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딸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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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각이한 운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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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의 전체 농산작업반들이 자체로 모내기를 하기 위한 준비로 끓었다. 보름이라는 모내기날자에 맞추어 벼모를 길러내기 위해 락종을 일별로 정확히 했고 모판관리공들의 책임성을 각별히 높이게 했다. 작답과 써레질을 선행시키였다. 포전정리는 모내기에 지장이 없도록 5월초에 일단 시작했던 논들을 마무리하고 가을에 가서 계속하기로 했다. 그런데 마지막포전에서의 마무리작업을 며칠 앞두고 뜻밖에도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비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불도젤이 한 이틀은 더 흙을 밀어내야 하겠는데 포전에 물이 차면서 가동을 할수 없었다.
《아니, 무슨 놈의 비가 이렇게 쏟아져내리는가. 꼭 장마철같군.》
《포전정리를 마무리 못했는데 야단났어.》
관리일군들이 모두 근심에 잠겼다.
모내기에 지장이 되지 않게 포전정리를 일단 마무리하려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이대로 방치해두면 상당한 면적의 논이 물에 잠기고 흙이 흘러내려 류실될수 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흙이 흘러가지 않게 뚝을 마저 쌓고 포전정리를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야 모내기도 보장할수 있다. 무슨 수가 없겠는가.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창가에 우두커니 서있던 명숙이 마침내 무엇을 생각해낸듯 복도로 향한 출입문을 열고 마침 생산부에서 나오는 강현이를 찾았다.
《기사장동무 그 방에 있어요?》
《있습니다.》
《나한테 보내줘요.》
로정만이 인차 나타났다.
《기사장동무, 전투를 벌립시다.》 하며 명숙은 자기가 생각하고 결심한바를 말했다.
《그 흙탕속에서 비를 맞으며 해내자는겁니까?》
《그 길밖에 방법이 없어요.》
로정만은 명숙관리위원장이 이미 결심했으며 그랬으면 그것을 변경시킬수 없다는것을 그간의 체험을 통해 잘 알게 되였으므로 더 의혹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다. 또 사실 관리위원장이 내놓은 전투적인 방법밖에 해결대책이 없었던것이다.
《총지휘를 기사장동무가 맡아주세요. 그리고 계획지도원에게 전화로 전체 작업반장들과 직속분조장들이 빠짐없이 긴급히 관리위원회에 모이도록 지시하게 하고 리인민위원회 서기장도 부르도록 하세요. 난 리당비서동무를 만나겠어요.》
《예.》
대답하고 나오며 로정만은 속으로 중얼거리였다.
(불같은 녀자야!)
로정만은 계획지도원에게 관리위원장의 지시를 전달하고 리서기장은 자기가 직접 만났다.
관리일군들도 례외로 될수 없었다.
비옷을 입고 장화를 신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농산이건 축산이건 남새건 직속분조건 관계없이 전체 단위책임자들과 관리일군들이 관리위원장방이 비좁게 모여들었다. 늘 리내 인민반장들과 사업하느라 분주한 리인민위원회 서기장도 어디선가 나타났다. 비옷들을 입긴 했으나 비발이 세고 바람이 불어 후줄근하게 젖은 사람들이 모이니 사무실안은 습기가 꽉 차서 숨쉬기 바쁠 정도였다.
관리위원장사무탁앞에 명숙과 차성재, 로정만이가 앉아서 사람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
《지령원동무, 다 모였나요?》
명숙이가 지령원을 겸하고있는 계획지도원에게 물었다.
《다 왔습니다.》
명숙이가 초급일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렇게 급히 모이라고 한것은 긴급대책을 토의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두 귀를 강구었다. 명숙은 토지정리장에 조성된 긴급정황을 설명하고 계속하였다.
《전체 농장원들과 잠정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가마니, 삽들을 가지고 토지정리작업장에 모여야 하겠습니다. 서기장동무는 현재 집에 있는 주민들을 다 불러내도록 포치해주십시오. 우리모두가 육탄이 되여 물탕에 빠진 불도젤을 대신하여 가마니로 흙을 날라 논뚝을 마저 만들고 논판을 고루는 작업을 결속해야 하겠습니다.》
모두는 비를 맞으며 흙탕물속에서 흙가마니를 끌어야 하는 작업모습을 상상해보며 비장한 감정에 잠겨있는것 같았다.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명숙은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 이렇게 말을 이었다.
