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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9. 외세의 음모가 끊기지 않는 우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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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534회 작성일 22-01-06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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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류태영 박사 

2.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력사적교훈

 

□ 외세의 음모가 끊기지 않는 우간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력사연구를 통해 그 나라들이 외세의 간섭과 지배정책에 시달렸다는 사실과 함께 명색이 지도자랍시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오히려 외세에 기생한 사대매국분파들에 의하여 인민대중이 고통을 받아왔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이로부터 강대국의 노예신분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면 외세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함께 옳바른 지도자를 가져야 하며 동시에 외세의 간섭과 지배를 막고 나라를 지킬수 있는 국민력량이 튼튼해야 한다는 력사의 교훈을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그 대표적실례가 바로 우간다라고 할수 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침략하여 노예무역만행을 저지르고 원주민들의 종족과 문화를 완전히 무시하는 분할정책이라는 악행을 저질렀다. 우간다도 여기에서 결코 례외일수 없었다.

우간다는 여러 부족들이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소유하고 살아온 나라인데 외부침략자들이 이들을 강압적으로 한령토에 묶어 괴롭혀왔다.

우간다는 유럽인들이 물러간 후에도 독립국가를 건설하면서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우간다의 어제와 오늘 그 비극의 력사 또한 이러한 식민지통치유산에서 비롯된것임을 알수 있다.

 

 

      우간다의 초기력사

 

우간다는 동서남북 네개의 나라들(케니아, 민주꽁고, 탄자니아, 수단)을 이웃하고있다. 인구는 2 300만명이며 조선반도의 1.1배되는 국토를 가진 나라이다.

한때 우간다를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다운 땅이다. 우간다는 케니아, 탄자니아와 공유하고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빅토리아호수를 갖고있다.

우간다에는 원시종족인 랑고족, 아콜리족, 피그미족과 바간다족이 살고있었다. 14세기이후에 토착왕국으로 버뇨로왕국, 토로왕국, 망콜레왕국, 버소왕국 등이 통치를 했으며 그리고 마지막왕국으로 바간다족의 카바카왕이 19세기 초반까지 통치하고있었다.

우간다는 또 고원평지의 비옥한 농경지 그리고 관목숲이 꽉 차있는 아름다운 지리적환경을 소유한 나라이다. 영국인들이 우간다의 아름다운 땅을 식민지화할 때 우간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녀왕의 목걸이》라고 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록지가 풍부한 비옥한 땅이였다.

1850년경에 우간다땅에 아랍상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유럽의 탐험가들과 그리스도교선교사들이 이곳에 오면서 침략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유럽인들은 이곳에서 상아무역과 노예무역으로 돈벌이를 했다.

1890년대에 들어와서는 베를린조약(Treat of Berlin)이 맺어졌다. 그 이후에는 우간다와 잔지바르 그리고 케니아가 영국의 보호령으로 되였다. 영국은 커피와 목화를 황금작물로 재배하는 등 이 나라 농민들을 착취하면서 식민통치를 하였다.

영국식민통치자들은 처음에는 우간다의 여러 종족들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하면서 특히는 바간다부족에게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고 일부 부족에게 공직을 맡기기도 하는 등 저항을 무마하려 교활하게 술책하였다.

뿐만아니라 영국은 바간다부족에게 거대한 토지를 주어 부를 축적하도록 특별대우를 했다. 그 리유는 왕족인 바간다부족과 카바카왕을 포섭하기 위한 수단이였다.

다른 부족 구성원들은 영국의 식민통치하에서 일자리를 얻는것도 어려웠다. 영국침략자들은 부족들사이에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지게 함으로써 서로 리해관계에 얽히도록 교묘하게 관리해왔다. 례컨대 랑고부족은 군대에만 종사하도록 하여 분렬주의정책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은 영국의 분렬적통치방법은 후날 우간다가 독립을 쟁취한 후 건국시기에 터져나온 분렬의 씨앗이 되였다.

결과 우간다는 1962년 10월 9일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내부분렬로 진통을 겪어야 했다. 독립한 우간다는 랑고부족출신인 오보테를 선두로 독립정부를 수립했다.

오보테는 식민통치이전에 존재한 바간다부족의 봉건주의적왕권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헌법을 도입제정하여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오보테는 영국의 식민통치자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바간다왕족에 대한 견제와 그들의 친영국적사고방식을 배격하고 자주자립의 국가건설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섰다.

오보테총리는 1966년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바간다 옛 왕국의 봉건주의적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새시대의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그 이듬해인 1967년에는 또다시 헌법을 개정하고 우간다공화국을 선포했다.

