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영의 ‘페르시아 문화유적 답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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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영의 ‘페르시아 문화유적 답사기’ (2)
(서프라이즈 / 김제영 / 2010-08-18)
알렉산더(Alexander)에 의해 정복된 아케메니언(Achaemenian) 왕조( BC.553~330)의 치적은 이란 역사에서 정치, 군사, 행정,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파괴된 채 남아있는 페르세포리스(PERSEPOLIS)의 잔해만으로도 우리는 앞서 있는 페르시아(Persia)문화와 아케메니언의 영화를 엿볼 수 있다. 아케메니언 왕조의 수도 페르세포리스를 건설함으로써 인류문화 창건의 웅대한 포부를 구가한 다리우스(Darius) 1세(BC. 522~486), 테헤란의 이란 국립박물관(고고학) 한쪽 벽에 그의 대관식(戴冠式)장면이 근엄하고 제의적인 양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부조(浮彫) 앞에서 마치 대관식에 참석했던 경험을 펼쳐놓듯 억양을 돋구어 설명을 하는 현지 가이드의 신바람이 더 볼만했다.
BC. 5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이란 역사의 흥망성쇠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고고학 박물관이 동(動)적이었다면 동일 부지 내의 이슬람(ISLAM) 박물관은 정(靜)적이었다. 13세기 초 이란을 침공한 징기스칸(Genghis Khan)의 자손 후레그(Hulequ)가 탄생시킨 몽골제국의 이루한(IL Khan) 왕조 시기에 회교로 귀의(歸依)했던 몽골귀족의 이슬람의 체취와 시리아 터키 이집트 이라크 등으로 번졌다가 이슬람 박물관으로 되돌아온 그들의 회교적 숨결이 여명의 보랏빛인양 고즈넉하다. 고즈넉한 유품들에서 울리는 알라신에 대한 기도소리는 우렁우렁하다. 특히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정성껏 치장을 한 서예작품은 일필휘지에 여백의 철학과 미(美)를 담은 우리네의 서예작품과는 흑과 백의 대조였다. 서도(書道)라는 용어는 한문을 사용하는 중국 한국 일본 동남아의 한문문화권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나는 알았었다.
얼마나 내가 무식했던지 이란에 서도(書道)가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내게는 마치 새로운 사물에 눈을 뜨기 시작한 아이들의 호기심처럼 신기하여 여기에 소개하겠다.
회교도(回敎徒)에게 있어서 코란(Koran)을 베낀다는 것은 알라(Allah)신에 대한 예배와 찬미이다. 지상(至上)의 아름다움과 순수와 유연함을 글씨에 담고 싶은 알라신에 대한 이슬람(Islam) 민족의 신심이 이란의 서도를 풍요롭게 하였고 다양한 서체(書體)를 개발해 냈다.
ㄱ: 아랍어의 타이핑 활자체인 Kufic체가 있고
ㄴ: Naskh체가 있다.
AD. 7~10세기경에 쓰였던 활자체로서 전자는 코란과 비문(碑文)에 후자는 그 외의 용도에 씌였고 11세기경에 상기의 두 서체에서 여러 종류의 틀이 고안되었다.
ㄷ: Thulth체는 Kufic에서 파생 ‘서체(書體)의 어머니’라고 불리우며 비문, 명문(銘文), 글의 제목 등에 많이 쓰였고
ㄹ: Mohaqqaq체는 Kufic에서 파생 ‘서체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며 판형(判型)의 큰 코란의 필사(筆師)에 쓰인다.
ㅁ: Rayhan은 Mohaqqaq에서 파생 그 축소형으로 코란의 필사에 쓰인다.
ㅂ: Towqi체는 Sols Thulth에서 파생 공문서, 편지, 칙령(勅令)등에 쓰인다.
ㅅ: Reqa체는 Towqi에서 파생된 빨리 쓰기 서식이니 우리네의 초서(草書)와 같은 것이다.
ㅇ: 13세기 이후 Reqa와 Towqi를 혼합 Nastaliq체를 연구해냄으로써 글쓰기의 속도와 편의를 도모 페르시아어의 사본(寫本)의 서사(書寫)에 씌었다.
ㅈ: Taliq에서 그 형체를 뭉개버린 Shekaste가 만들어져 서간 칙령 등에 쓰였고 Shekaste-ye taliq이라고 명명되었다.
ㅊ: 14세기 중기에 이르러 Taliq체와 Naskh체의 합성으로 Nastaliq체가 탄생, 이란 서도의 중요한 서체로서 현재에까지 광범위하게 보급되어지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는 17세기 중반에 Shekaste-ye taliq체의 판독과 필사(筆寫)의 어려움으로 하여 Nastaliq체를 뭉갠
ㅋ: Shekaste-yen Nastaliq체가 또 나타나게 되었다. 30여 종의 다양한 서체 중에서 신구(新舊) Naskh 포함 12형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서체이다.
