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6]민족차별받으며 투쟁으로 성장한 재일동포들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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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6]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본에서 민족교육을 위한 재일동포들의 투쟁
[도꾜=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조국분단은 잔인하다. 민족분단 때문에 해외동포들이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혹독하다. 특히 재일동포들, 그 중에도 혹심한 민족차별을 받아 온 총련동포들의 경우는
지구촌 그 어느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밝혀지고 있다. 민족통신은 특집기획으로 <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에 대해 연재로 다루기로 하고 그 여섯 번째 글을 소개한다.
[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0-12-25]
민족통신
말할 수 없이 혹독하다. 특히 재일동포들, 그 중에도 혹심한 민족차별을 받아 온 총련동포들의 경우는
지구촌 그 어느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밝혀지고 있다. 민족통신은 특집기획으로 <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에 대해 연재로 다루기로 하고 그 여섯 번째 글을 소개한다.
[기획-6]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본에서 민족교육을 위한 재일동포들의 투쟁 [도꾜=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조국분단은 잔인하다. 민족분단 때문에 해외동포들이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혹독하다. 특히 재일동포들, 그 중에도 혹심한 민족차별을 받아 온 총련동포들의 경우는 지구촌 그 어느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밝혀지고 있다. 민족통신은 특집기획으로 <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에 대해 연재로 다루기로 하고 그 여섯 번째 글을 소개한다. 이번에는 ≪도꾜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의 사무국장을 비롯하여 조선학교 학부모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재일동포들의 삶의 현주소를 알아본다.
그의 생년월일을 밝히면 놀랄 것이다. 1944년 11월19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이다. 소학교와 중학교는 일본학교에 다녔지만 고급부(고등학교)는 교또조선중고급학교를 졸업했고, 마지막 학교는 조선대학교 역사지리학부를 졸업한 역사전공 학도출신이다. 그의 직업배경은 교육계로서 1971년부터 <도꾜조선중고급학교> 교원으로 10년 근무했고, 그 후에는 군마<群馬>조선초중급학교 교장으로 다년간 근무한 경력과 함께 지금은 <도꾜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사무국장의 직책을 맡고 이 일에 전념하는 한편 일본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문제들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동분서주 뛰고 있다. 기자가 일본을 방문한 시기에 리일만 선생은 야수꾸니진자 내부에 설치된 박물관 전시장에 그 동안 감춰둔것으로 보이는 우리나라 국보급 유물(갑옷과 투구모자)이 뻐젓이 놓여있어 이에 대한 항의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것의 시대배경과 갑옷에 붙은 양어깨 용두마리를 비롯해 갑옷 겉에 흰 학두마리가 그려져 있고 여기 저기 순금장식물과 디자인, 그리고 투구모자에 새겨진 ‘원수’라고 씌어진 것을 분석해 보면 “17세기 내지 19세기 사이에 활약한 높은 군 지휘자의 것으로 이순신 장군의 것이든지 아니면 이에 준하는 우리나라 큰 인물의 유품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여 이 박물관 단장 앞으로 그 유품을 반환할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낸 상태”라고 설명하면서 “이것도 ‘적국항복’이라고 큰 글자로 쓴 바로 옆자리에 이 국고급 유품을 전시했는데 이것도 말이 안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당시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이 도망갔는데 어찌하여 적극항복이 되느냐”며 반문하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전시된지 21일만에 리일만 사무국장에 의해 발견되어 국내외 언론에 알려지게 되었다. 리 사무국장이 “원산지 국에 돌려줘야 한다.”고 촉구한 서한은 이들 박물관 측에 퍽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며 아주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이곳도 다른 곳이 아닌 야수꾸니 신사에 마련된 박물관 전시장에서 진열하였다가 발견된 것이다. 이 박물관은 주로 일본인 보수계 인물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야수꾸니는 어떤 곳인가. 1869년 건립한 건물로 초혼사(혼을 불러들이는 사찰)로서 이용되어 왔다. 즉 일본천황을 위해 죽은 사람들 혼을 불러들이는 사찰이라는 뜻이 된다.
