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싸움의 역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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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이 넘도록 파상공세를 거듭했지만 출혈만 심해질 뿐 목표했던 영국상공의 제공권
장악이나 지상목표물에 대한 파괴는 사실상 지지부진했습니다. 7월 1일부터 8월 15일에
걸친 공격으로 독일정보부는 모두 574대의 RAF 전투기들을 격추 혹은 파괴하고 약 196대
에 손상을 입혀 수리창으로 보냈다고 산정, 총 770여대를 없애 당시 영국이 보유한 전체
전투기 약 900대중 거의 대부분을 일소했고 추가로 생산된 것을 합친다 하더라도 활용가
능 전투기수는 450대 이하에 불과하다고 추산했지만, 실제 파괴된 전투기는 318대에 불과
했고 비버브룩경의 생산독려에 힘입어 불과 6주일 사이에 720대의 전투기를 새로 공급받
게 된 RAF의 전투기 보유대수는 8월 15일을 기준해 어느덧 1000대를 넘는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디파이언트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의 실전 가동율은 거의 80%에 달하
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독일은 계속 오판과 오산을 거듭한 것이고 이대로 가면 제 아무
리 수적 우세에 있는 루프트바페라고 할지라도 손실을 감당해내기도, 영국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일도 무망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실제로 독일 정보부의 오판과 잘못된 정보들
은 루프트바페 파일럿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키고 있었습니다. 정보분석에 따르면 저항
이 거의 없거나 크게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출격을 하면 항상 예상했던 것보다
더 격렬한 RAF 전투기들의 반격을 받아야 했기에 상부에 대한 불신이 커져만 간거지요.
결국 루프트바페의 지휘부는 이 모든 부진의 근원이 RAF의 전투기들에 있음을 깨닫고
집중적으로 전투기 기지와 활주로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8월 24일부터 개시된 루
프트바페의 작전변화는 RAF에게 대단히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약 80대에서 100여대
로 구성된 폭격기들과 이들을 호위하는 100여대의 전투기로 루프트바페의 공격은 주로
RAF 전투기들의 활주로와 기지에 집중되었고 불과 1주일만에 이들의 공격사정권에 들어
있던 영국 남부에 위치한 대부분의 주요 공군기지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거나 사실상 기
지의 기능이 마비됩니다.
활주로는 커다란 폭탄구멍이 생기면서 사용불능이 되고 격납고와 수리창이 파괴되는가
하면 지상기지가 공격을 당하면서 당장 한명이 아쉬운 파일럿들이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비명횡사하거나 부상을 입는 경우가 속출했습니다. RAF가 여태까지 해온 대로 신속한 요
격을 하기 위해서는 이들 기지가 꼭 필요했지만 당시 RAF는 워낙 수적 열세에 처해 있었
기 때문에 루프트바페의 공격이 RAF 공군기지 하나에만 집중되자, 쉬이 한계를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8월 30일 하루에만 무려 1300대가 넘는 루프트바페의 집중공격을 받았고
그 다음날에는 더 많은 수의 루프트바페가 RAF 전투기들을 노렸습니다. 8월 31일 하루에
만 RAF전투기 부대는 무려 39대의 전투기를 상실했고 8월 한달동안에 304명의 파일럿이
전사했습니다. 그에 비해 8월에 교육을 마치고 실전에 투입된 파일럿의 수는 260명 수준
에 불과했지요. 이런 수준의 소모율이라면 RAF는 파일럿 손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8월이 끝나자, 46개 전투기 중대의 지휘관 중 11명이, 97개 편대의 편대
장중 39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을 정도로 피해는 심각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조만
간 RAF의 전투기들은 소모전 끝에 고사되고 제공권을 내줄 것이 분명했을 상황이었죠.
