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신 특별대담]재미통일운동 지도자-유태영 박사의 부인 박옥자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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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유태영 박사 부인 박옥자 여사
“남편 연애시 묶어 3권 간직해”고백
[뉴욕=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 “하하하…하하하…허허허…” 결혼생활 54년을 보낸 유태영 박사의 사모, 박옥자 여사의 웃음소리(하하하)이자 옆에 있던 남편이 그 웃음소리를 따라 웃는 웃음소리(허허허)의 2중창이다. 남편의 8순 잔치겸 도서출판(‘제 소리’) 행사에서 유태영 목사가 기념케이크를 짜르고 나서 “오늘은 뽀뽀한번 할까?”라고 포옹하자 박옥자 여사는 수줍은 얼굴로 어색해 하면서도 좋아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는 바람에 그 입맞춤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때 하객들은 폭소를 자아냈다.
[참관기]감동적인 유태영 박사 8순기념 및 출판기념식---손세영 민족통신 특파원
[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0-10-29]
민족통신
[대담]유태영 박사 부인 박옥자 여사 “남편 연애시 묶어 3권 간직해”고백 [뉴욕=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 “하하하…하하하…허허허…” 결혼생활 54년을 보낸 유태영 박사의 사모, 박옥자 여사의 웃음소리(하하하)이자 옆에 있던 남편이 그 웃음소리를 따라 웃는 웃음소리(허허허)의 2중창이다.
그 행사가 끝나고 부부와 함께 대담하는 기회를 가졌다. 박옥자 여사는 2010년 1월1일 새날을 맞아 뉴욕의 타임스케워에서 벌어지는 행사에서 1월1일을 알리는 테레비죤 중계방송 방송원이 5,4,3,2,1을 소리치며 “드디어 2010년 새날을 맞았습니다!”라고 선포하자, 박옥자 여사는 남편과 함께 이것을 시청하며 “여보, 오늘은 뽀뽀하는 날이래요, 자 어서요!”하고 유목사에게 입술을 대려고 달려들자 유태영 목사는 눈이 둥그레 지며 기겁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서는 “하하하, 하하하…”하고 자지러 지게 웃음보를 터트리고 만다. 박옥자 여사는 이렇게 한바탕 웃고나서는 “목사님이 놀래서 기겁을 했지만 그 날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뽀뽀해도 법에 안걸리는 날이예요. 그래서 단둘이 테레비죤을 구경하다가 한번 해 보려고 했는데 글쌔 목사님이 놀래 기절하는 얼굴을 보고 너무 웃어웠어요”라고 깔깔대며 말한다. 그 때 옆에 있던 유태영 박사는 “저 사람이 평생 안하던 행동을 하는 바람에 깜작놀라서…”라고 대꾸한다. 유태영 목사를 아는 사람들은 “목사님 가정은 정말로 부부금실이 좋아요”, “이 가정은 언제나 깨가 쏟아져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필자가 여러차례 관찰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건강을 챙기는 일, 남편이 고민하면 옆에서 위로하고 자문하는 일, 남편이 조깅을 하면 함께 걷고 말동무가 되는 일, 남편이 나들이 가면 옆에서 시중드는 일…그 어느 순간도 밝고 기쁜 표정이다.
