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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처녀와 대한민국 청년은 어떻게 만났을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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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8,395회 작성일 10-09-24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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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 처녀 리정애 이야기
<밀착 취재> 조선처녀와 대한민국 청년은 어떻게 만났을까①
newsdaybox_top.gif 2010년 09월 20일 (월) 10:31:02 김양희 기자 btn_sendmail.giftongil@tongilnews.com newsdaybox_dn.gif

리정애와 김익의 결혼에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조선적 처녀와 대한민국 국적의 청년은 지난 9월 9일 혼인신고를 했고, 국적란이 공란으로 이루어지는 등 불안정하지만 그래도 혼인신고는 16일 확인 결과, 성립이 됐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조선적과 대한민국 국적의 부부가 탄생한 만큼, 이들의 만남에 축하를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한 일간지에 이들의 사연이 소개된 후 ‘북에 가서 살아라’, ‘이들이 말하는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이런 식으로 간첩이 많이 들어오는 것이다’라는 식의 댓글이 수 없이 달려 이들 부부를 가슴 아프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들의 결혼을 두고 조선적 문제를 여론화하기 위한 기획성 이벤트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몸소 실천(?)한 것뿐이다. 왜 신부는 조선적을 버리지 않는지, 그리고 재일동포와 한국인 청년이 어떻게 만나고 사랑을 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는 궁금한 것 투성이다. 이들 부부에게서는 특별한, 그렇지만 다른 연인들과 특별할 것이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들어봤다. 이 밀착 취재는 네 차례에 걸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아이

나는 1975년 1월, 재일동포 3세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제시대에 제주도가 고향인 할아버지는 ‘먹고살기 위해서’ 고향을 등지고 일본으로 건너왔고 나머지 생을 일본에서 사시다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일본이름과 조선이름 ‘리정애’ 두 가지를 지어주셨고,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네 이름은 리정애니까 누군가 정애야 하고 부르면 손을 번쩍 들어야 한다”고 해 철이 들고부터는 자연스럽게 조선인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나 나를 학교에서도 심지어 친척들 사이에서도 리정애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본학교를 다녔고 일본 이름으로 불리다보니 일본인 친구도 많았고 특별히 일본인 친구라고 거리를 두거나 하진 않았다. 대학도 일본대학교를 가려고 해 조선학교를 다니지도 않았다. 조선사람이 나쁜 것도 아닌데 밝히면 왕따를 당하기도 해 몇몇 가까운 친구들에게나 조선사람이라고 말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조선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끼는 사건이 있었다.

“5학년 역사시간에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일본 입장에서는 암살범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조선을 위해 싸운 영웅이었죠. 이후부터는 난 항상 주변 아이들과는 다르고 특별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제가 다른 일본 아이들보다 머리가 좋았거든요.(웃음)”

특히 중학교 1학년 때 조청(재일조선청년동맹)의 학생회가 주최하는 썸머스쿨에 참가했을 때 그 때 나는 동포가 별로 없는 학교에 다녀 몰랐는데 일본 전역에 있는 조선학생 수천 명이 모여 ‘조선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생각했다.

“이 때 모인 학생들이 ‘나는 조선사람이다’, ‘조선사람 최고’ 같은 구호를 외쳤는데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고 할까요? 수천 명이 모여 구호를 외치니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찼겠어요? 사춘기 시절 조선인들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사건이었죠. 외국에 나가면 저절로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저는 오히려 일본학교에 다니면서 민족성이 더 강해졌습니다.”

조선대학교에서 우리말 배워

그러다 아버지가 조선대학교에 가지 않으면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는 말씀에 조선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입학한 것이 조선대학교 외국어학부 일어문화과. 아버지는 일본대학교에 가면 공부를 하지 않고 놀 것을 걱정했고 동포랑 결혼을 시키고 싶으신 마음에 조선대학교로 가도록 하신 것이다. 이 때 우리말을 배울 수 있었고 북한에도 가볼 수 있었다.

