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북한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와 중앙위원회를 개최하면서 김정은의 권력승계가 현실이 되었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북한의 정치현실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민주노동당의 논평은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북한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반면 참여연대는 10월 7일 개최된 토론회를 통해 ‘정당성 없는 권력의 대물림은 시민주권을 제약하는 민주주의의 장애물’이라고 규정하면서도 ‘대결적이고 우월적인 자세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적대를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남한 사회는 평화지향적 의지로 분쟁상대인 북한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여러 주장을 종합해보면 현재의 논쟁을 대표하는 입장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관점에서 북한의 권력승계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과 북한 역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당사자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할 때 북한의 권력승계를 비난하며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라는 입장인 듯하다.
한국의 민중운동이 북한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맹목적인 반북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고 또한 반북주의에 편승한다는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조선일보는 '북한 3대 세습은 진보좌파의 시험대'라면서 진보좌파는 북한의 권력승계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라고 윽박지른다. 중앙일보는 중국공산당의 기관지 <인민일보>도 1980년에 사설을 통해 북한의 권력세습을 통렬히 비판했다면서 공당인 민주노동당이 ‘침묵의 논리를 설파하는 것은 스스로 북한 추종세력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보수언론은 침묵에 대해서는 북한추종으로 규정하고 비판이 나오면 자신의 논거로 활용한다. 보수언론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는 분명해 보인다. 그들이 북한의 권력승계를 빌미로 북한의 붕괴를 추진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미국도 자신의 동아시아 전략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냉정하게 따질 뿐이다. 그렇다면 보수언론의 의도는 그야말로 ‘내부용’으로 민중운동의 분열을 조장하거나 남한 사회체제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사회적 부와 정치권력이 계급집단 내에서 ‘세습’되는 사회다. 따라서 북한의 정치현실이 남한사회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현재 진행되는 논쟁을 볼 때 우리의 궁극적 과제는 ‘어떤 사회가 나쁜 사회냐’를 규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사회를 새롭게 건설할 것이냐는 것을 밝히는 일이다. 북한 사회에 내재한 모순과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과제에 기여할 때만 의미가 있다. 세계 자본주의가 극도의 위기에 빠진 현실은 우리가 새롭게 사회를 건설해야 할 과제에 긴급성을 더한다. 우리에게는 북한사회의 정치현실과 내적 모순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현실 사회주의의 오류를 반성하고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오류를 인식하는 것은 오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북한 조선노동당 당대표자회의는 왜 개최되었나?
북한 조선노동당은 2010년 6월 26일 정치국 결정서를 통해 9월 상순에 조선노동당 최고지도기관 선거를 위해 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한다고 발표했고 계획보다 약간 늦은 9월 28일 당대표자회의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했다. 조선노동당 규약에 따르면 당 중앙위원회는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에 당대표자회의를 소집할 수 있고, 당 대회는 5년에 1회 소집해야 한다. 당 대표자회의는 당의 노선과 정책, 전략전술에 관한 긴급한 문제를 토의 결정하고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당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위원, 준후보위원을 제명하고 그 결원을 보선한다. 즉 당대회가 당의 최고지도기관이지만 급박한 사안이나 당면 인사문제는 대표자회의를 통해서도 처리할 수 있다.
당 대회는 1980년 10월 6차 대회 이후 30년 간 개최되지 않고 있다.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도 반년에 1회 이상 개최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1993년 이후로 열지 못했다. 그에 따라 당 중앙위원회 위원(후보위원)과 중앙위원회 산하의 상설기관인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비서국, 당검열위원회의 개편과 보선이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 당대표자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당 중앙위원 145명 가운데 77명이 사망하거나 해임되어 68명만 남은 상태였고, 대부분 70-80대의 고령이었다.) 그리고 중앙위원회 산하의 군사위원회는 당대회의 승인 없이 중앙군사위원회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기존 구성원의 사망으로 김정일 위원장만 소속된 1인 위원회가 되었고, 정치국 회의도 거의 개최되지 않았다. 따라서 김정일 위원장이 당 총비서, 정치국 상무위원장 겸 정치국원, 중앙군사위원장, 당 비서국 내 조직담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 부장을 동시에 겸직하면서 의사결정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고도로 집중되었고, 당 규약을 따르지 않는 변칙적인 운영이 일상화되었다.
