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59]코트디부아르의 지역분쟁과 뿌리 깊은 대립--미국-프랑스가 일으킨 약소국의 내전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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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9]코트디부아르의 지역분쟁과 뿌리 깊은 대립
미국-프랑스가 일으킨 약소국의 내전상황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민족통신 [연재-59]번째로 코트디부아르의 지역분쟁과
종교와 종족간에 뿌리 깊은 대립에대해서 2011년 새해의 첫날부터 세계의 주요 뉴스는 서아프리카의 나라들
중의 하나인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에 대하여 중요한 기사들을 계속하여 보도 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 라는
나라의 국명은 프랑스가 식민초기에 이 지역에서 주요 상품인 ‘상아’를 처음 발견함에 따라서 <상아를 대량
산출하는 곳>이라고 하는 명칭을 프랑스어로 처음 사용한 것이 유래가 됬다.는 그의 논문을 전재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출처 : 유태영 박사 2011-01-10]
민족통신
종교와 종족간에 뿌리 깊은 대립에대해서 2011년 새해의 첫날부터 세계의 주요 뉴스는 서아프리카의 나라들
중의 하나인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에 대하여 중요한 기사들을 계속하여 보도 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 라는
나라의 국명은 프랑스가 식민초기에 이 지역에서 주요 상품인 ‘상아’를 처음 발견함에 따라서 <상아를 대량
산출하는 곳>이라고 하는 명칭을 프랑스어로 처음 사용한 것이 유래가 됬다.는 그의 논문을 전재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연재-59]코트디부아르의 지역분쟁 종교와 종족간에 뿌리 깊은 대립 또 하나의 미국-프랑스가 일으킨 약소국의 내전
코트디부아르 라는 나라의 국명은 프랑스가 식민초기에 이 지역에서 주요 상품인 ‘상아’를 처음 발견함에 따라서 <상아를 대량 산출하는 곳>이라고 하는 명칭을 프랑스어로 처음 사용한 것이 유래가 됬다. 하지만 미국은 그 후에 불어사용을 피하기 위하여 미국식으로 <아이보리 코스트, Ivory Cost>라고 명칭을 고쳐 불렀는데 역시 ‘상아’라는 이름은 그대로 붙어있다. 침략자 강대국들은 중요한 상품에 따라서 약소구들의 국명까지도 제멋대로 만들어 놓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코트디부아르의 오랜 내전에서 민중들이 웨치고 있는 슬러간이 매우 혼란스럽다. <프랑스의 신식민지정책을 모두 함께 반대하자> 라고 웨치는 구호는 코트디부아르의 그바그보 대통령을 반대하는 야당과 북쪽의 민중들의 웨침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현재 그바그보 대통령을 지지하는 남쪽의 여당과 집권세력도 역시 똑 같은 내용의 구호인 <프랑스의 내정간섭 반대하고 외세는 물러가라>를 크게 웨치고 있는 것이다. 양편이 치열하게 대치하여 내전을 벌리고 있으면서도 양편이 서로 똑 같은 내용 의 슬러간을 웨치고 있으니 이게 웬일인가? 그 원인과 이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코트디부아르의 역사의 심층을 고찰해 보아야 하겠다. 프랑스의 코트디부아르식민통치와 독립서아프리카 지역에 소속된 14개 나라들의 고대역사들은 거의 다 대동소이 하다. 이웃 나라들의 고대역사에 대하여 이미 여러번 기술했기때문에 코트디부아르의 고대역사는 생략한다. 그리하여 주로 프랑스가 1870 년부터 코트디부아르를 침략하고 식민지화한 잔악한 식민통치의 역사에 대하여 주로 살펴 본다. 코트디부아르의 면적은 322460km2로 조선반도 보다 훨신 크고 세계 67위 이다. 인구는 2,160만으로 인구의 38.6%가 주로 북쪽의 무슬림이고 기독교인 32.8%는 주로 남쪽에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종교적 인구분포로 인하여 북과 남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 특증이다. 언어느 프랑스어가 공식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코트디부아르에는 이웃의 여러 나라들에서 부터 밀려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이 전체 인구의 약 26%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런데 이들 이주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들이다. 이로 인하여 남쪽의 기독교측에서는 외래 노동자들에 대하여 거센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와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여 뿌리 깊은 지역, 종교, 종족의 갈등속에서 내전으로 번지고 있는 실정이다. 