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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23. 리베리아의 봄은 누가 막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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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653회 작성일 22-07-27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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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리아의 봄은 누가 막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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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류태영 박사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한창 벌어지고있던 때인 1863년 1월 링컨은 이른바 노예해방선언이라는것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선의에 의한 노예해방선언이 아니였다.

그것은 북부부르죠아지들이 노예제를 페지하여 흑인들을 다시 임금노예로 만들어 착취하자는것이였으며 당면하여 전쟁에 흑인들을 많이 참가시키려는 타산으로부터 나온것이였다.

력사를 더 거슬러올라가면 흑인노예해방론쟁이 한창 벌어지고있던 때인 1817년 미국에서는 미국식민지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라는 단체가 출현하였다. 이 단체의 조직목적은 《해방된 노예흑인》들을 처리할 준비를 미리 하는것이였다.

뉴져지출신 장로교목사 로버트 핀린이 이 단체를 만든 사람들중의 하나였는데 그는 당시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한창 번지고있던 신앙부흥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던 장본인이였다.

1822년경에 미국식민지협회는 아프리카의 서남부 기네만지역에 노예들이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에서 《리베리아》라는 식민지정착지를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해방》이 되여 아프리카로 되돌아온 흑인들은 각자가 자기들의 본고향땅으로 자유롭게 되돌아간것이 결코 아니였다.

아프리카로 되돌아온 노예흑인들은 모두 미국식민지협회가 미리 지정해놓은 리베리아로 또다시 끌려와 새로운 미국의 식민지노예로 된것이였다. 다시말하면 미국의 노예흑인들은 노예생활의 장소만 미국에서 아프리카로 이동하였을뿐 여전히 노예들이였다.

미국은 1822년에 리베리아에 첫 국가를 조작하고 저들의 총독을 통한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는데 수도의 이름을 《몬로비아》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대통령의 이름이 몬로였는데 그 발음을 그대로 따서 수도의 이름을 《몬로비아》라고 정했던것이다. 국호와 국기, 수도의 이름까지도 미국식으로 제정한셈이였다.

리베리아로 되돌아온 미국노예출신 흑인들의 수는 모두 10만명이 넘었으며 이들을 아메리카-리베리안(America-Liberian)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들은 본래부터 이 지역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대대손손 살고있는 토착원주민들의 수에 비해볼 때 5%에 지나지 않는 소수에 불과했다.

미국은 저들의 식민지통치에 이들을 적극 내세움으로써 다수인 원주민들과 심한 갈등을 조장시켰다.

그러한 가운데 1847년 버지니아에서 온 노예출신 흑인 조셉 로버트가 《독립국가》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미국의 식민지통치를 집행하게 되였으며 리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공화국》이 되였다. 사실에 있어서 말이 공화국이지 실제로는 미국을 위한 하나의 식민지였으며 미군이 주둔하여 활동하는 아프리카침략의 전초기지였다.

 

리베리아의 간추린 력사

 

리베리아는 서아프리카의 여러 이웃나라들과 거의 비슷하면서도 서로 련관된 력사적배경들을 가지고있다. 12~14세기경에 북동쪽에서 이동하여온 여러 부족들이 이 지역에서 살면서 한때는 말리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후 15세기에 이르러 마니족과 쿠르족이 새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 리베리아땅에 대한 유럽식민주의자들의 침략이 시작되였으며 1460년-1700년대말에 이르기까지의 약 300년동안 뽀르뚜갈, 네데를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식민주의자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이 지역의 특산물인 후추(Melegueta Pepper)를 대량적으로 강탈하였다. 유럽식민주의자들은 리베리아에 풍부한 농산물의 교역중심지로서 그레인 코스트라는 지역을 만들어놓고 막대한 경제적부를 축적하였는데 이 그레인 코스트는 농산물수출뿐아니라 노예무역에도 사용되는 서아프리카의 여러 항구들중의 하나로서 노예무역이 끝날 때까지 널리 사용되였다.

한편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1800년대초에 이르러 흑인노예해방론쟁이 시작되게 되였으며 1860년대에 들어서서는 기만적이기는 하지만 흑인노예해방선언이 공포되게 되였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그때 미국 흑인노예수는 80만명정도였는데 1863년 흑인노예해방선언으로 인하여 《해방》된 흑인노예는 약 10여만명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까지 흑인을 짐승처럼 보고있던 백인들은 갑자기 《자유인》이 된 흑인들을 백인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자유흑인추방청소정책》을 최선의 방법으로 채택하였다.