유태영 목사는 1970년 브롱스 교회를 창립하고 그 이듬해인 1971년 1월3일 창립에 드리는 시로 “좁은 문으로”라는 시를 썼는데 이것도 사실은 박옥자 사모에게 드리는 사랑의 시라고 고백한다.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좁은 길을 택하겠습니다. 명예와 안일이 미치지 못하는 곳 험하고 좁은 길을 나는 눈물과 참음으로 가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좁은 길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사랑의 좁은 길에는 무엇일 있을까요. 가시밭과 엉겅취의 험한 길에서 나는 아름다운 백합을 발견하겠습니다. 나는 님을 위하여 이 백합을 아끼리이다. 나의 숨길은 그 향기에 입맞추고 아름다운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이 백합을 꺾지 않으리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여왕같이 오신다면은 나는 이슬이 되어 오시는 길을 덮으리이다. 가시는 길은 눈눌이었습니다. 오시는 길은 사랑이겠습니다. 가시는 길은 좁문 문이었습니다. 오시는 길은 넓은 문이 되어지이다. 아 나는 눈물과 참음으로 당신이 오라고 하신 좁은 문을 지나서 가리이다. 가면 오고 싶고, 오면 또 가야할 유혹의 길을 나는 진질의 무기로서 싸우며 가겠습니다. 천만의 이론보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가버린 사랑이여 나는 지금 생명의 기로에 서서 당신이 오라고 하신 좁은 문으로 걸어 가리이다. 박옥자 여사는 필자에게 뀌띔해 준다. “목사님은 제가 보기에는 남다른것 같아요. 제가 1987년 장 수술을 하게 되어 병원에 입원을 하였는데 그 기간 동안 병실에 와서 몸이 차지 않나 걱정하며 손발을 만지다가 대야에 더운 물을 가져와 그 따뜻한 물로 내 발을 만져주며 간호하였어요. 그것을 본 미국인 간호원이 자기가 25년 동안 그 병원에 근무하면서 부부가 이렇게 다정 다감한 것은 처음 보았다고 감명받았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했어요.”라고 말한다. 유태영 박사는 박옥자 여사가 가끔 감기몸살에 아플때에는 벼개 옆에 앉아 새벽녘 잠들때까지도 말동무를 해주며 "당신,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줄 아느냐?”고 농담겸 진담겸 하여왔다며 부부사랑에 대한 주위사람들의 이야기를 말없이 긍정하는 표정이다. 박옥자 여사가 남편과 함께 평생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시고 그 추모행사에 참석하고 돌아 온 후 반공적인 동포사회 정서 때문에 일어난 사건을 회고한다. 떠
교회 교우들 중에 그 누구도 유태영 목사의 방북을 달가워하는 사람들이 없어 외로웠고, 슬펐고, 두려웠던 것이 그 때의 일이었다고 박옥자 여사는 그날들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돌이켜 본다. 그래도 조문을 위한 방북을 달가워하는 교우들은 없었지만 그 중에 일부 교우들은 유태영 목사에게 퍼붓는 규탄행동을 막으면서 반공세력에게 다가가 “그렇지 마시라”고 만류하는 교우들 때문에 큰 위로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 때 상당히 많은 교인들이 다른 교회들로 떠났지만 80여명의 교인들은 그대로 남아주어서 목회를 할 수 있었고, 그후 6년 동안 마지막 목회기회를 가지고 일하다가 브롱스 교회생활 30년을 마감하고 후임 목사를 선정한 후 은퇴할 수 있었던 것은 남았던 교우들과의 끈끈한 관계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박옥자 여사와 유태영 목사는 이번 8순기념식과 책출판기념식에 교회를 떠났던 옛 교우들도 눈에 많이 띄어 기뻤다고 말한다. 이날 참석한 교우들은 유태영 목사를 가리켜 “진실한 목회자, 금전에 깨끗한 목회자, 사회정의감이 투철한 목회자, 옳다고 생각하면 굽히지 않는 목회자…” 등으로 평가했다. 박여사는 또 결혼생활 54년을 돌이키며 “목사님은 평소때 꼬장꼬장 하지만 마음이 여린점도 없지 않다”고 말하면서 평생 살면서 일상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울어본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1년에 한번 어머니 주간이 되면 그 때 설교할 때는 꼭 눈물을 흘리며 말씀했다고 상기시켜 준다. 유태영 목사는 그 가정 배경도 남다르다고 말한다. 대한예수교장로교신학교 동창회 명부에 외할어버지 이름 유해천(1924년졸업), 아버지 유동만(1940년 졸업), 그리고 유태영 목사(1955년 졸업)의 이름이 모두 명기되어 있어 3대가 모두 목사 가정으로 이어져 왔다. 그렇지만 유태영 목사가 5살때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5남매를 기르기 위해 어버니가 베틀을 짜고 옷을 해 입히며 청상과부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는 것이다. 어릴때 어머니에게 투정을 많이 부리며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하여 준 일들 때문에 무척 괴로워하는 표정이다. “형제자매들이 많은데에도 아플때면 약병아리를 푹끓여서 다른 형제자매들 눈치 채리지 않게 ‘어서 빨리 먹으라’고 하면서 병약한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고 말하며 전쟁통에 20살때 월남하여 헤어졌지만 미국에 와서 고향땅을 밟았을 때에는 이미 그 어머니는 무덤에 묻혀 있었다고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하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유태영 목사는 그래서인지 1980년대 초 “어머니”라는 시를 써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고, 어머니 주일에는 교회 교우들이 모두 함께 이 “어머니” 노래를 부르며 찬송가 대신 합창하였다고 설명해 준다.
