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래일에 사는 사람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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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제 3 편 오늘의 의미
8
진수현은 여느때처럼 새벽 3시에 깨여났다. 좋은 착상은 대체로 새벽에 떠오르군 하였다. 서재에 올라와 노트콤을 펼쳐놓았지만 지금은 집안일로 괴로왔다.
그는 안해가 이전의 자기를 다시 찾으리라는것을 믿고싶었다. 과학밖에 모르는 애인을 리해하고 따르던 처녀시절처럼, 가정부인사서로서 남먼저 콤퓨터를 배우고 정보검색전문가로 준비하던 그 시절처럼 그리고 어려움을 웃으며 이겨내던 그 시절처럼 정답고 희망에 넘치는 녀인으로 돌아오기를 속으로 빌었다.
이젠 자기도 안해를 도와주어야 하였다. 돌이켜보니 자기는 안해의 고달픈 심정을 깊이 헤아려보려고 하지 않았고 집안일에는 손끝 하나 놀리지 않으면서 이따금 힘들어하는 안해에게 훈시나 하는것이 고작이였다. 안해의 일손을 거들어주어야 하였다. 집안에서 세대주가 해야 할 일부터 찾아서 해야 하였다.
(정임이한테는 허영에 뜰게 아니라 자기 천분에도 맞고 나라의 전도에도 유익한 실제적이고 보람있는 일을 지망하도록 일러주어야 한다.
정선이는 수학성적이 떨어지는데 원인은 그 과목을 홀시하는데 있는것 같다. 걱정만 하지 말고 일요일 오후시간은 그 애와 함께 보내야겠다. 숙제검열도 해보고 TV도 함께 보면서 이야기도 해주자.…)
리란희는 남편이 서재로 올라가는 소리에 깨여나서는 다시 잠들지 못하였다.
그는 요즘 부부간에 간격이 생긴것을 자인하자니 가슴이 아팠다.
아, 어떻게 만났던 우리들이였던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평성시도서관에 배치된 리란희는 얼마 못가서 의기소침해졌다. 자신이 불만스러웠다. 자기가 어째서 졸업때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했을가싶었다.
《네 꽁한 성미에 중학교애들 성화를 받아낼것 같으냐?》
처음에는 조용하고 장서가 그쯘한 일터가 마음에 들었었다. 그러나 도서관일은 너무도 단조로운것 같았다. 한창시절인데 이보다 더 보람있고 기쁜 일을 할수는 없었을가?
그런데 그를 구원해주려는듯 안경을 낀 과학원청년이 어느 겨울날 저녁무렵에 시도서관으로 찾아왔다. 평성시와 과학원지구는 낮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접해있었다. 연구사 진수현이라는 신분증을 대출구로 들이밀면서 그 청년은 장편소설 《시련속에서》를 빌리자고 하였다. 그 책은 1950년대말에 나와서 1960년대초에 재판을 했는데 너무도 독자가 많아 다 인멸되고 시도서관에도 이젠 한권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 대출된지 두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있었다. 리란희는 아직까지 그것을 채근하지 못한 자기를 속으로 책망하면서 대답하였다.
《래일 다시 오세요. 제가 오늘 저녁에 그 책을 찾아오겠어요.》
란희는 대출대장을 한참 뒤져서 그 책을 빌려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찾아냈다. 시교외의 농촌마을 사람이였다.
리란희는 퇴근후에 10리남짓한 그 마을로 다녀오려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과학원의 그 청년이 기다렸다가 길동무를 해주어도 좋은가고 묻는것이였다.
처녀는 사양하였다. 《저 혼자서도 갔다올수 있어요.》
그 청년은 그럴듯 한 구실을 댔다.
《오늘 저녁에 그 책을 손에 쥐고싶어서 그럽니다.》
말이 적고 속이 깊어보이는 청년이였다. 그와 함께 책을 찾아가지고 돌아오는 밤길에 란희는 그만 얇게 언 물웅뎅이에 빠져 구두 한짝을 온통 적시고말았다. 총각에게 이끌려 길가 집 아궁앞에서 구두를 말려 신었다. 그래도 란희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처음으로 한 독자를 위해 밤길을 걸은것이였다. 그밤에 도서관 사서도 노력할탓이며 앞으로 그 위치는 점점 더 높아진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희망으로 가슴이 설레이게 되였다. 총각은 처녀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조작하기 위한 체계를 규제하는 자연법칙이 있다는것을 알려주었다. 그에 의하면 정보는 대답이라기보다 그것을 통하여 정보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질문의 순렬이라는것이였다. 총각은 《20가지 질문》유희처럼 1과 0 즉 《예.》 혹은 《아니.》라고만 대답하는 사람이 념두에 두고있는 사물현상을 알아내기 위해 련속 질문을 하는것과 같다고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처녀와 총각은 걸어가면서 그 유희를 하였다. 총각이 묻고 처녀가 《예.》,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였다. 처녀는 속으로 개구리를 생각하였다.
