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박정희 죽었는데도 세상을 못 바꾼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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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감독이 <그때 그 사람들>(2005)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던 10·26 사건은 카리스마가 있는 독재자가 그의 최측근에게 살해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또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한 것이 계획적인 것이었는지, 이 과정에서 미국이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많은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지만 설령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지 않았더라도, 1970년대 말의 유신체제는 이미 종말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1970년대 들어 노골화된 군부독재체제의 구조적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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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1969년 3번째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켜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1970년대 들어 정권과 자본축적, 이데올로기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우선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반발하는 대중의 저항과 야당의 선거 약진에서 비롯된 정권 차원의 위기가 심화되었고, 저임금과 저곡가를 바탕으로 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과 민중배제정책, 물가상승과 국제수지 악화로 인한 자본축적의 위기가 뒤를 이었다. 게다가 베트남전쟁에서 기력을 소진한 미국이 1969년 닉슨 독트린을 선포하면서 냉전 상태가 일시적으로 이완되자 반공을 기반으로 한 통치이데올로기 위기까지 마주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런 위기를 1972년 종신집권체제를 골자로 한 유신헌법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극복하려 했지만, 반독재민주화투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었다. 긴급조치 1, 2, 7호와 9호를 연발하는 등 초강경 폭압정책을 펼쳐나갔음에도 1978년 12월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 1.12%P 더 많이 득표하기도 했다.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에서 치러진 선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민심은 이미 정권을 떠났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었다.
10·26사건이 일어난 1979년은 더욱 극적인 상황이 반복되었다. 1979년 8월 11일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점거 농성을 강제 해산한 박정희 정권은 10월 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까지 제명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10월 내내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대규모 항쟁을 촉발했고,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 오전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마산과 창원에는 위수령을 선포해 정국이 요동치고 있었다.
10·26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다. 아무리 김재규가 평소 박정희의 1인 지배체제에 대한 불만이 있었더라도, 정권이 안정적이었다면 살해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마항쟁을 목격한 김재규가 박정희만 없다면 독재체제가 허물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을 정도로 박정희 체제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준비된 전두환, 준비 안 된 민주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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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사망은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새로운 희망을 알린 소식이기도 했다. 18년간 무소불위의 독재체제를 구축한 박정희의 사망으로 인해, '민주시대'의 도래는 당연한 순서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는 종이집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었다. 박정희는 사라졌지만 유신체제를 떠받들던 국가폭력기구와 군부의 정보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게다가 위로부터의 박정희 암살이라는 독재체제 해체의 조건이 마련된 상황에서도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힘은 형성되지 못했다.
당시 민주진영의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국이 민주화냐 구체제로의 회귀냐의 갈림길에 서 있던 와중에도 민주진영은 정치적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당시 야당은 새로운 민주시대를 열 주체로서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유신체제에서 성장한 신군부세력은 달랐다. 군부에 대한 정보를 가장 광범위하게 수집할 수 있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장까지 겸임하면서 권력의 중추에 섰다.
그는 부마항쟁에 대한 해결책으로 김재규와 차지철을 동시에 제거하고 보안사가 주도해 새로운 개혁을 하자는 내용의 건의서를 박정희에게 보고하려다 10·26을 맞을 정도로 권력의 중심이 될 준비를 치밀하게 준비해 오고 있었다.
신군부는 10·26 이후 일사불란하게 12·12군사쿠데타를 비롯한 정권 장악 프로젝트를 실행시켜 나갔으며,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를 목표로 경쟁자들을 하나 둘씩 제거했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야당 지도자들이 이미 준비된 전두환을 이기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민주세력 중 유일하게 의미 있는 정치력을 발휘한 것은 학생운동세력이었다. 1980년 초 총학생회를 부활시키고 5월 들어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펼쳐나간 학생운동진영은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민주세력 참여 없는 개헌논의 중단을 요구하는 등 가장 정확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5월 15일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는 가두시위 철수 이후, 전두환 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했고, 결국 저항을 계속한 광주에서는 피의 살육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서울의 봄은 짧았고, 민주주의의 여름은 한참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대안 없는 저항의 한계
김재규는 그의 법정진술처럼 '유신의 심장'만 쏘면 독재체제는 저절로 붕괴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10·26사건과 뒤이은 서울의 봄의 좌절은 독재자 한명이 사라진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줬다.
만일 박정희 체제가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서가 아니라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힘으로 무너졌다면, 또한 당시 야당세력이 역사적 대의를 존중하고 학생운동진영 등 다양한 세력과 힘을 결집해 '박정희 이후의 대안'을 모색해 나갔다면, 신군부세력과의 대립양상은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80년 5월의 살육이 없었을 수도 있고, 1987년의 전환이 좀 더 빠른 시기에 도래했을지도 모른다.
저항에는 능숙하지만 저항 대상이 사라진 이후의 대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한 오늘의 정치세력 역시 30년 전의 상황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0·26사건과 뒤이은 정치과정이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은 '대안을 내포한 저항'만이 지금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10.10.26 14:01 Ohmynews 손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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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돼지님의 댓글
돼지 작성일
독재자는 가고 독재자의 딸이 차기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라는 현실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참 황당한 현실이 아닐수 없읍니다.
역사님의 댓글
역사 작성일
박정희와 함께 박근혜도 지난 페이지의 역사 속으로 묻혀졌어야 했다.
독재자를 도운 딸이 뭐 잘난 데가 있다고 국민을 우롱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