당 대표자회의가 개최된 것은 조선노동당 창건 이래 1958년 3월과 1966년 10월 단 두 차례뿐으로 이번 회의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번 당 대표자회의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매우 특별한 목적을 지녔다. 그것은 당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후계자가 활동할 수 있는 당 내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이번 대표자회의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당 대회를 개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 중앙위원(후보위원)을 선출하고 당 중앙군사위원회와 중앙위원회 산하 기관(정치국, 비서국, 검열위원회)의 인사문제를 처리함으로써 당 조직정비를 꾀했다. 과거 김일성-김정일의 권력승계도 김일성 수령의 영도체계 하에서 김정일 후계자가 당내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즉 김정은도 당 내에서 확고한 지도력을 확립해나가는 것부터 권력승계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김정은의 활동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당 조직정비가 반드시 필요했다.
현재 북한 사회는 모든 권력의 원천이 당이라는 사실을 헌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1992년에 개정된 북한 헌법은 11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노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이는 당 중심으로 운영되는 북한사회 현실을 법적으로 제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통상 당 관료가 행정관료를 겸하거나 정부기관의 각 부서에 상응하는 당내 기구를 설치하여 정부기관을 견제하고 사찰하는 방식으로 당에 의한 정부 통제가 이뤄진다. 최근 북한의 당조직이 변칙적,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이 사실이더라도 이번 당 대표자회의는 당이 모든 권력의 원천이라는 원칙에 따라 권력승계의 절차가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당대표자회의 개최 전날인 9월 27일 김정은은 군으로부터 대장 칭호를 부여받고, 28일 당 대표자회의에서 신설된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당중앙위원 직위을 맡음으로써 단숨에 김정일-김정은 후계구도가 공식화되었다. (하지만 김정은이 당 정치국이나 비서국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 역할을 맡지 못했고 이는 어떤 정치적 마찰을 함의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고, 반면 어떤 역할을 맡았지만 공개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번 대표자회의를 앞두고 김정은이 최소한 비서국 산하 조직담당 비서직이나 조직지도부 내 직위를 맡을 것으로 예상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당 조직체계 내에서 그 위상이 격상된 중앙군사위원장을 맡음으로써 예상하기 힘든 파격적 인사배치가 이뤄졌다. (이에 비해 김정일은 1964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당활동을 시작했다.) 따라서 북한이 이런 ‘속도전’을 감행할 만큼 급박한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북한의 후계자론에 따르면 후계자는 반드시 수령이 살아있을 때 정해져서 수령의 혁명위업을 보좌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권력승계, 무엇을 의미하는가
1980년대에 출판된 북한의 후계자론에 따르면 ‘세습에 따른 승계는 곧 혈연에 따른 무조건적인 승계이며 낡은 유물로서 지배 약탈의 권리의 계승’이라고 분명히 비판했다. 곧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혈연에 따른 세습이 아니고 김정일이란 인물이 후계자로서 매우 뛰어난 징표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 1970년대 초반 북한에서 후계문제가 언급되기 시작할 때 당 원로들이 김정일에게 전권을 부여하자고 거듭 제안했으나, 김일성은 김정일의 나이가 어리다며 더 넓은 범위에서 후계자를 찾아보자며 계속 유보하다가 1973년에야 후계자로 내정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김정일은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정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군사위원회 위원, 비서국 비서로 선출됨으로써 후계 문제가 제도적으로 완결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 연구자 가운데는 김정은 후계구도가 본격화되기 전에는 다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즉 북한의 후계자론의 논리구조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지니고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새 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혈통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혈통 승계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는 북한의 당과 국가가 김일성그룹의 항일빨치산 투쟁을 그 정통성의 원천이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항일빨치산 그룹의 가계에서 후계자가 나오겠지만 경제분야나 군사분야에서 성과를 쌓은 인물에서 후계자를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있었다.
하지만 경제분야든 군사분야든 아직 어떤 업적도 없는 김정일의 친아들이 후계자로 부상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몇 가지 가설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주류 북한학자들은 최고위층의 안전을 가장 우선시한 결과로 해석하는 듯하다. 현재 북한의 최고 엘리트층은 김정일 일가, 군부, 당관료 층인데 혈통에 의한 권력승계야말로 현존 통치자에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고, 현존 엘리트가 누리는 권력과 기득권의 지속성을 보장하기에 가장 적당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군부나 당관료층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약한 지도자’를 선택했다는 가설도 성립할 수 있다. 기존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업의 관리자는 국가소유를 매개로 사회적 자본을 영유함으로써 사실상 자본가로 기능했다. 나아가 현재 북한에서는 더욱 직접적인 형태의 ‘사유화’가 진전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관, 기업소의 명의를 빌려서 개인이 운영하는 지방산업공장, 중앙공업공장, 국영상점, 식당, 서비스업체, 무역회사의 비중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9년 화폐개혁은 북한에서 시도된 가장 강력한 ‘시장억제정책’이었으나 대체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사회 엘리트층이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조정자를 자임하는 정권을 내세워 충성을 맹세하되 실제로는 사적 이익의 극대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가설도 성립할 수 있다. (이러한 북한의 정치현실은 일종의 ‘보나파르티즘’과 유비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설에 따르더라도 북한의 ‘선군정치’가 이러한 현실을 교정하기 위한 것인지, 사실상 용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책상 동요가 반복되는 것인지도 아직까지는 불분명해 보인다.
