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대담]이활웅 선생: ≪북한이 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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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대담]이활웅 선생: ≪북한이 남이 아니다≫
"북미관계, 남북관계 동시개선 이뤄져야 한다"
노길남 민족통신 편집인은 지난주말 이활웅선생과 탐방대담을 가지면서 "노장 문필가 이활웅 선생은 앉으나 서나 “통일”에 관한 관심에 가득차 있었다. 지난 주말 이활웅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선생의 삶과 지나 온 발자취에 대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참 의미있는 만남이었다. 30년 가까이 같은 지역에 살면서 행사때나 만나 인사하거나 아니면 세미나 같은 행사 때 선생의 발표를 듣는 기회들은 많았지만 이번처럼 살아 온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고 그의 가슴에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다" 라고밝히면서 장시간 주고받은 이야기를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2010-11-15]
민족통신
[탐방대담]이활웅 선생: ≪북한이 남이 아니다≫ "북미관계, 남북관계 동시개선 이뤄져야 한다" 노장 문필가 이활웅 선생은 앉으나 서나 “통일”에 관한 관심에 가득차 있었다. 지난 주말 이활웅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선생의 삶과 지나 온 발자취에 대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참 의미있는 만남이었다. 30년 가까이 같은 지역에 살면서 행사때나 만나 인사하거나 아니면 세미나 같은 행사 때 선생의 발표를 듣는 기회들은 많았지만 이번처럼 살아 온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고 그의 가슴에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다.
나는 이활웅 선생을 향해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워낙 나는 성깔이 있어 일은 적지 않게 하고서도 순간 때문에 허무는 일들이 몇차례 있었다”고 고백하면서 “선생님은 부부싸움이나 누구랑 다투는 적이 없으시죠?”라고 말을 꺼내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아마도 내가 노선생 보다 더할꺼요, 그리고 부부생활도 57년이 되었는데 왜 싸움이 없겠오. 많이 했지요. 실은 나는 토론을 하건 무엇을 하건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기질을 가졌지요.”라고 대답한다. 나는 성깔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활웅 선생이 “아마도 내가 노 선생보다 더할꺼요!”라는 대목에 배꼽을 쥐고 웃고 또 웃었다. “아 이 세상에 이렇게 온순하게 보이시는 분인데 나보도 더하다고 말하는 분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얼마나 웃었던지 눈가에 눈물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날 이활웅 선생과 주고 받는 대화중에 필자가 성깔 때문에 낭패를 보았던 몇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대화가 무르익어갔다. 책상위에는 홀랜드 맥주 ‘하이네켄’여러병이 벌써 빈병으로 놓여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 올랐다. 이 선생은 “내가 술에 취해 안할 말 할말 막 쏟아 낸다.”뱉은 이야기들 일부는 쓰지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하며 가슴에 있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런데 그 중에 한가지 만은 써야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온화한 분인줄 알았는데 그는 역시 욱하는 기질이 어릴때부터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초등학교(당시에는 소학교) 4학년때가 일제시대(1940.3.15)인데 그 때 이즈미라는 담임선생이 조선학생들 앞에서 툭하면 “너희들은 돼지 새끼들이다.”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하여 그것 때문에 늘 속상하게 생각하여 왔는데 하루는 동급생들 80명이 담임선생으로부터 야단을 맞으며 “학교를 그만둘라면 그만 두라”고 호통을 치고 교실을 떠났다. 그 때 학급 반장을 맡았던 이활웅 소년은 학생들과 토론을 벌인후 “그러면 다 같이 자퇴를 하자”고 결의하고 집단행동을 인도한 후 “집에 가서는 부모들 한테 절대로 말하지 말고 내일 아침 나진극장 앞으로 등교시간에 그리로 모이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이틑날 아침 극장앞에는 동료들이 약속을 깨고 부모들에게 말하는 바람에 대부분 부모들과 같이 극장 앞으로 나와 그 부모들로부터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라고 회고한다. 그 집단행동은 일단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처벌은 없었다. 그 다음 학기에 일본선생 이즈미는 어디로 간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좌천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활웅 선생에게 최근 정세를 묻기 전에 그의 삶의 발자취를 알고 싶었다. 