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의 타계, 그리고 지식인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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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상>을 읽다 말고 너무도 두려워져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괴로움에 떨면서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고등학교까지의 주입식 학교교육으로 구축된 신념 체계가 저의 내면세계에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거꾸로 서 있던 온갖 사물과 관계와 색깔들을 제 모습, 제 색깔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차라리 두려움과 형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한 대학생이 당시 리영희 한양대 교수에게 보낸 편지다. 우익 독재, 폭력, 반공주의를 내면화했던 당대의 한국인들은 사회의 모순을 들여다볼 눈이 없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관념은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한 세대쯤 뒤처져 있었던 한국인에게 삶의 준거가 되지도 않았다. 야만의 시대를 살던 한국인들은 그것이 야만인 줄도 모른 채 하루하루 지친 삶을 견뎌내야 했다. 그가 폭압을 가리고 있는 우상의 장막을 걷어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상식과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신념 아래 그는 말하고 썼다. 그의 글을 읽은 젊은이들은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던 것들이 허구였음을 깨닫고 전율했다. 진실을 발견하고는 두려움에 떨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비로소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밀알이 되겠다고 활동하다 체포되고 갇혔던 수많은 이들이 그의 책 때문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는 생각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했다. 냉전의 얼음 속에 동결되었던 한국인에게 이성, 상식, 생각, 실천이라는 불을 전해준 그는 한국의 프로메테우스였다. ‘사상의 은사’였고 ‘우상의 파괴자’였다. 또한 그는 글을 통해, 그리고 자신의 글을 읽은 수많은 이들을 통해 이 세상의 변혁에 헌신하는 숱한 전사들을 낳았다는 혐의 때문에 ‘의식화의 원흉’으로 불리기도 했다. 모두 그의 역할에 값하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거짓과 우상에 의해서만 통치할 수 있었던 지배세력에게 그런 역할은 엄청난 반역이요, 범죄였다. 그 때문에 그는 네 차례의 해직, 다섯 차례의 구속을 거쳐서야 그 시대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맨몸으로 맞서야 했던 그는 결국 여러 가지 질병을 얻었고, 어제 새벽 오랜 병마에 시달린 끝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언론사에 남는 탁월한 기자였으며, 새로운 지평을 연 학자였고,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던 한 노지식인이 자기 책무를 다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민주화 이후를 사는 세대들은 이제 그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수확하는 자로서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기억은 추억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현대사가 낳은 위대한 지식인의 심장의 고동은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낡아버린 것들에 집착했던 흘러간 시대의 지식인이나, 고루한 선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맞섰던 상대, 즉 시장·자본·미국이라는 우상은 아직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우리의 삶 깊숙이 머물고 있는, ‘지금, 여기’의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의 수사는 넘쳐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실체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 또한 멀기 때문이다.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모순,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가치, 그가 추구하던 인간다운 사회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가 매달렸던 과제들의 많은 것들은 살아 남은 이들이 마땅히 물려받아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성찰의 시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왜 동시대의 지식인들은 그가 하던 것들, 그가 이룬 것들에 좀처럼 미치지 못하고 있는가. 물론 한 인간의 전형을 이룬 그의 삶과 철학을 따라하긴 어렵다. 게다가 동시대의 과제들은 더 까다롭고 복잡하고 모호하고 어려워졌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들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는 말했다.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1970년대 한 대학생이 당시 리영희 한양대 교수에게 보낸 편지다. 우익 독재, 폭력, 반공주의를 내면화했던 당대의 한국인들은 사회의 모순을 들여다볼 눈이 없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관념은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한 세대쯤 뒤처져 있었던 한국인에게 삶의 준거가 되지도 않았다. 야만의 시대를 살던 한국인들은 그것이 야만인 줄도 모른 채 하루하루 지친 삶을 견뎌내야 했다. 그가 폭압을 가리고 있는 우상의 장막을 걷어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상식과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신념 아래 그는 말하고 썼다. 그의 글을 읽은 젊은이들은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던 것들이 허구였음을 깨닫고 전율했다. 진실을 발견하고는 두려움에 떨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비로소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밀알이 되겠다고 활동하다 체포되고 갇혔던 수많은 이들이 그의 책 때문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는 생각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했다. 냉전의 얼음 속에 동결되었던 한국인에게 이성, 상식, 생각, 실천이라는 불을 전해준 그는 한국의 프로메테우스였다. ‘사상의 은사’였고 ‘우상의 파괴자’였다. 또한 그는 글을 통해, 그리고 자신의 글을 읽은 수많은 이들을 통해 이 세상의 변혁에 헌신하는 숱한 전사들을 낳았다는 혐의 때문에 ‘의식화의 원흉’으로 불리기도 했다. 모두 그의 역할에 값하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거짓과 우상에 의해서만 통치할 수 있었던 지배세력에게 그런 역할은 엄청난 반역이요, 범죄였다. 그 때문에 그는 네 차례의 해직, 다섯 차례의 구속을 거쳐서야 그 시대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맨몸으로 맞서야 했던 그는 결국 여러 가지 질병을 얻었고, 어제 새벽 오랜 병마에 시달린 끝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언론사에 남는 탁월한 기자였으며, 새로운 지평을 연 학자였고,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던 한 노지식인이 자기 책무를 다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민주화 이후를 사는 세대들은 이제 그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수확하는 자로서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기억은 추억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현대사가 낳은 위대한 지식인의 심장의 고동은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낡아버린 것들에 집착했던 흘러간 시대의 지식인이나, 고루한 선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맞섰던 상대, 즉 시장·자본·미국이라는 우상은 아직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우리의 삶 깊숙이 머물고 있는, ‘지금, 여기’의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의 수사는 넘쳐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실체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 또한 멀기 때문이다.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모순,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가치, 그가 추구하던 인간다운 사회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가 매달렸던 과제들의 많은 것들은 살아 남은 이들이 마땅히 물려받아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성찰의 시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왜 동시대의 지식인들은 그가 하던 것들, 그가 이룬 것들에 좀처럼 미치지 못하고 있는가. 물론 한 인간의 전형을 이룬 그의 삶과 철학을 따라하긴 어렵다. 게다가 동시대의 과제들은 더 까다롭고 복잡하고 모호하고 어려워졌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들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는 말했다.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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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돼지님의 댓글
돼지 작성일위의 글은 12월 06일 경향신문 사설입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지식인의 사회적인 책임은 정말 큽니다. 리영희 선생님은 수백 수천의 지식인들의 몫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