《포전이 흙탕물에 잠겼으니 흙가마니를 끌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것입니다. 그렇지만 비바람을 맞으며 차거운 물속에 몸을 잠그고 작업을 해야 하니 쉽지 않은 전투를 벌려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동무들, 이 방법밖에 없으니 각오를 굳게 다지고 대중을 궐기시킵시다. 나는 지난달에 평양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하여 토론들을 들으며 참으로 격동적인 소식들을 알게 되였고 많이 배웠습니다. 공장, 기업소, 광산, 건설장 어디서나 80년대속도를 창조하기 위한 투쟁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고있습니다. 해마다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일떠서는 평양의 변모되는 모습은 우리들에게 신심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리 농업부문에서도 이에 발을 맞추어 올해의 모내기전투에 진입하고있습니다. 우리 잠정농장도 자체로 모내기를 하고 김매기도 하려는 앙양된 분위기에서 곧 모내기에 착수합니다. 지금 내리는 비는 약간의 장애를 조성하고있습니다. 새로 넓히다가 중단된 포전이 비물에 류실될수 있고 모내기를 제대로 못할수 있는데 이것을 허용할수 있습니까? 나는 우리 당원들, 농장원들도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의견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합시다!》
하나와 같이 힘차게 울리는 대답소리에 명숙은 가슴이 뭉클해났다. 그새 농장원들의 정신상태에서도 일솜씨에서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알곡생산계획을 수행했고 분배몫이 늘어났다. 집단경리의 우월성이 더욱 확증되였다.
이러한 변화가 농장원들의 정신상태에 반영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누구보다도 명숙의 옆에 앉아있는 기사장 로정만이 그것을 느끼고있었다.
초급일군들이 자기 단위로 흩어져갔다. 그들은 작업반단위로 농장원들을 준비시켜가지고 포전정리전투장으로 모여들것이다.총지휘를 맡은 로정만은 관리일군들을 생산부에 모이게 한 다음 지도원들에게 작업분담을 주었다.
농산지도원은 곡괭이와 삽을 준비하여가지고 가마니들에 흙을 퍼서 담아주는 책임을 맡으라, 로동지도원은 작업반들에서 끌끌한 장정들을 뽑아 논뚝을 쌓는 작업을 맡으라.… 또 누구는 모닥불을 피울 대책을 세우라.… 옷이 흠뻑 젖어 추워하는 사람들을 그시그시 몸을 덥히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벌써 작업반들에서 농장원들이 가마니와 삽들을 들고 포전정리작업장으로 가기 시작했다. 리인민위원회 서기장이 리내 가정부인들을 동원해가지고 나왔다.
그리 찬 날씨는 아니였지만 비는 여전히 내렸고 흙탕물은 밑으로 가면서 허리까지 쳤다. 거기서는 청장년들이 흙가마니를 끌었다. 옷이 속속들이 젖었다.
허명숙이는 2작업반원들과 같이 일했고 차성재는 6작업반원들속에서 우스개소리를 해가며 농장원들을 고무하였다.
로정만이는 흙을 퍼담아주는 작업장과 뚝을 쌓는 작업장을 오가며 잔소리를 했고 흙가마니를 끌기 힘들어하는 아주머니들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제일 분주스럽게 돌아다녔고 정력도 그만큼 소비하였다. 그는 불시에 진흙에 미끄러지면서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 순간에 땅을 짚은 손바닥이 벗겨지면서 쓰려나고 허리가 시큰했다. 강현이가 달려와 부축여 일으켜주며 《어디 상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허, 괜찮아.》
로정만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한 아주머니를 도와 흙가마니를 끄는 일에 협력하였다. 손바닥이 쓰리고 허리가 아팠으나 참았다. 허명숙이 흙가마니를 끌고 씽- 하고 지나가며 기세를 올렸다.
불도젤운전수로서는 할일이 없는 철수도 흙가마니끌기를 했는데 억대우같은 그가 지내 속도있게 나가다가 발이 미끄러지면서 넘어졌다. 흙탕물속에 잠겼다가 솟구쳐오른 그는 고수머리얼굴, 어깨 할것없이 온통 흙탕매질이다.
《하-하-하-》
그 모양을 보며 비속에서 모두 웃어댔다.
《철수동무, 빨리 얼굴을 씻어요.》
명숙이도 웃다가 소리쳤다.
