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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5. 대전 감옥의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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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579회 작성일 22-03-2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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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5.

대전 감옥의 실태

[민족통신 편집실]


대전감옥은 일제 때 감옥과 같다. 대전 감옥은 이중 감옥이다. 이 이중 감옥이라고 하는 것은 감옥안의 먹방을 말한다. 이 먹방은 비전향자를 수용하는 76개방의 북풍바라지 맨 끝에 있다. 이 감옥은 감옥 내규를 어긴 수용자들의 징벌방이다

대전감옥에는 비전향자들을 수용하는 특별사동이 있다. 이 사동은 4사(76개 독거 방), 5사, 6사 7사(27독거방) 8사(12개방) 그리고 전 사형장을 5개 독방으로 만들어 제 2병사로 만들어 젔으나 전향 말살 고문구타 방으로 사용되었다.

여기 독방에 이석기동지가 폭력깡패 돈웅이란 재소자에 의해서 국방색 담요를 뒤집어 씌우고 전향 않는다고 바늘로 찔러서 죽인 살인 건이 있었다(1976년). 국가인권위에 제기하여 확증 통고를 받았다.

1961년 박정희 군사 구테타 당시 8월에는 전국감옥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총 집결시킬 때 800여명을 이들 5개 사동에 수용하고 있었다.

1957년 1/27일에 안동감옥에서 나를 포함한 무기수 3명이 대전으로 이감왔다. 인동김옥은 무기수를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전감옥에서의 나의 번호는 2511번이다. 이번호는 이름대신 부르는 본인의 이름과 같다.

대전감옥은 지금에 있어서는 구감옥이다. 전국 전향 말살책은 최초로 전쟁 때 1800여명을 학살 시킨 악명높은 전주 감옥이다.

대전은 1955년 공작 조직사건을 계기로 전향 공작이 시작되었다.

대전 감옥편은 4편으로 나누어 자세하게 논하려한다.

감옥은 단순한 휴식공간이 아니라 혁명 전선에 재진출하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다.

이 준비기간을 4편으로 나누어 기술하려고 한다.

첫째 생활권 옹호를 위한투쟁, 둘째 대열보전을 위한투쟁. 셋째 사상적 단결을 위한 투쟁, 넷째. 비전향 사수를 위한 투쟁으로 나누어 기술하려고 한다.

첫째, 생활권 옹호 투쟁은 우선적으로 사느냐 죽느냐 투쟁이기 때문에 절박하고 시급한 투쟁이었다.

이는 한마디로 의,식,주 문제이다. 먹는 문제는 우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안상현 의무과장은 이 5등식을 먹고 3년 버티기 힘들것이라 공공연하게 말했다.

우리 비전향 장기수들은 5등식인데, 부정부패가 감옥만큼 만년화한 곳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비전향자에 돌아온 양은 당장 죽지 않을 만큼의 양이다 그러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전향자가 많이 발생했다.

오죽했으면 밥치기가 성했겠는가이다. 이 밥치기는 한방에 10여명이 있다면 가위 바이 보를 해서 순차를 정하고 한번에 다 먹는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열끼니를 굶고 한번에 다 먹게 되면 배창자가 터져 죽게 된다. 그래서 밥치기를 한 사람들은 산사람이 별로 없다. 항간에 배나 한번 채우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이 떠돌아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죽더라도 밥이나 받어 놓고 죽지란 말도 있다. 그것은 1950년 9.28 후퇴후 체포된 사람들은 창고에 가득넣어 두었다가 형무소로 넘어온 사람들이 많이 들어 왔었는데 못먹고 병든 사람들이 갑자기 감옥에 들어와 죽는 사람들이 많아서 중앙에 있는 간수부장이 시체 펫통하면 여기 저기서 펫통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배식 후에 죽으면 밥을 받아놓고 죽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밥을 살아 남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밥은 5등인데 중간에서 다 떼어쳐먹어 적은 양이다. 반찬은 싱대가 하품한다는 말까지 있는 생선인데 대가리는 크고 꼬리는 적은데 이를 소금에 절어 주기 때문에 그 짠 것을 배가 고파 안 먹을 수도 없이 먹고 나면 물이 키게 된다. 여기저기서 물을 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반응이 없다가 많은 감방이 소리를 지르면 그때야 물을 주되 먹을만치 주는 것도 아니다. 주고 나서 소리 지른다고 두들겨패는 것이다. 여기에 반항하면 계호과에 알려 불러나가 조사받고 먹방에 들어가 징벌을 받는다.

그리고 옷과 이불은 항상 솜을 수십탕 하기 때문에 솜뭉치가 방울처럼 무명베 두겹안에서 놀 정도다. 그러니 추운겨울을 평안히 넘길 수 없다.

이불도 독거용 이불은 내키만 하다. 키큰 사람은 이불이 들린다 그러기 때문에 칠푼 송판위에 깐 가마니와 꼬다리를 달아 맨다. 그리고 후꾸루에 들어가듯 누워서 잠들만 하면 문을 찰카닥 한다.