그는 조선이 일제에게 먹힌지 15년째 되던 해에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들이 일제 때 중국 간도지역을 가는 바람에 그곳에서 출생했다. “4살때 조선에 이주해 함경북도 웅기(지금의 선봉: 나진서 40리 북쪽)와 그 인근 나진시에서 성장했고, 해방후 남녘으로 내려와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6.25 때 육군 정훈장교 3기로 입대했으며, 1955년 외무부 채용에 따라 대위로 예편했다.”라고 말한다. 이활웅 선생은 동생과 누이동생이 있고, 결혼은 1953년 10월에 중매로 했는데 그 당시 전방근무를 하다가 후방, 마산으로 가서 근무할 당시 동료가 한 여성 직장인을 소개하여 몇번 만나다가 결혼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그가 임관해서 만2년 동안 일선에서 근무하고 후방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외무부 시험에 합격하여 1956년부터 외무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재직중 한일회담, UN ECAFE 총회, UNCTAD 총회, UN 77구룹 총회, 한일무역회담, 한중무역회담, 한월무역회담, 동남아지역 무역사절단 등에 참가해 활동했다. 한편 외무부에 근무하면서 뉴욕 총영사관 영사로, 다시 한국을 가서 근무하다가 캄보디아에서 근무했다. 그 이후 다시 로스엔젤레스(1968년-71년)에서 영사로 근무하다가 현지에서 사임하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면서 재미동포가 되었다. 이활웅 선생의 마지막 학력은 뉴욕대학(NYU)에서 1961년 2월에 국제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이북에서 약초소학교를 나와 나진중학교 5년제를 졸업하고, 그 이후 만주 장춘에 있는 전문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외무부 근무시절 뉴욕에 가서 그 당시에 뉴욕총영사관 영사로 재직하면서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사실은 이어서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하던 중 5.16군사반란이 일어나 뉴욕총영사관에 외무부 출신 총영사가 있었지만 군인이 나와서 좌지우지 하는 바람에 마지막 학위를 끝낼 수 없었다. 그 당시 한국 외무부에 그러한 군인출신들 25명이 대거 들어와서 영향력을 주었기 때문에 그 당시 외무부 직원들은 그들 25명을 가리켜 “25사단”이라고 불렀던 시절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이름석자가 재미동포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에 대하여 그는 “1984년부터 현재까지 통일문제를 위주로 기고 활동을 해 왔다. 주요매체로 코리언스트릿 저널, 크리스천헤랄드, 한국신보, 뿌리, 코리언뉴스, 민주조국, 세계신보, 미주현대불교, 뉴 라이프, 코리언 저널, 시사주보, 통일마당, 코리언 드림, 민족통신, 통일뉴스, 한국기자협회보, 라성 한국일보, 미주 동아일보, 미주 중앙일보, LA Times, Nautilus Institute 등 총 4백여 편의 글들을 기고했다.”고 돌이켜 본다. 그는 또한 영어 문장력이 뛰어나 미국 주류사회 연구소 홈페지를 통해 한반도 평화문제, 북미관계 문제 및 통일문제에 관한 영문 원고도 많이 기고하여 발표한 바 있었다. 그의 최근 도서 ≪평화통일은 비기는 통일이다≫(2007년 10월31일 통일뉴스 출판))를 통해서 이활웅 선생은 “나이가 퍽 들어서 나는 ‘통일지향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남북문제와 통일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의식을 가다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부하고 생각 한 것을 글로 적어서 정리해 두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미국 내 동포언론에 독자투고를 몇 번 해봤다. 그랬더니 로스엔젤레스의 시사주간지 ‘코리안 스트릿저널’에서 정기적으로 칼럼을 써보라고 제의해 왔다. 그러자고 했다. 이것이 제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서투른 글을 쓰게 된 경위이다.”라고 밝힌다. 그는 이러한 동기와 계기에 대해 1984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올림픽대회를 떠 올리며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때, 처음에는 북한도 온다고 했어요. 나대로 북한 선수들이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온다고 하니깐 가보아야 하겠다. 남한, 북한 경기를 다같이 응원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개회식 입장권을 비롯해서 남과 북의 경기들을 예상하여 미리 경기 관람권을 사놓았다. 그 다음에 응원할 때 무슨 깃발을 들고 응원하느냐에 고민했다. 내 나름대로 응원할 수 있는 깃발을 구상하고 미술가 이명수씨에게 부탁해서 그 깃발과 들어 글씨를 넣어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한반도 지도에 양편에 ≪통일≫이라고 쓴 로고를 만들어 준비했고 그것을 자동차 뒤 범퍼에 부착하고 다녔다. 주위에 있는 분들도 그것을 달라고 하여 주었더니 차 뒤에 붙이고 다녔다.”고 설명해 준다. 바로 그 때부터 그는 남과 북에 대한 통일문제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 생각들을 정리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1990년 제1회 범민족대회 미주동포 대표단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며, 1995년에 ‘통일마당’이라는 동아리 조직에 창설회장으로 선임되어 약 1년 동안 활동했다. 현재에는 통일뉴스 상임고문 및 ‘6.15공동선언실천 미주본부’ 고문으로 있다. 그의 그 동안 저서로는 기고문집으로 ≪통일의 뜻과 통일의 길≫(1993), <<그렇다, 그들도 우리들이다>>(1996), ≪비기는 통일의 구상≫(1999), ≪미군이 나가야 통일이 된다≫(2002), 그리고 ≪평화통일은 비기는 통일이다≫(2007.10.31) 등이 있다.