《이제 비가 다 씻어줄텐데요.》
《불도젤에서 내리니까 땅크병두 그저 그렇구만.》
《불도젤이 감탕에 잠겨 일을 못하니 임자는 다른 사람의 세곱은 해야 해.》
《그러지 않아도 하고있지 않나.》
농장원들이 떠들었다.
철수는 넘어졌다가 뛰쳐일어났는데 오히려 더 힘을 쓰는것 같았다. 로정만은 자기 힘이 진했다는것을 아프게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아픔은 손바닥이 쓰린것이나 허리가 아픈것보다 더 괴로운것이였다.
마침내 그는 주저앉았다. 허리를 쓸수 없었고 입술이 덜덜 떨리였다. 젊은이 몇이 그를 부축여가지고 모닥불이 타고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함석으로 지붕을 만들어놓고 작업중 상한 사람들을 데려다 비도 긋고 불도 쪼이게 한 장소였다. 로정만이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만든것인데 그자신이 그곳에 이끌려왔다. 한 늙은 농장원이 이미 와있었다.
로정만은 불을 쪼이니 살것 같았다. 그러나 비와 흙탕물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흙가마니를 나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수치심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머리를 숙였다.
허명숙의 웨침소리가 울리였다.
《모두들 노래를 부르자요!》
그리고 선창을 떼는것이였다.
젊은이들이 먼저 따라불렀다.
로정만은 머리를 들고 법석 끓는 작업장을 바라보았다. 노래를 부르며 가마니에 흙을 담느라 삽질을 하는 녀인들, 흙가마니를 흙탕물우로 끌고가는 청장년들, 처녀들… 류순절의 모습이 두드러져보였다. 로정만은 그 어떤 커다란 충격에 떠밀린듯 벌떡 일어섰다. 불을 쪼이고있던 나이든 농장원이 《기사장동무, 앉아있소. 젊은 사람들한테 부담이 된다니까.》 하고 만류했으나 로정만은 그대로 다시 논판에 들어섰다.…
그들은 기어이 논뚝을 쌓았고 논바닥을 고르게 정리하여 모내기를 보장할수 있게 하였다. 비도 멎고 따뜻한 해빛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렸다.…
이 포전정리전투이후 로정만은 며칠동안 정신없이 앓았다. 열이 몹시 났고 온몸이 쑤시였다. 리병원 의사와 간호원이 거의 붙어있다싶이 했고 관리일군들이 련이어 찾아왔다.
늦은 밤에 명숙이가 왔다. 로정만은 열이 심한 속에서도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명숙은 얼른 그를 눕히고 불덩이같이 뜨거운 손을 잡아주며 위로의 말을 했다.
《의사선생이 그러는데 독감에 걸렸대요. 인차 회복될거라고 합니다.》
로정만이 까실까실 타드는 입술을 놀려 대답하였다.
《미안합니다. 모내기가 시작됐는데… 이렇게 누워있으니… 올해는 류다른 봄이지요.》
《아무 걱정 말고 치료를 하세요.》
로정만은 명숙의 볕에 탄 둥실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포전정리전투를 하는 날 노래를 부르며 농장원들을 이끌어나가던 그 정열에 넘친 모습이 방불히 되살아났다. 지금 온 농장이 모내기에 진입했으니 관리위원장이 얼마나 바쁘겠는가.
그러기에 밤늦게 시간을 내여 병문안을 왔다.
《위원장동무, 내 걱정은 말고 오늘 밤은 늦기는 했어도 집에 들어가 푹 쉬시오.》
로정만이 하는 말에 명숙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모내기가 예정대로 시작되여 그 바쁜 속에서도 일부 농장원들, 작업반장들과 기술원들이 밤에 병문안을 왔다. 로정만은 가슴이 후더워나는 한편 몹시 송구스러워 찾아오는 사람들을 빨리 집에 가서 쉬라고 권고했으며 제발 찾아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리당비서에게 부탁하기까지 했다.
마반장이 늦은 밤에 찾아왔다. 그때는 병세가 좀 숙어들고있었다.
《이 바쁜 때 뭣하러 왔소? 어서 가보오.》
로정만이 이렇게 말하자 마장석은 오히려 엉치를 든든히 붙이고 앉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기사장동무, 아직도 나한테 감정을 품고있는건 아니겠지요? 찾아온 사람을 쫓으니 섭섭하구만. 담배라도 한대 태우고 가게 해주우.》
로정만의 눈귀에 물기가 돌았다.
