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싸움의 역사 (7)//전투기 호위 없는 폭격기의 길었던 수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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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호위 없는 폭격기의 길었던 수난시대-
전간기 열강의 공군전문가들을 매혹시켰던 기종은 폭격기였습니다. 무엇보다 공간의 제
약을 거의 받지 않으면서 강력한 펀치력을 적국의 주요시설과 민간인들에게 투사할 수 있
다는 것이 큰 매력이었죠. 그러나 실제의 2차대전에서 폭격기는 무력하기 그지없었고 전
투기야말로 하늘의 주인공임을 재확인합니다. 본격적인 영국상공에서의 공중전에서 루프
트바페는 적절한 전투기의 호위가 부족해 사실상 큰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쌍발
의 중거리 폭격기로는 항속거리와 폭탄적재량의 부족으로 애초 목표했던 전략폭격은 정
확성과 효율성에서 크게 떨어졌습니다. 이는 RAF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상 전서유럽을
넘겨준 상황에서 영국이 전쟁에 개입할 방법은 공군력밖에 없었고 그 역할을 폭격기가
해야 했지만 영국의 대독일폭격 역시 큰 희생을 거듭했을 뿐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40년부터 42년중반까지 RAF 폭격대원의 사상율은 50%를 넘었고 희생이 너무 큰 주간폭격
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야간폭격으로 전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야간폭격은 정확성이 너
무 떨어져 사실상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영국의 폭격은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상징적 차
원에 그칩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악전고투하던 RAF 역시 힘을 얻고
새로운 전술을 채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융단폭격 혹은 무차별폭
격 전술입니다. 당시 영국 폭격기들은 정밀한 조준장치가 없어 명중률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목표물에 100발의 폭탄을 투하하면 명중은 고사하고 반경 500미터 안에 떨어지는 폭탄이
5발도 채 안되는 현실에서 폭격무용론이 나올 정도로 전과가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폭격기의 특성상 기체가 크고 속도가 느려 빠르고 날쌘 전투기들과 화망을 구성하고 발사
하는 대공포에 취약해 성과는 없고 희생만 늘어가자, 폭격기대 사령관 해리스 장군은 아
예 다수의 폭격기를 총동원해 특정 지역을 싹 쓸어버리는 전술을 사용키로 하고 42년 5월
무려 천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독일 쾰른 지역을 공습합니다. 당시 RAF가 동원할 수 있는
폭격기는 신형 구형을 막론하고 다 긁어모았고, 심지어 예비기체와 아직 항공학교를 졸
업하지도 않은 교육생들까지도 전부 탑승시켜 참가했던 이 초유의 대규모 야간공습으로
이들을 요격하던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조차 너무도 많은 RAF폭격기들의 인해전술(?)에
말려 어찌할 바를 몰랐고 해당 지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부터
최대 10톤의 폭탄을 싣고 수천킬로를 왕복할 수 있는 랭커스터 4발 중폭격기가 RAF의
주력기종이 되면서 야간 무차별폭격은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이들의 주 전술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말기 루프트바페가 완전히 몰락하여 저항이 전무한 상황에서도 계속
무차별 폭격을 강행해 드레스덴 폭격의 경우 히로시마 원폭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민
간인 희생자를 냈습니다. 참으로 어두운 전쟁의 뒷면이자 승자의 너무 심한 보복이었
다는 지적을 낳게 되지요)
42년 8월 드디어 고대하던 미 육군항공대가 영국에 속속 도착해 실전에 참여합니다.
RAF는 유럽주둔 미 제8공군이 자신들과 힘을 합쳐 야간 무차별 폭격에 나서주길 기대
했지만 미 육군항공대의 생각은 이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미 항공대는 정밀주간폭격
전술을 내세웠는데, 이들의 주력인 B-17 폭격기는 바로 이런 임무에 최적이라고 자부
하고 있었지요. 영국의 랭커스터에 비해 폭탄적재량은 절반수준도 안되었지만, 최신형
노든 조준장치에 힘입어 이른바 서지컬 스트라이크라는 정밀폭격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또한 사각이 없이 사방에 설치된 13정의 12.7밀리 중기관총과 미국 항공기 특유의 튼튼
한 내구성을 바탕으로 전술대형을 짠다면 제 아무리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이 공격해온
다 해도 격퇴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다분히 미국적 쇼맨십과 카우보이식 발상이 엿보
입니다요)했습니다. 그리고 초기 미 제8공군은 프랑스의 몇몇 표적에 대해서 성공적인
정밀 폭격을 성공하면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입증했고 결국 RAF도 더 이상 야간폭격을
고집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42년 후반부터 독일은 낮에는 양키들의 B-17,B-24의
폭격을 받았고 밤에는 토미들의 랭커스터 융단폭격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하지만 미 육
군항공대의 당초 생각은 곧 루프트바페의 매서운 역습을 받으면서 빠르게 바뀝니다.