“조선대학교에서는 조선학교가 아닌 일본학교 출신학생들을 편입생이라고 불러요, 편입생들은 따로 100일 운동이라고 무조선 우리말만을 사용하도록 하는데 이때 정말 많이 우리말 실력이 늘었어요. 그리고 조선대학교 4학년 때인 이곳의 수학여행이라는 개념으로 북한에 가 백두산을 비롯해 주요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은 다 다녀왔습니다. 이 때 조선대학교에서 배운 우리말이 과연 통할까 궁금했는데 정말 통해 기뻤습니다. 1996년은 북한이 정말 어려운 시기였는데 우리 동포학생들에게 맛있는 것도 내주고 많이 먹으라 하며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점이 기억에 납니다.”

조선대학교에 다니면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키워졌다, ‘나는 조선인’이라는 신념이 강해지고 가치관이 맞지 않아 이때부터는 일본인 친구들과 만나도 재미가 없으며 서먹하고 저절로 멀어지게 됐다. 조선대학교 졸업 후 일본 학교 내 우리의 방과 후 학교 같은 민족학급을 맡아 재일동포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하고 일본의 무역사무소 일을 하기도 했다.

꿈같던 고향 방문

그러다가 2004년 가을 어머니, 이모와 함께 고향 방문을 하면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에 왔다. 설악산을 관광하고 고향인 제주도를 돌아보는 일정이었는데 설악산은 조금 힘이 들었다. 고향방문을 하고 ‘내 조국이구나’하는 마음에 또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을 하던 터에 2005년 8.15민족대축전 행사를 참가하면서 통일단체 인사들과 만나게 된다.

“신문에 코리아지원센터라고 하는 단체에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기행 광고가 났어요. 일정을 살펴보니 서대문 형무소, 나눔의 집 방문 등 여러 행사가 있는데 가장 눈에 띈 것은 8.15민족대축전 행사였습니다. 통일을 위해 민족이 하나가 되는 8.15행사에 가고 싶어서 무조건 신청을 했습니다. 이 때 행사장에서 통일연대 깃발을 우연히 발견했고 그곳에서 우연히 장기수 어르신들을 만났습니다. 이때 원래 10일 동안 체류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너무 좋아서 행사 주최 측에 한국에 남겠다고 통보하고 한 달 동안 곳곳을 다녔습니다.”

이 때 모텔을 숙소로 잡고 탑골공원, 종묘, 민속촌 등을 다녔는데 가는 곳곳마다 동포라고 반겨주고 해서 너무 좋았다. 종묘에서는 마침 전주 이(李)씨 종친회가 있었는데 ‘나도 전주 이씨다’고 가서 얘기 했더니 전통의상을 입혀주기도 했고, 민속촌에 갔을 때는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찍고 있었는데 조연으로 출연한 기주봉, 최철호씨가 재일동포라는 이야기를 듣고 밥을 사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탑골공원의 한 점쟁이로부터 한국에서 공부하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민국으로 올 결심을 했다.

“친구와 함께 탑골공원에 갔는데 사주보는 아주머니가 저와 제 친구를 부르는 거예요, 갔더니 국민대 역사학과라고 아예 학교와 과도 찍어주시면서 여기서 공부를 하는 게 좋다고 하시더라구요. 이때 아~ 여기서 공부를 하면 이곳에 머무를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맛도 멋도 조선식으로 변해

점쟁이 아주머니의 말이 계기가 돼 2006년, 고대 어학당에서 6개월 동안 공부를 했다. 고대 어학당을 선택한 것은 당시 서울대 어학당은 전철역에서 너무 멀어서, 그리고 연대 어학당은 일본인들이 너무 많아 거부감이 나서였다. 어학당 근처에 하숙집에서 다녔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김치를 먹었다.