《마반장!》
그는 아직 뜨거운 손으로 마장석의 무릎을 건드렸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오. 내 이 며칠동안 생각이 많소. 우리 농장사람들의 인정이 이렇게 후한지 몰랐댔소. 내가 지금 이 중요하고 바쁜 시기에 집에 누워있으니 독감보다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몸살이 더 심해지는것 같소.》
《아, 아픈거야 어찌겠소. 강현이가 대신 일을 다 처리하고있으니 마음놓소.》
《강현이가!… 마반장, 내 이제 털고일어나겠소. 올초에 흙깔이두 시작했다지요. 강현이가… 그 젊은이가 나한테 말했댔지.… 5반은 모내기를 며칠내로 끝낼것 같소?》
《작년보다 닷새 단축해서 열흘동안에 끝내려고 모두 왁왁하오, 허…》
《마반장이 그때 한 비판이 옳았소.》
《뭘 자꾸 그러오? 기사장, 내 얘기를 하나 하리다. 사실 내 성은 마가가 아니요.》
로정만이 자꾸 농장원총회에서 비판된 일을 꺼내면서 자신을 심심히 뉘우치고있으니 인정이 헤픈 마장석이 딱해하며 슬쩍 이야기를 돌리는것이였다. 로정만은 그의 성이 마가가 아니라니 저으기 의아쩍어했다.
《그래요?》
《이보우, 이자 기사장이 인정을 말했는데 이 마장석이도 사실 정에 주린 사람이요. 우리 관리위원장에게 내가 첫 순간부터 마음이 끌린게 인정미가 느껴졌기때문이였소. 기사장하구는 달랐소. 성내지 마우.》
《아니, 아니요. 어서 말하오.》
마장석은 뻣뻣하게 일어선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렇지만 머리카락은 다시 일어섰다.
《내 이름이 좀 우습지 않소, 마장석이라구… 나는 사실 성이 둘이나 붙어있소. 〈마〉와 〈장〉이요. 원래 이름은 장석이였소. 우리 아버지의 성이 장씨였지요. 그런데 일찍 사망했소. 해방전에야 사람의 목숨이 개목숨이나 같앴지요. 지주놈의 땅을 소작했는데 일이 힘든데다가 열병에 걸려 사망했소. 어머니 혼자 나를 키우며 고생했소. 그러다가 해방을 맞아 생활이 활 피여나면서 어머니의 곱게 생긴 본바탕이 살아났소. 그래 마가 성을 가진 사람이 후처루 맞아들였소. 그 사람이 이붓아들인 나한테 장가 성이 붙어있는게 싫었던지 장석이한테다가 마가 성을 앞에 붙이였소. 그래서 내가 마장석이가 됐소. 후아버지와는 정이 통하지 않았소. 이제는 그 사람도 어머니도 다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살았소. 그렇지만 나는 진짜사랑을 알게 되였소. 여기 오기 전에 일하던 농장에서 있은 일이요. 당시 나는 분조장이였소. 그래 분조원들과 같이 논에서 줄을 띄우고 엎드려 모를 꽂고있었소. 이때 논머리에 오신 수령님께서 논판에서 나와 인사를 올리는 우리들에게 수고를 한다고 하시며 분조장인 저와 담화를 하시였소. 〈언제부터 농사일을 합니까?〉 따뜻한 물으심에 저는 〈열일곱살때부터 농사일을 합니다.〉 하고 대답을 올리였소. 수령님께서는 저의 손을 만져보시며 〈손이 험하구만. 열일곱살때부터 땅을 다루어온 손이니…〉 하고 가슴아파하시였소. 수령님께서는 모내는기계가 나왔는데 그걸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며 〈농사일을 기계화하여 농민들을 고된 로동에서 해방하기 위해 로동계급의 국가가 새로운 농기계들을 계속 생산해서 농촌에 보내주고있습니다. 그러니까 종합적기계화를 실현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였소. 나는 그날 평생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였소.》마장석은 목이 꺽 막혀 더 말을 못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정에 주려있던 투박한 사나이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로정만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얼마나 뜨거운 이야기인가.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들인가.
