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경제, 줄어드는 복지, 물건너간 팍스 아메리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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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지나면, 이곳 시애틀이 위치한 미국 서북쪽의 아름다운 워싱턴 주에서 사는 가난한 이들의 삶은 매우 빡빡해질 것 같습니다. 당장 내년부터 적용되는 예산에 따라 저소득층에 지원해주던 각종 의료혜택, 특히 한인들도 상당수 가입해 있던 '베이직 헬스' 보험이 예산감축을 위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무료로 이용해오던 주립공원 역시 앞으로는 돈을 내야만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지난 11월 선거 결과, 주민들이 더 이상의 세금을 낼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분명했지만, 빌 게이츠 시니어가 발의했던 매년 연소득 40만달러 이상 고소득자들에게 주 소득세를 걷자는 발의안이 부결되면서 결국 주정부는 원래 이 법안이 의도했던 교육 부분에 대한 예산 역시 대폭 삭감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세금의 부족으로 인해 예산을 새로 짜야 했습니다. 이 예산을 발표하던 크리스틴 그레고어 주지사가 "나도 이 예산안이 싫다"면서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 가난한 이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거의 울먹이듯 말할 때, 이를 TV를 통해 보고 있던 저도 참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아무튼, 대학 등록금 지원금도 삭감되고, 메디케이드 등의 중요한 공공 복지 서비스, 법원 통역 등 주민들의 편의를 위한 각종 혜택들이 이 한방으로 존재 기반이 없어져 버렸고, 이제 워싱턴주에서 내년부터 주민들이 겪어야 할 일상적인 불편들은 안 봐도 훤합니다. 저도 학교에 대한 예산이 많이 줄었으니 이제 등록금도 조금 더 내야 할 것이고... 가장 먼저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계층은 저소득층입니다. 그들이 생각 없이 던졌던 "증세 반대"안은 사실 전체적인 세금 부담을 덜기 위해 잘 사는 일부가 조금 더 세금을 부담하라는 안이나 다름없었지요. 말하자면 유럽 식의 '부자세'를 신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안은 대신 소규모 자영업과 일반 부동산세를 삭감한다는 부대 조항을 담고 있었습니다만, 부자들은 그걸 가리려 애를 쓰고 결국 이 법안의 통과를 막았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생각 없이 무조건 '세금을 신설'한다는 것에 반발해 무조건 반대표를 던졌고, 이제 그 결과를 자기들이 온 몸으로 겪어야 합니다.
그래도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비록 부결되긴 했지만, 이 부자들에 대한 증세 법안을 기초하고 주민들의 서명을 받으며 이 법안이 통과되도록 가장 힘쓴 것이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의 아버지인 빌 게이츠 시니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인 빌 게이츠 회장 역시 이 법안의 통과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서 왜 이 법안이 통과되면 세금을 더 내야 할 당사자가 이 법안을 지지하고 또 직접 발의하는가에 대해 물어보자 빌 게이츠 시니어는 "바로 이것이 모두에게 좋고, 자본주의에 좋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 건전하게 돌아가는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부자들로부터 더 세금을 걷어 이것으로 사회 전반에 나누어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주민들도 이제 직접 겪을 체험들을 통해서 그들이 찬성하고 반대한 것들이 어떻게 그들에게 직접적인 삶에서의 타격으로 돌아올지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매우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이곳 주민들에게 상처를 입힐 것입니다. 부를 쌓아놓고 있는 이들은 그래도 자기 몸에 장갑을 두른 셈이 되어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겠으나,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삶의 거의 모든 부분들이 가시가 되어 자기의 몸을 찔러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주민들로 하여금 고행의 채찍처럼 새로운 자각을 가져다주게 될지, 혹은 그 고통에 익숙해져 자기 몸에 더 상채기를 입어도 그냥 체념하고 둔감해질지에 대해선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 역시 고통을 입는 쪽이겠지만, 다행히 나름 직장도 탄탄하고 의료보험도 있으니 당장 걱정은 덜 해도 되겠지요. 제일 고통받는 쪽은 가난해도 보험조차 없어서 말 그대로 '아프면 죽어야 하는 계층'들입니다. 공화당에서 늘 이야기하는대로 '부자들이 알아서 스스로 베푸는 사회적 온정'들이 제대로 작동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지난 레이거노믹스 이후 30년 그 '부자들이 알아서 베푸는 온정'에 기댔던 미국이 어떻게 망가졌는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왜 사회가 강제적으로라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예산을 마련해놓아야 하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이미 이곳도 많은 직장들이 외국으로 떠나버린 상태입니다. 이른바 '효율의 극대화'를 외쳐왔던 레이건 시대의 경제정책의 종말은 결국 '미국의 세계 지도자적 지위 종말의 서곡'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미국 땅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이들에게서도 희망을 뺏아가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이미 복지가 무너졌을 때, '아메리칸 드림'도 함께 무너져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지고 나서의 절망의 무게는 미국 자체의 숨통조차 짓누르게 될 것입니다. 미국이 늘 바랬던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루는 한 축은 무력이었지만, 다른 한 축은 세계인들이 미국에 갖고 있는 환상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이거노믹스의 발호와 구소련의 붕괴 이후 자신의 체제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썼던 복지의 가면을 모두 벗어던지고 그 잔인한 '효율의 극대화'라는 맨얼굴을 그대로 보여줬던 미국 경제는 이제 그 '환상'이란 한 축을 잃게 되면서 팍스 아메리카나 자체를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향력이란 무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쨌든, 당장 1주일만 지나고, 새해가 도래하고 나면 발생하게 될 '악화'를 주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겪어낼지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들이 던졌던 부메랑에 자기들의 뒷통수가 깨져 피가 흐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궁금하네요. 아, 당장 우리 성당에도 제가 아는 많은 분들이 이 메디케이드 수혜 대상이신데, 그나마 연방 차원에선 오래전에 삭감됐고 이제 주정부 차원에서 조금 남아 있던 복지 정책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 노인분들 입에서 "미국 좋은 나라"라는 말이 나오진 않을 듯 합니다. 참, 이곳 미국 시골의 동포들도 이래저래 걱정으로 열어야 하는 2011년입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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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CK0206님의 댓글
ECK0206 작성일
"이미 복지가 무너졌을 때, '아메리칸 드림'도 함께 무너져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지고 나서의 절망의 무게는 미국 자체의 숨통조차 짓누르게 될 것입니다. "
아주 섬뜩히 다가오는 님의 통찰입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변혁님의 댓글
변혁 작성일
빌 게이츠가 말한대로 가진자들이 세금을 많이 내어 자본주의가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도 유익합니다.
저렇게 일반 대중이 바닥으로 떨어지고나면
변혁을 꿈꿀 수밖에 없으니까요.
자본주의도 뭐도 다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미국이 어디로 가게 될지
얼마나 더 추락하게 될지
이 나락의 날들은 얼마나 더 지속하게 될지
미래는 정말 불투명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