코트디부아르는 코코아, 커피 생산이 세계 3위이며, 코코아 수출은 세계 1위이다. 그 외에도 금과 석유, 바나나, 팜유, 고무와 원시림 목재를 수출 한다. 코코아와 커피 생산과 수출에 필요한 노동력을 위하여 외래 노동자들을 많이 끌어들이고 있다. 1970년대에 남쪽 해저에서 2곳의 유전이 발견되여 80년대 부터 1일 1만배럴씩 원유가 생산되여 석유수출국이 됬다. 적도 열대지방의 풍성한 원시림 속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진귀한 야생동물들이 대량 서식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번영하고 잠재적 가능성이 풍부한 나라로 알려저 있다. 15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침략자들은 귀중하고 진귀한 생산품에 따라 그 지역을구분하여 생산품과 연결된 지명을 만들어 부르면서 접근해 욌다. 17세기에 이르러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 해안에서 진귀한 상아를 발견했다.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에 상아 무역기지를 설립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서 프랑스는 서아프리카 침략의 요새를 코트디부아르에 구축하고 영국을 대항하여 싸우면서 서로 노예무역에 주력하고 있었다. 1870년에 프랑스-독일 전쟁으로 인하여 프랑스군이 한때 철수했지만 이 지역에 서 독일, 영국, 프랑스 세 나라는 상아와 골드 코스트에 대한 세력확장을 위하여 서로 치열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는 그 당시 코트디부아르의 주변의 내륙 지방의 추장들과 조약을 맺고 세력을 확장하고 이를 토대로하여 프랑스군이 1887-1892년에 주둔했다. 1893년에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와 세네갈을 따로 분리시켜 놓고 두 나라를 모두 다 식민지화하여 통치했다. 1903년에 프랑스는 내륙지방과 연결하는 철도건설을 시작했는데 1912년에 내륙지방으로 315km 를 건설하여 코트디부아르의 수도인 아비장 까지 연결했다. 1946년에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를 서아프리카 프랑스령 연합의 식민지로 편입 시켰다. 1958년에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를 프랑스 공동체의 회원국이 되여 자치공화국이 되게했다. 프랑스의 이와 같은 조치는 선의에 의한 조치가 절대로 아니라 그것은 오직 시대적 변화에 따라 할 수 없이 취하는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코트디부아르 해안에 상륙한 이후 250여년 동안 침략과 착취와 식민통치를 해 오다가 결국 마수의 손길을 완전히 떼고 드디어 코트디부아르에서 떠나 가야만 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부터 아프리카의 모든 피식민지 국가들은 앞을 다투어 가면서 나라들 마다 제각기 해방과 독립국 건설을 위하여 일제히 분발하고 투쟁에 나서고 있었다. 1946년 10월에 서아프리카 말리에서 서아프리카 독립운동가들 수백명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독립운동 연합체>를 결성하고 코트디부아르의 우푸에 부아니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이 <독립운동 연합체>에 일절 관여하지 않은 나라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오히려 더 많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지도자가 바로 세네갈의 셍고르 이었다. 셍고르 계통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운동가들은 이념적으로 우푸에 부아니가 회장으로 선출된 <독립운동 연합체>의 독립운동의 방향과 투쟁의 정체성에 대하여 전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독립투쟁방법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었다. 셍고르 계통의 운동 단체들은 프랑스 공산당과의 유대를 끝까지 제휴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면에 우푸에 부아니 계통의 단체들은 프랑스공산당과의 관계를 끊고 갈라 졌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부아니가 이끄는 <독립운동 연합체>는 해체됬다. 한편 그 당시 <아프리카 커피생산 조합>의 대표자로 있던 우푸에 부아니는 시대적 요구에 재빠르게 부응하여 <코트디부아르 민주연합>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푸에 부아니가 이끈는 코트디부아르의 독립운동은 1960 년 8월에 아프리카에서 찾아보기 드물게 어떤 항쟁이나 투쟁이 전혀 없이 극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주독립을 쉽게 성취 하였다. 