로정만은 이튿날 쇠약해진 몸이였지만 관리위원회로 나갔고 작업반들도 돌아보았다. 보름동안에 모내기를 와닥닥 끝내겠다고 경쟁적으로 일하는 농장원들은 헛눈한번 팔지 않고 모를 꽂고있었다. 논판에 들어선 작업반장, 부락당비서, 분조장들도 농장원들과 같이 모를 꽂으며 이 바쁜 때에 무슨 일로든 찾아오는 사람들을 시끄러워하였다. 관리위원장, 리당비서도 공연히 작업반들을 빙빙 돌아다니는것이 아니라 어느 한 작업반에 속해 모를 꽂았다. 기타 관리일군들은 더 말할것이 없었다. 모두가 논에 들어가있었다. 지원로력을 받지 않고 자체로 하니 로력자 한명이 귀했고 또 건들거리는 사람이 없었을뿐만아니라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논판에서 나오지 않았다.
관리위원장 허명숙은 모내기전투기간 일찍 모판에 나와 모를 뜨고 모내기에 착수하여 마력을 다 내여 일하도록 엄격한 규률을 세웠으나 밤작업은 절대로 못하게 했다. 밤에는 푹 쉬여야 다음날작업에 지장이 없는것이다.
로정만이는 명숙이가 발기한 분조들에서의 만가동운동이 어떻게 벌어지고있는가 하는것도 보았다.
5작업반 류순절분조의 경섭이는 널판자에 박힌 못을 밟고 발이 퉁퉁 부었댔는데 자기가 결근하면 만가동이 되지 못하므로 상처에 약을 발라 싸맨 다음 발을 바가지에 넣고 모판에 들어가 종일 모를 떴다.
어느 분조의 한 녀인은 생손앓이로 모를 뜨지 못하게 되자 남보다 일찍 나와 성한 손으로 모판의 돌피잡이를 하며 가동을 보장했다.
이렇게 하여 잠정리는 농장이 생긴이래 처음으로 지원로력을 받지 않고 기일을 훨씬 단축하여 보름동안에 모내기를 끝내였다. 이어 빈자리보식과 김매기에 들어갔는데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 휴식일날 명숙이가 관리위원회에 나와 앉아있는데 로정만이 찾아들어왔다.
《위원장동무, 시간이 있습니까?》
별로 심각해진듯 한 로정만이였다.
《오늘이야 쉬는 날이니 시간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앉으세요.》
밝은 표정으로 명숙이가 그를 맞이했다.
《아니요. 그저 이야기나 좀 나눌가 해서…》
《기사장동무두, 우리야 늘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까?》
《사업이야기가 아닙니다.》
《호… 그래두 기사장과 관리위원장의 대화겠지요?》
로정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명숙은 일부러 롱조로 말했다.
로정만은 눈길을 떨구고 긴 앞탁을 마주하여 앉아 그우에 두손을 올려놓았다.
원래 웬만해서는 웃지 않는 로정만인데 지금은 더욱 심중해있었다. 무엇때문일가?
명숙은 그를 피뜩 쳐다보았다. 앓고난 후 인차 일에 부대끼며 돌아가느라 몸이 아직 추선것 같지 않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일부러 나오셨어요? 푹 쉬며 몸보신이나 할것이지…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회복되겠지요. 관리위원장동무, 내가 어제 군경영위원회에 갔었지요?》
그것은 명숙이도 알고있는 사실이다. 어제 그는 명숙이에게 읍에 다녀오겠다고 이야기하고 갔다온것이다.
《그래서요?》
《사실은 농장일때문이 아니라 나 개인문제로 갔댔습니다. 군경영위원장을 만났지요. 그리고 군당에도 들렸습니다.》
《예…》
무엇인가 심상치 않는 일이 예감되였다.
《나를 총화지었습니다.》
명숙은 흠칫했다.
(총화지었다는것은 무슨 의미일가?)
로정만은 거의 표정없는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나는 말입니다. 내가 오늘까지 일도 많이 했고 잠정리에서 농사를 배우기 시작해서 기사장으로까지 발전한 사람으로서 내가 누구보다 잠정리를 잘 알고 농사에 밝다고 자부해왔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긍지감, 우월감,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기사장이 무엇때문에 이런 말을 할가?)
명숙은 의혹이 짙어가며 더욱 심중해졌다.
