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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으로 달라지는 아메리칸 라이프-불꺼진 수퍼마켓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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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종상
댓글 4건 조회 9,207회 작성일 10-09-1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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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일찍이라고 하기에도 좀 심할 정도로. 눈을 뜨니 오전 두 시. 아내는 응접실에서 빨래를 개다가 잠이 들었고, 저는 그녀를 깨워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어제 몇 시간 잤다고, 다시 잠들러 침대로 돌아가기엔 글렀다는 것을 전 금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쳐다보고 있기엔 어쩐지 아까운 시간, 운동을 가자 싶어서 이래저래 수건과 운동복을 챙겨가지곤 집을 나섰습니다. 바깥 공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습니다. 시애틀의 가을같지 않고, 마치 우리나라의 여름날 비 잔뜩 오고 나서의 새벽 공기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잠깐 내린 비도 예사롭지 않았었습니다. 장대비. 그것은 한국에서 보았던 장대비였습니다. 순식간에 지붕의 홈통을 메우고 넘쳐버리도록 만드는 엄청난 양의 비. 시애틀에선 이런 비가 잘 안 내리는데, 어젯밤엔 그런 비가 내려서 잠시 우리나라의 추억에 잠기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름날이면 그렇게 내리던 빗속에서 후다닥 뛰던 생각, 그래도 홈빡 젖어버리고 나면 그냥 포기하고 빗속을 터덜터덜 걸어 학교에서 집으로 하교하던 추억들이 문득 떠올랐었습니다.

 

그런데, 이곳답지 않은 후덥지근한 새벽의 습기 꽉 찬 공기는 우습게도 참나무 내음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와이너리에 가면 맡을 수 있는 냄새. 참나무 통에서 와인이 익어가는 향기가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풋,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와이너리들에 여행을 다니지 않았다면, 아마 감지하지 못했을 향일 것입니다. 세상과 저는 또다른 이유로 이런 인연을 맺고 있었습니다. 이 오크 향은 문득 아내와 처음 와이너리 구경을 다니던 때를 떠올리게도 만들었습니다. 사실, 와인에 대해서는 몰랐고, 그 '와인'이라는 것이 주는 낭만에 취하던 시절. 그때는 '아내'가 아니라 '연인'이었던 시절, 와인에 대해서는 몰랐어도 와인이 오크통 안에서 익어가는 향은 정말 알싸하고 좋았습니다. 물론 그녀도 지금처럼 사내아이 둘을 두고 늘 전투적으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그런 때가 아니라, 길을 걷다가 그저 제 어깨로 살폿 고개를 기대올 수 있는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때입니다. 지금 우리 모습을 잠깐 생각해보게 도 됩니다. 다시 웃음이 나옵니다.

 

모처럼 이런 상념들이 떠오르자, 저는 집에 남아 있는 게살과 햄, 그리고 계란 등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여기에 벨 페퍼(파프리카), 그리고 양송이만 있으면 맛있는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다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새벽에 요리를 해 놓으면 일어나서 깜짝 놀라겠지. 모처럼 맛있는 걸 해서 아침을 마련해줘야겠다. 뭐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 새벽에 운동을 다녀오면서 장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운동을 마치자마자 바로 헬스클럽 근처에 있는 '탑 푸드'라는 수퍼마켓에 들렀는데, 주차장에 아무도 없는 겁니다. '여기, 원래 24시간 열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문으로 다가서니, 새벽 여섯 시에 문을 연다는 것입니다. 시계를 보니 겨우 네시 반. 한 시간 반이나 되는 시간을 기다릴수도 없고, 또 출근 준비도 해야 할 테니 다른 근처의 수퍼마켓으로 가자 싶어서 차를 몰고 갔습니다. 미국에서 제일 흔한 수퍼마켓 중 하나인 세이프웨이. 이곳이야말로 늘 여는 곳이기에 차를 세우고 문으로 걸어갔더니... 이곳도 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출근을 하는지 근처 아파트에서 제가 차를 세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봐요, 여기 24시간 영업하지 않나요?"

"아뇨, 자정까지 영업하고 여섯 시에 다시 엽니다."

뭐? 도대체 언제 이렇게 된 거야? 그 사람은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아마 월마트라면 24시간 열 거요."

"고마워요."