1822년 1월에 제1차 《해방》노예흑인 88명을 태운 선발대 배가 뉴욕을 출항하여 리베리아항구에 도착했다. 이 항행은 미국식민지협회가 미리 치밀하게 계획한것이였다.

그후 리베리아에 《해방》노예흑인들의 정착지가 점점 더 확대되는데 따라 미국식민지협회는 통치권을 점차 정착한 미국출신 노예흑인들에게 《이양》해주었으며 1847년에 리베리아땅에는 조셉 로버트를 초대대통령으로 하는 이른바 리베리아공화국이 출현하게 되였다.

제4대대통령으로 올라선 제임스 페인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여 트루휘그당(TWP)의 일당독재를 실시하였다.

그후 133년동안이나 리베리아에서는 트루휘그당의 일당독재가 계속되였다.

하지만 트루휘그당을 배경으로 등장한 리베리아의 모든 대통령들은 미국이 지원하는 강력한 일당독재정당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부가 단명대통령들이였다.

그 리유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살펴본다.

ㄱ. 리베리아에서는 대통령이 반드시 미국출신 노예흑인이여야 한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제도는 항상 절대다수인 본토원주민들의 항의와 정치적인 불안과 사회적혼란을 일으키였다.

이런 속에서 대통령이 제아무리 미국이 지원하는 일당독재정권을 배경으로 삼고 집권한다 해도 중도에서 물러날수밖에 없었다.

ㄴ. 리베리아의 집권세력이 비록 흑인들이지만 미국을 배경으로 삼고있기때문에 유럽의 백인국가들을 더이상 종주국으로 여기지 않고있다. 이로부터 유럽의 프랑스나 영국 등 옛 종주국들은 틈만 있으면 내정간섭을 하여 정권의 불안을 조장하였으며 본토의 원주민대중인 부족들이 집권세력에 반발하도록 함으로써 장기집권을 위한 환경을 어렵게 만들고있었다.

ㄷ. 미국에서는 《흑백갈등》이 인종차별문제로서 정치와 사회적문제로 되고있다. 그런데 리베리아에서는 《흑흑갈등》이 극심한 사회적문제로 되고있었다. 인종과 부족들사이에서의 차별대우가 정치와 사회적문제로 항상 등장하고있었던것이다.

트루휘그당의 일당독재정권은 절대로 다수의 여러 부족원주민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사회생활전반에 있어서 엄정한 차별정책을 펴고있었다. 이런 문제로 인하여 대통령의 장기집권은 거의 불가능했다.

ㄹ. 미국출신 흑인들은 농장운영방식, 교회생활, 영어사용, 주택건설 그리고 자녀들의 학교교육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미국식으로 살아가면서 토착민들을 차별했으며 자신들을 특권계급으로 삼고있었다.

미국은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지배론리에 따라 일방적으로 미국출신 흑인들을 내세워 그들이 토착민들을 지배하도록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갈등을 산생시켰다.

이 과정에 미국은 트루휘그집권당내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행위가 발각되면 항상 관용으로 덮어주고 법에 걸린 인물들에 대해서는 도피장소까지 제공해주고있었다.

우에서 렬거한 이야기들은 미국이 지난 133년동안 리베리아에서 꼭두각시정권을 유지하도록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충분히 보여주고있지만 이 이야기들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때 미국은 리베리아의 고무를 무진장 략탈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리베리아를 랭전체제에 끌어들임으로써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확산을 막기 위한 교두보로 만들었다.

리베리아는 미국이 일으킨 추악한 윁남전쟁을 지지하는 등 랭전시대에 미국을 위한 아프리카의 첨병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첨병역할을 해온 트루휘그일당독재정권도 제18대의 터브먼대통령의 사망을 계기로 종말을 예고하는 여러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후임으로 역시 트루휘그일당독재정권의 부대통령 리챠드 톨버트가 제19대대통령으로 취임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철저한 친미주의적정치인으로 널리 인식되고있었다.

133년동안 쌓이고쌓인 원주민들의 분노는 끝내 폭발하고야말았다.