후일 역사가들도 이 시기가 배틀 오브 브리튼 전체기간중 RAF에게 가장 위험했던 순간
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 루프트바페는 주
요 공격목표를 RAF 전투기 기지에서 주요도시로 바꾸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이는 8월 24일 루프트바페의 하인켈 HE 111폭격기 한 대가 우연한 실수로 런던에 폭탄
을 잘못 투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8월 25일과 28일 29일에 세 번에 걸쳐서 영국폭격
기들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처음으로 폭탄을 투하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작 81대로 이뤄진 이 첫 베를린 공습으로 감히 제3제국의 수도를 공격한 것에 격분
한 총통 히틀러는 9월 4일 회견을 통해 전 독일국민에게 천배의 보복을 하겠다고 공언
했고 이로 인해 루프트바페의 집중공격 목표는 런던을 비롯한 주요 도시로 변경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히틀러의 분노는 다 죽어가던 RAF 전투기들에게 한숨 돌릴 여유를 준
셈이 되었고 런던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이 루프트바페의 야간 폭격에 시달리는 동안 신속
하게 기지를 복구하고 활주로의 구멍을 메우면서 결국 기사회생하게 됩니다.
물론 이 시기 영국의 주요도시들은 적지 않은 피해와 사상자를 냈지만, 한 달이 넘게 지속된
치열한 공중혈투로 피로에 쩔어있던 RAF의 전투기 파일럿들에게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의 기회
이기도 했습니다. 총통의 급작스런 전술목표 변경지시는 덩케르크에서 이유없이 진격을 중
지시켜 영국군이 무사히 달아날 기회를 주었던 실수에 버금갔습니다. RAF의 전투기들이
다시 활기를 되찾자 루프트바페는 다시 전투기기지에 대해서도 공격을 재개했지만 급속히
증강된 전투기들로 인해 배틀 오브 브리튼이 시작되기 전보다 거의 3배 이상의 숫자로 불
어난 RAF의 전투기들을 제압하기는 이미 불가능해진 뒤였습니다. 9월 15일이 되자, 영국
과 독일간에 펼쳐진 치열한 공중전은 절정에 달합니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런던을 습격한
100여대의 루프트바페 폭격기들과 이들을 호위하는 400여대의 전투기들에 맞선 RAF전투기
들의 치열한 공중혈투가 벌어지는 동안, 런던 지하벙커의 영국공군 지휘부 상황실의 거대
한 상황판에서는 영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공중전 상황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처칠 총리가 공군부원수 파크장군에게 남은 예비전투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던 순간, 파크 장군은 활용가능한 RAF의 전투기들이 모두 하늘에 떠있는 상황임을 깨
닫고 '더 이상 없습니다. 총리각하'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로 그 순간 영국 공군은 단
한 대의 예비전투기도 없이 모든 기체가 하늘에서 루프트바페와 싸우고 있었고 이 총력
전에서 루프트바페는 56대의 항공기를 잃고 패퇴하고 맙니다. 반면 RAF의 손실은 26대.
잘 나갔던 지난 9개월의 공중전 기간 중 고작 200대 수준의 피해를 입었던 루프트바페에
게 하루 50대가 넘는 손실은 치욕적인 참패에 다름아니었고 이 날 이후 루프트바페의 사기
는 급속히 저하됩니다. 이날 갈란트 대령은 일기에 '성공가능성이 희박해졌다'라고 적었습
니다. 갈란트의 기록에 따르면 '계속적인 작전목표의 변경은 일선의 파일럿들을 혼란스럽
게만 했고 상부의 잘못된 질책은 파일럿들의 사기만을 저하시켰다. 이미 파일럿들은 계속
된 출격으로 인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도달한지 오래고. 우리들(전투기 파일
럿)들은 상부의 잘못된 리더십과 수투카를 비롯한 폭격기들의 한심한 성능에 불만을 터트
리곤 했다. 계속되는 소모전으로 우리는 연일 동료와 상관과 부하들을 상실하기만 했다'
갈란트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두 달이 넘는 치열한 공중혈투로 양쪽 모두 거의 한
계상황 직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위 갈란트의 언급에서 폭격기들에 대한 불만은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전술했듯이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더불어 위력을 과시했던 수
투카는 공중근접지원에서는 효과적이었으나, 런던과 같은 도시를 파괴할 만큼의 폭탄을
적재하지도 못했고 근본적으로 너무 둔하고 느려서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의 가장 만만
한 먹잇감으로 전락한 것 못지 않게 하인켈과 도르니어 폭격기들 역시 적의 주요거점을
무력화하는 장거리 전략폭격에는 어울리지 않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먼저 독일의 폭격기들
은 두 개의 엔진을 단 중단거리 폭격용으로 항속거리와 폭탄탑재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
습니다. 고작해야 1톤이나 2톤의 폭탄을 탑재하고 영불해협을 오간들 사실상 치명적인 타
격을 주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고 기체의 특성상 충분한 방어력이나 방어용 기총을 설치
할 공간이 부족해 사각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전투기 공격에 상대적으로 더 취약했습니다.