대화중에 그리고 맥주를 나누면서 “역시 그는 말술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노선생이 마셔야 나도 좀 마시지요”라고 말하면서 화장실과 부엌을 출입하면서 맥주들을 자꾸 꺼내서 권한다. 이날은 웬지 술을 잘 못하는 필자도 얼근해 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 주고 받은 대화들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을 요약하여 노트북에 부지런히 입력하기도 했다. 질문한 내용들과 대답한 내용들을 아래와 같이 요약하여 정리해 본다. [질문]외무부 근무시절 분단문제에 대한 생각은 ? “나는 외무부에 근무할때 해외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한국 여권을 갖고 다니면 존경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분단국가에서 나온 외교관들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비치는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다. 국제회의에 가보니깐 더욱 더 그렇했다. 남북이 갈려져 있다는 것을 다른 나라사람들이 보는 시각이 곱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말해 분단국가 외교관으로 다니는 것이 부끄러웠다. 통일이 되어야 남들이 제대로 볼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질문]1984년 올림픽때 북한이 참석하지 못한데 대한 추억은? “공산권 국가들이 대부분 참석하지 못했고, 북한도 불참한 것이 무척 아쉬웠다. 그렇지만 사놓았던 입장권을 가지고 개막식과 일부 경기들을 관람했다. 그런데 입장식에서 멋있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미국과 중국 외교수립 이후 처음으로 중국(전에는 중공)이 미국에서 열리는 올림픽대회에 참가했다. 그 때 소련이 아프간 진출 반대해서 서방측이 반대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서방권과 공산권사이에 갈등이 있어 대부분 공산국가들은 올림픽 참가를 보이코트하였던 관계로 공산권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중국만이 참가한 상황이었다. 그 때 나는 각 나라들이 입장식을 할 때 타이완(대만)이 경기장에 들어오는 순간 중국(중공) 대표단 선수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그것을 보고 무척 감동되었다. 그 감동에 대해 글을 써 동포사회 언론에 기고하면서 다음 올림픽인 서울88올림픽을 남북이 공동개최하면 어떤가, 선수들도 공동으로 참가하면 어떤가 등의 내용들을 담았다. 당시 미주한국일보에서 내 글을 싣기는 하였는데 중요한 부분은 빼고 실었다. 그래서 그 글의 원문을 다시 코리안 스트리트 저널, 한국신보 두군데 보냈다. 이 두 언론은 원문 그대로 다 실어 주었다. 사실은 이때부터 글 쓰기를 시작했다. 그 당시 도무지 통일에 대해 글쓰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기에 통일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던 시대였다. 통일이라는 말조차 금기시 하였던 때라고 기억된다. 나는 그 때부터 미주 땅에서 코리안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하여 현지 언론에 기고활동을 시작했다.” [질문]남북관계,통일문제 주로 쓰셨는데 북한에 대한 생각은? “통일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남한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나 다 같은 ‘우리들’이라는 매우 단순하지만 엄연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나는 6.25는 남북이 서로 벼르던 전쟁인데, 그토록 ‘북진통일’을 외치던 남한이 북이 먼저 쳤다고 아직도 ‘불법남침’이라고 단죄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또 미국이 남한을 적화일보 직전에 구출해 준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은 스스로의 장기적 국익을 위한 고도의 전략적 견지에서, 북의 남침을 유인했을 뿐 아니라 당초부터 인적 물적 피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이끌고 확대해 갔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그리고 미국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질문]분단된지가 60여년, 해내외 동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나는 해방된 지 60여년이 지나고 휴전된 지도 반세기가 훨씬 넘는 지금까지, 또한 2차 대전 후 분단됐던 다른 나라들은 다 통일된 마당에도, 대결상태를 유지하면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남북 양쪽의 지도자들과 국민이나 인민들에게, 이제 미움을 거두고, 꼭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서로 “비긴다”는 차분한 자세로 평화통일을 이루기를 호소한다. 그리고 통일된 우리 나라는 반드시 사회주의래야 한다거나 아니 시장경제체제의 자유민주주의래야 한다고 고집하지 말고,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자주’, ‘평등’, ‘근대화’ 및 ‘시민적 자유’라는 소중한 가치들을 균형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우리 나름의 독특한 체제를 추구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을 주장한다. “남녘의 자랑인 민주화세력은 미국의 젖을 먹고 살찐 사대군부의 30여년에 걸친 반공반북독재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최근 10년간(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기) 남북화해 협력을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에서 몰아치는 광풍이 멎지 않는 상태에서 남한의 햇볕만으로 외투를 벗어 던질수는 없었다. 이를 트집잡아 워낙 뿌리 깊은 남한의 반통일 세력은 호시탐탐 권토중래의 기회를 노려왔었다. 