대통령이 된 오보테는 1969년에 사회주의인민헌장을 발표하고 봉건주의적 낡은 체제의 일소를 주장했다. 나아가서 1970년에는 사회주의로선을 선포하고 주요외국기업의 국유화를 강행하고 경제력을 장악하고있는 외국인의 추방을 추진하였다.

오보테는 농부의 아들로 태여나 대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독립운동에 참여했기때문에 졸업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장학금을 받으려 했으나 영국식민통치자들의 방해로 받지 못하고 1950년에 케니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로동자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57년에 우간다로 돌아와 우간다민족회의에 가담하여 립법의회의 회원이 되였다. 그는 영국정부에 용감하게 항의하는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그때 바간다왕족들은 우간다의 독립보다는 영국련방으로 예속된 국가로 남아있기를 원하고있었다. 오보테는 영국뿐만아니라 사대주의세력인 바간다왕족도 투쟁대상으로 놓고 싸워야 했다.

오보테는 마침내 군대를 규합하여 바간다왕국의 마지막왕인 무테사2세의 왕궁을 공격하였고 이때문에 무테사2세는 영국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보테는 대통령이 된 후에 사회주의로선을 선포했으나 영국으로 도망간 무테사2세를 옹호하고 추종하는 보수주의자들과 바간다 옛 왕국에 대하여 미련을 가지고 충성하려는 일부 반사회주의적반대세력에 부딪쳐 난관에 처하게 되였다.

대통령으로 집권한지 겨우 4년이 경과된 시기였다.

그때 이디 아민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하여 오보테대통령은 1971년 초에 실각했고 영국을 등에 업은 이디 아민이 미국의 후원을 받고 사회주의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미국의 간섭

 

이디 아민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한때 영국의 식민지군대인 왕립아프리카소총부대에 입대하여 군인생활을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때는 영국군으로 동남아 먄마전투에 참가하여 먄마인들의 독립운동을 말살하는 영국군으로 활약했다.

그는 1953~1959년에 이웃나라 케니아에서 케니아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마우마우저항세력을 소탕하는 영국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1961년에는 영국륙군중위로 진급했다. 그 당시 영국군안의 유색인들중에서 최고의 계급을 받은 군인이 될 정도로 친영사대주의인물이였다.

이디 아민은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한 후에 오보테대통령정권하에서 대령으로 진급하여 우간다군의 총사령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꽁고의 친미우익반란군에 대한 원조에 련루되여 오보테대통령은 그를 총사령관에서 해임시켰다.

그러나 이디 아민은 1971년에 오보테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고있는 동안 영국의 부추김밑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사대매국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국과 미국, 이스라엘은 이디 아민의 쿠데타성공을 즉시 승인하고 축하했다.

그때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멩기스또좌익정권이 출범했고 탄자니아에서 줄리어스 니에레레대통령이 아프리카식사회주의를 주장하고 나섰으며 수단의 니메리정권이 수단식사회주의건설을 시작했고 꽁고민주주의공화국의 모부트정권의 사회주의전향 등 아프리카나라들은 온통 사회주의성향의 나라들로 전환하고있었다.

영국과 미국은 아프리카대륙에서 사회주의의 물결이 요동치는것을 보고 아프리카대륙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을수 있는 우익독재자 이디 아민이라는 인물을 출생시켜 물귀신작전을 계획했던것이다.

이디 아민은 드디여 악명높은 독재자로 되였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국제사회는 서방문명이 낳은 《력사적괴물》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독재 8년동안에 우간다내에서 자주와 자립을 원하는 30만~50만의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였다.

서방이 낳은 정치적괴물인 아민에 대한 화제의 정치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이 영화들에서는 아민의 등장과 함께 발생한 공포정치와 그리고 독재자의 비참한 몰락에 대하여 보여주고있다.

영화제목은 《스코틀랜드의 마지막왕》(The last king of Scot-land)이고 주연은 배우 이디 아민역에 포레스트 휘테터, 감독은 케빈 맥도널드가 했다.

이 영화는 38년전 아프리카 우간다에 혜성처럼 나타난 독재자 이디 아민의 무서운 폭정을 생동하게 형상하였다. 왜 영화제목이 《스코틀랜드의 마지막왕》인가?

