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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싸움의 역사 (5)//태평양을 제패한 제로의 짧았던 영광과 기나긴 몰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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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4건 조회 24,095회 작성일 10-08-26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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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싸움의 역사(5)

                       -태평양을 제패한 제로의 짧았던 영광과 기나긴 몰락(상)-

 

   서구의 시각에서 2차 세계대전은 39년 9월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이었지만, 아시아의

관점에서 전쟁은 그보다 훨씬 더 먼저 시작된 지 오래였습니다. 쇼와 침략전쟁의 관점으

로는 31년의 만주사변부터 시작된 15년 전쟁이고 중일의 직접적 충돌로 봐도 37년에 시작

된 전쟁이라고 봐야 합니다. 일본제국이 1차 대전의 호황이후 닥친 불황을 침략전쟁으로

극복키로 결심한 이후, 일본 역시 서서히 다가오는 항공의 시대를 맞아 항공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전간기 일본의 항공개발을 주도한 군은 해군이었습니다. 섬나라의 특

성상 본토를 수비하는 최일선을 맡고 있던 해군의 주도하에 유럽과 미국의 기술을 수입하

여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항공력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오늘날 미츠비

시, 가와사키와 같은 재벌기업들이 그 시절 일본의 항공산업을 주도했지요. 일본해군은 주

로 광활한 태평양을 무대로 활동을 해야 했던지라 유럽과는 달리 항속거리를 무척 중시했

습니다. 또한 사무라이의 나라답게 공격적인 요소를 강조했던 반면 방어는 다소 등한시하는

설계컨셉을 선호했지요. 그러나 서구의 시각으로 볼 때 일본의 항공력은 서구의 항공산업

을 모방생산하는 수준에 불과했고 심지어 일본인의 째진 눈은 먼거리를 볼 수 없다는 식의

인종적 편견마저 겹쳐 진주만 기습일까지 일본의 항공력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서구의 군사

전문가나 전략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시각에서 3류군대 수준에 불과한 중국

군을 상대로도 수년씩 시간을 끌고 있는 일본육군을 위협적으로 생각해본적도 별로 없었지요.

 

 

   그러나, 이렇듯 일본의 존재를 과소평가했던 서구 열강들은 41년 12월 8일 새벽, 일본

의 항모에서 발진한 350여대의 함재기들이 미태평양 함대의 본거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해 주력전함 8척과 수백대의 육해군 항공기를 일시에 사용불능케 함과 동시에 말레이반도

와 필리핀, 웨이크와 괌, 홍콩등 아시아 태평양의 연합군 근거지에 대해 동시 다발적인

공격을 개시하자, 경악하고 맙니다.

 

   진주만이 쑥대밭이 된지, 12시간도 채 안되어 필리핀의 미 육군항공대는 대만에서 출격

한 일본해군 기지항공대의 공습으로 사실상 궤멸 되었고 그 다음날엔 말레이 반도에 상륙

한 일본 25군을 견제하기 위해 출항한 영 아시아 함대의 주력전함 2척이 말레이 반도 공

해상에서 도저히 날아올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베트남의 활주로에서 출격한 일본해군

기지 항공대의 어뢰와 폭탄을 두들겨 맞고 불과 2시간만에 침몰하자, 처칠 총리는 2차대

전 내내 이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없었다고 술회할 만큼 패닉상태가 됩니다.

전간기 미 공군의 아버지 빌리 미첼이 주장했던 항공기가 그 어떤 중장갑의 전함도 격침

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예언이 바로 현실로 입증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일본은 미,영을 상

대로 전면전을 시작하면서 불과 이틀 만에 미첼의 예언을 사실로 입증했습니다.

