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3>-"나의 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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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시키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제3회 "나의 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
한성 감옥. 1899년 2월 어느 날. 한겨울의 냉기는 내뿜는 숨도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돗자리가 깔린 마루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코끝을 맴도는 외풍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번데기처럼 움츠리는 것 말고는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드러누울 수 있는 신세가 되지 못했다. 긴 널판지의 칼이 목에 씌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손은 수갑에 채워지고 발은 차꼬에 끼워져 있었다.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그는 7개월을 꼼짝없이 목에 칼을 달고 있어야 했다.
▲ 맨 왼쪽 죄수복을 입은 이승만. 한성감옥으로 면회 온 친지들과 찍은 사진
목에 칼을 씌운 건 한번 파옥을 한 전력 때문이었다. 독립협회 활동의 일환으로 민권운동에 앞장섰던 이승만은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주셔야 한다"는 전단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지금의 종로 3가 단성사극장 자리에 있던 한성감옥에 갇혔다. 같은 달 30일 그는 탈옥을 감행했다. 언제 석방될지 기약도 없고 종로에서 군중대회가 열리기로 돼 있어 그에 맞춰 뛰쳐나갔던 것이다.
권총 두 자루가 은밀하게 감옥 안으로 반입됐다. 동지들은 추격하는 간수들에게 권총을 쏘며 내뺐으나 이승만은 권총을 발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속한 장소로 달려갔을 때 기다리는 사람들은 한 놈도 없지 않은가.
시간의 오차로 예기치 않은 낭패가 일어난 것이다. 세 명의 탈옥자는 허탈하게 쓰러졌고 어느새 병정들이 달려와 에워쌌다. 경무청에 끌려간 이승만은 박달북이라는 자에게 고문을 받았다. 박은 전화로 황제의 지시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고문을 당한 이승만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감옥으로 손바닥 크기의 성경을 가져다 준 사람은 선교사 셔우드 에디 박사였다. 이승만은 목에 씌운 칼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고 나의 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
그러는 동안 같은 감방에 있는 죄수들 중 한 명은 간수가 오는지 파수를 섰고 또 한 명은 성경의 책장을 넘겨주었다. 이승만의 손이 수갑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을 읽는 동안 차츰 그의 마음이 가라앉으며 평안해졌다.
이승만이 미국 선교사들을 알게 된 건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통해서였다. 1895년 3월 그는 또래의 서당친구 권유로 배재학당의 영어초급반에 등록했다.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6개월 만에 초급반을 졸업하자 바로 영어조교로 뽑혔다.
1897년 7월 8일 졸업할 때는 졸업식장에서 '조선의 독립'이라는 제목으로 대표연설을 영어로 했다. 배재학당 재학 중 서재필의 특강이 있었고 그 영향으로 그 후 '협성회'라는 토론회가 조직됐다. 처음에는 배재학당 학생 중심이었는데 차츰 일반회원도 받아들였다.
"시무를 의론하난 쟈 말하기를 임의 일본에 허락하여 절영도 안에 셕탄고를 짓게 하엿슨즉 지금 아라사가 그 졀례로 요구하난대 허락지 아니함은 올치 안타하니 그는 생각지 못하고 한 말이라. 대뎌 대한졍부에셔 대한 따흘 가지고 임의로 하난 권리가 잇슨즉 누구난 주고 누구난 아니 주난 것이 졍의에 고로지 못하다고난 할 지언뎡 경계에 틀이다고 할 수난 업난지라.(중략) 그런즉 우리가 암만 말하여도 실효가 업스니 말하난 우리나 말 아니하난 남이나 조곰치도 다를 거시 업다 할 듯하나 말만 하여도 국즁에 백셩이 잇난 것은 뵈임이오 또한 젼국 백셩이 우리와 갓치 일심으로 한 마대씩 반대할 만 하게 되엿스면 당초에 남의 툐디를 달날리도 업거니어….(하략)"
한국 최초의 시사주간지라고 평가되는 '협성회회보'는 4개월 만에 폐간돼 그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의 발행에 뛰어들었다. 기자로서 이승만은 혁신적인 논설을 썼고 당시 '독립신문'을 발간하던 서재필 박사는 '매일신문' 때문에 자기네 신문을 팔 수 없다고 불평했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관계자들이 투옥되면서 '매일신문'은 1년도 못가 폐간됐다.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이승만은 제중원의 여의사인 조지아나 화이팅의 한국 말 교사를 했고 제중원의 다른 의사들도 알게 됐다. 그들 중 의사 에비슨은 그의 상투를 가위로 잘라주었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캐나다로 이민했으며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한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 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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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복복복님의 댓글
복복복 작성일잘 읽고, 복사후 자세~히 읽으렵니다. ㅎ
대한민국님의 댓글
대한민국 작성일역사공부 잘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도르테아님, 직접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도르테아님의 댓글의 댓글
도르테아 작성일
먼저 옮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젠 제가 열심히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