야수꾸니진자(신사)는 다르게 표현하면 일본의 국립묘지 격이지만 2차대전 때는 천황을 신격화시켜 '모셔 놓고' 내지인은 물론 조선 등 아시아 식민지의 '황민화운동'을 주도한 중심지였다. 게다가 지난 79년에는 2차대전 1급 전범들의 위패를 옮겨다 놓고 일본인들의 참배를 고취한, 일본판 성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소에서 참배하는 세력은 주로 극우세력인데 이것을 찬성하는 일본인들은 대략 10% 안팎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박물관 2층 전시장에는 일본군 소위 박정희의 사진도 부착되어 있어 일본 보수세력은 남한의 대통령까지 한 인물이 일본군 소위였다고 은근히 자랑겸 조롱겸하여 이 전시물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하는 재일동포들도 있었다. 리일만 사무국장은 우리 동포들이 일제강점 시절에 이곳에 끌려와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말한다. 1945년 3월10일 미군들이 도꾜대공습을 자행할 때 이곳에 사는 민간인들 10만여명이 삽시간에 죽었는데 이 중에 우리 동포들이 1만여명에 달한다고 설명하며 그 사망자들의 인적사항이나 그에 대한 보상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고 지적하며 그 이외에도 우리 동포들이 일본정부 당국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많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그 때부터 <우천사>라고 불리우는 사찰에 모셔진 2천여구의 우리동포 유골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과 북에서 유족들을 불러 합동추도식이라도 하자고 하여 추진하였는데 일본 정부 당국은 북측의 입국을 거부하면서 이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남녘에는 이른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2004년 11월1일 결성되어 출범하게 되었다. <우천사>에 보관된 유골 2,328주 유해는 주로 1945년 8월24일 일본해군선 우키시마마루 폭침사건으로 사망한 것인데 이 유골들은 지금 <우천사>에 보관되어 있다. 우천사 보관 유해는 태평양전쟁시 강제연행되어 희생된 우리동포들로서 당시에 일본군인, 군속2,328주 유해로 1958년 일본오(吳)지방 복원부의 해군(874柱)유해와 후쿠오카현(福岡県)에서 육군(1,454柱)유해 등, 2,328구(우끼시마호 폭침 희생자 포함)를 후생성에 이관후 지하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68년 한,일 불교 사절단이 발견하여 한국 측이 항의를 하면서 위령제를 지내고 유족 확인2구 송환 후 1971년 6월 도꾜의 우천사(祐天寺)로 2,326구를 이관 예탁 보관해온 유해다. 그래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2010년 5월6일자 서한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2010년은 광복65주년이면서 경술 국치100년의 해로 우리 민족사의 뿌리 깊은 상흔을 치유해야 할 해이면서 태평양전쟁희생자들께는 70년 이상 지속해온 고통을 해소해야 할 해이므로 유족회는 혼신을 다해 “대일 민간청구권 소송”을 국제 변호인단 선임으로 단계별 추진중 다음과 같은 방해를 국가가 하고있어 대통령님께서 즉각 중단시켜줄 것”을 촉구했다. 유족회는 또 남한 정부의 향후 실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면서 “우천사 무연고 유해 일괄 송환시 20-30여만 주의 징용 노무자 유해 송환은 일본정부가 각 기업에 떠넘기면서 책임을 회피하고45년 패전직후 징용에 관한 공식 기록등 문서를 폐기 처분 지시 하듯이 일본은 한국 징용 노무자 희생자들의 자취를 말살 할것이다. 정부는 하루 빨리 징용 노무자 관계 문서 및 공식 기록을 요구하고 일본 각 사찰 및 산야에 내버려진 20만~30만 노무자 유해 명단인수 및 발굴 송환을 위해 일본 정부 책임의 한,일 양국 공식 기구를 먼저 설립 할 것”을 요구하며 한-일 양국 정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요청했다. 