가위로 맨 꼬다리를 자른다. 그렇게 되면 적은 이불이 들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잠을 잘 수 없다.

이튼날에 불려나가 해준대로 덮지 않고 조작해 덮는다고 뭇놈들이 달라붙어 두들겨 팬다.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옷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으로 받는 고통은 말할 수 없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닌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놈들이 주는 부당하고 인간이하의 처우개선을 위하여 투쟁하게 된다. 우리 동지들 중에는 주는 대로 받지 않고 불평하면 고통만 뒤따라오기 때문에 그냥 참고 견디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투쟁해야한다고 투쟁하는 사람도 있다.

성질 급하고 부당한 처우에 참을 수 없어 맨날 소제나 담당 간수와 싸운다. 더 나가서는 사안에 따라 부장 당직간수장 과장 소장 법무부장관 면담까지도 부르짖고 개별단식 집단 단식도 한다.

이렇게 되면 놈들은 할 수없이 한사람을 면담시켜준다, 과장이나 소장면담을 해도 우리 주체력량에 따라 변화된 양상을 볼 수 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필자는 머리가 23세 때부터 벗겨지기 시작했다. 아직 박사될 나이는 안되는데 영양부족에서 오는 증상이라고 의사들은 말한다. 그레서 대전감옥에 살 때 별명이 벗겨지기였다. 하도 사방에서나 감방에서나 어떤 일이 발각되었을 때는 내가 책임지고 나가 해결하기 때문에 계호과에서는 나를 보고 벗겨지기 또 나왔네라고 한다.

내자랑이 아니라 놈들 면담 투쟁도 내가 제일 많이 한 것으로 생각한다. 때로는 사방에서 대표로 선택되어 나가는 경우가 있다 면담 나갈 때 모든 것을 달성해 오라고 한다.

그러나 놈들과 협상에는 주객관 역량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오늘의 국제 협상관계처럼 감옥안은 더하다.

때문에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받아드릴 수 있는 조건만을 요구하면 놈들은 할 수없이 들어준다.

선두에서 면회투쟁하다 보면 요구 안을 모두 쟁취하지 못해가지고 왔다고 비판만 하는 친구도 있다.

사실 면담투쟁에서 하나도 챙취하지 못한 때도 있다. 우리투쟁에서 성과를 거둘 때와 실패할 때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장 끝장내는 투쟁이 아니고 장기간 놈들의 사슬에서 사는 조건이기 때문에 일회 일비하지 않고 버텨야 한다. 아무리 무기징역을 받고 감옥안에서 죽어나갈지는 모르나 살아 있는 한은 우리 대열결속을 위해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투쟁으로 극복해나가는 투쟁원칙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고 생각한다.

대전감옥에서 주는 작은 양의 5등식을 먹을 때 밥에 돌이 많아 씹을 수 없다. 돌맹이 밥을 먹다보니 이가 성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여름 잠자리에서는 빈대 때문에 잠을 설치게 된다. 방벽에 빈대 죽인 피가 빨갛다. 그래서 사방간수는 피를 닦는 뻬빠를 준다. 그것으로 벽에 묻은 피를 닦아낼 정도로 고생을 한다.

각방은 뺑기통을 감방구석에 놔두고 대소변을 눈다. 밤에 번호순서대로 자기 때문에 나는 항상 변기통에 머리를 두고 잔다. 밤에 동지들이 소변을 눌 때 조심한다고 하지만 오줌이 통 모서리에 떨어지면 내 얼굴에 뛰어배겨 잠을 깬다.

뒷참문이 높아 여름에는 용광로 겨울에는 냉장고라 한다 가장 추울 때 독방은 온도가 영하 7.5도다. 뺑기통이 얼고 방벽이 얼어 성애가 하얗게 낀다.

1960년대 까지 옷에 이 벼룩이 있어 썩가래가 낀다. 밤낮 가려워 곤란을 느낀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무기형을 받고 사는 수많은 비전향자들은 오직 미제의 점령국인 한국 감옥 밖에 없다.

그런 처우를 받고 무기수로 사는 동지들이 제대로 된 밥을 지어 달라고 맨날 투쟁하지만 고쳐지지 않아 목숨건 단식투쟁을 하다 자결로서 철창에 목달아 죽음으로서 뒷동지의 처우개선을 요구한 이영원동지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는 전향공작의 두드러진 대전감옥의 실태인 것이다.(1985년)

따라서 15척 높은 담안에서 놈들에게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 죽고 굶어죽고 하는 우리 동지들이 그얼마나 많으랴! 이렇게 처절하게 죽어가도 서면보고 한 장으로 모든 것이 완결되는 그 속에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 났기에 그 시대의 암울한 상황을 회고하며 알리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다. 이런 참혹한 일들은 이미 지난 일이지만 이땅에서 미제 점령군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또 다시 되풀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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