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60]미국노예들이 다시 <라이베리아>식민지 강점에 이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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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60] 미국노예들이 세운 최초의 미국 식민지 <라이베리아>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민족통신 [연재-60]번째로 미국노예들이 세운 최초의 미국
식민지 <라이베리아> 에 대하여 연구고찰한 내용을 다루면서 "미국에서 노예해방 논쟁이 1800년대 초에
시작하여 1863년에 노예해방을 공식으로 선포될 때까지 반세기 이상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의
노예해방 선포속에 숨겨진 꿍꿍이 속셈은 절대로 “선의에 의한 노예해방”이 아니였다". 고 지적하면서
이나라역사가 미국에의하여 수난받은 과거사를 소개했다.[민족통신 편집실]
민족통신
[출처 : 유 태영 박사 2011-01-25]
민족통신
식민지 <라이베리아> 에 대하여 연구고찰한 내용을 다루면서 "미국에서 노예해방 논쟁이 1800년대 초에
시작하여 1863년에 노예해방을 공식으로 선포될 때까지 반세기 이상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의
노예해방 선포속에 숨겨진 꿍꿍이 속셈은 절대로 “선의에 의한 노예해방”이 아니였다". 고 지적하면서
이나라역사가 미국에의하여 수난받은 과거사를 소개했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 60] 미국노예들이 세운 최초의 미국 식민지 <라이베리아>
말이 좋와 공화국 이지 사실은 미국이 세운 괴뢰정부"
그것은 그 당시 미국이 봉착하고 있던 남쪽의 농업제도와 북쪽의 산업구조의 격차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는 심한 갈등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였으며 또한 시대적 으로 강요된 불가피한 노예제도의 폐지문제가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뿐만 아니라 1861년에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링컨 대통령은 국가적으로 시급한 문제를 하루 속히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의 <연방 국가건설>의 선언이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과제였다. 그럼으로 링컨 대통령은 노예제도의 유지 따위는 별로 큰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링컨 대통령은 1863년 1월 1일에 뿌리 깊은 노예제도의 폐지를 전격적으로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미국에서 흑인 노예해방 논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816년에 <미국식민협회, American Colonization Society>가 새로 창설되였다. 이 조직의 목적은 남북전쟁 후에 <해방된 노예 흑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미리 준비하는 새로운 조직체의 창설이였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미국식민협회>의 창설자 2명 중의 한 사람이 뉴저지 출신 장로교 로버트 핀린 목사였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미국 뉴잉글랜드 신앙부흥운동이 한창 번지고 있었는데 핀린 목사는 그 부흥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장본인이였다. 1822년경에 핀린 목사가 창설한 <미국식민협회>는 벌써부터 아프리카의 땅인 <메수라도> 라고 하는 지역을 식민지 예비장소를 마련 해 놓고 있었다. 그 목적과 이유는 미국에서 앞으로 해방될 노예 흑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흑인들을 집단으로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낼 집단이동 준비공작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서아프리카 '메수라도'라는 곳에 식민지 정착지로 정해놓고 <라이베리아>라고 하는 명칭을 붙였는데 그 명칭의 뜻은 <노예들이 자유, Liberty 를 얻었다> 라는 뜻으로 그곳을 <라이베리아>라고 불렀다. 하지만 자유해방이 되여 아프리카로 되돌아 온 흑인들은 각자가 자기들의 본 고향 땅으로 자유롭게 해방되여 되돌아 간것이 결코 아니였다. 아프리카로 되돌아 온 노예흑인들을 몽땅 <미국 식민협회>가 미리 지정해 놓은 메수라도 즉 <라이베리아>로 또 다시 끌고와 새로운 미국의 식민지의 노예로 삼고 있었다. 다시말하면 미국의 노예 흑인들은 노예생활의 장소만 미국에서 아프리카로 이동 한것 뿐 이였고 여전히 노예들이 되고 있었다. 1822년말에 감리교의 제후디 아시문 목사가 라이베리아 식민통치의 첫번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아시문 목사는 1824년에 라이베리아의 수도를 결정하고 명칭을 <몬로비아>라고 불렀다. 그 새로운 수도의 명칭을 붙인 이유는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이름이 <먼로 대통령> 이였는데 그 발음을 그대로 따라서 <먼로-몬로>를 적용하여 라이베리아의 식민지 수도의 명칭을<몬로비아>라고 정했던 것이다. ‘국호’와 ‘국기’와 ‘수도의 명칭’까지도 미국식으로 제정했던 것이다. 