 

   이후 6개월 동안 일본의 육해군은 항공력을 앞세워 놀라운 그들식의 전격전으로 아시아

와 태평양을 석권했습니다. 불과 석달도 채 되지 않아 말레이 반도를 휩쓸고 영국이 아

시아 식민통치의 핵심으로 여기던 싱가포르마저 점령했고 그 기세를 몰아 버마로 진격하

면서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손에 넣습니다. 네덜란드 령 동인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를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석권해 숙원이던 유전을 쟁취합니다. 필리핀 주둔 미 극동군만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제공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결국 5월이 되자 승부는 기울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불과 6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히틀러가 2년반에 걸쳐서 얻었

던 영토의 거의 3배에 이르는 광활한 영역을 손에 쥡니다. 특히나 진주만을 기습했던

일본의 항모 기동부대의 활약은 눈부셨습니다. 첫 출동이래 태평양 전역을 누빈 것은 물

론 인도양까지 넘나들며 그들의 항공력을 투사했고 당시 일본함재기들의 명중률은 무려

80%를 상회할 정도로 무적을 자랑했습니다. 일본 육군 항공대 역시 나치독일이 유럽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전격전을 선보이면서 육군이 빠르게 동남아시아 각지의 연합국 비행장

을 점령하고 이를 기점으로 삼아 연합군 지상군을 압박했고 특히 영국군은 말레이 반도

와 싱가포르, 버마 전투 내내 일본군에게 제공권을 내주고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굴욕적

인 후퇴를 거듭해야 했습니다. 불과 5만에 불과한 일본 25군에게 13만이 넘는 영국군이

싱가포르에서 항복했던 것은 2차대전 기간 중 영국군 최악의 졸전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패장 퍼시벌 장군은 이후 전승기념행사에 단 한 번도 초대를 받지 못했을 정도고

종전후, 중장급 이상 모든 장군에게 경(Sir)의 칭호를 내렸던 영국왕실조차 퍼시벌에

는 아무런 작위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특히나 연합군을 경악시킨 상징적인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미츠비시가

제조한 A6M2 영식 함상 전투기, 일명 제로였습니다. 이 기종이 처음 나온 해인 40년이

일본의 황실 기원 2600년이 되는 원년이라서 영식 즉 제로라는 제식명을 얻은 이 전투

기는 항공모함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함재기로 1,100마력의 엔진에 날렵한 유선

형 설계와 시야가 좋은 버블형 캐노피를 장착한 금속제 단엽기로 20밀리 기관포 2정과

7.7밀리 기총 2문을 탑재해 당시 어느 서구전투기에 뒤지지 않는 화력을 보유했습니다.

최고속도는 평범한 530킬로였지만 그 어떤 서구의 전투기들보다 상승과 선회가 좋아

탁월한 기동성으로 근접 공중전에서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유럽에서 선회로는

따라올 자가 없다던 스핏파이어(배틀 오브 브리튼에서 루프트바페 파일럿들이 침을 흘

리면서 쳐다봤다는 그놈입죠)조차도 제로와의 선회전에서는 고전을 했을 정돕니다.

 

   또 한가지 서구의 항공전문가들을 경악시킨 것은 제로의 경이로운 항속거리였습니다.

불과 9미터가 약간 넘는 조그마한 전투기가 당시로는 불가능하리라 여긴 3천킬로를

난다는 것은 1,000킬로 훨씬 너머에서도 일본의 항공력은 공격이 가능하다는 의미였고

이렇듯 3,000킬로를 넘게 나는 제로의 장거리 비행능력은 태평양 전쟁 초기 6개월

내내 '설마 여기까지 날아오겠냐' 하던 지점의 기습공격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 결과 연

합군은 일본식 전격전술에 눌려 굴욕적인 참패와 항복, 졸전과 후퇴를 거듭합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배치된 미,영의 전투기들은 제로와 하야부사(육군전투기)의

날렵한 기동성에 눌려 번번히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꼬리를 잡혀 추락하기 일쑤

였습니다. 교범에서 배운대로 전통적인 선회전을 시도했다가는 제로는 날쌔게 기체를

선회시켜 손쉽게 연합군 전투기들의 6시 꼬리방향을 선점하고 기총세례를 퍼부어대니,

당최 어떻게 해볼 방법을 모르고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30년대부터 중국대륙에서 실전경험이 있었던 일본 파일럿들은 대다수가 수천

시간의 비행기록을 가진 베테랑들이었고 이 때문에 더욱더 연합군 파일럿들은 상대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모방이나 해대는, 2류급 항공대로 과소평가했던 일본

이 경이로운 제로전투기를 선보이자, 연합군 파일럿들은 상당수가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

