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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싸움의 역사(9)//초강력 에어파워도 굴복시키지 못한 베트남 민중의 저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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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4건 조회 32,125회 작성일 10-09-10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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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싸움의 역사(10)

          -초강력 에어파워도 굴복시키지 못한 베트남 민중의 저항(하)-

 

  베트남은 기후가 건기와 우기로 나뉘는 전형적인 열대우림지대였기에 미 항공력이 건기

에 아무리 맹폭을 퍼부어 레이다기지와 SAM기지 등의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더라도 구름

이 낮게 깔리고 엄청난 비가 퍼붓는 우기에는 항공기들의 활동이 제한 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북베트남측은 우기를 이용해 신속하게 시설을 복구해 미군의 폭격은 사실 큰

효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베트남의 지형은 무르고 습한 곳이 많아 폭탄이나 미사

일등이 불발탄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고 이 때문에 미군의 공습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막대한 물력과 인력을 소모해댔습니다. 또한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면전에 돌입

한 상태가 아니어서 공격목표 선정과 교전규칙에도 여러 가지 규제가 많았고 정치적인

고려도 해야 했기에 미 공군은 제한적인 공격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약점을 잘

간파하고 있던 북베트남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평화회담에 응하는 식의 영악한 외교전술

을 구사해 미 공군을 더 힘들게 했습니다. 지상 탐지능력을 강화한 전천후 공격기인 A-6

와 기존의 F-105전폭기에도 전천후 탐지 능력을 부착해 우기와 건기를 가리지 않는 전천

후 공격이 가능해진 이후에도 미그 요격기들의 집요한 방해로 고심합니다. 기본적으로

북베트남의 미그전투기들은 미전투기들과 정면대결을 하기보다는 폭탄을 적재한 전폭기나

공격기들을 위협해 폭탄을 버리게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되도록 오래 오래 전력을

유지해 미군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려고 했기에 미군의 북폭은 생각만큼 전과를 내지 못하

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 눈엣가시인 미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한 미군은 경험 많은 에

이스 로빈올즈 대령의 지휘하에 미그유인 작전 '볼로'를 개시합니다. 미그기들의 주 타겟

이 폭탄을 실은 전폭기라는 점과 연일 계속되는 폭격으로 그들이 미군의 일상적인 공격패

턴을 거의 숙지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지상기지에서 미 공군의 통신을 감청하여 요격

에 나선다는 점을 착안해 F-4 팬텀 전투기들로 하여금 F-105전폭기인 것처럼 행동하면,

전폭기를 견제하려는 미그기들이 가짜 미끼를 물려고 달려들 때 이를 잡겠다는 심산

이었지요. 볼로 작전은 무려 50여대의 독일 전투기에게 단신으로 달려들어 3대를 격추했

던 공중전술의 달인이었던 올즈대령 다운 대담한 유인책이었고 대령의 계산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67년 1월 2일 대규모 F-105전폭기의 내습을 예상한 북베트남의 최신

예 미그 21전투기들은 일제히 구름 속을 뚫고 빠르게 상승해 특유의 일격이탈전법으로

폭격을 방해하려 했으나, 구름위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올즈 대령의 F-4 전

투기 편대들이었고 이 날 북베트남 공군은 15대의 미그 21중 7대를 상실하며 참패합니다.

대규모 F-105전폭기들이 호위도 없이 날아오니,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달려들었다가 그것

이 모두 미그 21을 잡기위한 함정이었음을 눈치 챘을 땐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습니다.

최신 기종의 거의 절반을 단 하루 만에 말아먹은 북베트남 공군은 큰 타격을 입고 67년

중반까지 활동을 자제하게 됩니다. 한편 공중전이 격화되면서 근접 조우 상황이 너무도

많아지자, 미 공군은 해군의 구식 F-8전투기가 강력한 20밀리 기관포 4문으로 더 용이하

게 미그를 잡아내는 걸 보고 결국 자신들이 쓰던 팬텀에 외장형 기관포 포드를 장착(결

국 팬텀의 마지막 개량형인 F-4E는 팬텀 모델 중 유일하게 기수에 20밀리 벌컨포를 고

정무장으로 탑재했고 이들의 마지막 79년 생산분량 40대는 한국공군에게 판매되어 아직

도 사용 중입니다)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월남전 내내 해군의 F-8전투기는 18대의 미