피나는 투쟁의 역사가 없이 독립을 획득했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립을 성취한 코트디부아르는 우푸에 부아니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했다. 치열한 투쟁 없이 프랑스와 평화적 합의에 의하여 독립을 성취한 코트디부아르는 <피의 값>으로 독립을 쟁취한 이웃 나라들에 비하여 예외적으로 행운이였다. 하지만 그 행운이 오히려 코트디부아르의 제2의 불행으로 후에 작용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위에 간략하게 기술한 독립운동의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코트디부아르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우푸에 부아니 대통령의 통치이념과 정치 행태가 어떻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 815 해방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중국과 만주 벌판에서, 거친 밀림에서 투쟁한 경험이 전혀 없이 너무 쉽게 친미 일변도로 독재적 집권을 시작한것 처럼 우푸에 부아니 대통령도 너무 쉽게 친프랑스 일변도 독재집권을 시작했던 것이다. 코트디부아르의 초대 대통령 우푸에 부아니 대통령이 옛종주국 프랑스를 배경삼아 외세의존 통치노선을 취한 정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몇가지를 알아 본다. ㄱ. 프랑스와 투쟁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을 성취하여 집권한 부아니 대통령은 프랑스 식민통치하에서 총리직을 역임한 친프랑스적 경력를 가지고 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코트디부아르의 막대한 재원인 카카오, 커피, 목화의 생산과 수출에 관한 일체를 전적으로 프랑스 위주로 관리하고 진행을 했다. 부아니 대통령의 친프랑스 청책에 의하여 프랑스는 식민통치 시절과 조금도 다름 없이 코트디부아르를 지배하면서 수출의 1/3정도를 프랑스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코트디브아르는 <탈식민지> 후에 또 다시 < 후기 식민지>가 되고 있었다. ㄴ. 부아니 대통령은 33년동안 집권을 하면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급속히 달성을 했다고 과시했다. 하지만 경제적 목표달성을 구실 삼아 빈곤한 이웃 나라들로 부터 자국의 인구 26%에 해당되는 이주노동자를 대량 이주시켜 끓어 드렸다. 전체 인구 3분의 1이상의 외국인 출신인 혼합된 나라를 만들었다. 외국인 중에서 70%, 360만명이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이다. 오늘의 생산과 수출에만 눈을 크게 뜨고 미래에 당면할 인종문제와 외국인 대우문제 그리고 빈부격차의 문제에 대하여는 캄캄한 소경이 었다. ㄷ. 부아니 대통의 친프랑스 정책하의 33년 동안에 코트디부아는 물, 전기, 건설,통신, 교통등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 있어서 프랑스 기업이 대부분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아니고는 모든 것이 불가능한 전적으로 예속된것을 말 한다. ㄹ. 코트디부아르의 가장 큰 자원인 카카오 재배는 세계 43%를 차지하고 수출은 세계 1위이다. 하지만 무리한 재배확장과 수출증가로 인하여 자원의 고갈과 열대림의 파괴는 큰재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부아니 태통령의 집권기간 33년동안에 매해 년간 45만 ha가 파괴되고 있었으며, 이제는 코트디부아르 자원의 고갈이 위험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ㅁ. 부아니 대통령의 33년 집권의 마자막 해인 1993년에 그가 사망할때 그 당시 현재에 있어서 코트디부아르가 IMF에 158억 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의 사망 후에 코트디아부르의 국가 경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내리막 위기에 처해 있다. ㅂ. 부아니 대통령은 신실한 케톨릭 신자다. 그가 비록 무력투쟁이 없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집궈을 시작했지만 그는 걸코 평화적으로 통치를 하지는 못했다. 1964년 4월에 보카 대법원장이 대통령 암살음모를 꾸미다 실패하고 자살 했다. 1969년에 수도 아비장에서 대학생들의 반정부 데모가 1년동안 계속됬다. 1973년에 12명 장교들이 정부전복 시도를 하다가 체포된 음모 사건이계속됬다. 1980년에 로마교황방문 때 육군 장교가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 했다. 1982년에 대학생들의 거센 데모로 인하여 대학교가 장기간 폐쇠됬다. 1990년 2월에 개혁을 요구하는 반정부 파업사태가 전국적으로 일어 났다. 1999년에 부아니 대통령은 자기 고향인 야무스크로에 세계 최대 규모의 캐톨릭 성당 건축을 완공했는데 국고금 낭비의 문제를 무시하고 독재전권이 강행했다. 