양키와 토미가 낮밤을 가리지 않고 독일의 본토를 두들기기 시작하자, 루프트바페 역시
기민하게 대응합니다. 이렇게 해서 설치된 것이 캄후버 라인과 빌데자우(멧돼지) 자메
자우(집돼지)항공대였습니다. 이미 40년부터 야간요격전투기부대를 창설하고 적지않은
성과를 내고 있었던 루프트바페는 레이더의 설치에 힘입어 캄후버 라인에서 미,영 폭
격대의 내습을 조기경보했고 전담지역 요격을 담당하는 집돼지 항공대와 지역을 구분하
지 않고 기동성 있게 적폭격대의 요격에 나서는 멧돼지 항공대로 임무를 전담해 조직적
으로 미국과 영국의 폭격기들을 사냥합니다. 일단 연합군 폭격기들이 캄후버라인을 넘어
서면 멧돼지 항공대가 사방에서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폭격기들을 격추하고 달아납니다.
이런 기습적인 습격을 수차례 감수하고 간신히 목표지점에 도착하면 사방에서 대공포화와
지역전담 집돼지 항공대 소속 전투기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간신히 폭탄을 투하
하고 어느 코스를 선택해 돌아가더라도 이미 이들의 귀환 행로를 감지한 멧돼지 항공대
에게 캄후버라인을 넘어서는 순간까지 괴롭힘을 당했던 거지요. 특히나 야간 공습으로
전환했던 영국폭격대에 비해 주간정밀폭격을 선택한 미육군 항공대는 호위전투기가 전무
한 상태에서 독일본토를 공습하면서 엄청난 희생을 치릅니다. 당시 미 육군 항공대는
P-38과 P-47이라는 괜찮은 성능의 전투기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당시 연합군이 보유한
그 어떤 기종보다 멀리 날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독일본토에 폭격기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깊숙한 공업지역과 군사시설물까지 함께 날아가기엔 항속거리가 부족했습니다.
결국 캄후버라인까지만 폭격대를 호위하고 돌아갔다가 나중에 폭격대가 돌아오는 시간
에 맞춰 마중을 나가 만신창이가 된 폭격대를 악착같이 추격하는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
을 쫓아내는게 고작이었습니다. 43년 내내 지속된 주간폭격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매일
평균 240여대의 B-17 혹은 B-24폭격기를 동원해 주간폭격에 나섰지만, 미 제8공군은 한번
출격에서 평균 30-40대의 폭격기를 잃었고 43년 8월 17일 검은 목요일로 기억되는 레겐스
부르크 폭격에서는 340대의 폭격기중 무려 64대가 격추되고 147대가 크게 부서졌을 정도로
루프트바페의 요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날 미 폭격기들이 원래 출격했던 영국으로 가
지 않고 아프리카 알제리로 방향을 틀지 않았더라면 거의 전멸했을 것이라는 후문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호위전투기 없는 주간폭격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그대로 보여줬죠.
당시 미8공군의 출혈은 제 아무리 미국의 공업생산력이 탁월하더라도 점점 부담이 되는
숫자였고 B-17과 B-24 모두 2차대전시 그 어떤 폭격기들보다 내구성이 좋고 강력한 방
어용 중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1차대전시보다 거의 3배이상 빨라진 전투기들의 빠르
고 조직적인 공격을 버텨내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입증할 뿐이었습니다.
43년 후반에 이르면, 너무도 큰 출혈로 인해 승무원들 일부에선 탑승을 거부하는 상황
까지 발생했고 이 무렵 미 8공군은 고집했던 주간폭격의 포기를 고려할 정도였습니다.