그를 격추하면서 자신의 피해는 고작 3대에 불과할 정도로 근접공중전에서 우위를 보였

고 아무리 미사일의 시대가 되었다지만 근접전상황은 의외로 빈발했고 이를 위해 고정

무장은 여전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개싸움, 도그파이팅은 한 물간 옛날이 아니라 오늘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던 셈이지요. 실제로 이후 미군의 팬텀은 외장형 기관포

를 사용해 근접전상황에서도 미그를 격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볼로 작전의 성공으로 이후 북폭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67년 하반기에 이르자

다시 미그의 요격활동이 재개되었고 전술을 바꿔 미 전폭기의 꼬리를 잡고 공대공 미사일

을 발사하는 미그 21의 신전법으로 미공군은 또 고전합니다. 북베트남의 미그 전투기들

은 영악하다 싶을 정도로 미 전폭기들의 후미에서 집요하게 이들을 괴롭혔고 상황이 조

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정면승부를 포기하고 언제나 이탈해 다음 기회를 노렸습니다.

비록 수적에서 열세에 있었고 전투기의 성능 자체도 종합적으로 봤을때 미군의 전투기들

에는 많이 뒤떨어졌지만 특유의 장점과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한 북베트남 공군의 저항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베트남 전쟁기간 중 무려 16명의 에이스가 나왔을 만큼 크게 성장합

니다. 67년을 넘기면서 북베트남 파일럿들의 숫자는 당초 미군의 예상과는 달리 점점 증

가했고 이들 역시도 세계 최강의 실력을 가졌다는 무서운 미군 파일럿들과 겨루면서 나

날이 발전했습니다. 미 공군의 초점이 점차 미그전투기에 맞춰지자, 북베트남 공군은

현명하게도 최정예의 소수 파일럿과 전투기만을 남기고 대부분의 전력을 중국 남부로 보

내 그곳에서 훈련을 계속케 하는 등 최소의 전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면서 버티기를 계

속했고 이러다 보니, 미공군은 엄청나게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제공권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렇지를 못했고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북베트남의 전쟁수행의지를

꺾지도 못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음에도 끝내 베트콩의 보급을 차단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베트콩은 상상을 초월하는 깊이와 길이의 구치터널을 파 미 공군의

눈을 피해 안전하게 호치민 트래일을 통한 보급을 받아가면서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현 호치민시)까지도 자유롭게 교란해댔고 베트남 사람들은 길고 험난한 호치민 트래일

을 자전거와 도보로 심지어 노인과 어린아이들까지 나서서 탄약과 식량을 실어 날라가며

베트콩의 항전을 지원했습니다. 67년부터 68년 중반까지 양측은 치열하게 공중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놀랍게도 북베트남의 피해는 22대, 미군의 피해는 18대였습니다.

북베트남이 더 많은 수의 전투기를 잃었지만, 미군의 입장에서, 여태까지 해왔던 공중전

에서 대부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왔던 미국의 체면은 심하게 구겨진 셈이었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3류 공군으로 치부되던 북베트남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입증합니다.

여기에 더해 한동안 와일드 위즐 작전의 효과로 활동이 잠잠했던 북베트남 군의 대공포

부대와 SAM미사일들도 개량된 신형장비들이 배치되고 레이다 관제술이 개선되면서 다시

한번 만만치 않은 위협대상으로 떠오르자 실로 미군의 전투는 이미 고전에 고전을 거듭

하던 지상은 물론 하늘에서도 적지 않은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북폭 초기와 달리 북

베트남 공군은 연이은 대공포화와 대공미사일 공격으로 미군기들을 몰아냄과 동시에 다

수의 요격기들을 투입하여 사방에서 미공군과 해군의 전투기들을 조직적으로 공격합니다.

이 무렵 북베트남 공군에도 5대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은 성장한

그들의 모습을 말해줍니다. 세계 최강의 상대와 겨루면서 그들 스스로가 강해진 셈.