이 성당은 오늘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 명물일뿐 아무 소용없는 건물이다. ㅅ. 부아니 대통령은 33년 집권 기간에 34개의 국영 기업체중에서 18개를 폐쇄 하여 반정부행위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했으며 수없이 많은 헌법의 폐지와 개정을 강행하여 장기집권의 야욕을 채웠다. 코트디부아르의 주요 수출자원은 카카오이다. 카카오의 열매는 럭비공 모양으로 길고 걷이 단단한 열매이며 열매속을 갈아서 가루를 만든 것이 수출상품이다. 카카오 가루에 당분을 섞어 초콜릿을 만든다. 코트디부아르 사람들은 초콜릿을 <검은 신의 음식>이라고 부를 정도로 코트디부아르의 보배로운 달러를 벌어들이는 자원이다. 그러나 이 보배로운 달콤한 자원은 너무나도 큰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다. 카카오 의 “검은 초콜릿” 빛 보다 더 검은 빛이 지금 이 나라의 정치적 미래를 더욱 검고 어둡게 만들고 있다. 1993년에 33년 집권을 끝내고 부아니 대통령은 88세의 나이로 사망 했다. 프랑스는 부아니 대통령의 사망에 대하여 ”아프리카의 현인”의 사망이라고 하면서 애도 했다. 하지만 88세 나이로 마침내 암으로 인하여 사망한 부아니 대통령은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캐톨릭 교회와 그리고 코트디아부르의 순박한 국민들의 가슴속에 비극적 이며 불의한 역사의 씨앗을 마냥 뿌려 놓고 떠나갔다. 부아니 대통령의 사망후에 앙니 베디 국회의장이 법적으로 대통령직을 계승 했다. 전임 대통령의 잔여임기 2년을 인수 받아 제2대 대통령이된 앙니 베디 대통령은 2년 인수된 임기가 다 끝난 1995년에 코트디아부르의 역사상 최초로 다당제 선거를 실시하여 앙니 베디는 당선되여 대통령직을 계속할 수 있게 됬다. 하지만 최초 다당제 선거로 집권에 성공한 앙니 베디 대통령은 4년후 1999년 12월 24일에 발생한 쿠테타로 인하여 단명으로 권좌에서 쭟겨날 뿐만 아니라 쿠테타군에 의하여 프랑스로 추방을 당했다. 군사위원회의 수반인 로버트 케이 장군이 주도하여 쿠테타는 일단 성공하였다. 쿠테타에 성공한 군사위원회의 케이 장군은 과도정부를 수립하여 대통령이 됬다. 하지만 곧 민정이양을 위하여 민선 대통령 선출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분명히 발표 했다. 그런데 코트디부아르의 국가적인 정치적 불행의 씨앗이 바로 이번 민선 대통령 선거전에서 부터 움트기 시작했다. 문제의 씨앗은 33년을 통치하다 사망한 부아니 대통령이 뿌려 놓은 분쟁의 씨앗 이였다. 분쟁의 씨앗은 무엇인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3명의 후보자가 등장했다. 첫째는 쿠테타 주동자인 로버트 케이 현직 대통령이고 둘째는 <아이보리 인민전선>의 후보자인 로랑 그바그보 이다. 세째는 전 총리이며 북쪽 이슬람 배경을 가지고 있는 알라산 와타라 후보자가 출마하여 모두 3파전 선거가 예상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3파전 후보자 중에서 가장 유력시 되는 유능한 후보자는 북쪽의 이슬람 배경을 가지고 있는 전직 총리인 알라산 와타라 후보자 이었다. 강력한 상대 후보자는 로버트 케이 장군이 아니고 북쪽의 이슬람 배경으로 출마하는 알라산 와타라 후보가 염려가 된다고 확실히 깨닫고 있는 후보자는 바로 로랑 그바그보 이였다. 로랑 그바그보는 벌서 마음속에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알라산 와타라 후보자는 전 대법원장이며 또한 북쪽 이슬람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유력한 후보자로서 그바그보에게는 분명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럼으로 그바그보는 케이 장군은 전혀 문제 하지 않고 오직 알라산 와타라 후보자의 자격문제를 들고 나왔다. 무슨 자격 문제인가? 그바그보의 문제 제기는 후보자들은 순수한 코트디부아르의 조상의 혈통을 이어 받은자 이어야만 대통후보자가 될수 있다는 주장이다. 만일 부모중에서 한 사람이 순수한 코트디부아르인의 혈통의 자손이 아나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대통령 후보자의 자격이 상실된다고 주장했다. 부아니 전임 대통령이 33년동안 통치할 때 전체 인구중 3분의 1 이상 되는 많은 이웃 나라 외국인 노동자 들을 끌어 들였기 때문에 양부모의 조상이 순수한 코트디부아르인의 혈통이되는 경우는 극히 어려운 상황 이였다. 그럼으로 그바그보 후보자가 주장하는 <양부모의 순수한 코트디부아르인 혈통> 을 주장하는 것은 실지에서 하나의 억지 주장에 불과 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은 역시 이 억지 주장에 손을 들어 주었다. 대법원 판결이 그바그보 후보자의 주장에 손을 들어 줌으로 인하여 알라산 와타라 후보자는 자격상실되여 탈락했다. 2000년 10월 20일에 치려진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선거는 그바그보와 로버트 케이의 양자 대립의 선거가됬으며 그바그보 후보자가 쿠테타를 이르켰던 로버트 케이를 쉽게 물리치고 당선됬다. 