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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박용만과 그의 시대 (도르테아님이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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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2건 조회 5,560회 작성일 10-09-06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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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박용만과 그의 시대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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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낙원에 도착한 사람들

 

지상의 낙원 하와이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인들이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20세기 초장부터였다. 우선 겨누어야 할 총의 가늠자는 나라를 강탈한 왜적 대신 때로 같은 동족의 가슴을 과녁으로 삼는 수가 있었다.

 

이 얘기의 주인공 박용만 역시 끝내 동족의 눈먼 총알에 쓰러졌다. 김구 역시 눈먼 총탄에 쓰러졌지만 그렇다고 그의 투쟁과 삶이 헛된 건 아니었다.

 

네브래스카 주의 대평원에서,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와 북경을 오가며 30여 년 동안 벌였던 박용만의 독립운동 역시 동족끼리의 투쟁을 비켜갈 수 없었다.

 

그의 반대편 선상에 이승만이 있었다. 옥중에서 결의형제까지 한 두 사람이었다.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들어온 이승만은 외려 박용만과 대적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1910년 8월 29일.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넘겨준다."는 경술국치(庚戌國恥),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이에 대해 "이의 있소! " 팔을 치켜들고 나선 사람이 박용만이었다.

 

"이제 형질상의 '구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의 '신한국'은 바야흐로 울흉하기를 시작하니 어찌 희망이 깊지 아니함이요?"라면서 "그것은 단지 이씨조선의 통치권이 끝난 것 뿐이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3.1 독립선언보다 8년 5개월 앞선 그의 다부진 선언이었다.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간 박용만은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고 1912년 졸업했다.

 

"이제 우리 조선민족으로 말하면 이미 국가를 성립하여 4천여 년을 지켜왔거니와 4천 년 후에 나라가 한 번 망하고 4천 년 후에 우리 백성이 비로소 바다 밖에 나온 것은 이는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한 새 나라를 만들게 함이라."

 

이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 주필도 했던 박용만의 논설이다. '영토'와 '주권'을 잃었으므로 '유형국가'는 소멸됐으나 '국민'이 단결하여 '무형국가' 곧 '망명정부'를 세우자는 게 그의 유명한 '무형국가론'이었다. 또 그의 전 생애를 통한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다.

 

그렇다고 오직 칼에만 의지하는 '무력투쟁론'이 아니었다. 이성의 눈으로 시대를 꿰뚫고 암담한 독립운동의 지평에 정치적 이정표를 세웠던 그는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생애 내내 광복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만의 '외교에 의한 독립론'과 평행선을 달려 두 사람의 대결은 하와이 동포들을 테러의 공포 속으로 밀어넣었다.

 

한 달에 16달러를 준다는 모집 광고는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을 황금빛 환상으로 눈멀게 했다. 하와이에는 나무에 돈이 열린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빗자루로 땅을 쓸기만 하면 돈이 생긴다는 소문도 있었다.

 

1903년 1월 13일 갤릭호를 타고 태평양을 넘은 8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처음 상륙했다. 연이어 약 2년 반 동안 65차에 걸쳐 태평양을 넘은 배들은 7천여 명의 한인들을 실어 날랐다.

 

한인들의 동정이 이따금 현지 영자신문에 비치기 시작했다. 미담기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16년까지 한인사회에 대한 기사가 435꼭지 실렸는데 그중 231꼭지가 범죄와 불법행위에 관한 것들이었다.

 

현지 신문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Pacific Commercial Advertiser)>의 1907년 9월 28일자 판에는 다음의 기사가 실린다.

 

"현재 푸에트리코 시민들이 자신들의 큰 특징을 잃고 있다. 그들의 특징은 도시 범죄자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던 인종이라는 특징이다. 이제는 한인들이 그 특징을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1905년 7명의 한인들이 여권과 돈을 훔친 동료 한인을 이틀 동안 '가혹한 고문'을 해서 죽게 했다는 기사가 영자신문에 등장한다. 그때 하와이에는 부랑자법이라는 게 있어 수상쩍은 거동을 한 한인을 경찰이 영장 없이 대낮에 체포하기도 했다. 당시 하와이 군도의 인구는 19만도 되지 않았다. 그 절반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왔다. 이들 동양인들과 백인의 결혼은 금지돼 있었다.

 

어찌된 셈인지 이민 초기의 한인들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순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밤중에 남의 목장에 잠입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다가 포식한 사건을 일으켜 무더기로 포박돼 가야 했다. 고향에서 익힌 닭서리쯤으로 만용을 부려본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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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토론토에 사시는 이상묵선생이 박용만 평전을 준비하셨습니다.

저는 초고원고의 오류 수정, 내용 보완하는 작업에 도움을 드렸습니다.

 

책으로 낼까.. 하시다가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오마이뉴스에 글을 실기로 하여

10회분의 원고를 보내셨는데,

채택이 되어 오늘부터 글이 올랐습니다.

 

그러나, 고정컬럼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초반에 조회수와 기사점수, 반응 등이 결정의 요건이 된 답니다. 

직접 가셔서 조회수 좀 올려주시면 정말 감솨~감솨~ ^^

 

이승만은 우성 박용만선생을 최고의 정적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 버린 후에야 진심을 밝힌 것입니다.

 

최고의 정적, 박용만에 대해 이승만은 그의 모든 흔적을 역사에서 지워 버렸습니다.

박용만을 들추면 이승만의 추악한 만행이 모두 드러나니까요.

 

김구선생이나 여운형 선생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만행을 박용만선생에게 저질렀으니...

그렇게 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1910년대, 하와이섬에서 벌어진 이승만과 박용만의 치열한 대립은 그 후에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집권 당시엔 박용만파 사람들은 귀국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박용만선생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부터 몇몇 미국으로 유학을 간 사학자들로 인해 우성선생은 연구가 되기 시작하였고,

1928년에 암살 당하신 우성선생은 드디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서훈받으셨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의 비서였던 임병직도 1급인 대한민국장을 주었는데,

당연히 1급 대한민국장을 받으셨어야 할 우성 선생은 2급인 대통령장을 받으셨습니다.

아직도 건재한 이승만의 추종자들의 파워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우성 선생이 드디어 일반 대중 앞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고, 또한 조회수도 팍팍! 기사 점수도 팍팍!! 올려 주세요..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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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복복님의 댓글

복복복 작성일

잘 읽고 갑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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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님의 댓글

점수 작성일

기사 내용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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