전국적으로 토착민의 모든 부족들이 친미독재정권타도를 웨치면서 봉기에 궐기하였으며 수도 몬로비아를 점령했다.

사태가 이렇게 번져지자 톨버트대통령은 군부를 동원하여 시위군중을 진압하는 과정에 70명의 사망자까지 발생시켰다.

그러나 기울어진 독재정권의 운명은 구할수 없었다. 1980년 4월 12일 133년의 친미독재정권은 원주민출신 해병대 특무상사 카뇬 도가 주도한 쿠데타에 의하여 붕괴되고말았던것이다.

무혈쿠데타에 성공한 카뇬 도로 말하면 순수한 원주민인 쿠르족출신으로서 그의 정권장악은 리베리아국가출현이래 133년만에 처음 있는 력사적인 사건이였으며 이것은 리베리아력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원주민통치시대의 시발점으로 되였다.

 

하지만 리베리아에 봄은 오지 않았다

 

1980년 4월에 카뇬 도는 리베리아력사상 최초로 토착원주민으로서 리베리아의 국가수반이 되였으며 많은 정적들을 처형하고 추방했다.

동시에 카뇬 도대통령은 같은 부족인 쿠르족을 대거등용하고 측근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 정권 역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83년에 리베리아에서는 카뇬 도정권의 고위직에 있던 챨스 테일러가 정부기금횡령죄로 기소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후 챨스 테일러는 탈출하여 미국으로 도망치였다.

카뇬 도대통령은 테일러의 송환을 미국에 즉각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 요구를 거부하고 테일러를 체포하여 감옥에 수감했다.

그러나 테일러는 미중앙정보국의 도움으로 의문의 탈출에 성공하여 1985년에 서아프리카로 돌아와 잠복해있으면서 때를 기다리고있었다.

그후 해외에서 반정부단체인 민족애국전선을 조직하고 반정부활동을 벌리던 챨스 테일러는 1990년 카뇬 도정권을 붕괴시키였다.

리베리아에서의 이 정권교체를 두고 외신들은 한결같이 미국의 리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군벌교체라고 평하였다.

미국이 리베리아에 대하여 지금까지 군사개입을 하면서 독재정권을 후원해준 리유는 첫째로 공산주의확산을 막기 위함이고 둘째는 서아프리카나라들사이의 단결을 파괴하기 위함이였으며 셋째는 상당량의 쇠돌과 천연고무 등에 대한 경제적리권을 확보하기 위함이였다.

카뇬 도대통령의 집권기간 리베리아에서는 쿠데타시도가 7차례 발생했고 신문페간과 언론인체포가 항상 계속되였으며 50명이상의 정치인들이 암살당하였다. 그리고 반정부활동에 가담하였다는 리유로 10년동안 600명의 정치인들이 처형되고 많은 부족성원들이 살해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카뇬 도대통령의 부패한 독재정권을 10년동안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그런데 이전 쏘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고 랭전이 종식되자 카뇬 도대통령의 독재는 오히려 미국의 부담이 되고말았다.

그래서 미국은 카뇬 도정권이 반군에 의하여 1990년 9월 붕괴되는것을 이미 알고도 못 본척 하였다. 아니 리베리아에서의 군벌교체를 의도적으로 조장하였던것이다.

 

정치적암흑속에 빠져 헤매이는 리베리아

 

카뇬 도정권의 붕괴후 최대의 관심사로 등장한 인물은 물론 챨스 테일러였으나 모든 정치단체와 주요지도자들은 1990년 11월에 아모스 쏘예를 림시과도정부의 수반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아모스 쏘예는 능동적으로 국가재건에 기여하지 못하고 4년이 지난 후인 1994년 3월에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그 이후부터 리베리아의 여러 파벌들과 정당간에 내전이 발생하였으며 내전은 산불처럼 번져나갔다.

미국은 이를 재개입을 위한 좋은 기회로 삼고 1994년 10월에 유엔이 관리를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95년에 리베리아의 운명은 유엔의 손안에 들어가게 되였다.

1997년 7월에 유엔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챨스 테일러가 국민애국당의 후보로 출마하여 75%의 득표로 당선되였다.

그런데 챨스 테일러대통령이 취임한지 2년이 경과된 1999년 8월 발행된 신문들의 기사를 종합해보면 대통령의 통치행태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며 극히 실망적인 기사들뿐이였다.

