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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적들은 어떻게 다시 민주주의 속으로 돌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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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북새통선생
댓글 0건 조회 3,675회 작성일 10-11-1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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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적들은 어떻게 다시 민주주의 속으로 돌아왔는가?
(블로그 ‘우리의 세상 아름답게’ / 북새통 선생 / 2010-11-11)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주의에 성공한 것이 맞는가? 요즘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다. 즉답을 할 수가 없다. 우리 피부가 느끼는 분위기상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에서 말하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라는 말이다.

분명히 우리는 민주주의에 성공했다고 자부했는데 내가 숨 쉬는 공기에는 독재의 악취가 가득하다. 어디선가 스며 나오는데 분간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적은 어느새 다시 우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그 모습은 크게 변형되었다. 못 먹는 시절에는 사람을 때리고 패야 바른말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감옥에 들어가도 민주주의를 외친다. 그래서 급기야는 자살을 가장한 타살까지 이루어지고 공권력의 폭력 속에 평범한 시민이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데 지금은 변했다. 그 시절 독재나 지금의 독재나 정도는 똑같으면 똑같지 덜하지 않다. 그렇다. 우리는 불과 20년~30년 전의 독재보다 어쩌면 더 지독한 독재에 유린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 독재에 대한 저항은 그 시절 그때보다 한참이나 뒤처져서 노예의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는 정말 노예일까? 배고픈 자유민에서 어느새 배부른 노예가 된 것이다. 산업화의 성공은 민주주의 적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우리는 산업화에 성공해 이제 물질적 풍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결코 누구 하나 작은 불편을 쉽게 감수하지 못한다. 독재를 아는 놈들이 국민의 약점을 파고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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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우리는 배고픈 자유민에서 어느새 배부른 노예가 된 것일까?

독재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이렇다.

첫째, 국민 모르게 한다!

그래서 언론장악은 첫 번째 과제였다. 정권의 패악질은 뉴스에 나오지 않게 한다. 그럼 뉴스는 무엇으로 대체하나? 정권이 흥행을 찾아 홍보에 앞장서는 이유이다. 건수만 있으면 그 뉴스만 부풀린다. 국민을 소몰이하듯이 그 뉴스 속으로 몰아붙이는 게 정권의 목표다. 천안함 사건이 그랬고, 이제는 G20이다. 국민을 모르게 하고 정권이 원하는 것만 보여준다. 이게 첫 번째다.

둘째, 바른 소리 하는 국민의 밥줄을 끊는다.

대한민국 그래도 알게 모르게 식자들 많다. 유식한 사람들 많다. 그렇게 어수룩한 사람들 없다. 그런데 입을 다물고 있다. 약점 단단히 잡혔다. 아는 대로 말했다가는 밥줄이 끊긴다. 하려던 꿈을 접어야 한다. 회사마저 강제적으로 헐값에 넘길 수밖에 없다. 사원이 살려면 사장이 그 회사를 포기해야 한다. 가족을 먹이려면 가장은 입 닥쳐야 한다.

개인 혼자만의 빈곤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주변의 빈곤마저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에는 빈곤이 두렵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는 어머니, 아버지들의 그저 몸 건강하라는 걱정이 최고의 걱정이었다. 그러니 정권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자신의 자식을 바른 소리 하는 것으로부터 뜯어말리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자식의 몸을 두들겨 패야 했다. 폭력적 공권력이라야만 효과가 있었다. 다른 수단 별로 없었다.

요즘?

독재의 수단은 산업화의 열매 속에 파고들었다. 경쟁의 시대에 뒤처지는 것은 대단한 두렵다. 그 두려움을 민주주의 적들이 철저히 이용하며 농락하는 것이다.

셋째, 민주주의로 서서히 자신들의 권력을 잃었던 독재 권력의 잔존물들이 약진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민주주의는 일정 정도 권력의 해체를 요구한다. 특히나 독재 시절은 독재자만이 권력자는 아니다. 물론 무소불위의 권력자는 독재자지만, 국민에게는 그 독재자의 하위 통치기관들의 권력이 더 피부에 와 닿는 권력들이다.

