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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의 풍요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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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돼지
댓글 0건 조회 2,786회 작성일 10-12-28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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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것이 오히려 많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발적 가난>(E F 슈마허)에 나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수상한 수학 얘기다. 차 좀 마시라는 토끼의 간곡한 얘기에 앨리스는 아직 많이 못 먹었으니 더 먹을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 직선 논리 또는 과학과 성장경제학의 논리를 갖고 있는 토끼에게 앨리스의 얘기는 알다가도 모를 온통 바보 같은 소리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의 삶에는 토끼가 생각하는 직선 논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직선 논리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안고 있는 것이다. 삶에서는 일종의 곡선 논리가 작용해 생각과 사물을 뒤집어버리거나 종종 우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반대편에 갖다 놓기도 한다.

그렇다고 정보사회에서 직선 논리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직선 논리의 필요성은 그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는 곡선 논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풍요롭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삶에 의미와 가치도 부여하게 해 준다. 그래서 적은 것이 오히려 많다는 앨리스의 말은 오직 곡선 논리에서만 바라볼 때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1970년 중반 여름장마가 한창이던 어느 날, 난을 가꾸면서 산철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난초에 지독한 집착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법정은 3년 동안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내면서 무소유의 의미를 깨닫는다.

2007년 병마에 시달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드나들 때, 자신의 몸인 줄 알았던 자신의 몸뚱이마저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는 법정은 소유에 대해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홀가분한 마음, 여기에 행복의 척도가 있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거듭 새겨두기 바란다.(<산에는 꽃이 피네>)

주위에 비밀로 했던 장학사업, 1997년에 창건했던 길상사란 절에서 가난한 절이 되라던 법정은, 사리도 찾지 말라,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2010년 3월11일 입적했다.

1978년,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 말죽거리 근처의 옥탑방에서 파출부, 셋방살이 노동자, 구멍가게 아줌마 등 개척 초기 가난한 교인 9명으로 목회를 시작한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을 거친 수천명의 평신도 리더와 함께 건강하고 가난한 교회를 일구어냈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에게도 웃음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건강한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생에 대한 탐욕을 다 버린 사람들이고 마음을 완전히 비운 사람들입니다. … 이런 사람은 가치관이 새로워집니다. 판단기준이 달라지며 소유의식이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떠드는 일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습니다.(<고통에는 뜻이 있다>)

교회가 목사와 함께 늙으면 안 된다며 정년을 5년 앞두고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에서 조기은퇴해 목회권력을 모두 내려놓았던 옥한흠 목사는 가난한 교회를 지향하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구제활동을 펼쳤다.

교회를 너무 키워버려 가난한 교회 목회철학의 자기모순에 빠진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기도 한 옥한흠 목사는 2010년 9월2일 소천했다. 그날 가족들은 옥한흠 목사의 관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어야 했다. 평생을 목회활동에 바친 나머지 가족사진 한 장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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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앨리스처럼, 적고 가난한 삶으로오히려 불구가 된 인간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잉여 자본이 소외되고 아파하는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게 하여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찾는 해법에귀를 기울여야 할 차례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20세기 두 번의 세계전쟁을 거치면서 과학과 스포츠 그리고 경제학은 더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 내달림으로써 인간의 행복과 평화를 구하려 했다. 초고속 컴퓨터 시대의 21세기를 구현해낸 우리 인류 역시 경이로운 과학기술의 발달과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인간의 보편적 행복을 쟁취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정의나 아름다움 그리고 건강과 같은 비물질적 가치를 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욕구를 최소한이나마 충족시켜 주며 또한 물질의 부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그것들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인간성이 더욱 상실되고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 역시 더 피폐해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인류가 과학과 기술의 힘을 너무 확장시킨 나머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능멸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버렸고, 우리가 생산해낸 시스템이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이제는 앨리스처럼, 적고 가난한 삶으로 오히려 불구가 된 인간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잉여 자본이 소외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게 하여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찾는 해법에 귀를 기울여야 할 차례이다.

관념적인 사유가 아니라 한평생의 삶으로 ‘자발적 가난’이란 화두를 우리에게 던진 법정 스님과 옥한흠 목사의 삶에 녹아 있는 경종을 토끼와 우리가 겸허히 깨우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정재흠 | ‘꿈퍼나눔마을’ 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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