았고 이후 제로의 모습만 봐도 꽁무니를 빼는 경우가 속출할 정도로 제로에 대한 공포심

은 극에 달합니다. 암담한 상황이었지요. 당시 미영 연합군이 보유했던 주력 전투기,

미육군 항공대의 P-36, P-40, 미해군의 와일드캣, 버펄로, RAF의 허리케인 그 어떤 기종

도 제로나 하야부사와의 근접공중전에서 상대가 되질 못했습니다. 그간 인종적 편견과 근

거 없는 자만심에 빠져 있던 연합군은 제로의 경이로운 선회력과 경쾌한 기동성, 상상을

초월하는 장거리 항속능력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항공력과 파일럿들의 수준을 예의 주시했던 선각자들도 있었는데, 바로 이

들이 제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게 됩니다. 공군력이 매우 빈약했던, 공군을 그저 부자

집 자제들의 명목상 병역등록처로 인식하곤 했던 중국은 2차대전 초기부터 일본 항공대

의 계속되는 무차별 폭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습니다. 항공기의 위력과 필요성을 절감

한 장제스 주석은 일본 항공력에 맞설 전투기와 파일럿을 ‘급한 대로 외국에서 사올’ 것

을 결심하게 되죠. 당시 중국에게 필요한 전투기와 파일럿을 제공해줄 수 있는 나라는 미

국밖에 없었고 이를 위해 장주석의 부인 쑹메이링이 직접 나섭니다. 그녀는 미국 상류사

교계에서도 명성과 인기가 자자했던지라, 이를 통한 미국 내 인맥과 탁월한 로비력을 바

탕으로 중국에게 절실했던 ‘용병항공대’ 계획을 현실화합니다. 이때 쑹메이링이 발탁했

던 인물이 미 육군항공대 퇴역 장교출신인 클레어 리 셰놀트였습니다. 전술했듯이 셰놀트

는 30년대 내내 미 육군 항공대 내에서 보기 드문 전투기 신봉자였고 이 때문에 항공대

주류였던 폭격기우위론자들과 격렬한 의견대립과 충돌 끝에 전역해버린 문제아였으나

당시 중국에게는 아주 적합했죠. 셰놀트는 곧 중국공군의 대령이자 고문이 되었고 이후

항공사에서 매우 독특한 의용항공대를 창설하게 됩니다.

 

 

   중국은 루스벨트 미 행정부를 설득했고 서서히 일본위협의 심각성을 인지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침내 중국에게 전투기의 ‘수출(P-40 전투기 100대)’을 허락했고 여기에

더하여 미국이 수출하게 될 전투기의 파일럿을 '미국 민간인'들 중에서 모집해도 좋다

는 ‘특별한 허락’마저 얻게 되는데, 중국정부가 모집한 이들 민간인 의용항공대원들

은 사실상 미 육군항공대와 해군, 해병대 소속의 정규 파일럿을 차출한 것이었습니다.

일본과의 외교마찰을 생각해 이들을 전역시켜 민간인으로 만들어 중국에 보낸거지요.

이들에 대한 중국정부의 보수는 매우 두둑한 것이었는데, 파일럿들의 월급은 매월 600

달러였고 일본기를 한대 격추할 때마다 특별보너스 500달러를 추가로 지급하기로 했는

데, 이는 현역대령들보다 더 높은 급여여서 희망자가 속출해 육해군과 해병대를 도리어

곤혹스럽게 했다는군요. 우여곡절 끝에 선발된 110명의 민간인(?) 지원자들은 의사와

선교사, 농부, 항공회사 직원(판매된 P-40전투기의 A/S를 담당한다는 구실로)등으로 신분

을 위장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으로 향했죠. 이렇게 해서 41년 6월을 전후하여 뉴욕

에서 선적된 P-40 전투기와 의용항공대원 318(파일럿 110명, 지상요원 208명)여명이 버

마 랭군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의욕은 좋았지만 실전경험이 전혀 없었고

상당수는 폭격기나 수송기 조종사 출신이어서 당장 이들을 실전에 투입할 수 없는 상황

이었습니다. 다만 30년대 내내 전투기의 효용성과 폭격기의 맹점을 역설해왔던 셰놀트

는 중국공군 고문의 경험을 통해서 이미 일본전투기들의 장단점과 파일럿들의 능력에 대

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투기와 인원이 도착하자, 랭군 북쪽의 쓰다버린 비행장에서 셰놀트는 이들 신출내

