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2. 대구감옥에서 사형을 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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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2
대구감옥에서 사형을 면하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중상을 입고 생포된 후 1954년 초에 남원 고등군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있다가 대구 감옥으로 옮겨져 미결수 방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수번호는 900번이다. 감옥에서는 이름은 부르지 않고 수번호로 불려지게 되니 수번호는 자기 이름과 같다. 들어가면 입고 있는 옷은 영치되고 감옥에서 주는 푸른 제복을 입는다. 미결수는 아직 형이 확정 안 되었기 때문에 사복도 입는다.
나의 가족들은 내가 체포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연락이 닿지 않아 나는 전쟁 때 가족들이 다 죽었는지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관구부장이 사형 받은 나를 측은하게 생각했는지 어느 하루에 나를 불러내 하는 말이 유명한 대구에 박철호 변호사를 한번 난나 볼 수 없는가를 물어보기에 만나서 무엇하는가고 말하니 아직은 육군 법무감실이 전쟁 때 부산에 있다가 정전 되고 대구에 올라와 있는데 서류 재심이 있기 때문에 사형을 받았어도 나이 어린 소년이기 때문에 사형은 면할 수도 있다하며 만나보라고 한다. 그래서 수긍했다.
며칠 후 변호사 면회라고 불러 나가서 면회했다.
이야기 중에 주소가 어디며 가족이 살아 있다면 누구누구냐고 하기에 어머니 아버지 큰형님을 대었다. 그리고 당시 집안의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고 하기에 소작농 10마지기라고 했다.
마지막에 사형은 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우선 죽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변호사의 말을 듣고 면회를 마치고 감방에 돌아왔다. 그당시 소년 사형수는 2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사형수는 한방에 오래두지 않고 자주 전방시킨다.
매일 12시면 사이렌을 불고 각 감방을 엄중 감시한다. 이날은 미결에서 불러내 사형장으로 데리고 나가 사형시키는 날이다. 그때 나도 언제 부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무덤덤한 생각이었다. 전쟁 때 하루 제일 많이 사형시킬 때가 35명이었다고 말을 듣기도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남원에서 한달 후에 제2차로 사형수 동지들이 내 방 건너편에 왔다.
이때 동지들의 얼굴을 볼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동지들을 보는 것은 운동나갈 때와 검방할 때 조금 볼 수 있었다. 무기로 감형된 5월 10일 까지 본 것이다. 그때 주로 본 동지는 남태준동지와 조병화동지이고 대전 감옥 테러 때 전향한 김00동지다. .
김00동지는 전남부대 3중대 정치지도원이며 순천에 고향을 두고 있으며 순천사범학교 졸업생이다.
여순항쟁 때 가택수색을 하는데 똥통에 들어가 놈들이 똥깐에 왔을 때 통통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놈들이 간후 살아 남았다. 그래서 6.25합법공간 때 순천군당 조직부장을 하다 1950년 9.28후퇴 후 도당학교에 입학하고 공부하다가 적들의 대공세로 인하여 공부할 수 없어 우리 전남부대 3중대 정치지도원을 했던 것이다.
3중대는 모두가 전남 도당 조직부 또는 선전부 지도원들이며 지방사업나갈 때는 조직부 지도원으로서 사업하다가 도당에 들어오면 3중대 전투대원들이다.
이때 대구감옥으로 어머님과 큰형님이 살아계서 면회 왔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만나니 반가움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이 되었다. 변호사가 편지를 해 받아보고 왔다 하면서 어머님은 눈물만 흘린다.
네가 사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죽고 없으면 잊고 있겠는데 언제 살아 나와 같이 산다면 모르나 죽을지 살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 하며 말을 흐리고 눈물만 지었다.
어머님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세요 하면서 소작농을 다 팔아서 변호사비로 쓸 수 없는가를 물으니 형님 대답이 살아 날 수만 있다면 논밭이 문제 될 것 없으니 변호사 면담해 보고 살 수 있는 것인지 알아보겠다고 말씀하신다.
그후 논밭을 다 팔고 문중 제각에 들어가 살면서 보름 후에 형님 혼자서 면회 왔다. 면회시에 나는 변호사 만나 보고 가능하면 돈을 쓰고 가능하지 않으면 돈을 쓸 필요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가능 하면 다시 면회하고 그렇지 않으면 면회 할 필요 없이 그냥 집으로 가시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면회는 끝났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면회를 기다렸으나 해가 넘어가고 아무 소식이 없어 단념했었다.
소년수 2명이 사형수 였는데 하나는 대인 나이 차니 집행되고 나만 살아 무기로 감형을 받았다. 드디어 1954년 5월 10일 점심 때 이름을 불러 자기 감방 앞에 앉아 있으라하고 한 10여명이 서로 눈만 깜박이며 인사하고 중앙에 들어가니 간수 부장은 대뜸 하는 말이 여러분들은 이제 살았으니 안심하라고 하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그 다음날 전방을 시켜 소년수만 한방에 넣는다 이감 숫자가 차면 김천 소년형무소로 이감을 보낸다. 그간은 빵건봉지 부치는 공장에 출력해서 4등식을 먹인다. 그리하여 10여명이 되니 김천소년감옥으로 이감을 해 1955년 5월 10일에 성인이 되니 안동감옥으로 이감보낸다.
