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3]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최진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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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3]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김구,함석헌선생 흠모한 최진환박사
[포트 화이니미=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재미동포사회 민족주의자 제1호로 알려진 최진환 박사(75),
그는 치과병원을 33년 운영하다가 2007년에 은퇴하고 그리고 로스엔젤레스 지역에 거주하다가 시골로 갔기
때문에 최근년에 와서는 그를 만나는 기회가 좀처럼 드물었다. 그런지 그에 대한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운전대를 잡고 101번 고속도로 북방에 올라 한시간 가량 달려갔다. 고속도로를 내려
최진환 박사 주택으로 이어지는 해변으로 가는 길목에는 마치도 베토벤 교향곡에 나오는 전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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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1-01-23]
민족통신
그는 치과병원을 33년 운영하다가 2007년에 은퇴하고 그리고 로스엔젤레스 지역에 거주하다가 시골로 갔기
때문에 최근년에 와서는 그를 만나는 기회가 좀처럼 드물었다. 그런지 그에 대한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운전대를 잡고 101번 고속도로 북방에 올라 한시간 가량 달려갔다. 고속도로를 내려
최진환 박사 주택으로 이어지는 해변으로 가는 길목에는 마치도 베토벤 교향곡에 나오는 전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기획-3]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김구,함석헌선생 흠모한 최진환박사 [포트 화이니미=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재미동포사회 민족주의자 제1호로 알려진 최진환 박사(75), 그는 치과병원을 33년 운영하다가 2007년에 은퇴하고 그리고 로스엔젤레스 지역에 거주하다가 시골로 갔기 때문에 최근년에 와서는 그를 만나는 기회가 좀처럼 드물었다. 그런지 그에 대한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운전대를 잡고 101번 고속도로 북방에 올라 한시간 가량 달려갔다. 고속도로를 내려 최진환 박사 주택으로 이어지는 해변으로 가는 길목에는 마치도 베토벤 교향곡에 나오는 전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최진환 박사 자택은 로스엔젤레스 서북쪽 55마일(약 94킬로메터) 거리에 있는 옥스나드 근처 '포트 화이니미(Port Hueneme)'라는 해변도시이며 농촌마을에 위치한 아담한 단독주택이다. 그는 부인 손경자 여사(80)와 함께 건강을 돌보며 휴양겸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후대를 위해 그의 정력을 바칠 계획이다. 그는 의사생활을 하면서도 돈에 관심이 없어 노후대책을 알뜰하게 준비하지 못했다고 다소 후회스러운 지난 시기를 돌아본 최진환 박사는 "다행스럽게도 자녀들이 이 주택을 오래 전에 마련하여 주어 주택문제는 해결하고 산다"고 말한다.
다시 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침실로 가는 복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사진이 붙어 있다. 그는 "내 평생 존경해 온 분들은 백범 김구선생과 함석헌 선생이다."고 말하면서 '백범일지'와 함께 함석헌 선생이 쓴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본래 '성서의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다'고 설명하며 두 분의 나라사랑 정신과 애국애족에 대한 마음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최진환 박사가 1936년 음력5월1일(양력으로는 6얼19일)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이서초등학교, 대구중학교, 부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대학원에서 의과박사학위를 받고 학교에서 7~8년 강의도 하며 교수자리를 기다려 오면서 약 1년동안 치과의사 생활도 하다가 1971년 3월13일에 미국에 왔는데 어떻게 하여 자신이 민족주의자가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부산고등학교 재학시절 국어선생이었던 박지홍 선생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털어 놓으면서 그 이후에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함석헌 선생 강연회' 같은 모임에 참석하여 그의 강연을 들으며 많은 것을 깨닳을 수 있었다"고 그의 생애를 돌이켜 본다.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 장준하 선생이 발행했던 '사상계' 등의 도서들을 보며 우리 민족과 나라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어떻게 미국으로 이민 오기를 결정했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살수 없어 쫒겨 온거나 마찬가지지..."라고 대답하면서 사실은 치과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여의치 못했고, 당시 박정희 군사통치도 싫었고, 사회부조리 풍토 등 불만이 많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게다가 "일반 의과대학에서는 의학역사라는 과목을 자료에 의해 가르치는데 우리 치과대학에서는 치과역사라는 과목이 없어 그것을 연구하여 자료를 만들어 치과역사 과목을 강의하고 싶었는데 학교에서 인재를 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불만이었다. 더욱이 사회환경이 돈을 써야 뭘 할 수 있는 그런 풍토가 나는 싫었다. 교육계까지 그 모양이었다."고 토로한다. 이러한 것들이 미국 이민을 오게된 동기로 이해된다.