원래 미폭격대원들은 25회의 출격을 마치면 제대하여 귀국할 수 있었지만, 당시 미폭
격대원들의 평균 생존출격수는 고작 8회에 불과했습니다. 43년 8월 최초로 이 꿈의 목표
를 달성했던 B-17 멤피스벨이 그토록 화제가 되고 유명해져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이유도
그만큼 폭격기들의 당시 생존율이 매우 낮았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미 항공대의 폭격기 옹호론자들은 자신들이 무시했던 셰놀트의 이론이 더 현실에
맞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이후 미 항공대는 전략폭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폭격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줄 장거리 호위전투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발을 서두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전투기가 바로 항공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로펠러 전투기이자 하늘의
캐딜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는 P-51 "머스탱(야생마)"입니다. 당초 여태까지 미국이
생산했던 투박스런 스타일과는 판이하게 날렵하고 잘 빠진 디자인의 P-51은 처음엔 엔진
의 성능이 떨어져 지상 근접지원용으로 쓸 작정이었지만 영국에서 실험도중 우연히
롤스로이스사의 멀린 엔진(영국의 자랑 스핏파이어의 엔진이기도 하죠)으로 교체한 후
스핏파이어를 능가하는 선회와 상승력과 더불어 그 어떤 전투기도 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신데렐라로 변신합니다. 최고 속도 704킬로에 상승고도 1만 2천
미터 그리고 최대 항속거리 2600킬로를 넘어서는 꿈의 전투기가 탄생한거죠. 이러면서
도 여전히 미제답게 6문의 중기관총을 탑재한 강력한 화력까지 겸비한. 당시 머스탱은
무겁고 둔해보이는 평균적인 미제전투기와는 달리 더 공기역학에 적합한 날개 설계를
택해 연료의 낭비를 최소화해 그 어떤 전투기보다 더 멀리 오래 날 수 있게 됩니다.
당시 머스탱은 폴란드 동부 영공까지 왕복할 수 있었고 이는 전독일 영토가 연합군 폭
격기의 사정권에 들어갔음을 그리고 이 폭격기들은 이전과는 달리 호위전투기가 딸려 있
음을 의미했습니다.
44년 5월 처음 장거리 호위임무에 투입된 P-51 머스탱 전투기는 루프트바페 파일럿들
을 경악시킵니다. 미군 전투기가 어떻게 독일내륙 본토까지 날아올 수 있었는지를 이해
하지 못했던 것은 물론, 여태 독일이 자랑하던 Me 109와 FW 190 포케볼프를 능가하는
선회력과 기동성을 선보이며 차례로 독일의 전투기들을 격추시키자 미 8공군의 폭격기
들 역시 숨통을 트이게 됩니다. 당시 폭격기 승무원들은 이들 호위 전투기들을 '작은
친구들'이라고 부르면서 좋아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들 호위전투기가 따라붙게 되면
서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은 무서운 사냥꾼에서 사냥대상으로 전락해버렸고 이미 수년
째 계속되어온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된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점점 파일럿의 부족
을 느껴오던 루프트바페는 급격한 인력부족으로 44년 후반부터는 완전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서부전선에서는 미영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동부에서는 극심한 혈
투 끝에 소련의 붉은 군대가 우위를 점하게 되는 44년 중후반부터는 P-47 썬더볼트전투
기에도 보조연료탱크를 부착하고 폭격기들을 호위할 수 있게 되었고 이토록 연합군의 전
투기 호위가 강화되자 루프트바페는 연이어 베테랑파일럿을 상실했고 대체된 신참들은
경험부족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연합군 전투기 파일럿들의 만만한 먹잇감이 됩니다.
독일의 전투기들은 44년 중후반을 전후해 사실상 씨가 말라버렸고 이후 연합군 전투기
파일럿들은 공중전 상대를 고르지 못해 지상 근접지원에 더 주력했을만큼 루프트바페는
과거의 위용을 상실해버립니다. 이 시기 미국의 P-38과 P-47 전투기들과 영국의 템페스
트 공격기들은 강력한 화력을 베어마흐트(독일육군)에게 퍼부었고 판쩌와 티거등 2차대
전 최고의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육군은 이들 야보(연합군 전투기의 독일
명칭)의 기세에 눌려 번번히 힘을 써보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합니다. 44년부터 불과 1
년사이에 야보가 파괴한 독일의 전차 및 기갑차량과 열차의 수는 총 15만대를 상회했을
만큼 위력적이었습니다.