그때 기사들은 《독재정치, 부정부패정부, 강압정치행태 그리고 살해와 략탈의 반민족적정권》이라고 일제히 테일러정권을 비판하며 규탄하고있었다.

2003년 10월에 권좌에서 축출될 때까지 6년동안에 챨스 테일러는 리베리아의 안보와 경제 그리고 국가의 존엄성을 시궁창에 빠져들게 했으며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희망을 완전히 망쳐놓고있었다.

권좌에서 축출된 후 테일러는 미국이 자기를 완전히 리용만 하고 배신했다고 함으로써 리베리아정치를 막후에서 조종해온 미국의 진모습을 드러내보였다.

앞서 언급했지만 1983년에 공금횡령죄로 기소되였던 테일러가 미국의 감옥에 갇혔다가 그곳을 탈출하여 서아프리카로 가서 반정부활동을 벌린것은 커다란 의문이 아닐수 없다.

이 큰 의문에 대하여 《뉴욕 타임스》의 2009년 7월 17일 기사는 이렇게 설명하고있다.

《테일러는 미국 마사츄세쯔감옥에 15개월간 수감되여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미중앙정보국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비밀공작임무를 세밀하게 설명해주었다.

며칠후 테일러는 감옥의 직원으로부터 자기의 석방을 알게 되였으며 어느날 밤 10시 려권을 돌려받고 안내자를 따라 여러개의 문들을 무사히 통과하여 감옥밖으로 빠져나왔다. …

감옥밖에 대기한 미국정부소속의 승용차안에는 미중앙정보국성원 두사람이 있었으며 차는 뉴욕과 텍사스를 거쳐 국경과 린접한 메히꼬공항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테일러는 비행기를 타고 처음에는 벨지끄에 도착했다가 무사히 서아프리카까지 올수 있었다.》(《뉴욕 타임스》 기사의 요약)

서아프리카로 돌아온 테일러는 곧 반군조직을 뭇고 반정부활동을 벌리였다.

하지만 오늘 미중앙정보국은 《뉴욕 타임스》에 실린 테일러의 감옥탈출기사에 대하여 그저 《엉터리이다.》 또는 《확인해줄수 없다.》라는 말만 되풀이할뿐이다.

미국은 처음에 원주민출신인 카뇬 도대통령의 정권을 적극 지원해주었으나 그가 점차 골치거리가 되자 카뇬 도정권을 붕괴시키는데 테일러를 리용했으며 테일러는 일등공신으로 리용당하였다.

테일러는 그 공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리베리아의 대통령이 되여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테일러는 미국의 배경으로 대통령이 된 후에 전형적인 독재자가 되여 세계적으로 그 악명이 점점 높아졌다. 게다가 그는 시에라레온의 다이야몬드를 욕심내여 무리한 행동까지 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우호적이던 꼬뜨디봐르와 리비아는 물론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테일러에게 등을 돌려대였다.

미국의 처지는 난처해지게 되였으며 테일러는 또다시 미국의 큰 골치거리로, 괴로운 짐으로 되였다.

마침내 미국은 침묵을 깨고 테일러의 퇴임을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리해관계에 따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버리는 미국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것이다.

결국 테일러는 2003년 8월에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정권을 모세스 블라부대통령에게 넘기고 권좌에서 물러나고말았다.

마지막으로 되는 방송연설에서 그는 미국의 압력때문에 퇴임을 한다고 밝히면서 미국에 대한 반감과 억울한 심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 하나의 력사적사실을 통하여 리베리아가 처한 정치적암흑의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알수 있다.

 

혜성처럼 나타난 리베리아의 녀성대통령

 

테일러대통령이 퇴진한 후에 모세스 블라가 대통령직을 넘겨받았지만 반군들은 수도 몬로비아를 공격하고 블라정권을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고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2003년 10월 서아프리카련합군 3 500명이 치안을 담당하게 되였으며 그로부터 2년후인 2005년 10월과 11월 리베리아에서는 대통령선거가 진행되였다. 23명의 후보자들이 출마한 선거는 혼란을 일으켰으나 나중에 결선투표에서 2명의 후보자가 최종 대결하게 되였다.