문자의 크기와 굵기에 따라 Dang으로 표시되는 Galam(펜)이 1Dang(2~2.5mm)에서 6Dang(5.5~6mm)까지 여섯 종류가 있음도 흥미로웠다. 붓의 재료는 윤기가 있고 너무 부드러워도 뻣뻣해도 안 되고 동일한 색이라야 하는 생후 2개월 된 고양이 털이 가장 이상적이란다.
세속의 명성이나 명예의 노예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자 작품에 서명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코란의 필사에 몰두하는 이란의 다음 행선지는 한국음식점 코리아가든이다. 주인은 이란인이고 부인이 한국여인이란다. 어떠한 경위로 이란 신랑을 맞았을까. 내 맏이는 72학번이다. 유신체제에 맞선 학생들 데모가 가장 격렬했던 시기이다. 정치상황이 비슷한 두 나라 젊은이가 의기상합하였음은 과부 설움 과부가 안다 에서 였을 것이다.
한국 여인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마음이 바쁘다. 음식점은 번화가에 있었다. 분위기가 한국적이기보다는 중국음식점에 가깝다. 유일하게 한국을 상기시키는 호돌이(88올림픽 마스코트)가 우리를 맞아줄 뿐 한국 여인은 만날 수가 없었다. 김치찌개에 오징어 볶음 불고기도 나오고 종업원의 서비스도 좋았으나 만나고 싶은 고국의 동포 여인을 만나지 못했으니 입맛이 꿀맛일 수는 없었다.
오후의 스케쥴은 한국 이란 작가 워크샵이 있고 밤에는 한국 대사관 초대가 있다. 음식점에서 나와 거리를 살펴본다. 플러터너스 가로수가 여간 우람하지 않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에 도랑이 설치되어 있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다. 나뭇잎이며 먼지 등이 떠 있어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시궁창 내가 진동하는 하수구의 썩은 물은 아니다. 하수구는 그 도랑 밑으로 나있는 것일까. 가로수가 물이 지나가는 도랑 속에 심겨져 있다는 것이(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내게는 또 신기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생하지 않아 연옥의 어디쯤인가에 있을 법한 하늘과 땅 사이를 잿빛으로 이어 놓은 이란의 석회암 산들, 비가 오지 않는 고장의 가로수 관리법인 것일까. 어쨌든 테헤란은 가로수가 무성했고 도시는 깨끗했고 정돈이 되어 있었다. 도시계획, 물, 나무 관리에 예산을 투입하고 있음이 피부에 와 닿았다.
호텔로 돌아와 숨을 돌리고 한국 이란 작가 Workshop에 참가했다. 장소는 우리가 묵고 있는 Azadi Grand Hotel 2412호 소회의실이다. 시간은 99. 10. 2 16:00~18:00(현지시간)시이다.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문화가 화려한 아리안의 나라 이란에 와 여러분과 함께 두 나라의 문화와 문학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는 인사말로 시작하여 한국의 역사와 지리적 상황을 요약 소개했고, 누차의 외침에도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았음을 한국민족의 언어와 글자가 있음으로써 였고, 고대 신라시대에 이미 페르시아와 교역이 트였었음을 실례를 열거 역설했고, 과거의 6,7십 년대의 독재정권에서는 투옥되고 탄압도 받았으나 오늘의 민주정부에서는 작가의 작품활동이 완전히 보장되어 한 사람의 작가도 투옥된 자가 없음에 힘을 주었고, 중국에서 발생한 유교문화의 장단점에서 한 민족의 의식주와 사고에 폐해가 되는 유교문화와의 싸움이 한국작가들이 지향해야 할 Motto임을 내용으로 한 사단법인 한국소설가 협회 정을병 회장의 주제(한국소설의 소개) 발표에 이어 테헤란 대학의 푸리남 다리인 국문학 교수의 ‘페르샤문학의 어제와 오늘’이 발표되었다.
사산 왕조(651-1501) 초기에 이란을 침공한 아랍과 거기에 대항하는 이란주체의 이슬람 운동과 코란의 율법 그리고 샤마니안 왕조가 꽃피운 문화적 공적과 페르시아 시인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사마니안 왕조가 낳은 위대한 시인 루다키에 대해서 언급했고 페르시아 전통시 1. 서사시(Epic) 2. 서정시(Lynic) 3. 교훈시(Didactic)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이란 7∙8세기 서정문학의 최고봉인 사디와 하페즈의 작품에 대해서 그리고 19세기 말 1979년 이란혁명 이후의 이란 문학의 동향에 대해서 푸리남 교수는 정열을 토했다. 통역에 한국 유학생(박사과정) 김 혁 씨가 수고를 해줬다.
끝나고 양국 작가들의 촬영이 있었다. 차도(Chador)를 걸친 이란의 여류시인(주제 발표자 푸리남 교수의 딸)이 어찌나 매혹적인지 나는 체면이고 뭐고 따질 겨를 없이 그녀를 흘끔흘끔 훔쳐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만일 내가 영화제작자나 감독이었다면 그녀를 비련의 주인공으로 영화 한 편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불꽃처럼 치솟았다.
김제영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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