이디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우간다의 권력자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본래 스코틀랜드의 용병부대의 일개 병사였다. 그런데 이디 아민은 스스로 요구하여 영화제목을 《스코틀랜드의 마지막왕》으로 정해달라고 원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요구는 곧 이디 아민이 심리적으로 우간다보다 오히려 스코틀랜드의 용병이였다가 후에 륙군중위로 진급한 스코틀랜드의 장교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마음속 한구석에 깊이 간직하고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한때 일본군소위였던 박정희가 쿠데타로 남조선《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친일파적정체성이 끝까지 간직되여있었다는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같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오늘날 남《한》의 리명박《대통령》이 일본《천황》에게 머리숙여 경배하는 모습을 보며 우려를 금할수 없는 리유도 이런 력사적경험이 있기때문이다.

이 영화내용에 등장하는 이디 아민의 주치의사인 니콜라스 게리건은 스코틀랜드인이며 백인인데도 이디 아민의 권력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면서 마치 자신이 왕처럼 행세함으로써 위선적백인들과 위선적지식인들이 오히려 더 큰 문제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이 영화의 중요한 의미는 이디 아민의 폭정으로 인하여 무죄한 사람들이 8년동안에 30만~50만명이 희생되였는데 영국과 미국이 이디 아민을 지원하고 묵인한 사실을 폭로한 점이다. 오늘 미국이 주도하고있는 테로와의 전쟁은 그 모양과 형식만 다를뿐 마치도 이디 아민의 폭정이 오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전히 계속되고있는 형국이다. 이 영화는 또 이디 아민의 폭정이 아직도 우간다에서 바르게 청산되지 못하고있다는 점도 밝혀주고있다.

이디 아민에 대한 두번째 영화인 《이디 아민의 흥망성쇠》(Amin: The rise And Fall)의 내용을 놓고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이디 아민은 영국군의 소총부대의 병사였는데 우간다에서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다. 권좌에 오른 이디 아민은 국민의 기대를 배반하고 가공할 독재자로 변신한다.

이디 아민은 비밀경찰을 창설하여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투옥하고 입에 권총을 넣어 살해하고 독사를 날것으로 회쳐 외교사절에게 권하는 등 잔혹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권좌에 앉은 후 8년동안 탄압과 대학살의 력사를 전개한다. 아민정권은 30만~50만명을 대량학살한 살인광으로 《검은 히틀러》, 《미친 알라신》, 《인간백정》, 《영국이 승인한 살인마》등의 악명높은 독재자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이 영화는 너무나 적라라한 잔인성을 표현했기때문에 나이로비에서 촬영하는데 2년 반이란 촬영기간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상영전에 기자들만을 위한 시사회를 가졌을 때 사실에 충실하느라 잔록한 이야기와 화면을 가감없이 그대로 재현해 상영여부에 대하여 상당한 론난이 있었고 미국에서도 상영여부가 론난이 되여 상영금지국들도 속출되였다고 한다. 이 영화의 감독 샤라드 바델은 40대인디아인이지만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살면서 이디 아민의 폭정을 직접 체험한 산증인이라고 한다.

1976년에 이디 아민은 자신을 종신대통령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1978년부터 외국에서 이디 아민을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게 시작되였고 국내에서도 내부적권력기반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디 아민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사우디 아라비아로부터 원조를 받아 성대한 이슬람교 모스크를 건설하면서 이슬람교도가 되는 또다른 변신을 했다. 이디 아민은 1975년에 로마교황을 접견하여 교황의 축복을 머리숙여 겸손하게 받는 카톨릭교신도이기도 했다.

이디 아민대통령의 폭력적탄압을 피하여 탄자니아 등 외국에 피신하여 집결해있던 오보테 전 대통령의 추종자들은 때를 기다리고있었다. 1979년 4월 13일에 이디 아민대통령의 독재를 반대하는 우간다민족해방전선의 의용군들이 탄자니아군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 진격해들어갔다.

다급해진 독재자 이디 아민은 처음에는 리비아로 급히 도망을 했다가 얼마후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피신하여 마지막망명지로 삼았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이슬람교로 변신한 이디 아민에게 그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종신토록 살 별장을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이디 아민은 그곳에서 고혈압과 신경마비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사망했다.

이른바 서방문명국이라는 강대국들은 수백년간 아프리카의 자원을 수탈하며 그들이 자의적으로 그어댄 직선의 국경선을 만들어 분쟁의 씨를 뿌려놓았다. 침략자들은 분쟁이 있는 곳마다 독재자를 낳아키우고 지원하면서 은밀히 내전을 부추겼다. 그리고 독재자와의 분쟁을 통하여 무기장사를 하며 숱한 리익을 챙겨갔다.