라이베리아로 되돌아 온 미국 노예출신 흑인들의 수는 모두 십만명이 넘었으며 이들의 명칭을 <아메리카-라이베리안, America-Liberian>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십만명이 넘는 아메리카-라이베리안들은 본래부터 이지역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고 대대손손 살고 있는 토착민 원주민들의 총인구 수에 비한다면 5%에 지나지 않는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5%에 불과한 미국에서 이주해 온 노예출신 흑인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미국의 막강한 세력을 배경으로 삼고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여 라이베리아의 식민 통치를 처음부터 주동적으로 역할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처음부터 자연히 절대적 다수인 원주민들과 심한 분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1847에 버지니아에서 온 노예출신 흑인 조셉 로버트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을했다. 그는 원주민 이웃 나라들과 국경선을 확정하고 미국의 식민통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첫번으로 시작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국이 되였으며 또한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공화국>이 되였다. 미국의 식민지 라이베리아는 미국을 그대로 모방하여 헌법을 제정하였고 심지어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를 그대로 모방하여 '라이베리아'의 국기를 제작하여 독립국이 된것을 선포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라이베리아는 말이 공화국이지 실제로 미국을 위한 하나의 괴뢰정부나 마찬가지였으며 미국은 라이베리아에 마음 놓고 미군을 영구주둔 시킴으로서 미국이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전초기지로 삼고 있었다. 라이베리아의 고대 역사는 서아프리카 여러 이웃 나라들의 역사와 거의 비슷하고 또 서로 연결된 역사적 배경들을 가지고 있음으로 생약하고 다만 1400년대에 들어서서 유럽의 백인 침략자들이 지금의 라이베리아에 침입해 들어온 역사를 간략하게 고찰해 본다. 12-14세기에 북동쪽에서 여러 종류의 부족들이 현재의 라이베리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이지역의 주인들이 되고 있었고 한때 말리제국이 번창하다가 무너졌다. 15세기에 이르러서 마네족과 크루족이 동맹을 맺고 이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15세기 초에 유럽인들의 접근이 시작되여 농산물과 자연자원의 착취가 시작되고 있었다. 1460년-170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의 약 300년동안에 유럽의 백인 침략자들인 포르투갈을 비롯하여 네덜란드와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경쟁을 하면서 지금의 라이베리아를 침공하여 이 지역의 특산물인 후추, "Melegueta Pepper"를 처음으로 생산하여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풍부한 농산물의 교역 중심지를 창설하여 <그레인 코스트>라고 지역의 명칭을 명명하고 본국의 경제적 부를 축척하고 있었다. <그레인 코스트>는 농산물 수출뿐만 아니라 노예무역에도 사용되는 서아프리카의 여러 항구들 중의 하나로서 노예무역이 끝날 때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한편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1800년대 초에 이르러서 흑인노예해방 논쟁이 시작되여 1820년-1860년에 결국 노예해방이 선포되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1790년에 미국 전체인구 400만명 중에 흑인 노예수는 약 80만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런데 1863년 경에 미국에서 노예해방 선포로 인하여 신분이 자유인의 권한을 획득한 해방된 흑인노예는 수없이 많은 노예흑인들 중에서 우선 약 10만명 정도로 나타났다. 미국의 주류백인들은 그때 까지 흑인을 짐승처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유인이 된 흑인 10만명을 백인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이 생각해낸 것은 영국을 따르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 영국은 영국 땅에서 해방된 노예흑인들을 처치하기 위한 방법으로 해방된 노예 흑인들을 집단으로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으로 강제로 이주를 시킨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영국의 방법을 그대로 뒤 따라서<자유흑인 추방 청소정책>을 최선의 방법으로 채택했던 것이다. 1822년 1월에 제1차 해방노예흑인 88명을 태운 선발대 배가 뉴욕을 출항하여 라이베리아 항구에 도착했다. 이 배는 <미국식민협회>가 미리 치밀하게 계획하고 강행한 첫번째 시도 였다. 미국에서 새로 온 <해방노예흑인> 들에 대하여 본토에 살고 있는 원주민 말링케족과 여러 토착민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강한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1835년 경에 이르러서 해방노예 흑인들의 정착지는 점점 더 확대되였으며 라이베리아 안에는 미국 출신 노예흑인들의 정착지가 5곳 이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정착지가 튼튼히 자리가 잡힘에 따라서 <미국식민협회>는 모든 통치권을 정착한 미국 출신 노예흑인들에게 이양해 주었다. 1839년에 식민지의 공식적 명칭을 <라이베리아 자유 공화국>이라 정하고 1841년에 흑백 혼혈의 조셉 젠킨스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1847년에 <라이베리아 자유공화국>으로 선포하고 조셉 로버트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는데 그 당시 미국 해방노예 흑인들의 수는 모두 3,000명 정도였으며 공화국 선포와 대통령이 취임함으로 하나의 국가적 위치를 확인했다. 1847년-1868년 사이에 3명의 대통령들이 단명으로 교체되었는데 그 이유는 토착민 부족들의 반격이 거셈으로 안정을 위한 대통령의 교체였고 특히 유럽 나라들이 무역의 기득권 문제로 마찰이 날로 점차 심화되여 정국이 불안 하였기 때문에 대통령의 교체가 계속 되었다. 