기들을 데리고 그가 생각해왔던 독창적인 훈련에 돌입합니다. 셰놀트가 AVG 파일럿들

에게 전수한 공중전 전술은 여태 미 항공대에서 가르쳐 왔던 전통적인 1차대전 식 선회

전법과는 매우 다르고도 판이한 것이었습니다.

 

   셰놀트는 파일럿들에게 절대로 일본기들과 전통적인 꼬리잡기식 선회전을 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는데, 그들이 몰게 될 P-40전투기는 일본의 전투기들에 비해서 기동성

과 선회력, 상승력 등이 현저하게 뒤졌고 자칫 선회전에 말려들 경우, 무겁고 둔한 P-40

에겐 전혀 승산이 없음을 셰놀트는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셰놀트는 불리한 선회전 대

신 P-40의 장점인 급강하 능력과 두터운 장갑, 우세한 화력을 이용한 신전법(에너지 파이

팅)을 대원들에게 계속 강조하며 맹렬한 연습을 시킵니다.

 

   기동성이 우세한 일본 전투기들에 대해 셰놀트 대령이 훈련시킨 플라잉 타이거스 P-40

전투기 파일럿들의 기본 대응 전술은 통상 다섯 가지로 요약되는데;

 

1)급강하해서 충분한 속도를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일본 전투기 앞에서 상승하지 말

것. 일본 전투기는 손쉽게 너(여기서는 플라잉타이거스 대원)를 따라 잡을 것이다.

 

2) P-40의 장점을 활용할 것. 간단히 말해 급강하 능력과 화력(헤드 온 전술을 써라)

을 이용하고 절대로 선회기동을 하지 말 것. 어떠한 경우에도 일본 전투기들은 선회전

에서 너보다 빠르고 민첩하다.

 

3)고도는 생존을 보장하는 든든한 보험과도 같다. 적기가 너보다 2,3천 피트 높은 위치

를 점유하고 있을 경우 멀리 우선회해서 그들에게 접근하거나 직진해 접근하더라도 적기

와 같은 고도가 될 때까지는 충분한 안전거리를 유지할 것. 적의 편대 대형 바로 앞에서

150마일의 속도로 급상승 하는 짓은 죽음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4)적기에 피탄 되어 탈출해야 할 경우, 최대한 낙하산을 펴는 시간을 늦추며 기다릴

것. 만약 일본기가 너를 발견 할 경우 그들은 바로 기총세례를 가할 것이다.

 

5)인내하며 기다릴 것. 구름과 태양을 활용하여 공격하기에 적당한 급강하 고도가

될 때까지. 적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급강하를 했을 경우, 원래 고도로 돌아가기

위해선 20분이 걸림. 적기를 선제공격하기 좋은 고도에 있을 경우 급강하해서 사격하

고 다시 상승해서 계속 간격을 두고 공격을 뒤풀이 할 것. 이러한 전술이 훨씬 더 적기

에게 치명적임을 명심하라.

 

 

  플라잉타이거스가 사용한 P-40B전투기는 기체가 무거워 기동성과 상승력은 일본 하야

부사 전투기나 제로전투기에 비해서 떨어지지만 반대로 급강하능력에 있어서만은 튼튼한

기체구조와 무게로 인해 월등히 앞섰고, 피탄 시 연료 누출을 막아주는 연료탱크 자동봉

입장치와 파일럿을 보호하는 장갑을 갖춰 방어력이 우수했으며, 동체에 2문의 12.7mm

중기관총과 4문의 7.62mm 기관총을 날개에 장착하여 월등한 화력의 우위(이에 비해 일본

육군의 주력전투기인 하야부사는 고작 7.7mm기관총 2문의 화력을 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셰놀트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언제나 일본기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빠르

게 급강하하며 한번의 기관총 사격으로 승부를 결정짓고 멀찌감치 달아나는 ‘히트 앤

런(Hit and Run)’전술과 또 단 한번뿐인 사격기회를 보다 더 확실히 하기 위해 2대의

전투기가 일개 조로 하나의 목표물을 동시에 공격하는 ‘원 바이 투(One by Two)’전술을

지속적으로 반복·훈련 시켰지요.