 

  미항공력이 처음 예상과는 달리 고전을 거듭하는 동안 지상의 전투는 더욱 지리멸렬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68년 구정에 벌어진, 이른바 테트 공세로 알려질 베트콩의

남베트남 주요 거점과 도시에 대한 일제기습 공격은 수도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내에서

까지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을 정도로 남베트남 전체를 뒤흔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지

리멸렬한 상황은 언론의 티비 생중계로 전세계에 알려졌고 이때까지 공산세력에 대해서

최후의 승리를 장담하던 웨스트모얼랜드 베트남 주둔 미군사령관 이하 주요수뇌부는 고개

를 들지 못하게 됩니다. 존슨 행정부 역시 극렬한 국내외의 반전시위에 직면했고 사실상

재선을 포기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됩니다. 비록 화력의 열세로 베트콩의 테트 공세는 실패

로 끝났지만 내전 수십년 간 휴전의 묵계가 지켜져 왔던 설명절 기간에 남베트남과 미국

의 뒤통수를 강타한 베트콩의 기습은 많은 전략적인 이익과 함께 커다란 충격파를 미국

여론에 던집니다. 그 엄청난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베트콩과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여

전히 건재하며, 남베트남의 티우 정권이 얼마나 자생력이 없는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인

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라는 거창한 참전명분과는 달리 미국이야말로 베트남에 개입해

베트남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분단과 침략전쟁을 일삼고 있으며, 이 부당한 전쟁에 개입

한 것은 분명한 실수이자 오판이라는 것을 전 세계 여론에 각인시켰다는 것으로도 이미

전쟁의 승부는 기울고 있었습니다. 월남전의 참상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여태까지 애국심

과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명분으로 미국의 해외 개입을 지지해왔던 미국의 여

론은 급속히 반대로 돌아섰고, 대규모 징집 거부와 귀향군인들의 연이은 폭로와 반전 시

위는 가히 폭발적 수준으로 미국을 사분오열시켜버렸습니다. 특히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병사들은 싸워야 하는 이유가 불분명하고, 전선이 어딘지도 분명치 않으며,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도 모호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쉽게 전의를 잃고 기강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베트남전이 지속될수록 미군 병사들은 전의를 잃고 말초적 향락과

도피와 일탈에 몰두했고 이미 한국전쟁에서 기록적인 탈영과 항명과 대민사고를 기록

했던 미 육군은 세계최강이라 믿었던 병사들이 베트남에서 한국전의 몇 배를 능가하는,

수치스런 신기록(공공연한 약물중독이 포함된)을 작성하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상당수 베트남 미군은 전장에서 싸우는 군인이 아닌 군복을 입은 건달에 가까웠습니다.

비록 전술적으로는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매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전쟁의 대의명분이 궁색했던 미국은 전쟁의 정치적 차원에서 점점 열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베트남 종전을 공약해 집권한 공화당 닉슨 행정부는 반전여론을 의식해

점차 베트남에서 손을 떼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했고 한때 최고 67만명에 달하던 주월

미군의 병력은 69년을 기점으로 신속히 줄여나갑니다. 동시에 이른바 "베트남화 정책"을

추진, 남베트남군에게 기존 미군의 작전지역을 인계하면서 단계적으로 지상군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베트남 민주공화국 측과 명예로운 강화협상을 위해 연일 프

랑스에서 지리한 회담을 지속합니다.

 

 

  69년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24번째 생일날, 자신의 이름을 아이꾸옥(愛國)으로

바꿀 정도로 베트남을 사랑해 79년의 평생을 외세의 침략에 억눌린 민족의 독립과 자주

를 위해 투쟁해온 대통령 호치민이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뜹니다. 이미 60년대

중반 무렵에 사실상의 모든 권한을 후계체제에 물려주고, 자신은 인자하고 자애로운 베

트남 인민의 친근한 벗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전 베트남 민족의 구심점 역

할을 하는 상징적인 존재였지만 그의 죽음은 베트남인들에게 커다란 슬픔이자 회복되기

어려운 상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민주공화국, 즉 북베트남의 항미자주 독립의 의지

는 그의 사후에도 더욱 크게 불타올랐습니다. 국부 호치민의 평생 꿈이자 유업인 자주독

립과 민족통일을 달생해야 한다는 지상명제가 더욱 이들을 채근합니다. 호치민 사후 미

국의 뉴욕 타임스는 1면에 그의 사망을 애도하는 기사를 대서특필했을 정도로 전쟁 상대

국의 언론에서조차 존경과 흠모를 받고 있는 묘한 상황에서 미국은 더 이상 승산 없는 전

쟁을 계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모양새 좋게 빠져나오기에는 너무도 단추가 엇갈

려 있는 상황. 이미 62년부터 71년까지 밀림으로 침투하는 베트콩을 차단하고자 엄청난

양의 고엽제를 살포했지만 효과는 전무하다시피 했고 십 수년에 걸쳐서 천문학적인 액수

의 전쟁비용과 각종원조를 제공하며 남베트남의 이른바 반공정권을 지원했으나 미군에 철

저하게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던 남베트남군과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이 떠난다면 독자생