그는 특히 70년대 중반에는 장준하 선생기념사업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국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왔고,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이후 미국에 망명와서 미주청년운동에 불을 붙여 준 윤한봉 선생이 1983년 조직하여 만든 민족학교(Korea Resource Center)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오랜 동안 젊은이들의 후원자로서 활동해 왔다. 그리고 조국통일운동에 참여하는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한국민주화 운동과 조국통일 운동에 열과 성의를 다해 왔다. 최진환 박사는 지난 해 로스엔젤레스 동포사회에서 주최하는 ‘제15회 개척자상’ 수상자로 선정돼 다른 3명과 함께 수상한바 있고, 작년 2월에는 또 '시민사회네트워크'가 제정한 수상자로 선정되어 표창받은바 있다. 그는 33년 동안 자신이 개업한 치과병원을 운영하며 때로는 가난한 동포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기도 하였던 최진환 박사는 “이제 내 남은 여생 동안 후손들에게 백범 김구 선생님의 숭고한 정신과 함석헌 선생의 애국정신을 후대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난 해 3월13일에도 함석헌 선생 애국정신을 기리는 '씨알 함석헌 사랑모임'을 결성하여 후대들이 민족주의자로서 애국활동을 이어 받을 수 있도록 이 단체를 조직한바 있다. 함석헌 선생은 1970년 민족계몽을 위한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고 1984년 ‘폭력에 대한 거부’, ‘군사독재의 권위에 대한 저항’ 등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반일·반독재에 앞장섰던 분으로 그 시대에는 남녘사회에서 정신적 대통령으로 평가 받은바 있었다.
손경자 여사는 캘리포니아 최남단 멕시코 국경지역에서 시작하여 최북단 카나다 국경지역까지의 등산코스가 총 2,600 마일인데 이것을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하고, 자신은 지금까지 2,150 마일 가량 등산하였기 때문에 남은 거리가 대략 4백여 마일되는데 그 나머지는 내년 여름에 완주할 계획이라고 밝힌다. 손 여사 자신도 그것을 완주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며 오는 여름 그 계획을 실현할 생각에 가슴 벅차 있는 표정을 짓는다. 손 여사는 또 나에게 "앞으로 은퇴하면 '죤무어 트레일(John Moor Trail)'이 210 마일로 위트니 산정과 요세미티로 연결하는 세계적인 등산코스인데 그것을 한번 해 보라고 권유하기도 한다. 죤 무어는 국립 공원을 발견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가꾸어 놓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사람으로, 요세미티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로 이름이 나있다. 초기에 그가 이 곳을 발견하면서 닦아 놓은 길이 존 무어 트레일이다. 이 트레일은 요세미티 밸리의 동쪽에서 투올러미 고원 지대의 비지터 센터로 연결된다. 이 등산 코스는 여름에만 개방하는 곳으로, 세계 여러나라 등산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다고 손경자 여사는 말한다. 최진환 박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의 부인이 있었지만 여름에 등산이 시작되면 둘은 각각 자신들의 세계에서 활동한다고 이들 부부는 말한다. 이렇게 등산시기가 아닌 경우에는 이들 부부는 언제나 변함없는 끈끈한 동지이다. 이들 부부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항상 뜨거운 동지부부라는 평가도 받아 왔다.
그는 대화를 나누는 말미에 어른이든 젊은이들이든 (1)백범일지, (2)함석헌 선생 전집 20권, 그리고 (3)조정래 작가가 쓴 태백산맥 10권, 아리랑 12권, 한강 10권을 필독으로 읽기를 권유한다면서 이에 대해 반복해서 강조해 주었다. 최진환 박사가 이렇게 독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남한이 산업화에 치우치다 보니까 역사, 철학, 문화 등에 등한시 하였다. 이것은 심히 염려스럽다. 사람은 근본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유엔이 세계정부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왔다. 이제 중국, 일본, 통일조국이 공동체가 되어 유럽공동체 처럼 잘살아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미래 통일조국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나는 이들 부부와 함께 이 고장의 베트남 식당에 가서 쌀국수로 만든 소위 '월남(베트남)국수'를 나누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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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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