물론 흑인들 사이의 분쟁도 있었다. 미국은 <라이베리아 자유공화국>을 보다 강화하고 안정된 정권으로 만들기 위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제임스 페인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더 많은 흑인들을 미국에서 이동시켰다. 미국의 영향하에서 보다 강력한 합법적인 헌법을 제정하도록 도와 주었다.그리하 여 <트루휘그당,TWP>을 새로 창당했다. 새로운 헌법과 정당에 의하여 라이베리아의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제임스 페인 대통령은 <트루휘그당,TWP>의 강력한 일당독재 정권의 대통령이 되었다. 제임스 페인 대통령은 미국의 배경으로 대통령에 취임을 했지만 앞으로 133년동안 < 트루휘그 당>이 일당독재 정권으로 독재통치를 계속 통치를 하게 되리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트루휘그당>은 반석같이 튼튼한 미국이 절대적으로 지원하는 <일당독재>의 정 당이 되였다. 하지만 <트루휘그당>을 배경하여 등장한 그후 라이베리아의 모든 후계자 대통령들은 미국이 지원하는 강력한 일당독재정당 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부가 단명 대통령들이 되고 있었다. 1847년-1980년 까지 133년 동안에 20명의 대통령들이 등장했다가 단명으로 살아지고 마는 불안정한 정권들이 연속 되었다. 막강한 독재정권 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6년 6개월 동안 집권을 하고 물러 났다.미국이 절대적으로 지원하는 막강한 일당 독재정권들이라면 최소 15년- 30년은 끄떡 없이 견디는 것이 통상 아니겠는가? 하지만 라이베리아의 일당독재정권의 대통령들은 단명 대통령으로 집권을 하고모두 다 중도에 물러나고 말았다. 그 이유가 무었인지를 다음과 같이 살펴 본다. ㄱ. 미국에서는 흑인이 절대로 대통령이 될 수 없는것이 미국의 역사였다. 이처럼 라이베리아 에서도 대통령은 반드시 <미국 출신노예 흑인> 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제도로 인하여 절대 다수인 본토 원주민들의 항의가 항상 계속됨으로 정치적인 불안과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사람 대통령이 제 아무리 미국이 지원하는 일당독재 정권을 배경으로 삼고 집권을 한다 해도 중도에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5%에 불과한 미국 노예출신 흑인들의 집권세력은 항상 불안정한 혼돈속에서 정치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ㄴ. 라이베리아의 집권 세력이 비록 흑인들이지만 막강한 미국을 배경삼고 있기 때문에 유럽의 백인 국가들을 더 이상 종주국으로 여기지 않고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그럼으로 유럽의 프랑스나 영국등 옛종주국들은 틈만 있으면 라이베리아의 오만한 흑인 노예들의 정권에 대하여 내정간섭을 하여 정권의 불안을 조장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등 유럽 국가들은 특히 무역의 악조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집권중에 있는 미국의 노예 출신 흑인 대통령에게 모든 악조건을 조성하고 있었다. 또한 본토의 원주민 대중 부족들을 충돌질하여 집권세력에 항거하도록 음모를 조작하여 한 사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못하도록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ㄷ. 미국에서는 <흑백갈등>이 인종차별 문제로 정치와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라이베리아 에서는<흑흑갈등>이 극심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인종과 부족들 사이에서 차별대우가 정치와 사회문제로 항상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르휘그당의 일당 독재정권은 절대로 다수의 여러 부족 원주민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있어서 엄정한 차별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런 문제로 인하여 한 사람 대통령이 장기집권은 거의 불가능 했다. ㄹ. 미국출신 흑인들은 농장 운영방식, 교회생활, 영어사용, 주택건설 그리고 자녀들의 학교교육에 이르기 까지 모든 분야에서 미국식으로 살아가면서 토착민들을 차별했다. 특히 미국출신 흑인들의 자손들은 거의 모두 미국유학을 하여 선진국의 문화의 우수성을 본받아 그것으로 자신들을 특권계급으로 삼고 있었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미국출신 흑인들만 지배계급으로 인정하고 토착민들을 지배하도록 모든 지원을 무진장 제공해 주었다. 미국이 지원하는 TWP 집권당 내에서 발생하는 부정과 부패가 발각되면 미국은 항상 관용으로 덮어주고 법에 걸린 지도자들에 대하여 미국은 그들에게 도피장소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우습게도 미국에서 온 흑인들이 영어를 사용하고 교회를 세우고 야만스러운 본토의 흑인들을 지배하면서 미국을 등에 업고 유럽의 국가들에게는 오만불손했다. 