또한 북한이 수령론과 후계자론을 완성하면서 내세운 논리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활용된 ‘김일성 민족주의’에 의해 북한의 후계자 구도가 역규정되었다는 가설도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의 공식매체는 ‘백두산을 맥으로 하는 민족사적 정통성은 민족의 아들이 되기 위한 본질적 징표’라며 김일성 가계에서 태어난 것이야말로 최고지도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징표라는 식으로 거듭 주장했다. 나아가 1998년에 개정된 북한 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라고 규정함으로써 ‘김일성민족’이라는 개념이 앞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할 가능성을 예고했다. 1970년대 이후 북한은 북한 체제와 지도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김일성민족주의’와 개인숭배에 점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는 퇴행적인 이데올로기가 북한의 향후 후계구도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가설인 셈이다. (북한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사회화와 노동>에 실린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다?: 남북한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2007.6.21. 356호)을 참고할 수 있다.)
북한 수령제 사회주의의 미래는?
북한의 후계구도가 분명히 드러나기 전에 혈통승계가 아닌 다른 방식의 권력승계를 전망했던 연구자들도 북한이 과거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채택했던 집단지도체제를 선택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았다. 그것은 북한이 수령제를 확고한 원리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수령제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집단지도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붕괴의 길로 갔다고 거듭 강조했다. 수령제야말로 북한 사회주의의 미래를 가장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길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수령제는 과연 얼마나 안정적일 것인가. 북한의 수령론에 따르면 수령의 지위와 역할은 크게 세 가지다. 수령은 1) 혁명적 지도이념․사상을 창시하고, 2) 혁명과 건설에서 탁월한 영도력을 보여야 하며, 3) 인민의 어버이로서 고매한 덕성과 풍모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후계자는 선대가 ‘개척한’ 혁명위업을 ‘계승 발전’시키는 미래 수령이다. 나아가 1986년 김정일은 논문을 통해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제시함으로써 수령론을 ‘완성’시켰다. 그 논문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니는데 인민대중은 당조직을 통하여 수령의 영도를 받을 때 사회정치적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사회정치적 생명론은 수령을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최고뇌수라고 규정하고 당을 그 중추라고 규정한다.) 결국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에서 수령은 인민대중에게 생명의 은인이자 ‘혁명의 대가정’에서 충성과 효성을 바쳐야 하는 어버이가 된다. 북한에서 수령에 부여하는 의미를 볼 때 북한의 수령제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해 여러 의문이 생긴다. 우선 북한의 김일성민족주의나 선군사상이 체계화될 수 있을 것인가, 얼마나 보편적 정치이념․사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을 것인가. 또한 그것은 북한 사회의 체제 결속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과거 ‘인민의 어버이’라는 수령의 이미지는 배급제나 무상교육․무상의료와 같이 ‘가부장적 국가온정주의’가 기능할 수 있었던 때에 어느 정도 성립 가능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북한에서 ‘사유화’와 ‘시장화’(생산재 시장, 소비재 시장, 금융시장, 노동시장의 등장)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또한 현재 북한에서는 이른바 ‘8․3 노동자’라고 하여, 국영기업소에 소속되었으나 일정한 금액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다른 곳에서 돈벌이를 하는 공장과 기업소 내 노동자의 비중이 약 4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성인남녀 중 시장경제활동 종사자의 비중은 70% 전후로 추정된다. 하지만 북한에서 태동하는 시장경제가 북한경제의 미래를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북한의 시장경제는 계획경제 내에 존재하는 각종 설비, 원자재, 부품, 전력을 유출, 절취하는 형태로 생산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생산력 발전을 동반하지 않으며, 해외수입을 계속 자극한다. 이처럼 계획경제의 물적․기능적 토대가 와해되고 동시에 국가가 시장경제에서 발생한 잉여를 수취하는 식으로 시장에 의존하는 형국이다. 즉 국가가 ‘시장화’를 관리할 능력이 제한적인 것이다. 따라서 계획경제 부문을 정상화하여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려는 당과 국가의 공식적 노선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2009년 북한헌법은 왜 ‘공산주의’를 삭제했나