 

  당시 의용항공대원들은 실제 공중전보다 훈련에서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을 만큼 맹훈

련을 거듭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구 최후의 의용항공대 AVG가 탄생했고, 호스트인 장제

스 중국주석은 이들에게 비호전대(飛虎戰隊)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후일 서구 언론들

이 플라잉타이거스로 역사에 기록하게 될 전설의 시작이었죠.

 

 

   원래 셰놀트는 중국공군의 고문으로서 3개 비행단의 플라잉 타이거스를 구상했습니다.

2개의 전투기 비행단과 1개의 폭격기 비행단을 구성하여 중국대륙을 기지로 하는 장거리

일본본토 폭격을 가하여 일본의 전쟁의지를 꺾으려는 더 큰 규모의 구상을 했지요.

그러나 이 구상은 진주만 기습으로 현실화되지 못합니다. 대신 그가 이끄는 플라잉타이

거스 대원들은 이제 남중국과 버마의 하늘에서 일본 육군항공대와 데뷔전을 치릅니다.

셰놀트는 여태 일본항공대가 사실상 거의 요격다운 요격을 받지 않았던 점을 감안,

일본폭격기들이 자주 출몰했던 쿤밍 상공일대를 감시하며 일본군을 기다립니다.

41년 12월 20일,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서 이륙한 10대의 99식 쌍발폭격기들은 여느때

처럼 전투기의 호위도 없이 쿤밍으로 날아오다 중국국기를 단 P-40전투기의 기습을 받고

6대의 폭격기가 격추됩니다. 이후 중국 하늘에서 일본 항공력의 우위는 급속히 흔들리

게 됩니다. 여태까지 전투기호위 없이도 마음껏 중국의 도시들을 공격했던 일본의 폭격기

들은 고공에서 급강하로 돌진해 사격을 퍼붓고 달아나버리는 P-40전투기의 만만한 먹잇감

이 되고 만거죠. 플라잉타이거스는 이후 중국 남부 쿤밍일대와 랭군 상공에서 일본 육군항

공대의 하야부사 전투기들과의 연이은 공중전을 벌였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플라잉타이거스 대원들은 그들의 보스인 셰놀트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숙지했던 전술

이 실전에서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후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합니다.

연일 계속된 공중전에서 급강하하여 사격하기 좋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경우에는 무모한 선회대결을 하기보다는 P-40의 우세한 급강하성능

과 하야부사보다 월등한 최고속도를 이용하여 회피해버립니다. 플라잉타이거스 전투기들

이 고속의 급강하를 시도하면 이를 추격하는 일본전투기들은 현저하게 조종성능이 떨어

져 그들이 장기로 삼는 선회전을 전혀 벌일 수 없었을 뿐더러, 약한 기체의 내구성과

엔진의 한계로 따라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일본 전투기들은 고속의 급강하 상황에서

평범한 롤(roll) 기동조차 힘겨웠고, 화력과 장갑의 열세로 헤드온(정면대결) 전투는

기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속거리와 선회력, 기동성이 뛰어나 2차대전 초부터 대륙에서 무적을 자부했던 일본

전투기들의 허점을 간파한 플라잉타이거스 전투기들은 셰놀트가 가르쳐 준대로 치고

빠지고 악착같이 살아남아 집요하게 일본 항공대를 괴롭힙니다.

약이 오른 일본군은 42년 2월 25일 150대가 넘는 전투기와 폭격기를 동원하여 버마

랭군을 공습했지만, 불과 12대의 플라잉 타이거스 P-40전투기들에 의해 24대의 항공기를

상실했고, 다음날의 공습에서도 200여대의 공격대를 동원했지만, 다시 18대가 격추되는

등 연패를 거듭합니다. 이들 전투에서도 놀랍게도 플라잉타이거스는 단 한대도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일본육군 항공대는 플라잉타이거스의 독특한 일격이탈 에너지 파이팅

전술에 번번이 항공기를 잃고 패배를 거듭합니다.