유족회는 일본 당국에 해서는 (1) 일왕 침략사 만행과 희생자에 대한 사죄, (2) 노무자 유해 명단(20만~30만 이상) 환수 및 유해 발굴 송환 한, 일 양국 기구 설립, (3) 무유해 유가족등의 일본 정부 대책, (4)지도리가후찌 공원 묘지와 우에노공원에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 및 위령 공간 건립, (5) 대일 민간 청구권 개인 보상법 제정을 요구했고, 이명박 정부측에 대해서는 (1) 정부는 태평양전쟁 희생자 납골당 및 공원묘지 건립, (2)2010년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민간단체 지원금 누락에 대한 것을 위원회에 요구해 줄것을 요청한바 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동포들에 대해 리일만 사무국장은 “주로는 아오모리<靑森>현 시모기다<下北>반도에 강제로 끌려 갔던 사람들인데 이들은 1945년8월22일 우끼시마호에 타서 부산을 향했으나 8월24일 저녘 돌연히 배머리를 돌려 교또<京都>부<府> 마이즈루<舞鶴>만에서 폭침되어 죽은 희생자들이다.”라고 설명하는 한편 그 폭침의 원인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은 상태라며 “자폭설<自爆說> 혹은 촉뢰설<触機雷說>이 있다”고 알려준다. 이것도 진상규명의 몫으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그는 이어 “이 때 희생자들과 남아시아 여러 섬에서 죽은 조선인 군인,군속들의 유골에 연관된 희생자들의 한은 살아 있는 우리들이 풀어주지 않으면 누가 풀어 주겠냐”며 끓어 오르는 분노를 삼킨다. . 그러나 재일동포들은 이명박 정권과 일본 정부 당국의 향후 반응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우선 이명박 정권 자체가 자기 국민들을 위해서 복무하는 정치세력이 아닐 뿐만 아니라 친미정책, 친일사대 정책으로 경도되어 있어 유족회나 관계자들의 당연한 요구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예견하는 표정들이다. ≪도꾜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에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리일만 사무국장의 운동철학에 대해 궁금했다. 그는 무엇때문에 생의 막바지에 열심히 일하고 있을까를 알고 싶어 질문해 보았다.
그는 부부관계에 대해서도 “동지적 관계에서 살고 있다”고 서슴없이 대답한다. 그의 부인 박금년<朴錦年>여사는 1948년11월20일생으로 일본 지바<千葉>현에서 태어 난 재일동포 2세이다. 조선대학 재학시절 같은 학부 같은 학년에서 공부하다가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졸업후 부인은 욕카이찌<四日市>조선초중급학교에서 교원으로 재직시절 연애가 성사되어 1973년3월에 결혼하여 1녀1남를 잘 길러왔다. 지금은 이들 자녀들이 낳은 외손녀 외손자 친손녀 등이 모두 3명이다. 외손녀 외손자는 조선학교 재학중이고 나머지 친손자는 조선유치원생이라고 한다. 재일동포 3세인 공연순 학부모의 의견을 들어본다. 그는 가나가와조선학교 어머니회 연락부대표를 맡고 있는 학부모로서 “저는 아들과 딸을 요꼬하마조선초급학교에 1학년부터 보내고 있다. 아이들은 1시간이나 전차를 타고 매일 학교에 다닌다.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일본학교가 있는데 왜 어린 아이들에게 고생시키면서 멀리 떨어진 조선학교로 보내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면 한마디로 그것은 바로 조선학교가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해외에 살면서도 자기 나라 말과 글을 배워 자기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는 떳떳한 조선사람으로 아이들을 키워주는 곳은 우리 조선학교외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지켜 오신 조선민족의 넋을 제가 이어 받고,또한 자기 자식들이 이어나가도록 바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응당한 요구가 아닌가. 일본학교에서는 우리 말도, 올바른 우리 역사도 배울 수 없으며 더구나 조선사람으로 키워주지는 않는다. 