라이베리아가 영국, 프랑스와 독일등 유럽의 극가들과 무역마찰로 인하여 위기에 봉착하게 될 때마다 미국은 군함을 즉각 보내여 라이베리아를 보호해 주었다. 위에 열거한 이야기들은 미국이 지난 133년 동안 라이베리아에서 미국의 노예 출신흑인독재정권을 유지하도록 어떻게 작용을 했느가를 말해 주는데 있어서 충분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사실 빙산의일각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천연고무가 중요해짐으로 라이베리아의 고무를 무진장 착취했고 그 대가로 무상으로 공항과 항구 그리고 도로공사등을 건설해 주었다. 미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이어스톤 Tier 사>를 설립하여 250만 달러를 투자하여 광대한 토지를 임대하여 고무나무 재배를 시작하고 있었다. 원주민에 대한 가혹한 노동력 착취가 노출되여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미국은 이번에는 라이베리아를 냉전 체제에 끌어 들임으로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위한 교도보를 만들었다.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소련을 막는 방패역할을 함으로 그 대가로 1946년 이후 25년동안 미국의 다국적 기업으로 부터 10억 달러 이상의 투자를 받았다. 라이베리아는 추악한 베트남 전쟁까지도 미국을 지지하였다. 장교들을 미국에 보내어 군사훈련을 받게 했으며 라이베리아는 냉전시대에 미국을 위한 아프리카의 첨병 역할을 잘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라이베리아도 제19대 TWP 일당 독재당의 터브먼 대통령이 1971년에 27년간의 장기집권을 끝내고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동안 133넌을 장기집권한 TWP의 독재정권은 종말을 예고하는 여러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후임으로 역시 미국 출신 노예 흑인의 후손인 TWP 일당 독재정권의 부통령 리차드 톨버트가 사망한 터브먼 대통령의 승계자로 제20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대통령직을 승계한 리차드 톨버트는 미국에 유학하여 보스톤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철저한 친미주의적 정치인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었다. 133년 동안 밀리고 쌓인 원주민들의 분노와 27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하다 사망한 터브먼 대통령에 대한 토속 본토민들의 분노가 일제히 폭발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토착민의 모든 부족들이 총단결하고 총동원하여 TWP 미국 출신 노예 흑인 친미독재정권 타도를 웨치면서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 나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원주민 민중들이 미국을 등에 업은<미국해방노예 흑인 정권> 타도를 웨치면서 수도 몬로비아를 점령했다. 신임 제20대 톨버트 대통령은 정치의 미숙으로 무조건 군부를 동원하여 시위 군중을 진압하여 70명이 사망했다. 1980년 4월 12일에 133년의 친미독재 투르휘그당, TWP 해방노예 흑인정권은 원주민 출생 해병대 특무상사 도우가 주도한 쿠테타에 의하여 붕괴되고 말았다.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는 TWP의 붕괴를 얼씨구나 반기면서 원주민 소수의 군인 도우 해병대 특무상사가 일으킨 쿠테타를 열열히 환영했다. 원주민 소수의 군인이란 누구인가? 무혈 쿠테타에 성공한 해병대 특무상사 사무 엘 도우가 주도한 쿠테타를 말한다. 도우는 미군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은 해병대 특무상사로서 라이베리아 정규 군인이다. 도우는 <구국 평의회, PRC>를 비밀로 조직하여 무혈 쿠테타에 성공했다. 사무엘 도우는 친미독재 정권인 투르휘그당, TWP 노예 흑인 정권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순수한 원주민 <크란족>의 출신이다. 그럼으로 사무엘 도우의 쿠테타의 성공과 또한 그의 정권장악은 라이베리아 국가창건 이래 133년만에 처음있는 역사적인 사건 이였다. 원주민 출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것은 라이베리아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 점이며 원주민 통치시대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무혈 쿠테타에 성공한 해병대 특무상사 도우는 해병대의 기질을 그대로 발휘하여 톨버트 전임 대통령을 즉각 처형했으며 톨버트 정권 내각의 각료 13명도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도우는 쿠테타군의 위세와 그동안 눌려 있던 원주민 부족들의 분노와 잠재적 위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1980년 4월에 사무엘 도우는 라이베리아 역사 최초로 토착 원주민으로서 라이베리아의 국가수반이 되였으며 수없이 많은 미국 출신 해방노예흑인정권의 정적들을 처형하고 추방했다. 동시에 도우 대통령은 같은 부족인 크란족을 대거 등용하고 측근들을 중심하여 새로운 정권을 튼튼히 구축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즉시 도우 정권을 시인하고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구실로 매년 9천5백만 달러의 지원을 즉각 약속헸다. 