 

  평상시 거의 군기를 찾아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종종 기행과 일탈을 멈추지 않았음에

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의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고 자유분방함을 즐겼던 기이한 대원

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진주만 기습 이후 연전연승하며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유일한

아시아태평양의 연합군 부대였기 때문 일겁니다. 플라잉타이거스가 맹활약했던 시기 태

평양과 아시아의 연합군은 지리멸렬해가고 있었고, 단연 플라잉타이거스는 돋보일 수밖

에 없었지요. 그러나 42년 7월 3일 의용 항공대 플라잉타이거스는 해체됩니다.

 

   이미 미국이 본격적으로 일본과 전쟁에 돌입한 이상, 의용항공대가 아닌 정식으로

미 육군항공대에 편입되지요. AVG의 사령관인 셰놀트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

소장으로 승진, 미 육군항공대 중국 주둔 제 14공군의 사령관이 되었고, 플라잉 타이거

스는 14공군 소속의 제 23전투비행단으로 개편됩니다. 물론 이후에도 제 23전투비행단은

계속 플라잉 타이거스로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육군당국이 진급등의 호조건을 제시하며

부대에 남을 것을 권했음에도 이들 탁월했던 플라잉타이거스 대원 대부분은 제23 전투

비행단 소속이 아닌 자신들의 원 소속부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셰놀트의 전술을 몸

으로 체득했던 플라잉타이거스의 파일럿들은 이후 태평양 상공의 공중전에서 지대한 영

향을 끼칩니다. 셰놀트는 플라잉타이거스를 통해서 향후 벌어질 하늘의 싸움에서 맹활

약하게 될 인재들을 키워낸 셈이죠. 또한 전투기의 효용가치와 중요성을 꿰뚫어 본 선

각자 셰놀트에 의해서 창시된 일격이탈 에너지 파이팅 전술은 이후 태평양 상공 연합군

파일럿들의 가장 보편적인 전술이자 매우 유효한 제로전투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플라잉 타이거스 전투기들이 제로와 직접 싸운 것은 아니지만)

 

 

   불과 7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플라잉타이거스는 평균 가동 기수 30대 안팎의 적은

전투기, 그것도 무겁고 둔하다는(?) P-40 전투기를 가지고 미확인 격추 기록 150여대를

제외하고도 219대의 일본 항공기를 격추했습니다. 손실 비율로 보면 P-40 한대 당

일본기 약 50대의 비율이라는 놀라운 전과이며 당시 일본육군 항공대가 얼마나 큰

손실을 입었는지 수치로도 증명이 됩니다. 이들의 경이로운 격추성적은 우월한 기체와

경험 많은 파일럿을 가진 일본항공대를 맞아 극도의 열세를 보였던 42년 전반기 연합군

항공대의 전과 중 단연 발군입니다. 플라잉타이거스는 13개월의 활동기간 중 모두 22

명의 파일럿을 잃었는데, 훈련 중 사망이 10명이고 공중전에서 전사한 사람은 4명에 불

과할 정도로 실전에 강했습니다. 6명은 지상공격임무에서 전사했고 나머지 두 명은 일본

군의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불과 6개월 남짓의 짧은 훈련기간과 고작 7개월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플라잉타이거스는

항공사의 전설(saga)로 기억되기에 충분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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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엘님의 댓글

제이엘 작성일

플라잉타이거스가 중국 정부를 위해 싸웠던 의용군이라는 사실이 흥미롭군요.. 정말 당시의 실정으로 봐서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네요.  잼있게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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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즐겁게 봐주셨다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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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나그네님의 글이 갈수록 흥미진진하고 또한 그 주제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불리한 전세에서 플라잉 타이거스가 정말 큰일을 해냈던 것이군요.
역사는 저렇게 선견지명을 가졌고 그것을 실행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쓰여지는
것이기도 하구나 느껴집니다.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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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통찰력이 그래서 중요한 거 같습니다. 선견지명이 필요하고요. 역사를 그래서 배우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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