“일본의 집에서는 한식, 일식, 양식을 골고루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1, 2월에 제사가 많아 명절을 포함하면 이때 4번 정도 제사음식을 먹어요. 특히 한식은 식으면 맛이 없는데 그 음식들을 매번 먹어야하니 얼마나 질리던지, 제가 좋아했겠어요? 게다가 조선대학교에서도 식당에 늘 김치가 나왔고 김치를 먹지 못하면 조선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집에서도 김치를 먹어보지 않았고 딱히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서 그 전에는 김치를 한 번도 먹지를 않았어요. 그렇지만 하숙집 아주머니께서 김치, 삼겹살을 해주셔서 먹었는데 너무 맛있는 거예요. 이 맛있는 것을 왜 30년을 안 먹었나, 안타깝기까지 했어요. 예전엔 매운 것을 전혀 먹지를 못했는데 이제는 김치는 물론이고 매운 음식을 잘 먹습니다. 이제 진짜 조선 사람이 된 거죠.”

음식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그동안 배우고 싶었지만 배우지 못했던 가야금도 배우게 됐다. 일본에는 워낙에 가야금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고, 또 조선대학교에 다닐 때도 기악부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조선학교에서 가야금을 배웠던 학생들이 많아 수준이 맞지 않아 배울 수가 없었다.

“워낙 배우고 싶었던 악기이기 때문에 한 번 배울 때마다 5만원을 내면서 3개월을 다녔어요. 제게 큰돈이었죠. 이제는 민요 정도는 연주할 수 있는데 아직 훌륭한 수준은 아닙니다. 예전에 양심수후원회의 낙성대 ‘만남의 집’에 며칠 묵을 일이 있었는데 그 때 가야금을 보시고는 김영식 선생님께서 연주를 해보라고 하셔서 그 분 앞에서 연주를 해 본 것이 대중 앞에서 유일한 공연이었습니다. 그 때 김영식 선생님도 가야금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는데 배우셨는지 모르겠네요.(웃음)”

가치관이 맞지 않았던 어학당 교육

그러나 어학당에서의 교육은 가치관이 맞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았다. 교과서를 수정하고 교육을 하는데 더욱 세심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를 하곤 했었다. 어학당이라는 것은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 등을 처음으로 가르치는 곳인데 강사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학당에는 일본인들도 많았지만 일본인들과는 상대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중국인 친구들이 많았다.

“어학당의 선생님들은 재일동포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반에는 재일동포가 3명이나 있었는데 꼭 발음을 할 때 ‘일본인들 하세요’, ‘중국인들 하세요’, 그런 식으로 하면서 우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 일본인이 아니라고 선생님께 이야기를 했지만 그냥 ‘일본사람이랑 같이하면 되잖아요’라고 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그냥 하기도 했지만 전 절대 하지 않았어요.”

또 역사를 배우는 시간에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분단 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일본 학생들은 미국, 소련에 의해서라고 답을 했지만 저는 근본적으로 일제 식민지로 원인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했어요. 일제 식민지가 아니라면 우리 할아버지도 일본으로 가지 않으셨겠죠. 일본에서 동포들이 차별도 심하게 받았다고 선생님께 대답을 했더니 ‘누구나 식민지가 될 수 있고 누구나 다 차별을 받을 수 있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나아가 통일관련 토론 시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묻길래 원래 하나였던 민족이 통일을 하는데 무슨 이유를 대야하냐고 했더니 선생님은 ‘분단은 과거일 뿐이고 경제가 혼란이 빠질 것’이라고 말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중국학생들도 와서 공부를 하는데 무조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교하면서 자본주의가 훨씬 우월하다는 교육을 해 중국학생들도 몹시 기분 나빠하곤 했습니다. 어학당에서 남한 사람들의 인식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이곳의 현실이었죠. 그렇지만 그럴수록 더욱 조선민족에 대한 생각과 통일에 대한 열망은 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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