도우 대통령 은 미국의 요구대로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와 단교하고 소련대사에게 퇴고령을 내리기 까지 함으로 완전히 경제와 군사적으로 미국의 우방국으로 변화되고 말았다. 1983년에 도우 대통령 행정부의 고위직에 있는 찰스 테일러가 정부기금 횡령죄로 기소되였다. 찰스 테일러는 탈출하여 미국으로 도망친 사건이 발생했다. 도우 대통령은 테일러의 송환을 미국에 즉각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도우 대통령의 테일러 송환요구를 거부하고 미국 마사추세츠에서 테일러를 체포하고 감옥에 수감했다. 이 사건은 훗날에 CIA의 개입사건으로 밣혀졌다. 찰스 테일러는 감옥에서 CIA의 도움으로 의문의 탈출에 성공하여 1985년에 서아프리카로 돌아와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 밑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후 테일러는 코트디부아르에 잠복해 있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찰스 테일러는 코트디부아르에서 반정부 단체인 <애국인민전선,NPEL>을 창설하고 앞으로 도우 대통령 정권을 공격하여 붕괴시킬 내전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우 대통령은 미국의 절대적인 동맹국으로 1980년 4월-1990년 9월까지 10년동안 집권을 했다. 하지만 테일러가 일으킨 내전과 반란군에 의하여 결국 살해 당했다. 도우 대통령이 테일러에 의하여 살해 당한데 대하여 이웃 나라 나이제리아의 한 주요 언론은 다음과 같이 의미 심장한 논평했다. <도우 대통령의 죽음은 제국주의적 안락사의 마지막 희생자다. 그가 죽은 이유는 미국이 그에 대한 치료를 중단하면서 그의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 냈기 때문이다> 위의 나이제리아 주요 언론의 논평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피지배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해결책은 한 명의 군벌을 다른 군벌로 대체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라이베리아에 대하여 지금까지 군사개입을 하면서 독재정권을 후원해 준 이유는 첫째는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며, 둘째는 서아프리카 나라들 사이에서의 단결을 분산시키기 위함이며, 셋째는 상당량의 석유매장과 천연 고무등 경제적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이권때문 이었다. 도우 대통령 집권 10년 동안에 라이베리아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발생 했던가? ㄱ 쿠테타 시도가 7차례 발생했다. ㄴ 신문 폐간과 언론인 체포가 항상 계속 되었다. ㄷ 50명 이상 정적들을 암살 했다. ㄹ 9개 정당 중 3개 정당만 활동을 허락 했다. ㅁ 반정부 쿠테타에 가담한 죄로 10년 동안 주요한 정치인들 600명을 처형했다. ㅂ 도우 대통령의 친위군부와 경찰은 부족들간의 분쟁에서 크란부족을 보호하기 위하 무죄한 기타 부족인 2000명을 살해하고 반대 부족 지도자 100을 투옥했다. ㅅ 도우 대통령은 1982년 5월에 한국을 13일간 방문하여 전두환 대통령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전두환 대통령은 도우 대통령 방문기념으로 축하우표를 발행하도록 명령했다. 그 후 도우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도우 대통령의 부패한 독재정권을 10년동안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미국은 소련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된 후 도우 대통령의 독재가 오히려 미국의 부담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도우 대통령이 반군에 의하여 1990년 9월 9에 살해 당하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도 못 본척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우 대통령의 사망후에 최대의 관심사로 등장한 인물은 물론 찰스 테일러였다. 하지만 테일러를 제외한 모든 정치단체와 주요 지도자들은 1990년 11월에 오히려 찰스 테일러를 배제하고 아모스 소여를 임시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아모스 소요는 세월만 허비하고 능동적으로 국가재건에 기여하지 못하고 4년이 지난 후 1994년 3월에 <국가평의회>에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소요 임시정부 수반의 사퇴 이후부터 라이베리아의 여러 파벌과들과 정당간에서 내전이 발생하였으며 내전은 산 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큰 혼란속에 빠진 라이베리아에 미국은 재개입을 위한 좋은 기회로 삼고 1994년 10월에 UN이 관리를 하게했다. 1995년 8-9월에<과도통치기구-국가평의회>가 구성되여 라이베리아의 운명은 UN의 손안에 들어 가게 되었다. UN의 손안에 있는 라이베리아는 1996년 부터 찰스 테일러가 직접 관련된 내전이 일어 났으며 내전은 장장 7년동안 계속하다가 겨우 끝났는데 그 당시의 인구 250만명중 150만명이 사망 했고 20만명이 부상당했으며 150만명의 난민이 발생 했다. 1997년에 UN군 2만 3천명이 주둔하여 7월 19일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 하였는데 찰스테일러가 <국민애국당>의 후보로 출마하여 75%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도우 대통령 사망후 7년 동안 내전을 격은 후에 1997년 8월에 찰스 테일러가 드디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찰스 테일러 대통령이 취임하여 2년이 경과된 1999년 8월 19일에 모든 언론들이 발행한 신문들의 기사를 종합해 보면 찰스 테일러 대통령의 통치행태에 대한 언론들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며 극히 실망적 기사들 뿐이였다. 