무기장사를 할뿐만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반대세력에게 또 무기를 제공해주고있다.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선교의 손길뒤로 슬며시 살상무기를 건네주어온 서방렬강들은 이른바 문명국들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외정책에서 약한 나라들을 침략하고 착취하는 야만의 나라들로 규탄받고있다.

말이 내전이지 실은 외세와 반외세의 싸움이며 위선과 진실의 싸움이였다.

2003년 8월 16일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비참하게 사망한 이디 아민에 대하여 또 하나의 놀라운 보도가 영국에서 들려왔다. 영국의 BBC방송은 이디 아민의 사망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했다.

《영국정부는 그 당시 오웬외무장관의 제안으로 이디 아민 우간다대통령을 암살할것을 고려하고있었다. 이디 아민의 정권은 아프리카의 최악의 정권이였으며 그의 학살규모도 트메르루주정권에 버금갈 정도로 큰 살인행위였기때문에 이처럼 많은 인명을 앗아간 폭군을 이토록 오래 집권하도록 놓아둔것은 우리의 수치다.》

가증스런 변명이다. 영국의 위선에 치가 떨린다.

한때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의 수치는 어디 우간다에서뿐이겠는가?

 

 

      무쎄베니 우간다대통령은 어디로

 

1979년 2월에 탄자니아북부 모시에서 이디 아민의 독재를 대항하는 반군세력인 우간다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였다. 우간다민족해방전선은 탄자니아군의 지원을 받아 그해 4월에 이디 아민정권을 타도했다.

우간다민족해방전선은 룰레대통령을 지도자로 내세웠다. 하지만 룰레대통령은 곧 물러나고 비나이사가 그 후임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우간다민족해방전선의 내분은 당분간 계속되고있었다. 이디 아민의 쿠데타로 인하여 권좌에서 물러났던 사회주의신봉자 오보테가 1980년 12월에 다시 복귀하여 세번째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회주의신봉자인 오보테대통령이 재차 등장하는것을 보고 영국과 미국은 또다른 음모를 꾸미였다. 이들은 우간다의 정치적불안의 틈을 리용하여 오켈로가 지휘하는 무명의 군인집단이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후원하면서 1985년 6월 오보테대통령을 해외로 추방하는데 일조했다. 오보테대통령은 재집권한지 5년만에 다시 권좌에서 물러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때 1986년 1월 26일 무쎄베니가 민족저항운동(NRM)을 조작하여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우간다의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무쎄베니대통령은 1944년에 목축업을 하는 농부집안에서 태여났다. 초등교육은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를, 대학졸업후에 사회주의자 오보테대통령밑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있다. 학생시절에 진보학생단체의 회장을 지낸 경력도 있다. 청년시절에 맑스주의신봉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 집권초기에 한때 꾸바 등 사회주의나라들과의 관계를 중시하기도 했다.

무쎄베니대통령은 집권초기 5년동안에 정치적불안을 리유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경제회복과 사회안정을 위하여 강력한 정책을 써서 어느 정도 효과를 이루었다. 그동안 정치적불안으로 외국으로 피난했던 많은 사람들이 귀국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1996년 5월에 우간다력사상 최초로 실시된 대통령 및 의회직접선거에서 대승한 무쎄베니대통령은 정치적기반을 강화는데 주력했다.

무쎄베니대통령은 정권을 장악한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를 대항하는 4대반정부조직에 시달리고있다. 그 조직들은 우선 수단을 근거지로 한 최대의 저항세력인 로드저항군과 다음으로 북서부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우간다국가구원전선, 전통적인 반정부세력으로서 서부 나일지역전선 그리고 꽁고민주주의공화국을 거점으로 한 반정부운동인 련합민주군, 이밖에도 많은 반정부 군소단체와 조직들이 저항하고있다.

결론적으로 우간다를 고찰하면서 세가지를 느낄수 있다.

첫째로는 남아메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지역에서도 강대국들의 약소국들에 대한 침략과 수탈현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아프리카나라들이 겪는 현상이다. 둘째로는 강대국들의 간섭과 지배정책을 저지하고 돌파할수 있는 자주적인 지도자들이 국내분파들에 의하여 좌절되여온 력사를 발견할수 있는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외세를 지지하며 주권을 견지할수 있는 주체력량이 튼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강대국노예신분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유지하자면 외세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함께 옳바른 지도자를 가져야 하며 동시에 외세의 간섭과 지배를 막고 나라를 지킬수 있는 국민력량이 튼튼해야 한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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