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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 선생은 우리 고장이 낳은, 최고의 명창이다. 판소리사에서도 임방울제는 가장 특별나고 의미 있는 소리제이다. 임방울은 화려한 무대보다 시골장터나 강변의 모래사장에서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한을 노래한 음유시인이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 만주에까지 그의 명성이 울렸고, 유성기 음반 <쑥대머리>는 1백 만 장이 넘게 팔렸다고 한다.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과 절망을 노래한 임방울의 한 맺힌 목소리는 당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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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은 1905년 4월 20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679번지(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 679번지)에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 임경학과 어머니 김나주 사이에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임방울의 출생시기와 가족관계에 대하여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천이두 선생의『임방울』(1986, 현대문학사)과, 박황 선생의『판소리 200년사』(1994, 사사연), 그리고 최동현 선생의 『판소리란 무엇인가』1994, 에디터)에서 임방울 선생의 생년을 공통적으로 을사조약 체결 1년 전인 1904년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호적등본에 1905년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해를 공식적 기록으로 삼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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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의 본명은 임승근(林承根)이다. 임방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는 다음의 두가지 추정이 있다. 어려서 울지도 않고, 방울방울 잘 놀아서 임방울이라 불렸다는 증언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임방울이 판소리하는 장면을 당대의 명창이 소리를 듣고 탄복하면서, "너야 말로 은방울이다" 라는 칭찬하면서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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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의 아버지인 임경학은 소리로 이름을 떨칠 정도는 아니었으나, 인근에서 <비갑이 소리꾼> 정도로 인정받아 친지들이 모인 데서 벌어진 소리판에서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임방울이 태어날 무렵, 전남 지역에서 활약하는 판소리 명창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임방울의 어머니 쪽 계통이 단골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임방울의 어머니를 흔히 ‘김나주’라고 말하는데, 이는 나주 출신의 김씨, 즉 ‘나주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어머니와 누나가 무업을 행했다는 증언도 있다.
임방울의 외숙이 당대의 국창 김창환이다. 김창환은 전남 나주 출생의 고종, 순종 때의 명창이다. 그는 서편제 유파로 원각사에서 창극을 연출했으며, 협률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흥보가 중에 <제비노정기>는 김창환의 독보적인 경지를 표현해낸 더늠이다. 김창환의 아들인 김봉이, 김봉학도 명창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임방울은 어려서부터 외사촌형인 이들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 이 같은 환경이 임방울을 당대 최고 판소리꾼으로 키우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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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이 열 살 되던 무렵에, 광주 송정리에 나주의 명창 박재실이 이끄는 창극단(唱劇團) 공연이 벌어졌다. 이 공연이 임방울의 판소리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본격적인 판소리와 창극 공연이야말로 소년 임방울의 동기를 유발시키는데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임방울은 박재실 문하에서 3년 동안 <춘향가>와 <흥보가>를 전수받았다. 임방울은 열두살 되던 해에 박재실의 창극단에 들어가 세달 뒤에는 무대에 서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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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실 창극단이 화순에서 공연할 때였다. 협률사에서 활동했던 공창식 선생이 공연장에 나타났다. 그 무렵 명창 공창식 선생은 소리로 이름이 크게 떨쳤는데, 고향인 화순 능주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공창식 선생은 음성이 맑고 높고 아름다우며 애원 처절한 서편제에 특기를 가진 분이었다. 임방울은 창극단을 그만두고 공창식 선생의 제자가 되어 판소리의 여러 대목을 배웠다. 화순 사람 남국일이 임방울을 후원하여,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며 소리공부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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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이 열일곱 살 되던 무렵, 남국일은 임방울을 유선준에게 보내 소리공부를 하도록 도왔다. 임방울은 유성준에게서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유성준은 뱃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씩씩한 느낌을 주는 동편제의 대가였다. 이 무렵 함께 소리공부를 한 사람들로는 성원묵, 조몽실, 오수암 등이 있다.
마침 임방울은 변성기를 거치는 중이어서 소리가 기대보다 시원하게 나오지 않아 심각하게 좌절하는 시기를 보냈다. 송정리에 살고 있는 매형 박치대를 찾아와 골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겨울부터 봄까지 소리공부를 하였다. 임방울은 다시 유성준 선생을 찾아와 <수궁가>와 <적벽가> 공부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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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은 자신의 소리를 완성하기 위하여 지리산 쌍계사를 찾아갔다. 그곳에 토굴을 파고 독공을 시작 했다.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를 차례로 공부하고, '아니리'와 '발림'을 개발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구전심수로 선생에게 배워온 부분을 기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훈련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임방울은 선생에게 배운 소리제에다가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개성을 보태기도 하였다. 구수한 송정리 사투리가 판소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지리산에서 독공을 하던 중에 임방울은 집으로 내려오라는 전갈을 받게 된다. 집에서는 임방울에게 소리를 그만두고 결혼하라고 하였다. 임방을이 '득음을 하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 었다'고 고집을 하자, 부모님은 일단 혼인을 하고 소리공부를 계속하기로 허락하였다. 이렇게 맞아들인 부인이 한살 아래인 박오례 여사이며, 그 사이에 오희, 순희 두 딸과 아들 화택을 두었다. 임방울은 혼인 6년 후에 명창의 큰 꿈을 안고 상경 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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