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위해 요리할 때,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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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아침부터 바쁩니다. 지호를 학교에 떨궈 주고, 다시 집에 돌아와 이번엔 작은아들 지호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할 일들을 챙겨봅니다. 지호가 전학해야 할 학교에 가봐야 하고, 내일부터 쌀 도시락 장을 봐야 하고, 이번 주말에 있을 ME 총회 초청을 위한 편지를 작성해 띄워야 하고, 아내의 자동차 브레이크 손을 봐줘야 하며, 그리고 나서는 운동도 좀 다녀와야 할 듯 하고, 내일 있을 클래스의 시험 준비도 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든 시간들입니다. 오후엔 아이들이 태권도에 가는 날이니, 아마 모르긴 해도 그때 시험공부를 해야 할 듯 합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에서 공부하면서 시험준비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겠지요. 아참, 지원이를 학교에서 데리고 와야 하는 것을 잊었군요.
일들이 이렇게 꼬리를 뭅니다. 할 일이 많다는 것, 괜찮은 일입니다. 그만큼 시간을 채워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잡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되지만, 사실은 뛰면서, 혹은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생각들이 더 많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저는 우체부이기에, 매일매일 많은 거리를 걷습니다. 특별히 다리가 아프거나 해서 신경쓰이지 않는다면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과거에 '소요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은 걸으면서 받는 발의 자극이 뇌를 자극한다는 것을 이미 체험으로 알았던 듯 합니다. 걸으면서 이야기하고 그들의 생각을 모았던 게지요. 저 역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소요학파의 후예가 된' 셈입니다. 우편물을 나르며 걷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이 듭니다. 과연 내가 이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에서부터, 그냥 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들에 대한 생각들까지, 그리고 걸으면서 만나는 반가운 사람들과의 교류까지도,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쉬는 날은 아이들에게 점심을 준비해줘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후다닥 점심을 만들어 내는 것도 하나의 이력이 됐습니다. 어떤 날은 아이들 좋아하는 피짜나 치킨 베이크 같은 것을 사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저는 제가 점심을 만들어내는 것을 즐깁니다. 물론 할 줄 아는 요리는 뻔할 뻔자입니다. 대부분은 많은 정성 들여야 하는 요리보다는 간단하게 뚝딱 만들어낼 수 있으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파스타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종류는 늘 크림파스타. 아빠는 아이들의 취향을 살펴서 푸질리나 펜니, 혹은 스파게티나 페투치니 등을 만들어 냅니다. 크림소스 펜니는 그런 면에서 제겐 손에 익을 대로 익은 요리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집에 손님이 와도 저는 이런 걸 만들어 냅니다. 정말 손에 익은 게지요.
일단은 오징어를 냉동고에서 한 마리 꺼내옵니다. 얼른 다듬어서 내장을 빼 내고 씻어 놓습니다. 냉동고를 뒤져보니 홍합과 새우가 나오는군요. 아예 해물로 가기로 작정을 합니다. 마늘과 올리브 기름을 넣고 함께 볶아 주다가 향초와 파마잔 치즈를 부어 녹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준비해 놓은 해물들을 부어 함께 볶고, 그 시간동안엔 펜니 파스타를 팔팔 끓고 있는 소금물에 부어 파스타를 준비해 둡니다. 펜니는 펜촉같이 생겨서 펜니라는 이름이 붙었다지요? 여기에 와인을 조금 부어줘 잡맛을 빼야 하는데, 이래저래 살피다가 펜들럼이라는 워싱턴주의 신흥 와이너리에서 내 놓은 피노 그리를 맞춥니다. 으음... 약간 기후가 충분히 덥지 않다면, 가끔 피노 그리(지오)는 약간의 짜다 싶은 맛도 내기 마련입니다. 향은 바로 올라오진 않지만, 일단 흔들어서 깨워 보니 가벼운 과일, 특히 멜론의 향이 풍깁니다. 산도는 보통 미디엄에서 약간 높은 정도를 보이지만, 이같은 산도는 음식과 어울리는 데에 있어서, 특히 이런 크림 파스타와 함께 하는 데 있어서는 괜찮은 조건이 됩니다. 구조가 상당히 단단한 와인입니다.
자, 다 볶아진 재료에 와인을 조금 따르니 포도 향이 확 풍깁니다. 알콜도 날아가고... 여기에 알프레도 소스를 부어줍니다. 그리고 다시 치즈 조금 첨가. 그 동안에 국수는 푹 익습니다. 이제 잘 익은 국수에서 물을 따라내고 나서 약간의 올리브 기름을 쳐서 국수들이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하고, 소스 붓고 나서 파마지아노 치즈 뿌리면 시식 준비 끝. 조금 전에 딴 피노 그리를 맞춰 봅니다. 산도는 역시 기분 좋습니다. 오히려 어지간한 레드와인보다 강건하다는 느낌마저도 오는 이태리 스타일의 피노 그리입니다. 말 나온 김에 이태리 와인도 하나 열어서 맞춰봅니다. '포지오 스텔라'라는 와이너리의 로소 디 몬테풀치아노. 편안한 로소입니다. 음식과의 궁합은 좋지만, 역시 레드는 오히려 피짜나 스파게티에 맞추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 줍니다. 톡 튀는 것 없이 부드럽게 음식과 잘 어울려주는 와인입니다.
아빠는 이렇게 음식을 준비할 때가 참 신납니다. 여기에 와인을 맞추고, 내 생활을 반추해보게 됩니다. 얼른 빠른 시간 안에 이런저런 것들을 소나기처럼 해야 하지만, 이때가 살아 있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 그리고 손님들이 흐뭇해 하는 것, 이런 모습 속에서 다시 확인해보는 내 존재의 이유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일까요. 아, 적당히 짭조름하며 해물향이 가득 밴 크림소스 파스타와 와인의 궁합에서, 나는 내 삶의 소중함에 대해 문득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 비록 장식물처럼 힘든 순간들이 삶에 달리게 되지만, 그래도 사는 것은 아름답고 기쁜 일입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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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권종상 님의 파스타.....참 맛있어 보입니다.
벌써 저녁때가 되어서인지
배도 출출............. 부엌에 뭐가 있나 살펴봐야겠군요..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함께 할 가족들이 있다는 일은 참 행복한 일이 아닐까요.
조조님의 댓글
조조 작성일
맛있어 보이내유....
아이들을 위한 상에 부부를 위한? 와인이
더 돋보이내유.....파스타,새우 그리고 와인...맛 있겠다.
ECK0206님의 댓글
ECK0206 작성일
요리를 관심있게 만들어내는 남성들은 대부분 지능지수가 매우 높다고 합니다.
근거 있는 통계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