이렇듯 유럽의 하늘을 제패한 P-51 머스탱과 P-47썬더볼트는 태평양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는데, 이미 기존의 헬캣과 코르세어, P-38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일본항공력은
이들 신형전투기들에 대해서도 거의 대항다운 대항을 하지 못합니다. 특히나 이오지
마에서 출격했던 머스탱 전투기들은 일본 본토의 주요 시설기반들을 불과 10개월만에
90%이상 초토화한 B-29 폭격기의 든든한 호위자 노릇을 했고 주요항구와 기반시설에
대한 근접공격에서도 탁월한 성능을 발휘했습니다. 머스탱은 한 번의 기총사격으로
일본의 구축함을 두 쪽 낼 정도로 강력한 위력(참고로 왜 항공기의 공격에 지상이나 해
상의 목표물들이 취약한지 간단히 설명하면 같은 구경의 기관총이라도 공중에서 빠른
속도로 날아와 기총을 발사하면 가속도가 더해져 위력은 지상보다 몇 배 이상 커집니다.
바로 이런 가속도의 원리가 항공기를 최강의 병기로 만듭니다. 물풍선이라도 높은 고층
에서 투하하면 지상에서 이를 맞는 사람의 쇄골을 부러트릴 수도 있는 것처럼)을 과시했
고 2차 대전 최고의 전투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머스탱은 프로펠러 전투기가 보여줄 수 있는 궁극의 성능을 전부 보여준 '하늘의 캐딜
락'이었습니다. 2차대전 후반기에 등장해 기존의 전투기들에서 발견된 이러저러한 약점
과 개선점들을 모두 보완해가면서 설계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머스탱의 등장은
제트엔진시대를 예고했다고도 볼 수 있지요. 더 이상 프로펠러식 피스톤 엔진으로는
그 이상의 성능을 낼 수 없는 한계가 바로 머스탱이었으니까요.
물론 폭격기가 공업시설과 군수생산시설등의 중요 전략목표를 공격하면서 독일과 일본
의 주요산업시설기반을 마비시키고 추축국의 전쟁 수행의지를 꺾는데 크게 기여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제공권을 좌우하는 전투기의 호위 없이는 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폭격기만으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전후
전투기의 성능이 다용도 임무가 가능해질 정도로 개선되면서 결국 폭격기는 극소수의
특수임무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투기로 단일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만큼 2차
대전에서 공중전 특히 전투기의 비중은 그 어느 전선을 막론하고 절대적이었고 이후 전
투기는 2차 대전 말 제트엔진을 장착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엽니다.
30년대 후반 2차대전이 시작될 무렵 대다수 공군들은 복엽기와 나무로 제작된 항공기
를 쓰고 있었지만 불과 5,6년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전투기는 금속제 단엽기로 대부분
바뀌었고 속도는 거의 1차 대전의 3배를 넘겨 피스톤 엔진의 극한까지 성능을 향상시켰
으며, 그 한계를 넘는 제트엔진기까지 선보이는 등 그야말로 획기적인 진전(아! 왜 인류
는 전쟁기간 중에 이토록 미친 듯이 발전을 거듭하는 것일까요? 때때로 전쟁은 문명을
촉진하지만 급속도로 세포분열을 가속화하여 숙주자체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성종양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여 내심 불안합니다)을 이룹니다.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항공의 시대를 연 인류사 최대의 전쟁,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전투기의 시대는 이후로도 계속 됩니다.
다음엔 최초의 제트기 간 공중전 시대를 연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개싸움의 역사를 살펴보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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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제이엘님의 댓글
제이엘 작성일연재하시는 귀한글 항상 흥미있게 읽고 있으며 많이 배우고 갑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다음 글도 기대가 되는군요.
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늘 덧글 달아주시고 관심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한국전쟁은 그닥 재미는 없습니다. 너무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게...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머스탱, 썬드볼트, 이름을 많이 들었는데 그렇게 전쟁통에 진화된 전투기들이었군요.
이미 2차 대전시에 그렇게 방공망이 철저했다고 하니 참으로 전쟁이란 무서운 것이군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폭격기들이 꼼짝을 못하고 당할 만큼 인간의 이기고 지느냐의 싸움은 대단합니다.
계속되는 나그네님의 글...감사드리며, 잘 읽었습니다.
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방공망이 철저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폭격기들 역시 조준장치나 야간 항법장치가 부실했고 기타 목표물을 탐지하는데 실수가 잦았고 오조준도 많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