그 때 기사들은 <독재정치, 부정부패 정부, 강압정치행태 그리고 살해와 약탈의 반민족적 정권> 이라고 일제히 테일러 정권을 비판하며 규탄하고 있었다. 1997년 8월에 취임하여 2003년 10월에 권좌에서 축출될 때까지 6년동안에 찰스 테일러 대통령은 라이베리아의 안보와 경제 그리고 국가의 존엄성을 시궁창에 빠져들게 했으며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희망을 완전히 망쳐 놓고 있었다. 하지만 2003년에 축출될 뿐만 아니라 국제적 범죄자로 기소되여 국제판을 받게된 찰스 테일러 대통령 본인은 권좌에서 축출된 원인을 전적으로 미국이 자기를 완전히 이용만하고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면서 미국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 시키고 있었다. 1983년에 테일러는 그 당시 도우 대통령 행정부에서 고위급 직위에 있으면서 공금 100만 달러를 횡령했다. 그는 범죄 행위후에 미국으로 도망갔는데 도우 대통령 정권은 미국에게 테일러를 라이베리아로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 은 송환요청을 거부하고 그 대신 테일러를 체포하여 마사체스츠 감옥에 수감시켜놓고 15개월동안 무엇인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일러는 1985년에 감옥을 탈출하여 서아프리카 이웃나라 코트디부아르에 잠입하여 그곳에서 도우 대통령을 반대하는 반정부 조직인<인민애국전선>을창설하여 내란을 일으키는데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테일러는 어떻게 미국 마사체스츠 감옥을 탈출했을가? 또 그는 어떻게 하여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까지 올 수 있었을가? 이것은 큰 의문이 아닌가? 이 큰 의문에 대하여 The New York Times의 2009년 7월 17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을 간단히 요약한다. <테일러는 미국 마사체스츠 감옥에 15개월 수감중에 있었는데 어느 날 갑짜기 Mr. Nyguan이 찾아와서 CIA 공작을 세밀하게 설명해 주었다. 몇일 후에 감옥의직원 2명이 와서 석방을 말 해 주었다. 그후 몇일 후에 밤 10시 여권을 돌려 받고 안내자를 따라 여러개의 문들을 무사히 통과하여 감옥 밖으로 빠져 나왔다> <감옥 밖에 기다리고 있던 차를 탔는데 차 안에 CIA 두사람이 있었으며 차는 미국 정부 소속차 였고 뉴욕을 통과하여 Texas에서 국경선을 넘어 Mexico City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처음에는 밸지움에 도착했다가 무사히 서아프리카까지 올 수 있었다> (뉴욕타임즈 기사의 요약이다) 미국 감옥에서 탈출히여 서아프리카로 돌아 온 테일러는 즉시 리비아로 갔다. 테일러는 카다피의 지도하에서 게릴라 전문 훈련을 받았으며 그 후에 코트디부아르 에에서 라이베리아 반군조직을 창설하고 지도자로 활약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미국 CIA는 The New York Times의 테일러의 감옥탈출 기사에 대하여 그저 두마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는데… ‘엉터리이다’ 또는 ‘확인해 줄 수 없다’ 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다. 1990년 9월 9일에 도우 대통령을 총격으로 살해한 프린스 존슨은 누구인가? 존슨은 테일러 밑에서 활약한 게릴라 대원이였다. 테일러는 정권을 잡아 대통령이 된 후에 그 누구를 막론하고 반대파들을 싹쓸이로 죽여 버리는 잔인한 독재자가 되고 말았다. 미국은 처음에는 <원주민 출신인 도우 대통령>의 정권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도우대통령이 미국의 골치덩어리가 됨으로 미국은 도우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테일러를 이용했으며 테일러는 일등공신으로 잘 이용 당했다. 테일러는 도우 정권을 붕괴 시킨 그 공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딱 들어 맞게 당장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되여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하지만 테일러는 미국의 배경으로 대통령이된 후에 전형적인 독재자가 되여 세계적으로 악명이 점점 높아졌다. 이로 인하여 아프리카를 통치하는 미국에게 테일러 대통령은 또 다시 큰 골치덩어리가 되여 괴로운 짐이되고 있을 뿐이였다. 특히 테일러 대통령은 이웃 나라 시에라리온에 가득한 ‘다이아몬드’를 욕심내여 무리한 행동까지 하기 시작했다. 테일러 대통령은 시에라리온 반군의 내전에 처음 한발을 걸쳤다가 드디어 이웃 나라 반군의 몸통이 되고 말았다. 테일러 대통령은 라이베리아군을 반군으로 위장하여 시에라리온에 보내여 현지인들의 두 팔을 자르는 잔인한 행동과 아이들을 강제로 마약을 먹여 소년병으로 만들고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데 고역을 강요했다. 테일러 대통령은 시에라리온에서 획득한 대량의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알 카에다와 비밀거래를 하고 있다고 미국은 테일러 대통령을 의심하고 있었다. 테일러 대통령의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여 지금까지 우호적이든 코트디부아르와 리비아는 물론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테일러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게되었다. 