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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동지 팥죽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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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usoo
댓글 1건 조회 3,198회 작성일 10-12-18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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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팥죽 한 그릇 어떠세요?

"사라졌거나 사라져가는 것들은 왜 그립고 아름답다 생각하는 걸까?" 친구의 질문에 잠시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쓰고, 다루고, 먹고, 겪던 당시에는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했던 사물이나 사안들이 골동품화한 지금은 왜 그리 아름답고 그리운 형상으로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을까. 사라져 아쉽고, 불현듯 생각이 난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지곤 하는 걸까.

 

"추억과 향수는 아름답다"는 말도 그렇다. 곽재구의 시에선 사평역이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한줌의 톱밥', '한줌의 눈물'로 연결돼 삶의 고단함을 노래하는 장소지만 우리에게 그리움과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연유는 또 무얼까. 어쩌면 고통조차 아름다움으로 둔갑시키는 '시간의 마력'이 작은 행복을 주는지 모른다. 그 고통, 그 아픔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하다면 그것은 사라진 게 아니요 현재적이며 당연히 아름다움 또한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호호 불며 먹던 '동지팥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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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팥죽에 얼음 "동동" 동치미
1997 12. 19 [동아일보] 23면


의문은 남는다. 단지 조금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진 것들은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름다우며 아쉽고, 그리우며 되살리고 싶은 데도 그냥 추억의 곳간에 갇혀버린 것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춥고 긴 겨울밤, "온 식구가 둘러앉아 호호 불며 먹던 동지팥죽"이 바로 그런 '갇힌 것'의 하나다. 문풍지를 때리던 북풍한설조차 돌려세울 것 같던, 그 뜨겁고 맛깔스러운 동지팥죽은 지금 너무 쉽게 우리 주변에서 물러나 버렸다.

 

동지는 1년 중 밤이 가장 긴 때다. 북반구에선 연중 가장 남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며 고도가 가장 낮다. 태양이 떠있는 시간이 가장 짧으므로 일조량도 가장 적다. 그렇다면 이론상으로 가장 추운 날이어야 맞다. 하지만 지표와 대기가 머금은 열량 탓에 최한 추위는 한 달쯤 후에 온다. 음양 중 음(陰·어둠 밤 달)이 극에 달하고, 이때 미세하며 작은 양(一陽·밝음 낮 해)이 처음으로 생겨나니 음양 순환의 끝이자 시작인 날이 또 동지다. 농경사회에선 그 동지를 새해의 첫날로 쇠며 축제를 벌였다. 기독교의 성탄일도 동지축제 풍속이 옮겨진 것이란 설도 있다.

 

바로 그 '동짓날 긴긴 밤', 우린 팥죽을 쑤어 조상과 조상신에 올리고 가까운 친척친지와 나눠먹는 아름다운 풍속을 키웠다. 궁중에서는 관상감(지금의 기상청)이 만든 황장력(黃-粧曆·누런 표지의 책력, 달력)을 백관에게 나눠주고 관리들은 다시 백성에게 돌려 모두의 다복다행을 기원했다. 단옷날 한여름에 대비해 부채를 선물하고, 동짓날 새해맞이 달력을 돌리는 것은 이른바 하선동력(夏扇冬曆)의 미풍양속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일찍부터 나눔의 기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왔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던 정겨움도 실종

 

그러나 어쩐 일일까. 동지 무렵 연말연시 달력을 돌리는 풍속은 여전하지만 팥죽을 올리고 함께 먹는 풍습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빨간 팥죽에 동동 뜨는 하얀 새알심- 그걸 먹어야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는, 그래 아이들이 연신 입언저리를 혀로 쓸며 핥던 팥죽의 기억이 사라졌다. 부엌에 쪼그려 앉거나 무쇠 솥 옆에 붙어서 한 명은 지푸라기나 나뭇가지를 아궁이에 쓸어 넣고 다른 한 명은 큰 주걱으로 솥을 휘휘 젓던 정다운 할머니 어머니의 모습도 간데없다. 뜨거운 팥죽그릇을 꼬맹이 고사리 손에 들려 가난한 이웃에 보내던 정겨움이 실종됐다.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아침, 팥죽그릇을 들면 손바닥은 뜨겁고 손등은 얼어터질 듯 했다. 꾀를 낸다고 털장갑을 끼고 들고 가다 미끄러워 떨어트리며 뜨거운 팥죽을 뒤집어쓰고 울며 집에 돌아온 아이를 어머니는 맛 좋은 팥죽을 떠먹여주며 달래곤 했다. 팥죽을 쑤면 우선 조상신께 한 그릇 올린 뒤 이어 장독대, 광과 각 방에 또 한 그릇씩 놓아둔 뒤 먹게 마련이지만 귀여운 아들에겐 언제나 예외였다. 할머니한테 들키지 않게 한 수저씩 떠주면 입안의 뜨거움 때문일까, 눈물 콧물이 주책없이 흐르곤 했다.