검찰이 그렇고 경찰이 그렇다. 그들은 독재의 밑에서 누리던 온갖 특혜와 부당한 폭압적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이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독재에 충성경쟁을 펼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재의 향수가 그리운 것이다. 다시 자신들 과거의 부당한 권위를 찾고 싶은 것이다. 잃어버린 왕좌를 독재자에게 바치면 자신들은 칼 차고 대로를 활보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국민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독재가 없는 것 위에서 이루어진 독재라면 지금은 무엇인가 있는 것 위에서의 독재이다. 억압할 곳이라곤 저항하는 사람의 몸뚱이밖에 없던 시절을 떠나 이제는 억압할 방법은 저항하는 사람의 몸뚱이 이외에도 얼마든지 많아졌다. 일정한 경제적 부의 창출과 더불어 국민은 경제의 노예가 되었고 그것은 독재가 자신의 통치수단으로 이용하기에 효과적이란 말이다.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서열이 그리운 그 밑의 하부기관들이 이때를 노려 과거의 향수를 불태울 기회를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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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상의 그림세상

더불어 우리가 참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아직 남아있는 독재의 종지부를 찍는 수단이 있다. 선거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2년 남았다. 지금 모든 것을 잃느니 2년만 참았다 바꾸자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자신들의 말로가 너무 비참할 것을 예상해 헌법상 남은 마지막 수명을 연장하고자 하려면 그때는 사람들이 결코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유가 우리들의 믿음에 보답할까?

사람들은 순진하게 믿고 있다. 레임덕이 오면 갈 곳은 감옥밖에 없다. 분명 응분의 대가를 치룰 것이다. 과연 그럴까?

국민들의 그 바램을 모르고 있을까? 우리 국민은 단순히 숨죽이며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바라고 있고 꼭 그렇게 될 것을 믿고 있지만, 저들은 그리되지 않기 위해 지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하드도 백주대낮에 지워버리지 않았나? 증거인멸은 아주 작은 부분이다. 국민들이 모르는 온갖 장치들이 독재의 마지막 순간에 그 독재의 결과물들을 그대로 취한 채 고스란히 국민들 위에 군림하여 남은 여생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설치되고 있을 것이다.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순진하고 독재자가 응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란 믿음도 한가한 교만일 뿐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이 만들어 놓은 것은 박정희의 아이들인 전두환과 노태우였고 그들은 박정희가 미화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보장했다. 2000년대 화려하게 등장한 박근혜는 1980년 순진했던 우리 믿음이 배신당한 또 하나의 결과물인 것이다. 독재자는 은밀히 잘 보호되었지 결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교묘한 독재에 취약한 국민들이다. 사람이 죽지 않아도, 맞지 않아도, 우리를 독재에 숨죽이는 노예로 만들 수단들이 너무나 많이 노출된 우리들, 우리의 넓어진 삶의 영역은 우리들을 독재에 저항하기에는 너무 많은 족쇄를 찬 인간들로 만들었다. 경제적 부를 독점하는 대기업과 국민의 눈과 귀를 거짓으로 농락하는 거대족벌언론과 독재 정권이 결합된 구조는 그들 사이가 벌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독재 권력에 너무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한 세대 만에 이룩한 민주주의는 아직 과거의 독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독재의 기억이 죽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서 세대가 바뀌고 공고화되어 독재의 유전자가 모두 땅속에 묻히기 전에 독재의 유전자들로 가득한 뇌 구조를 가진 사람이 권력을 잡았고 그 기억을 공유하는 자들이 밑에 포진하면서 우리는 독재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세대 만에 이룩한 산업화는 그 독재의 유전자들이 활개를 칠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독재의 방법을 규정하기 어렵게, 모호하게, 숨어들어서, 때로는 독재가 아닌 것처럼까지 모양새를 바꿀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변형과 억압의 수단들로 살아있는 독재의 기억들이 다시 부활할 공간을 만들었다.

물론 저항의 기억들도 살아있다. 하지만 저항의 기억들은 이미 늙었고 다른 삶의 이유들에 굴복해서 오랜 시간 지나 추억이 되던 순간에 독재의 기억이 부활한 것이다. 그리고 저항의 기억들은 그 저항을 되살리기에는 너무나 다른 환경이 되어버렸다. 독재의 기억들이 무너진 자신들의 독재를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켜 헤게모니를 장악한 순간에 저항의 기억들은 미처 대비를 못 한 것이다.

민주주의 꽃 속에, 경제적 자유의 열매 속에, 독재는 다시 똬리를 틀고 우리는 그 속에 옥죄여 뒷목부터 독재의 날름거리는 한 입에 제물이 되는 것도 모른 채 먼 허공을 바라보며 이 삶의 척박함은 자신이 경쟁에서 낙오했다는 개인적 푸념의 어리석은 진단 속에 그저 우울해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북새통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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