특히나 항속거리가 짧아 고작해야 목표 상공인 런던이나 영국의 주요 도시에 15분 이상을
머무르기가 힘들었던지라 목표물을 포착하고 정확한 폭격을 가하기는 더욱 어려웠죠.
이들 루프트바페 폭격기들의 구조적인 약점은 이들을 호위하는 전투기들에게 되려 부담을
준 셈이고 이는 애초부터 공군력을 육군의 공중포병정도로 활용하려고 했던 독일군 자체
의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루프트바페에서도 30년대 초중반 미국의 B-17이나 영국의
랭커스터 폭격기에 버금가는 4발 장거리 중폭격기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는 했으나,
당시부터 루프트바페의 총수를 맡았던 헤르만 괴링은 무겁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거대한
중폭격기보다는 단거리 위주의 경폭격기를 다량 보유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주장하여
결국 중폭격기 개발을 단념한 것이 후일 영국과의 항공전에서 패배의 한 원인이 되고 맙
니다.
치열한 혈투를 벌였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루프트바페는 총수 괴링이
장담했던 것과는 달리 여전히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한 채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었고
사실상 승리할 가능성이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여름 내내 평온하던 영불해협의 바다는
서서히 계절풍의 영향으로 다시 높고 거친 파도가 일기 시작했고 이는 크릭스 마리네와
베어마흐트가 영국 침공시 준비하고 있던 상륙용 보트와 대형 바지선들의 사용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국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막강한 전함들과 압도적으로 우세
한 수상함 세력에 대한 공격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절정의 9월 15일이
지나고 이틀 후, 시라이언 작전을 이미 9월 27일로 한번 연기했던 총통은 별도의 언급이
있을 때까지 라는 단서를 붙여 작전을 무기 연기합니다. 사실상 영국을 침공하려던 계획
을 접고 만거지요. 이후 런던에는 9월 30일 마지막으로 루프트바페의 주간폭격이 있었고
그후로도 간헐적으로 야간 기습 폭격이 이뤄졌지만 RAF의 확고한 제공권 우위를 무너
뜨릴 방법이 사라진 루프트바페는 이후 다시는 대규모 공습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드디어 양쪽 어디에서도 더 이상 공중전 사상자가 나오지 않게
됩니다. 길고도 길었던 넉달간의 치열했던 배틀 오브 브리튼은 끝이 났습니다.
승승장구하며 파죽지세로 전 유럽을 석권했던 나치독일의 기세를 처음으로 저지해낸
겁니다. 한줌도 안 될 거 같았던 RAF의 전투기 파일럿들이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대영
제국을 구출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수많은 찬사가 쏟아졌지만 가장 간결하고 명쾌
하게 이들의 역할을 정의한 사람은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8월 20일 하원 연설에서
처칠은 '인류의 전쟁역사상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세를 진적
은 단 한번도 없었다' 며 항공력이 역사의 흐름을 바꿨음을 높이 상찬합니다. 그러나
배틀 오브 브리튼에 참여했던 2,900여명의 파일럿들 중 5분의 1에 달하는 567명이
영국출신이 아닌 영연방 혹은 폴란드와 체코 출신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146명의 폴란드 출신과 88명의 체코 출신 파일럿들을 필두로 벨기에(26),프랑스
(13)출신 파일럿들이 나치에게 항복한 망국의 설움과 패전의 아픔을 딛고 연합군의
대의아래 목숨을 걸고 영국의 하늘을 지켜줬습니다. 당장 한명의 파일럿이 아쉬웠던
영국에게 있어 이들의 존재는 정말로 소중한 것이었지요. 이 위대한 승리가 오직 영국
인들만의 것은 아니었고 이들의 숫자가 뉴질랜드(126)나 캐나다(97), 오스트레일리아
(33)와 같은 영국의 형제국 영연방 출신 파일럿들보다 많았다는 점에서 이 승리는 영
국 혼자만의 승리라고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셰놀트의 선견지명이 옳았던 것이지요. 아무리 폭격기가 무섭다고 한들, 공중전
의 주역은 분명히 전투기였습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항공력이 반드시 필요했고
그중에서도 제공권을 좌우하는 전투기가 최우선해야 함을 배틀 오브 브리튼은 입증했
습니다. 물론 영국은 십만채가 넘는 건물이 부서졌고 4만 3천의 민간인 사망자와 5만1
천명에 달하는 부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루프트 바페는 1,733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RAF
는 937대를 잃는데 그쳤습니다. 그 이전 9개월의 전투에서 루프트바페가 상실했던 항공
기 숫자가 고작해야 200여대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임을 감안할 때 불과 넉달의 항공전
에서 루프트바페는 엄청난 손실과 더불어 체면과 자존심을 구기고 말았습니다.