존이 가능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닉슨 행정부 내에서조차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후 미국

은 더 빨리 베트남 문제에서 손을 빼기 위해 북베트남을 협상장에서 압박했고 이를 위해

더욱더 공군에 의한 북폭에 의존하게 됩니다. 사실상 남아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남베트남군과 정권이 자생력을 키우지 못하고 나날이 지리멸렬해가는 데 비해, 북베

트남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투사와 공습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전력을 증강시켰고 여

전히 호치민 트래일을 통해 군수품을 보급하며 베트콩의 게릴라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결국 70년 초, 눈엣가시 같던 호치민 트래일을 차단하기 위해 미국은 아무런 사전 경

고 없이 캄보디아 동부의 산악과 농촌지대에 B-52 폭격기까지 동원된 엄청난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캄보디아 동부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공습으로

베트남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베트남의 싸움에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이용

당하고 있었던, 캄보디아의 농민 80여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의 시작이었지요. 그러나 호치민 트래일은 차단되지 않았고 당시 미국은 철저하게 캄

보디아에 대한 무차별 폭격과 이로 인한 엄청난 캄보디아 농민들의 희생을 은폐하려고

했고 심지어 폭격에 동원된 파일럿들이 격추되어 붙잡힌 경우에도 이를 공식 부인할

정도였습니다.(후일 이 은폐와 무차별 폭격지시혐의로 당시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키신저는 국제 사법재판소에 전쟁범죄자로 기소되었고 둘은 모두 혐의를 부인했음)

당시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친미 론놀정권 역시 미국의 무차별 폭격과 자국민의 참상

과 고통을 외면했고 가해자인 미국에게 항의한마디 하지 않아, 민심의 급격한 이반을

초래했고 후일 남베트남이 멸망할 무렵, 캄보디아의 극좌 크메르 루주게릴라 군은 민심

을 잃은 론놀정권을 축출하고 두 번째 킬링필드를 예고 합니다. 이후 불과 600만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 캄보디아는 베트남전에 휘말리면서 미국의 무차별 폭격으로 80만, 폴

포트 극좌정권의 학살로 30만, 전후 찾아온 기아와 질병으로 다시 80만 도합 200만명이

사망해 전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나가는 전대미문의 비극 '킬링필드'를 경험했고 무차별

폭격과 내전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지뢰와 부비트랩이 곳곳에 남아 있는 세계최빈국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천년전 유럽의 그 어떤 대도시보다 화려하고 강성했던 앙코르와트를

건설했던 크메르민족의 문화적 전통과 과거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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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베트남 전쟁의 비극이 폭격으로 캄보디아에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였군요.
무차별폭격이란 명확한 사실을 은폐하고 부인하는 모습은 꼭 근래의
어떤 사건에 대한 것과 겹쳐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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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네, 정말 캄보디아는 이웃해 있었다는 죄 하나로 너무도 큰 고통을 치렀습니다.
실제로 만나보면 너무 너무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인데...

지금도 국민소득 평균 3백불이 채 안되는 최빈국이고 아직도 30년전 전쟁의 지뢰와
부비트랩때문에 연간 수백명이 죽거나 다치고 있지만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앙코르 와트에 가보신 분들은 다 아시지만 정말 한때는 위대한 민족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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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님의 댓글

한결 작성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베트남 전은 미국이 전쟁결과, 명분, 도덕성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패배한 부끄러운 역사로, 그들의 영원한 수치로 남을 겁니다. 

그리고 본문과는 관계없는데, 저렇게 반제의식이 투철한 베트남도 글자는 불어 알파벳을 쓴다고 합니다. 우리가 옛날에 한자를 썼듯이요. 새삼 한글의 고마움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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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베트남의 알파벳은 불어라기보다는 이미 많은 차원에서 베트남화 된 알파벳이 돼버렸다고 현지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처음엔 거기서 따왔다고는 하는데, 이후 점차 자신들의 발음편의에 맞게 고쳐졌다고 합니다. 물론 한자도 씁니다. 그래서 정 의사소통이 안되면 한자로 쓰면 웬만한 건 알아듣습니다.
하지만 상당수 사람들이 영어와 불어를 할 줄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우리네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이 일어를 잘 하시는 것처럼, 이분들도 노인 세대분들은 의외로 불어를 알아듣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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