일본 정부 당국은 저들이 저지른 침략전쟁,식민지통치,학살행위를 왜곡하는 교과서까지 만들고 《日の丸》,《君が代》를 국기, 국가로 쓰는 일본학교에 어찌 저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보낼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공연순 학부모는 또 유치원의 3살 어린이부터 초급부 6학년 12살 어린이가 다니는 신성한 교육의 현장에 더러운 구두발로 들어온 경찰의 강도만행에 일본전국의 어머니들이 항의투쟁에 나섰던 경험담을 회상하며 “특히 깅끼지방 어머니들은 즉각 강제수색을 감행한 오사까부경찰본부앞에 모여《우리 학교를 구두발로 짓밟은 경찰당국의 만행을 규탄한다!》는 구호를 소리높이 외치며 항의투쟁을 힘차게 전개했다고 말한다. 이들 재일동포들의 투쟁에 남녘동포들과 이북동포들, 그리고 해외동포들도 연대하며 지원해 왔다. 일본 정부당국과 극우세력의 재일동포 탄압 행위에 분노한 남녘 진보정당과 북녘 동포들, 남북시민단체들, 그리고 유럽동포들을 포함하여 재미동포, 재중동포, 재러시아 동포 등 해외동포들도 그 동안 재일동포들의 권리와 안위를 위하여 부당한 탄압을 일삼아 온 일본정부 당국과 극우세력을 향해 규탄하면서 각종 지원행사들을 벌여 왔다. 특히 일본 정부 당국은 전쟁범죄국으로서 진정한 사죄나 보상은 하지 않고 식민지 40년의 고통과 수난을 받아 온 우리 재일동포들에 대해 지구촌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혹독한 탄압행위를 자행해 왔다. 그러한 파렴치한 행위를 하고서도 일말의 자성도 없는 일본 정부 당국의 처사는 우리 민족 뿐만 아니라 인류사회로부터도 따거운 규탄을 받아 왔다.
그런가하면 남녘의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세력은 일제36년의 지긋지긋한 과거의 역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친미사대주의, 친일사대주의 정책을 기조로 하여 국내에서는 민족화해와 협력을 부르짖는 애국세력을 잔인무도하게 탄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남북대결정책을 통해 미국과 일본 당국의 2중대 역할을 하기에 급급하고 있어 이에 대한 해 내외동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의 지원을 받아 온 일본의 민단 간부들도 반민족의 편에서서 총련 동포들을 탄압하는 일본정부 당국과 일본인 극우세력의 탄압행위에 야합해 왔다. 이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그러나 우리 민족사를 포함하여 인류역사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 왔다. 정의의 역사는 반드시 승리한다. 우리 민중들과 인류사회 민초들은 정의의 역사에 기초하여 기필코 승리의 역사를 아로 새길 것이다. (다음 기획-7은 마지막으로 4박5일 동안의 일본방문…재일동포들을 만난 대한 소감에 대하여)를 맺는말로 소개한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가한 잔인무도한 전쟁범죄 행위들-동영상 *[기획-5]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본에서 민족교육을 위한 재일동포들의 투쟁 *[기획-4]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본 당국과 극우세력의 각종 횡포유형 분석 *[기획-3]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교장,교원들:민족애,조국애등 보람갖고 생활 *[기획-2]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 당국:반인륜적 탄압,감시와 배제,동화정책 *[기획-1]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도꾜조선중고급학교 신길웅 교장(61)과 대담 *[대담]재일평통협 리한수 상임고문(70):"회장 직 그만두고 대중사업 더 바쁘다" *[대담]재일한청 박명철 부위원장:“한통련 선배들 통해 역사 눈떠” * 재일한국청년동맹 50주년 기념식 진행 *[기획]재일한국청년동맹 50년 발자취③ *[기획]재일한국청년동맹 50년 발자취② *[기획]재일한국청년동맹 50년 발자취① |
[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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