《식물입니까?》
《아니.》
《척추동물입니까?》
《예.》
《물에서 삽니까?》
《예.》
《페로 숨을 쉽니까?》
《예.》…
총각은 연거퍼 질문을 던지던 끝에 이젠 알겠다는듯이 마지막 질문을 들이댔다. 《고래입니까?》
《예? 아니예요! 개구리였어요!》
그때 둘이서 얼마나 유쾌하게 웃었던가.
진수현은 그후에도 책을 빌리러 왔고 란희를 걸음걸음 이끌어 머지않아 도래할 정보시대에 미리 들여세웠다.
리란희는 그와 결혼하고 과학원도서관 정보검색전문가로 발전하게 되였다.
앞날을 내다보며 콤퓨터를 배우던 그 시절은 더 말할것도 없지만 《고난의 행군》시기에 죽 한그릇을 서로 권하며 그것으로 부부의 정이 더 두터워졌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이 간격이 무엇때문에 생겼는지 스스로 다시 묻게 되는것이였다.
그래, 남편은 예이제 줄곧 한모양으로 고지식하게 살아오고있지 않는가. 변한것은 나자신이 아닐가? 이제는 박사론문도 통과되고 공훈과학자도 되였는데 집안살림살이에도 관심을 돌리고 안해의 바쁜 일손도 도와주면 안되는가하고 점점 불만이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자기의 바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듯 여전히 한본새로 수굿하고 뒤떨어진 부서들을 맡아 제 궤도에 올려세우면서, 지어 어린 사람들한테서 모욕까지 받고 그것을 묵새기면서 일하고있다.
란희는 어제 송춘도가 하던 비난에서 남편에 대한 자기의 불만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던것을 다시 상기하자 가슴속에 찬 바람이 휘돌고 지나가는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내가 남편한테서 바란것은 무엇이였던가? 남편의 명예와 유족한 살림, 자식들의 발전… 그래 이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면 난 행복하게 될가? 이제 생각해보니 이 세가지가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남편이 박사가 되기 전에, 나라와 우리 가정이 식량부족으로 곤난을 겪을 때 그리고 아이들이 더 어릴 때 지금보다 가정이 더 화목하고 희망에 찼으며 생활에 기쁨이 더 많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생활이 그때보다 퍼그나 안정된 오늘 도서관일을 그만두려 하면서 그때문에 남편과 간격까지 생겼다. 정임이한테서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아이들을 기특히 여기던게 언젠데 지금은 정임이의 대학입학시험공부에 방해가 된다면서 그 애들을 문밖에서 돌려보내고있다. 게다가 정임이가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 애들을 배워주는데서 기쁨을 느끼는 그런 천성과 좋은 취미를 가진것을 보려 하지 않고 그저 남들이 부러워하는 큰 대학을 지망하도록 입김을 불어넣고있다.
이런 탈선은 남편이 이젠 학자로서 오를수 있는 높이에 다 올랐다고, 나도 그만하면 나라의 과학사업을 위한 정보검색에 이바지했다고, 이젠 집안을 추세워야겠다고 멈춰선 그때로부터 시작된게 아니였을가? 오늘에 대한 만족… 가정에 비낀 그늘…
리란희는 래일에 대한 희망과 열정에 넘치던 그 시절을 다시 찾고싶었다.
그는 부뚜막앞에서도 즐거웠던 평성교외의 밤길을 생각하고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창고쪽으로 가서 부스럭거리며 무얼 뒤지는 소리가 났다. 결혼해서 이때까지 저런적이 없었다. 집안에서 못 한번 박아보지 못한 남편이였다.
란희는 하도 의아해서 그쪽으로 슬그머니 가보았다. 어두운 창고에서 남편이 안경을 추스르며 정말 무엇을 뒤적이고있었다.
《무얼 찾아요?》
《마당비는 있는데 쓰레박이…》
란희는 가슴이 섬뜩하였다.
《그건 뭘하려고?…》
《여보, 오늘부턴 인민반 청소를 내가 하겠소.》
《예?!》
그는 저도 모르게 다가가 남편이 쥔 비자루를 잡아당겼다.
《정임이 아버지, 청소는 제가 해요.》
《내가 그동안 당신만 고생을 시켰소.》
《아니예요.… 아니예요.…》
리란희는 눈물을 보일것 같아 외면하며 비자루를 들고 복도로, 계단으로 급히 내려갔다.
그는 비자루를 찾아쥐던 남편이 나무랍게 생각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가 바라던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 모양이 달갑지 않고 도리여 민망스럽고 서글플가?
리란희는 마당을 쓸면서 생각하였다.
아침에는 세대주가 응당 비자루를 쥐여야 하는거겠지만 이제보니 그것은 자기가 그대신 비자루질을 하는것보다는 기쁘지 않았다.…
리정철은 실장으로부터 여러가지 유전알고리듬자료들과 우선처리규칙에 관한 자료들, 특히 동적환경에서의 일정진척관리에 대한 최신자료들을 받았다.
그는 더 폭이 넓고 높은 토대우에서 체계관리프로그람을 구상할수 있게 되였다.
그는 실장의 부인이 이 자료검색에 많은 품을 들였으리라 짐작하고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그 자료들과 련관된 가정적인 일화와 그밑에 깔린 정신생활의 굴곡들을 정철은 미처 헤아릴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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