로정만은 딱딱하다고 할 정도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허명숙이 잠정리에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무리 이름난 관리위원장이라 해도 이 로정만이에게 의거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하는 자기 우월감에 잠겨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우리 농장을 잘 알고있은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잘 안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중요한것은 어떻게 아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관리위원장동무는 짧은 기간에 도당책임비서가 말한것처럼 때묻지 않은 생신한 눈으로 잠정농장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혁신적인 안들을 내놓았습니다. 나는 놀랐으며 내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고집했습니다. 105프로 장성이 힘들다, 자체로 농사짓는것은 더 그렇다, 아직 농사경험이 별반 없고 입만 까진 젊은이 강현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하지만 관리위원장동무는 자기의 신념과 결심대로 내밀었습니다. 첫해 총화는 교훈적이였습니다. 우리 농장이 알곡생산에서 전진한것은 틀림없으나 높이 세운 계획을 수행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5작업반은 자체로 모내기를 한다고 했지만 나중에 지원로력을 받지 않았는가, 이 로정만이 우려하고 충고한것이 옳지 않았는가, 나는 이렇게 자신심에 넘쳐있었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이때까지 말한것은 다 기본이 아닙니다. 우리 농장이 계획을 못하게 되자 나는 관리위원장동무처럼 농장원들의 분배몫이 줄어들게 되고 나라의 쌀독을 채우는데 기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아니라 군경영위원회에 올라가기는 다 틀렸다는 자기 문제에 더 신경을 썼고 나를 약속대로 군에 소환하지 못했다고 량해를 구하는 한광훈위원장에게 짜증을 내면서 잠정리를 영원히 뜨지 않겠다고, 다시는 소환문제를 꺼내지 말라고 화를 터뜨렸댔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105프로 장성을 우려하고 자체로 농사짓는 문제를 반대한것도 자기의 소위 발전이 걱정되였기때문이였고 그것이 결정이 된 후 열성을 낸것도 진심으로 농사를 잘 지으려는 마음보다 어떻게든 계획을 해서 자랑스럽게 군에 올라가기 위한데로부터 출발한것이였습니다. 마장석반장의 비판이 아주 정당했습니다. 관리위원장동무, 이것이 기본입니다. 나는 이런 인간이였습니다.》
명숙이는 눈길을 떨구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다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러니 마장석이 한 말이 사실이였구나. 지금은 로정만이 스스로가 그것을 발가놓고있다. 로정만이 이처럼 자신을 허심하게 뉘우치고 속심을 털어놓으니 얼마나 그의 인격과 인간적면모가 고상하게 안겨오는가.
《올해 우리 농장은 자체로 모내기를 짧은 기일안에 성과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나는 푸른 논벌을 바라보며 봄날에 있었던 시련과 그 시련을 이겨낸 우리 농장원들의 앙양된 정신상태, 단합된 힘을 생각했습니다. 농장원들은 관리위원장동무의 호소에 하나같이 따라나서서 비속에서 전투를 벌려 포전정리를 했고 모내기를 보름동안에 끝냈습니다. 그간 이 락오자는 쓰러져 앓고있었습니다. 나는 그래도 내가 기사장이라고 그 바쁜 모내기전투기간이였으나 병문안을 온 우리 농장사람들을 대할 낯이 없었습니다. 지난 시기 일을 좀 했다고 그리고 자기이상 없는듯이 잔뜩 코를 쳐들고 다니던 나였지만 앓아누워도 버리지 않았고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로정만은 뜨거운것을 삼키고 계속하였다.
《나는 군경영위원장과 군당에 제기했습니다. 나는 군경영위원회에 올라가 일할 자격은커녕 잠정리 기사장자격도 없다, 나는 물러나야 한다, 강현과 같은 새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이렇게 말입니다. 관리위원장동무, 내가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는 심적고충이 많았습니다. 하루이틀사이에 결심한것이 아닙니다. 부탁합니다. 나는 잠정리를 뜨지 않겠습니다. 나에게 알맞는 일감을 주시오. 우리 농장의 양어장관리공도 좋고 축산반에 가서 염소를 먹이는 일도 좋습니다.》
언제나 자세가 도고하고 자존심이 강하던 로정만의 고백은 그가 다시 진실하고 성실한 인간으로 돌아왔다는것을 말해주고있지 않는가. 명숙은 가슴이 뜨거워났다.
로정만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이 북받쳤다.
사람이 자기를 낮추고 진심을 터놓을 때 오히려 그가 쳐다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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