이러한 야비한 방법으로 승리한 그바그보 대통령의 비극적인 통치시대가 처음 시작됬던 것이다. 프랑스와 미국은 쿠테타를 일으켜 일시 정권을 장악한 로버트 케이 장군을 눈의가시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케이 장군의 집권을 저지시키고 친프랑스 남쪽 출신이며 기독교인 그바그보를 대통령으로 세우는데 완전히 성공했다. 그바그보 대통령 집권 초기인 2000부터 2011년 초까지 10여년 동안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와 사회적 혼란은 <누가 진짜 코트부아르인 인가?>라고 하는 문제제기로 인하여 계속 잡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순수혈통 론란을 가리켜 이른바 <이부아르인> 론란 혹은 <이브아리테>론란 이 라고 부른다. 뿐만 아나라 <이브아르인>론란으로 인하여 <북쪽의 이슬람권>과 <남쪽의 기독교권>이 첨예하게 양분되여 사회적 불안이 심화되고 있다. 그바그보 대통령의 정권은 완전히 남쪽의 기독교권을 위주로 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바그보 대통령의 집권행태 무엇이 문제인가? 그바그보 대통령이 벌려놓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하에서 북쪽 이슬람계통의 주민들은 <진짜 코트디부아르인>이 못된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2등 국민 취급을 받고 있는데 대하여 몹시 분개하고 있다. 북부지역은 땅이 천박하여 농업이 어렵고 가난한 무슬림이 다수이다. 이와 반면에 남쪽은 열대우림이 무성하여 카카오, 커피, 목화 등이 풍부하여 달러 획득으로 풍요로운 기독교인들의 천국이 되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무슬림들에 대하여 남쪽의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박대하고 정치적으로 2등 국민 취급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결국 높아진 북쪽의 이슬람 주민들의 분노는 이슬람반군을 조직하여 남쪽의 기독교정부와 무력충돌을 이르켰다. 2002년에 북쪽 반군이 남쪽 수도인 아비장까지 진격하여 코트디부아르 전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것은 물론 그바그보 대통령이지만 프랑스가 몹시 다급해서 곧 비상사태 수습조건으로 군사개입을 개시했다. 2003년에 프랑스군의 개입과 중재로 전투는 정전됬지만 북과 남의 분렬은 더욱 심화되 고정되는 형국으로 진전됬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또 하나 북과 남이 분렬되는 나라가 발생한 것이다. 2004년 3월에 수도 아비장에서 반정부 시위가 대대적으로 발생하여 120명이 숨지는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서방을 편드는 UN의 이름으로 8000의 병력을 급파하여 치안군의 역할을 시작하여 2007년 까지 하고있었다. 사실은 UN이라는 명분하에 실제로는 옛종주국 프랑스군이 8000명이 코트디부아르에 주둔하고 있었다. 명분상으로 다국적 평화유지군과 모두 합하면 1만명의 외국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 10월에 <이브아르인>론쟁을 이르켜 억지로 대통령이된 그바그보 대통령의 임기는 2005년 10월이 임기가 이미 끝났다. 하지만 그바그보 대통령은 북 쪽과 싸우는 내란을 핑게삼아 재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계속 집권을 하고 있다. 5년 임기가 끝난데도 불구하고 내란을 핑게삼아 배짱으로 버티고 서서 집권하고 있는 그바그보 대통령 그는 영웅인가? 폭군인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프랑스를 반대하는 <안티 프랑스> 구호가 오히려 남쪽의 정권과 그바그보 대통령 진영에서 크게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물러가라> <우리는 프랑스 더 필요 없다> 왜냐하면 8000명이나 되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북쪽의 반군들을 싹 쓸이로 완전히 물리쳐서 몰아내 깨끗히 전멸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프랑스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휴전협정>만 그냥 연장시키고 있다고 불만을 터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바그보 대통령 자신도 프랑스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차라리 프랑스 대신 미국의 개입을 요청하는 발언을 은근히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친정부 젊은 애국단체>들은 길거리에 나와 <프랑스 대신 미국> 이라고 하는 구호를 크게 웨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정책의 혼돈속에서 프랑스군 9명이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34명이 중상으로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 했다. 