
그것은 그가 당선이 되건 안되든 관계없이 딴 리유가 있다.
현재 미국은 특히 《워싱톤 기득권정치세력》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전쟁으로 인하여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반미열풍으로 인하여 그리고 로씨야와 중국의 부상으로 인하여 사면초가의 극히 난처한 립장에 처해있다.
다시말하면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적정치》의 한계점에 이르게 된것을 뼈저리게 느낄뿐만아니라 공포심마저 들게 됐다. 부쉬의 오만이 미국을 세계적으로 곤경에 빠뜨린것이다.
이와 같은 곤경을 일단 면해보자고 미국은 림시방편삼아 별안간 흑인 오바마를 하나의 위선적방패용으로 앞에 내세우고있는것이다. 여기에 미국의 또 다른 위선이 숨어있다.
백인들이 세계적으로 망가진 체면을 되살려보려고 궁여지책으로 백인이 절대다수인 미국에서 흑인을 대통령후보로 세웠다고 볼수 있다. 오바마의 출현을 절대로 백인들의 호의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수세기동안 영국의 가혹한 식민통치와 그리고 수십년동안의 목을 조르는 미국의 경제적봉쇄와 제재속에서 자연히 잉태된것이 무가베대통령의 등장이였다.
꾸바를 국빈으로 방문한 무가베대통령은 말하기를 《짐바브웨는 제국주의와 친구였던적 없으며 앞으로도 친구가 되지 않을것이다.》라고 언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