그러던 중 2007년 남북정상간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도 교류협력과 무력충돌방지에 역점을 두면서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그 성과들은 무참하게 원점 이전으로 되돌아 갔다. 안타깝다. 이제 남과 북 해외동포들이 더 한층 열심히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였으면 좋겠다.” [질문]이명박 정부에 대한 생각과 기대는? “그 동안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을 보면 남은 임기 동안 그렇게 기대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한반도 문제 변수는 북미간에 6자회담을 비롯하여 북미 당사국간에 평화협정이 맺어지는가, 그리고 북미간의 국교정상화가 이뤄지는가에 더 무게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남북관계는 향후 창출된 정권이 어느 정권이 될 것인가에도 주목될 것으로 본다. ” “이명박 정부가 있는 한 남북관계 진전은 어렵다고 본다. 통일문제에 있어 기본적으로 누가 ‘우리’이고 누가 ‘남’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북한이 아무리 이런일 저런일 잘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일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뭐니 뭐니 해도 남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한미군은 통일의 장애물이다. 통일의 대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 문을 잠고고 있는 빗장이 바로 주한미군이다. 이것이 없어져야 통일이 된다. 그런데 한국 정치인들은 주한미군 나간다면 마치도 내일 아침 태양이 뜨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이 큰 문제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에 브르수 커밍스가 쓴 도서, ≪The Korean War(Modern Library Chronicles)≫를 읽고 있는데 그것은 1930년대 일본이 만주국 괴뢰정부 세웠을 때에 생긴 그 때 한국사람과 일본과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확대되어 지금은 일본 대신 미국이 대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항일투쟁시대가 항미투쟁시대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우리 민족 분단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명박 정부가 북을 악으로 보는 것도 그 맥락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이명박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나는 통일의 눈으로 볼 때 이명박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남과 북, 해외동포들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때가 지나면 지날 수록 통일은 멀어질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질문]북미관계 전망은?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핵위협이니 뭐니 하면서 계속 위협해 왔고, 또 그것을 정당화 해 왔다. 한편 북한의 입장으로서도 미국의 이러한 대북적대시 정책에 대해 군사적으로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을 평화적 분위기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바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었다. 그 시기의 남한 당국의 대북정책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평화적 분위기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앞으로 6자회담 성사문제, 그리고 9.19성명으로 동북아 지역안보문제 등으로 주한미군의 지위와 역할이 어떻게 변화하겠는가가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영향으로 나타날 것 같다.” “나는 전부터 생각해 온것이 있다. 미군을 남한에서 뽑아 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북한은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는 한 곤란하다고 주장해 왔다. 내 생각으로는 주한미군의 성격이 북한을 적으로 삼는 미군이 아니라 북한을 적으로 삼지 않는 미군, 즉 동북아 안정을 위해 동북아 평화유지군 일환으로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상황을 상정해 본다. 9.19성명이 알다시피 북-미관계정상화, 북일관계정상화, 동북아 안보체제를 논의하기로 명문화 되어 있다. 이것이 원만하게 풀리면 북미관계가 휴전협정-평화협정으로 바뀌면서 미군의 지위와 역할을 달리하는 방향에서 상호교섭할 수 있는 여백도 없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미관계나 남북관계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서로 상호작용, 혹은 반작용을 하기 때문에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관계 개선이 동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 *이활웅 선생님 많은 시간 내주시고 맥주까지 나누면서 서로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좋은 생각들을 후진들에게 많이 나누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건강 돌보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20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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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꾼님의 댓글
통일꾼 작성일이활웅 선생님.....해외 교민들에게 통일의 꿈을 심어주는 귀한 분이로군요. 비기는 통일... 모두가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