성난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63명의 코트디부아르 시민이 사망했다. 이로인해 코트디부아르 시민들은 프랑스인을 대상으로 화재, 강탈, 강간행위를 서슴치 않고 행함으로 프랑스 정부는 13만명 프랑스인들 중에서 우선 5000명을 급하게 프랑스로 귀국시키는 상황이 벌어 졌다. 2004면 11월 15일에 당황한 프랑스는 UN에 제의하여 코트디아르로 흘러 들어가는 모든 무기들을 일체 차단할 것을 제안하여 UN은 가결했다. 그동안 이스리엘쪽에서 많은 무기들이 그바그보 대통령 진영에게 보급되고 있었던 것은 다 잘 알려진 비밀 이었다. UN은 <상호적대행위금지, 무기사용금지, 반군과 친정부군 모두 무장해제>등 전혀 실효성이 없는 결의안들만 계속하여 통과시키고 있는데 대하여 코트디부아르 남쪽의 국민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비밀이 아니라 다 알려진 통계에 의하면 1999년에 로버트 케이 장군이 이르킨 쿠테타사건 이후 또 그바그보 대통령의 집권 이후 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내전기간에 강대국들을 통하여 코트디아부르로 흘러 들어온 무기는 약 300만정 이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신식민지 세계화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는 가운데서 눈가리고 아웅하는식의 <휴전협정>과 <평화결의안> 채택만 반복하고 있을뿐 실제로는 약소국들만 이래저래 회생을 당하고 있을 뿐이다. 약소국들 사이에 분쟁이 있기때문에 강대국들은 서로 무기장사들을 하고 있다. 2004년-2010년 사이에 미국과 프랑스는 코트디아부르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UN을 활용하면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적극 끌어들이면서 아프리카 이웃나라들의 중재역할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영웅심에 이끌린 아프리카 나라들은 저마다 중보자가 되겠다고 나서고 있다. 하지만 지난 7-8년동안 아프리카 나라들의 중재역할로 인하여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2007년 3월 4일에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의 주재로 <와가두구평화합의>가 어렵게 성사되여 북과 남 쌍방이 서명한 예가 꼭 한번 있을 뿐이다. <와가두구 평화협정>에 의하여 2007년 3월 29일에 그바그보 대통령은 반군 지도자 소로를 새로운 과도정부의 신임 총리로 임명했으며 7월30일에 <전쟁종결> 선언을 했다. 또 <선거관리 위원회>도 창설했다. 그러나 당장 위기를 면했을 뿐이고 반군의 무장해제는 이루워 지지 못했으며 국토의 절반인 북쪽에서 그바그보 대통령의 통치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반군 지도자 소로의 신임 총리 임명도 얼마 후에 취소되고 말았다. 2008년에 들어서서 <선거관리 위원회>도 인원 구성 문제에 마찰이 일어났으며 정세의 악화로 인하여 아무 효과도 없이 혼돈만 또 다시 재현되고 있을 뿐이였다. 그바그보 대통령 퇴진? 망명? 기로에서 헤멘다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 선거는 응당 2005년 10월에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바그보 대통령이 내전을 핑게 삼아 배짱으로 미루고 또 미루다가 드디어 2010년 11월 28일에 역사적인 대통령 선거가 실시됬다. 대통령 후보자는 그바그보 현 대통령과 전 총리 알라산 와타라 두 사람이다. 알라산 와타라 후보자는 누구? 그는 2000년 10월에 실시한 대선 때 후보자로 출마 했다. 하지만 그때 그바그보가 제기한 <누가 진짜 코트디부아르인 인가> 라는 신분론쟁의 희생양이 되여서 후보자에서 탈락된 쓰디쓴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장본인 이다. 그러데 이번 2010년 11월 28일 선거전에서는 그바그보 대통령이 감히 또 다시 순수혈통신분론쟁을 제기하지 못하고 알라산 와타라를 대통령 후보 경쟁자로 시인하고 있다. 2010년 11월 28일 대선 결선투표에서 선관위는 알라산 와타라가 54.1%를 획득했고 그바그보 현 대통령은 45.9%를 획득하여 와타라가 당선됬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게 웬말인가? 그바그보 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와 군부를 등에 업고선관위의 발표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승리를 선포했다. 결국 코트디부아르에는 두명의 대통령이 저마다 12월 초에 취임을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있다. 