 

동짓날 팥죽 풍습은 붉은 색을 싫어하는 역신을 쫓아낸다는 전설에서 시작됐다. 대문에 붉은 팥죽을 바르거나 뿌림으로서 귀신을 몰아내고 한 해를 병치레 않고 보내려는 바람이 그 안에 담겼다. 그러나 선조들은 제 식구, 제 피붙이만의 행복을 기원한 게 아니었다. 행복과 기쁨은 나눠야 커지고 눈덩이처럼 구른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실천했다. 그래 시식(時食·때에 맞춰 먹는 음식)을 만들면 언제나 이웃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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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팥죽 풍속은?
1982 12. 22 [매일경제]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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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만수무강" 이웃서 팥죽가져와 위로
1967 12. 25 [경향신문] 8면


1967년 동짓날. 서울 종로구 화동 주민들은 89세난 정은성 할머니에게 팥죽을 쑤어주고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할머니는 52년 전부터 조선왕실이 쓰던 복주우물을 혼자 지키며 살아왔다. 창덕궁에서 쓰던 이 우물물은 고종도 마시던 것. 갑신정변 임오군란의 와중에 혹시 누가 독이라도 탈까 보아 궁에서 우물까지 1백m 거리에 포졸을 세우고 상궁이 그 사이를 지나 물을 떠오곤 했다. 당시 포졸이던 남편이 갑자기 병사하며 유언으로 "우물을 지켜라"고 한 것을 52년 동안 하루같이 우물가 삶을 보내왔다.

 

관할 파출소에서도 할머니에게 쌀 한말과 연탄 1백장을 보내 "한겨울 추위에도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보내시기를" 기원했다. 신문들은 이 온정기사를 사회면 중요기사로 다루며 세밑을 어렵고 힘든 이웃과 나누며 보내자고 호소했다. 논설위원들은 동지팥죽의 기원과 우리 전통으로 굳은 '이웃 나눔'을 강조하는 글을 실었다. 어느 칼럼은 "작은 밝음이 어둠 속에서 생겨나는 동지는 곧 희망의 싹이 트는 날"이라며 "지나면 밝고 따스한 날이 오듯 나누면 밝고 따스한 기운이 사회에 생겨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지?' 명절로 안 여기고 요리법도 몰라!

 

그러나 사실 팥죽을 쒀 나눠먹는 동지의 전통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라져가고 있었다. 60년대 초반부터 언론은 절기로서의 동지를 소개할 때 마다 꼭 "사라지는 전통이 아쉽다"는 말을 함께 넣었다. 그도 그럴 것이 50년대에는 전쟁으로 피난 다녀 말 그대로 '살기 바빠' 팥죽을 쑤어먹을 겨를이 없었다. 판잣집 단칸살이에 팥죽은 호사였다. 강냉이 죽, 미군 군용 식으로 한 끼 때우기도 힘들었던 시절 일부러 팥과 찹쌀을 구해 팥죽을 쑤어 먹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60-70년대에 이르러서도 급격한 도시화와 그에 따른 간편식 바람을 타고 팥죽은 더욱 더욱 추억의 창고 안쪽으로 들어앉았다. 백자 항아리 그림을 자주 그린 수화 김환기 화백과 그의 부인 김향안 여사의 집에 들렀던 어느 제자가 동짓날 하얀 백자에 담겨 나온 붉은 팥죽을 보고 감탄한 얘기도 있지만 삶에 찌든 보통 이들에겐 그야말로 '그림 속 팥죽'이었다. 그 아름다운 팥죽 이야기는 1959년의 일이고 일화는 79년 칼럼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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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풍속도 상품화
1988 12. 22 [매일경제]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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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이 뭡니까"
1994 12. 22 [동아일보] 31면


회사마다 대량으로 찍어 돌리는 달력이 캘린더 걸로 채워지던 시절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신문은 "동방예의지국의 안방에 벌거벗은 여체가 걸려있어서야 되겠느냐"며 동짓날 달력 돌리기 풍습이 에로틱 세속화하는 것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거리에 종은 울리는데 자선냄비엔 들어가는 것이 적다"고 한탄했다. 바로 팥죽 나눔을 통해 이웃과의 작은 정조차 단절하고 사는 무감정 세태를 한탄한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동짓날 거리에 나갔던 여기자는 "동지팥죽? 그게 뭐예요?"라고 되묻는 주부들을 만나 기사를 실었다. "지방에 살거나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주부들의 경우 팥죽을 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신세대 주부들은 동지를 명절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예전엔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아 명절음식을 챙겼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시간도 없고 끓이는 방법도 몰라 반찬가게에서 파는 2천 원짜리 팥죽을 사먹겠다.'" 하긴 솥에 얹혀 지은 밥도 전기밥솥에 자리를 내준지 수십 년인 지금 직접 쑨 팥죽을 얘기하다니, 자칫 쫓겨나기 십상이다.

 

 

 

올해 동지에는 팥죽 한 그릇 어떠세요?

 

올해 동지는 12월22일이다. 초순에 끼면 애동지라 해 팥죽도 끓이지 않는 법이지만 올핸 그렇지도 않다. 팥죽 한 그릇이 그냥 팥죽 한 그릇이 아니고 우리의 삶이며 정이고 아름다움이며 나눔이던 시절이 있었다. 호호 불며 한 수저 가득 팥죽을 넣어주던 엄마의 눈을 마주보던 아이들은 아마 지금 중년 노년이 되었을 게다. 가난한 이웃 팥죽 돌리기에 나섰다 벌건 팥죽을 뒤집어 썼던 아이도 그럴 테지.

 

왕십리 중앙시장, 독립문 영천시장, 영등포시장 등 재래시장에는 옛날 팥죽을 쑤어 파는 곳이 있다. 불린 쌀을 넣어 함께 끓인 서울식, 새알심만 넣고 끓인 남도식이 그곳엔 다 있다. 입언저리를 핥으며 먹는 팥죽이 제 맛이다. 세상은 추워도 거긴 따뜻하다.

 

 

 

민병욱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가 있다. 

발행일  201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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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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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갓더파워님의 댓글

유갓더파워 작성일

글 잘 봤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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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다 읽고 남는 생각은 온리....


팥죽 먹고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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