그중의 한 후보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리베리아의 축구선수 죠지 웨아였고 다른 한 후보자는 녀성대통령후보자 죤슨 써리프였다. 결국 유명한 녀성학자후보자와 유명한 국가대표 축구선수후보자가 세계에서 보기 드문 대통령선거전을 벌린셈이다.

투표의 결과는 죤슨 써리프가 59%의 득표로 당선되여 리베리아의 32대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하여 그는 리베리아에서는 물론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녀성대통령으로 되였다.

수십년간의 잔혹한 내전을 거친 리베리아의 대통령으로 된 죤슨 써리프앞에는 부정부패문제, 오랜 관료주의 그리고 부족들간의 분쟁문제, 80%까지 올라선 실업률문제 등 태산같은 난문제들이 쌓여있었다.

도대체 신임녀성대통령이 산적한 이 어려운 난문제들을 어떻게 다스릴것인가를 세계가 주목하고있었다.

그런데 써리프대통령은 집권초기부터 과감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2005년당시 총예산규모가 8 000만US$였던것을 집권후에 3억

5 000만US$로 늘여놓았다. 그리고 가난한 민중들의 복지와 국민교육의 재건을 위하여 투자할것을 선포하여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써리프대통령앞에는 해결하기 곤난한 문제들도 적지 않게 산적해있다.

첫째, 전임 테일러대통령의 추종세력이 막강한 세력으로 재집결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고있으며 그들은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있는 실정이다.

둘째, 약 8 000명에 이르는 전직 군인들과 반정부게릴라출신들의 사회복귀와 경제적지원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고있는 상태인데 이것은 대통령의 큰 짐이 되고있다.

셋째, 리베리아에 주둔하고있는 외국군의 철수문제가 앞으로 큰 국제적정치문제로 등장할것이다.

넷째, 공무원들에 대한 시급한 교육문제와 폭동에 대비할수 있는 훈련된 군인과 경찰이 부족한 문제, 군경장비의 부족문제도 심각하게 제기되고있다.

다섯째, 리베리아는 고무, 커피, 코코아, 금과 다이야몬드 등 다양한 자원들을 풍부히 보유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빈국들중의 하나로 되고있다.

이밖에 써리프대통령이 당면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는 수다하다.

리베리아가 대외적으로 쁠럭불가담로선을 주장하고있기는 하지만 써리프대통령의 실제적인 정치로선은 친미와 친서방적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리베리아에 이변이 생겼다.

2007년 2월 중국의 국가주석 후진타오가 리베리아를 방문하여 써리프대통령과 과학, 기술협력 등 7가지 협정을 맺은것이다.

써리프대통령이 지금까지 미국에 속고 또 속은 쓰라린 력사를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동양적인 믿음직한 협정에 큰 만족과 기대를 가진것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수난에 찬 리베리아력사를 돌이켜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미국은 외교와 안보에 있어서 원리와 리성보다는 자국의 정략적리익과 감성을 앞세우고 그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횡포하기 그지없는 나라라는것이다.

미국에서 정략적으로 할수없이 해방시킨 흑인노예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하는 최초의 음침한 과정에 있어서 하필이면 왜 장로교목사와 감리교목사 두사람이 등장하여 주동적역할을 했는지 이 글을 쓰면서 나자신이 목사중의 한사람으로서 더욱 분노와 부끄러움을 금할수 없다.

《한국》에서 3. 1운동때 미국선교사들이 뒤에서 일본을 옹호하고 《한국》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앞에 나서서 활약하는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한국》교회의 초대력사가 바로 리베리아의 최초의 력사에 있었던 동질의 사건인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리베리아의 미국출신 흑인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같은 흑인들끼리 《흑흑갈등》을 일으킨 력사는 바로 《한국》에서 친일파와 친미세력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동족을 무시하면서 호의호식하는것과 그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미국의 침략작전에 리용당했으며 그리고 용도가 다 끝난 후에는 배신당하여 비운에 처하게 된 리베리아의 카뇬 도대통령과 테일러대통령의 경우와 8. 15해방후에 조선반도 남녘에서 발생한 비극적력사는 미국이란 나라의 진모습을 다시금 파헤쳐보게 한다.

미국은 참말로 리베리아의 력사와 조선반도 남녘의 력사에 있어서 동질의 침략자이며 동질의 범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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