이락의 사담 훗세인의 행태를 문제삼아 그를 처형한 미국은 훗세인 보다 더 흉악한 행동을 하고 있는 테일러 대통령에 대하여 적극 개입하기를 꺼려 하면서 속으로는 큰 고민에 빠져 있 었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의 주목을 의식하여 2003년에 부시 대통령은 드디어 침묵을 깨고 테일러 대통령의 하야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 버리는 의리가 없는 미 제국주의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 내고 있었다. 2003년 8월 11일에 테일러 대통령은 결국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할 수 없이 굴 복하여 정권을 모세스 블라 부통령에게 이양하고 임시 망명지 나이지리아로 떠나 갈것을 국민들 앞에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테일러 대통령은 그의 마지막 고별 연설 방송에서 미국의 압력때문에 퇴임을 한다고 밝히면서 미국에 대한 억울한 심정으로 <나는 반드시 돌어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그의 마지 막 연설을 했다. 권좌에서 퇴임한 찰스 테일러는 국제범죄 11가지 조목의 범죄 행위에 대한 국제 전범재판에 2008년에 기소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현재까지 3년이상 재판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재판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는 너무나도 막연하여 아무도 예측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분명히 미국이 찰스 테일러에 대한 애매한 태도로 최종 판결이 알게 모르게 지연되고 있다. 테일러 대통령이 퇴진한 후에 모세스 블라가 대통령직을 승계를 하기는 했지만 반군 들은 수도 몬로비아를 공격하고 블라 대통령 정권을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2003년 10월에 미국이 동원한 서아프리 연합군 3500명이 치안을 담당하면서 라이베리아 정권을 앞으로 책임질 위원회를 만들고 브라이언트를 의장으로 세 웠다. 브라이언트 의장은 미국과 UN의 절대적인 지시와 후원하에서 여러 종파들이 지금까지 <친미 흑인 정궝>과 싸운 반정부 게릴라 10만명 이상의 반군들에 대하여 무장해제를 강행하여 성공했다. 2005년 10월 11일 UN과 서아프리카 연합군의 평화유지 활동에 힘입어 드디어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23명의 대통령 후보자들이 출마하여 혼란을 일으켰으나 결선 투표에서 오직 2명의 후보자가 최종 대결을 하게 되었다. 2명 후보자 중의 한 후보자는 국제적으로 명성이 유명한 라이베리아의 축구 선수 조지 웨아 인데 그는 <외로운 별>이 되여 <민중의 별>이 되고 싶은 꿈을 품고 최종의 2명 결선 투표의 후보자가 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하바드 대학 출신인 여성 대통령 후보자 존슨 설리프 후보자였다. 유명한 여성 학자 후보자와 유명한 국가 대표 축구선수 후보자가 세계에서 보기 드믄 대통령 선거전에서 힘을 겨뤘다. 2005년 11월에 결선 투표의 결과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지 웨아를 누루고 존슨 설리프 여성 대통령 후보자가 59%의 득표로 당선되였다. 세계 언론은 그녀의 당선에 대하여 <철의 여인>이 대통령으로 탄생 했다고 격찬했다. 설리프 당선자는 하바드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의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경제학의 석사 학위를 받은 학자 여성 대통령 되었다. 2006년 1월 26일에 존슨 설리프 당선자는 라이베리아의 2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녀의 대통령 취임은 라이베리아에서는 물론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는 17세 때 결혼하여 4명의 아들과 6명의 손자 손녀를 두고 있으며 남편은 몇년전에 사망했다. 존슨 설리프 대통령은 <미국 해방노예 흑인 독재정권>이 붕괴된 후 26년 만에 잔혹한 내전을 거친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라베리아는 당장 안고 있는 부정부패문제, 오랜 관료주의 그리고 부족들간의 분쟁 문제등 태산 같은 난제들이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실업율 80%의 시급한 문제가 앞에 놓여져 있다. 도대체 신임 여성 대통령은 이 산적한 어려운 난제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하여 세계의 관심이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리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2005년 당시 총예산 규모가 8000만 달러 였던 것을 집권 후에 3억 5000만 달러로 늘려 놓았다. 그리고 설리프 대통령은 가난한 민중들의 복지와 국민교육의 재건을 위하여 과감히 투자할 것을 선포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 또한 설리프 대통령은 세계적으로<4대 여풍>으로 핀란드의 할로넨 대통령, 칠레의 중도 좌파 바첼렛 대통령 그리고 독일의 강철여성 메르켈 총리등 지구촌 정치 여풍의 주역 중의 한 정치 지도자로 우뚝섰다. 하지만 설리프 대통령의 통치여정에는 해결하기 골란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첫째, 전임 테일러 대통령의 추종세력이 막강한 세력으로 재집결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은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약 8,000명에 이르는 전직 군인들과 반정부게릴라 출신들의 사회복귀와 경제적 지원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 서리프 대통령의 큰짐이 돠고 있다. 