다음은 김천 감옥생활이 계속된다.
2021년 11/15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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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지난 달 김영승 선생이 어머님의 제사를 지내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민족통신 편집실]우리 어머님 제사를 지냈다.
오늘(2021. 10/1일 )경기도 동두천에 살고 있는 큰조카 집에서 우리어머님 55주기 제사를 올렸다.
살아 있는 우리 삼남매(둘째누님과 막내누이동생)와 조카들 둘이 함께 했다.
55주기를 맞이하여 우리 어머님을 회고한다.
우리 어머님은 전남 영광군 염산면 출신으로 촌 농부의 딸이었다
나는 외가집을 모르고 살았다. 어렸을 때 다 돌아가시고 외삼촌 한분이 우리 아랫 동내 오두막집에서 엿장사를 하며 살다가 전쟁나기 전에 3살짜리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 시신은 거적때기에 몰아서 동내 뒤 산골짜기에 묻은 것밖에 모른다. 그래서 다른 애들의 외가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나는 미제가 일으킨 조국전쟁을 맞이하여 9.28후퇴 때 입산하여 1954년 7월에 대구감옥에서 면회를 통해 어머님과 상봉했다.
그 때 큰형님이 살아있어서 어머님과 같이 오셨다.
그 때 어머님은 "네가 총을 맞고 숲속에 쓰러져 죽는 것을 봤다는 자수자들의 말을 믿고 죽은 줄로 단념하고 사는데 어느 변호사의 살아 있다는 편지를 받고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할 수 없어 한번 가보자해서 와서 보니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구나"하시면서 기뻐 했으나 이는 일시적이고 한숨만 쉬는 모습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후 면회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35년 9개월 사는 동안 꼭 3번밖에 어머님을 보지 못했다.
두 번째는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을 받아 김천소년감옥으로 이감가서 살 때였다.
1955년 여름에 혼자 면회왔는데 하는 말씀이 서울에서 네 조카딸이 식모살이에서 모은돈 2,000원을 네게 넣어주려고 대구감옥에 있는 줄 알고 왔다가 김천으로 이감갔다는 소식을 듣고 김천으로 오는 과정에 기차에서 쓰리를 당해 한푼도 넣어 줄 수 없구나 하고 눈물짖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르고 있다.
그 당시에는 쓰리군들이 많아 촌에서 올라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 비일 비재했다.
3번째는 대전 감옥에서 1965년 추석무렵이었다. 이 때는 비전향자는 일상적으로 가족면회를 시켜주지 않으나 가족이 와서 전향을 권고하겠다하면 한 번은 시켜주는 때였다.
이 때 서울 딸네집에서 시골로 내려가는 길에 들려 면회를 했는데 소장실에서 당시 윤병히 소장과 교무과 유종흠 교화사놈의 입회하에서 하는데 이야기 중에 "재심 한번도 해주지않아 마음이 변해 전향 않고 있느냐. 전향하면 나온다고 하는데 고집부리고 있느냐고 말씀하기에 전향 여부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것이니 어머님 건강만 유지하기만을 바란다고 하는 내 말끝에 윤병희 소장놈은 "공산주의자들은 부모형제도 생각 않는 냉혈인간이라"고 하기에 "공산주의자만이 진정으로 부모형제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맏받아치니 성깔을 내면서 이런 사람은 가족면회 해 보아야 아무소용없다고 하면서 중단하고 들려보내라고 해서 들어 온 것이 마지막 면회었다.
그 당시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향공작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님께서 또하는 말씀이 "유엔에서 대한민국깃발이 펄펄 날린다고 하더라 하시기에 "어머니 어데서 들은 말씀인가고 물으니 교무과에서 이분들이 면회하면 말을 하라고 하더라" 그리고 반복해서 외우라고 하면서 다른 말은 절대 하지 말고 가르쳐 준대로 하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듣고 비열한 짓 하지말라고 교무과 유종흠에게 쏘아 부치고 감방에 들어온 사실도 있었다.
그후 어머니는 지금 같으면 위암에 걸려 있었다. 식사를 하지못하고 백약이 무효하다는 조카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뼈와 가죽만 남겨놓고 숨을 거두면서 영승이를 몇 번인가 부르다가 운명하고 말았다는 돌아신 후 달포 지난 편지를 받고서야 돌아가셨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미제보다 악독한 암병마는 기다려주지 않고 우리어머니를 앗아 간 생각을 회고해 보면서 75년의 둥지를 틀고 있는 반미 자주화 통일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할 것을 더욱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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