수령제 사회주의는 당-국가라는 스탈린적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당 위의 당’으로서 수령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극단화시킨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스탈린적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에 따르면 당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조직의 최고 형태로 간주되고 따라서 국가의 영구적 지도적 세력이 된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당은 가장 선진적인 인자들로 구성된 영구적 혁명세력이라는 부당한 전제에 따라 분파형성을 금지했다. 스탈린은 당내 분파가 혁명적 실천에서 등장하는 불가피한 모순에 따라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분파는 곧 기회주의의 발현이고 당에서 추방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스탈린은 분파의 자유가 개량주의․기회주의 정당의 특징이라고 규정했다.) 당이 국가의 지도적 세력이라면 분파의 금지, 무오류성의 신화는 국가로 전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논리의 귀결에 따라 당-국가는 ‘지도’라는 명목으로 강제와 독재을 실행하게 되고 대중민주주의의 전망은 점점 더 소실되었다. 기업의 관리자와 당․국가와 같은 정치적 장치의 관리자는 지배계급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계급질서는 가족제도와 교육제도를 매개로 재생산되었다.) 이는 착취계급의 소멸과 사회주의의 기본적 달성을 선언한 1936년의 소련 헌법 개정 이후 소련의 억압기구가 오히려 한층 더 강화된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72년 북한에서 국가주석제가 신설되면서 수령의 초월적 지위와 역할이 제도화되고 1973년 미래 수령으로 후계자 문제가 일단락되면서 국가의 억압적 기능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1973년 사회안전부(일종의 ‘경찰’)에서 국가정치보위부(일종의 ‘중앙정보부’)가 분리 독립되어 주석 직속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국가정치보위부는 북한 내부의 간첩, 반당반혁명 분자를 적발, 색출, 제거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삼는 것으로 사실상 김정일이 직접 통제했다. 국가정치보위부는 당․정부․군대와 기업소까지 파견되었고 지방조직까지 설치하여 전국적인 규모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국가정치보위부는 김정일체제를 보위하고 모든 장애요소를 제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에서도 철의 규율을 강조하며 대대적인 검열이 이뤄졌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2009년 최고인민회의는 국방위원회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체제 유지에 필요한 모든 군사력, 강제력을 국방위에 집결시켰다. 국방위원회에는 민간치안(인민보안성), 체제보위(국가안전보위부), 실질 군사력(당 군수공업부), 대남분야(당작전국장) 핵심인사도 총 집결했고, 주요 산하기관 개편도 동시에 이뤄졌다.
사실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란 위계적 관료제나 억압적 국가장치를 파괴하기 위한 의식적인 투쟁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국가의 강제, 독재로 이해한 스탈린주의나, 나아가 ‘당 위의 당’으로서 수령제를 도입한 수령제 사회주의의 전망에서는 그러한 투쟁의 의미를 인식할 수 없거나 실현할 수 있는 경로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항목을 삭제한 북한의 2009년 헌법 개정은 북한 사회의 미래에서 의미심장한 조치다.
한국 민중운동의 과제
논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어떤 논자는 북한의 권력승계를 비난하는 자들이 남한에서 재벌일가처럼 사회적 부가 독점되고 세습되는 현상은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를 꺼냈다. 남한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단지 사회적 부만 아니라 정치권력도 계급집단 내에서 ‘세습’된다. 물론 선거를 매개로 한다는 중대한 차이가 있으나 이는 노동자의 지난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남한의 문제는 북한의 권력승계 방식이 남한 체제의 상대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한국의 민중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일차적 과제를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가 잉태했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변화의 전망을 창출해야 한다. 나아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그 위기(2007-2009년 금융위기)라는 현실은 이러한 과제에 긴급성을 더하고 있다. 혹자는 적극적인 대북지원과 한반도 평화정착이 북한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이끌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논자는 북한이 처한 대외 고립과 제재가 권력세습의 요인이라고도 말한다. (곧 ‘미국이 원인 제공자’라는 논리다). 북한의 사례뿐만 아니라 고도의 고립과 위협에 처해 있는 사회가 오히려 더 권위주의적이고 호전적인 사회로 변질된 사례가 무수히 많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도 물론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북한 사회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외적 요인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의 내적 모순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한국 사회와 세계 자본주의의 변화를 위한 전망을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한반도의 동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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