셋째, 라이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약 1만여명의 미군과 외국군의 철수문제가 앞으로 큰 국제적 정치문제로 등장 할 것이다. 네째, 전국에 뿌리 깊은 부패 공무원들에 대한 시급한 교육문제와 폭동에 대비할 수 있는 훈련된 군인과 경찰이 부족하다. 뿐만 아니라 군경 장비의 부족도 심각한 문제이다. 다섯째, 라이베리아는 고무, 커피, 코코아, 금과 다이아몬드등 다양한 철광자원들을 풍부히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하의 빈국이 되고 있다. 위의 다섯 가지 외에도 설리프 대통령이 당면하고 있는 괴제는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이 쌓여 있다. 라이베리아의 외교노선은 비동맹국 임을 주장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재 설리프 대통령의 실제적인 정치 노선은 분명히 친미와 친서방 정치 노선이며 그녀의 정책임이 분명하고 확실하다. 2007년 10월에 설리프 대통령은 미국의 부시 당시 대통령으로 부터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메달을 받았다. 부시 대통령은 설리프 대통령을 세계의 드물게 존경 스러운 여성 정치적 지도자라고 높이 추겨 세웠다. 한편 2008년 2월에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라이베리아를 방문 했을 때 설리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라이베리아의 최고훈장을 수여 했다. 두 나라의 정상들은 서로 사이 좋게 최고의 영예로운 훈장들을 주고 받으면서 친선의 외교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쥐 구명에도 해뜰 날이 있었던가? 라이베리아에 큰 이변이 생기는가? 2007년 2월에 중국의 국가주석 후진타오 주석이 라이베리아 친선 방문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후진타오-설리프 두 정상들은 긴밀한 회담을 통하여 세계가 깜작 놀랄 획기적인 양국의 협정을 맺었다. 두 정상은 과학,기술 협력등 7가지 협정을 친절히 맺을 뿐만 아나라 중국에 대한 라이베리아의 부채 1천만 달러를 무조건으로 탕감해 줄것을 약속했다. 뿐만 아니라 후진타오 주석은 라이베리아 펜델 대학의 캠퍼스 건축, 내전으로 인한 피해복구사업 원조로 2천5백만 달러를 제공할것과 그리고 라이베리아의 대중국 무역에 대하여 특혜관세를 적용해 줄것 등을 굳게 약속했다. 설리프 대통령은 지금 까지 미국에게 역사적으로 속고 또 속은 쓰라린 역사를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후진타오 주석의 동양적인 믿음직한 협정에 큰 만족과 기대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고 필자는 생각 한다. 미국은 라이베리아와의 외교와 안보에 있어서 원리와 이성 보다는 자국의 정략적 이익과 감성적 욕심을 앞세운 강대국이다. 필자는 미국의 횡포와 악행에 대하여 분노와 울분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미국에서 정략적으로 할 수 없이 해방시킨 노예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하는 최초의 음침한 과정에 있어서 하필이면 장로교 목사와 감리교 목사 두 사람이 등장하여 주동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처음 알게되여 나 자 신이 목사 중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분노와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한국에서 3.1운동 때 미국 선교사들이 뒤에서 일본을 옹호하고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선봉에 나서서 활약하는 것을 못마땅 하게 여겼던 우리 한국교회의 초대 교회의 암흑의 역사가 바로 라이베리아의 최초의 역사에 있었던 동질의 사건인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라이베리아의 미국출신 흑인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같은 흑인들 끼리<흑흑갈등>을 일으킨 역사는 바로 우리 한국에서 친일파와 친미 세력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같은 동족을 무시하면서 호의호식 하는것과 그 무엇이 다른가? 또한 라이베리아 도우 대통령과 테일러 대통령은 모두 다 미국의 침략 작전에 이용을 당했으며 그리고 용도가 다 끝난 후에는 배신당하여 비운에 처했다. 이와 같은 과정들이 바로 라이베리아의 지난 날의 역사적 과정 자체이다. 그런데 8.15 해방 후에 조국반도의 남녁에서 발생한 비극적 역사는 바로 라이베리아의 역사의 동양적 재판인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미국은 참말로 라이베리아의 역사와 조국반도의 남녁 역사에 있어서 동질의 침략자이며 동질의 범죄자이다.(끝) |
[출처 : 유 태영 박사 2011-01-25]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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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여명님의 댓글
여명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광복군을 이끌고 들어 왔어야 했는데..
미국이 무장 해제시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데서부터 민족의 비극은 시작 된거죠..
광복군을 이용해먹고 뒤통수 친 미국.
물론 책임은 전적으로 원주민들의 몫이겠지만요...
차준만님의 댓글
차준만 작성일새로 접하는 정보입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