저는 다시 차를 몰고 우리집 근처의 월마트로 향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월마트로 가면 됐을 것을. 이곳도 열긴 열어놓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수많은 계산대 중에서 한 군데만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사려고 했던 걸 사들고 나서 그 새벽에 요리를 시작, 오믈렛을 맛있게 만들어 놓고, 그 오믈렛으로 샌드위치도 싸서 도시락으로 준비를 하고, 고마워하는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궁금증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거... 참.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야? 이곳에 월마트가 들어오고 나서 생긴 현상은 아닐 텐데. 분명히 한 두어달 전만 해도 수퍼마켓들은 24시간 문을 열고 있었는데. 이게 궁금해서 출근한 후에 저희 집 근처에 사는 동료에게 물어봤습니다.

"브라이언, 그거 알아? 세이프웨이랑 탑 푸드, 더이상 24시간 영업을 안 하는데?"

"알고 있었어. 얼마 되진 않았지."

"그래?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장사가 안 되니까 그렇지. 사람들이 아직도 돈 안써. 그리고 더 싼 곳만 찾아가지."

그랬구나... 그래도 미국의 생활 패턴과도 같았던 수퍼마켓의 24시간 영업이 중단됐다는 것은 제겐 작지 않은 충격임과 동시에, 지금도 미국의 경기는 사실 회복세와는 상관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하긴, 수퍼마켓이 밤 늦게까지 여는 이유는 보통 술을 사러 오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특히 건설업이 호황일 때, 건설 쪽에서 일하는, 주로 멕시칸 계열의 이민자들은 그들의 고된 하루를 끝내고 마켓에 들러 맥주와 간단한 스낵류를 사서는 이걸로 저녁을 때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건축 경기가 완전히 '증발하다시피' 하자, 이들은 직장을 잃었고 이들에겐 생존의 터전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워싱턴주 동부로 가 농장 노동자가 됐지만, 이것은 건설업 쪽에서 그들이 일할 때만큼 충분한 임금을 보장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계절노동이라는 한계가 있어서 그들에겐 생존이란 것이 절박해지는 상황이 됐던 것입니다.

 

점차 경제의 사다리의 윗쪽에 있는 금융업부터 점점 아래쪽으로 파급된 이 불황은 드디어 사회에서 가장 아래에까지 미쳤고, 이 때문에 실제로 경영현장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은 죽을 맛입니다. 처음에 외식을 줄이던 사람들은 이젠 아예 불필요한 그로서리(식료품)의 구입조차도 자제하는 쪽으로 나갔고, 그것이 확실하게 사회 전반으로 파급됐다는 것이 식료품을 주로 파는 수퍼마켓들의 영업 축소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지요. 이 때문에 동포사회의 경기 역시 아직도 최악입니다. 이 지역 한인 사회의 주력 업종인 세탁소는 일감을 맡기는 사람이 없어서 불경기이며, 외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식당 역시 그 어느때보다도 어렵고, 간단한 점심이나 저녁으로 인기 높았던 고기 구이 식당인 '테리야키'도 마찬가지 처지이고, 심지어는 불경기를 크게 타지 않았던 잡화점들마저도 문을 닫는 곳들이 속출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예전 같으면 수퍼마켓이 영업시간을 단축한다고 하면 신나 했던 이 근처의 편의점들도 이 불경기엔 어쩔 수 없다고들 투덜거립니다. 분명히 경기는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도, 그것을 실감하기에 현실은 너무나 각박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제대로 돌아오려면 미국의 '임노동자'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직장이 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공장들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한때 노동자들에게 많은 임금을 주는 것을 손해로 여겼던 미국 기업들의 미국 탈출 러쉬는 결국 이렇게 '엄청난 공황'을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한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꾸려지려면 소비자층이 탄탄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소비자층이 안정적으로 구매력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그러기에 미국의 기업들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자기들의 생산력을 해외로 돌려 추가 이윤을 뽑고자 했고, 결국 여기서부터 모든 비극은 시작된 셈입니다. 거품으로 키운 경제가 결국 이런 식으로 터지고 나서, 오늘의 미국의 현실은 불꺼진 수퍼마켓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애틀에서...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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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님의 댓글

공감 작성일

맞아, 윗 글에 공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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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k0206님의 댓글

eck0206 작성일

차분히 흐르는 서정적 분위기의 글임에도 주어진 현실을 어느 신문기사보다도
더욱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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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님의 댓글

조조 작성일

피부로 느끼고 있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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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rt님의 댓글

45rt 작성일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 페이스북에 퍼 가겠습니다. -Steve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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