영국을 완전히 무력화해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하려던 히틀러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고 이로써 연합국은 후일의 반격을 시도할 최소한의 전진기지를 확보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일의 주인공이 바로 2차대전의 가장 중요한 주역이 될
전투기들과 그들을 조종한 파일럿들이었습니다. 항공력이 세상의 흐름을 좌우할 것이라
는 1차대전 이후의 전망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지요.
물론 이 위대한 업적은 사실 전투기들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독일군의 통신
암호를 해독해낸 울트라와 루프트바페의 접근을 완벽하게 감지해낸 레이다 시스템과
최일선 공중전 현장에서 온갖 욕설과 비명이 난무하는 통신 내용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침착하게 기록하고 보고해간 공군여자보조부대원(WAAF)들과 밤을 새워 기체를
정비하고 파손된 기체를 수리했던 정비병들과 같은 무수한 이들의 노고와 땀과 희생
이 뒷받침 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아울러 오늘날 영국 현대사는 이들 파일럿 못지않게 배틀 오브 브리튼 기간중에
대활약한 또 다른 영웅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어디를 가더라도 공공건물이나 주요 역사에는 배틀 오브 브리튼 기간에
폭격으로 부서진 집들과 화재로부터 시민들을 지키려다 사망한 수많은 소방관들과
홈 가드 요원들의 추모비와 이들의 업적을 기록한 명판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역사가 늘상 위대한 몇몇보다 평범하지만 남다른 희생을 마다치 않았던
보통 사람들의 것임을, 영국 현대사에서 가장 험악했던 시절 영국을 지킨 이들이
누군지를 알게 해주는 소중한 흔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5편은 무대를 잠시 태평양으로 옮겨 전투기가 태평양 전선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클레어 셰놀트가 창설했던 의용비행대 플라잉타이거스와 2차대전 항공전술의 새로운
흐름 에너지 파이팅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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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제이엘님의 댓글
제이엘 작성일그당시 독일군에 대항한 영국 공군 구성원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비행사들이 비영연방의 나라들에서 왔다는 사실이 흥미롭네요.. 졸지에 나라 잃고 자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 영국을 도와 열심히 싸웠다는것을 보니 갑자기 일본에 대항하여 중국과 미국등에 예속되어 싸웠던 예전의 우리 조상들이 생각이 납니다..
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저도 그대목을 읽으면서 같은 생각을 했답니다. 어쩔수 없는 한국사람인가봅니다. 좀 더 덧붙이면 8명의 미국인이 국적법을 어기면서까지 참전했고 20여명의 남아공사람과 3명의 로리지아인, 한명의 자메이카인까지 포함해서 참으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참전했던 걸로 나와 있습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역사에 만일이란 없겠지만
히틀러가 아예 영국침공을 하지 않았다면 영국 또한 그만큼 전쟁을 위해 무기생산에 집중하지 않았을 것이고 독일에 대한 전의 또한 불타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찔하군요.
그랬다면 독일이 힘을 분산하지 않고 집중해서 유럽 전역을 모두 휩쓸고 승리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요?
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외교 역학상 그렇게 전개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일단 폴란드를 건드릴 명분이 전혀 없었거든요. 전면전하겠다는 의사표시지요. 1차대전으로 형성된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겠다는 것이 바로 폴란드의 침공이었지요. 폴란드는 1차대전 독일의 패배로 250년만에 다시 독립을 쟁취했었으니까요. 프랑스나 영국이나 독일이 폴란드를 건드리는 것은 바로 자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걸 히틀러도 잘 알고 있었고요. 독일은 해군력이 빈약해서 영국을 침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화평을 청하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