그 사랑 언제나 나의 소망되었다 흙속의 새싹이 솟아 나오듯이 어머님 모습이 다시 그립습니다. 낮에는 땀으로 옷을 적신 어머님 밤에는 기도로 눈물 흘리시였다 생명의 지혜를 심어 주시였고 내일의 큰 꿈을 키워주셨습니다. 장구한 세월에 연륜 싸이는 동안 어머님 초상화 사뭇 새로와 진다 마음에 사무친 정든 고향으로 뜨거운 눈물의 기도 보내옵니다. 어머님 생존 지금 알길이 없어 불효한 옛날을 다만 참회합니다 지극한 그 사랑 삶의 빛이 되여 어머님 계신곳 멀리 바라봅니다 박옥자 여사는 유태영 목사의 ‘어머니’ 사랑은 지극하다고 말한다. 임헌정 선생의 작곡으로 노래도 만들어 불렀지만 “목사님은 어머님의 모습은 허리가 끊어지도록 일하시는 어머니, 손을 펴서 남을 도와주는 어머니라고 하시면서 효도하지 못하고 전쟁통에 돌아가신 것을 무척 애석하게 생각하며 어머니 생각하면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한다.
필자는 박옥자 여사와 대담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나 같은 사람 취재해서 뭘하느냐”고 겸손해 하면서 인터뷰 하지 말고 그냥 개인 대화하자고만 고집한다. 본인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쑥스러워하며 자신의 이야기보다 유태영 박사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꺼낸다. 아들 써니에 대해서도 별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아들은 이곳에서 학원 4개를 운영하며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유태영 박사의 입을 통해 박옥자 사모에 대해 들어 볼 수 밖에 없었다. 유 박사는 부인과 두살차이란다. 자신이 1930년 9월27일 신천 출생이고, 부인 박옥자 여사는 1932년 8월26일 사리원 출생이라고 말한다. 이북에서 부자집 딸이었다고 말하면서 “평양양말공장 사장 딸”이라고 밝히면서 8.15이후 사리원 여고를 졸업하고 친구들 3명이 서울 유학을 떠나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유학 중 전쟁이 터져 단신이 된 몸이었지만 숭의여자중고등학교 이신덕 교장이 부친과 잘 아는 사이라서 딸처럼 길러주었다
전쟁시기가 끝나고 고아들이 늘어나자 ‘송죽원 고아원’에서 원장으로 활동했고, 충무로교회에서는 성가대 대원 뿐만 아니라 각종 봉사일에 헌신해 왔기 때문에 박옥자 여사는 당시 8방미인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유태영 박사는 더 이상 부인에 대해 자랑하려고 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쑥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두 부부가 아직도 젊은이들처럼 속삭이고, 다정하게 대화나누며 아기자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역시 이들은 부부금실이 좋고 깨가 쏟아 지는 부부라는 것을 다정다감한 대화속에서 이들의 행동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유태영 박사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큰 힘이 되었던 그 배경에는 훌륭한 부인 박옥자 여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목회자의 아내로서, 조국통일운동의 선봉적 지도자로서, 그리고 동포사회 지도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에는 그의 부인 박옥자 여사의 뒷받침도 큰 몫을 차지했다.박옥자 여사는 또한 조국통일운동의 열렬한 동지이기도 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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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기]감동적인 유태영 박사 8순기념 및 출판기념식---손세영 민족통신 특파원
[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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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사람님의 댓글
뉴욕사람 작성일
관련보도 출판기념식 및 8순기념 행사 보도자료는 시애틀 한마당 게시판 아래에 있습니다.
http://www.hanseattle.com/main/bbs/board.php?bo_table=freeboard&wr_id=1772
기독신자님의 댓글
기독신자 작성일멋진 목사님 ^*^
귀한 목사님님의 댓글
귀한 목사님 작성일
우리시대에 꼭 필요한 귀한 목사님입니다.
험한 길, 가시밭 길을 마다하지 않고
용감하게 걸어가신 유태영 박사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며 후세에 큰 빛을 던져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