알라산 와타라를 세계의 여론은 지지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의 여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저울질을 하고 있다. 와타라 전 총리를 지지하는 민중들의 시위를 정부군이 폭려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2010년 12월 28일 현재 170명이 사망했고 14,000명의 피난민들이 국외로 탈출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프랑스의 그바그보 대통령에 대한 태도가 어떻한지 전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미국과 프랑스는 그바그보 내통령에 대하여 완전히 냉담항 뿐만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는 완전히 등을 돌리고 그바그보 대통령이 무조건 선거 결과에 승복하라고 일방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미국과 프랑스에게 완전히 배신당한것을 통분하고있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분통이 터져서 미국과 프랑스에 대하여 큰 소리를 치며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UN 평화유지군 모두 물러가라> 라고 외치고 있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지금 < 반미 반프랑스 반제국주의자>가 되고 있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미국과 프랑스에 이용만 당했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미국과 프랑스에게 <왕따 당했다> 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면서 그바그보 대통령은 끝까지 정권을 지키겠다고 버티면서 군부와 기독교 세력을 붇들고 있는 것이다. 2011년 1월 8일 The Washington Post기사를 읽으면서 그바그보 대통령의 가련하고 비참한 운명이 숨김 없이 노출되고 있다. 필자는 세계정치의 패러독스를 강하게 느끼면서 아래 기사를 소개한다. The Washington Post 기사는 대략 아래와 같다.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국무장관은 여러번 전화와 편지로 그바그보 대통령을 접촉 했으며 미국에 초청하였는데, 초청의 목적은 코트디부아르의 당면한 문제를 솔직히 토의 하기 위함이다. 만일 선거결과에 승복하고 평화적으로 퇴임하게되면 미국은 당신을 국제적 위신을 고려해서 높은 위치에 해당하는 고급직을 부여할수 있으며 미국안 에서도 좋은 직책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호의를 무시하고 고집하여 대통령직을 고수한다면 그때 미국과 세계은행과 국제적인 경제봉쇄를 가하게 될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두번이나 전화를 했는데 그바그보 대통령은 전화를 거절하여 통화를 못한 일이 있다>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코트디부아르에는 국민적 영웅 축구선수 드로구바가 있다. 그는 아프리카 선수로는 처음 영국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두번이나 올랐으며, 아프리카 최고 선수로 두 차레나 선정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의 조국 코트디부아르를 월드컵 본선에 연속 진출 시켰다. 2006년의 독일 월드컵 본선진출을 확정짓는 티켓을 걸머지게된 2005년 10월의 주요한 경기였다. 이 경기를 승리로 끝낸 드루구바는 이 소식을 국민에게 알리는TV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꿀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눈물로 소리 쳤다. “여러분, 우리 적어도 1주일간만이라도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멈춥시다” 마이크를 잡고 드로구바는 눈물로 국민에게 호소했다. 거짓말 같은 휴전이 정말 1주일간 이루어 젔다고 한다. 총소리는 한 방도 울리지 않았고 서로 부등켜 안고 기쁨을 온 국민이 만끽 했다고 한다. 종교가 못하는 종족갈등의 벽을 잠시나마 극복하게 하는 역할을 축구선수는 넉넉히 해냈다. 드로구바는 1주일간의 평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 했다. “그동안 수많은 트로피를 받았지만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가져다준 그 1주일간 이 가장 영광 스러운 트로피였다” 필자는 이 글을 마치면서 재일 동포 청년 정대세 축구선수의 뜨거운 눈물이 자꾸 만 생각나서 종교인으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끝) |
[출처 : 유태영 박사 2011-01-10]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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